‘수수께끼’ 페론주의자들

2017-03-02     크리스토프 방튀라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특파원

 좌우를 가르는 것이 유효한지 묻는 이들이 있다. 아르헨티나에서는 지역적 특수성 때문에 이 논의가 한층 복잡해졌다. 신자유주의자와 보호주의자, 범대서양주의자와 주권주의자, 자유무역주의자와 ‘큰 정부’ 지지자들이 ‘페로니즘’이라는 한 지붕 아래 모였다.


근 20년 전부터 외스터헬트 서클은 매주 월요일, 조합 형태로 운영되는 고급호텔 바우엔에 모인다. 부에노스아이레스의 유명한 이 사교단체의 이름은 1977년 작고한 좌파 성향의 페론주의자, 애니메이션 시나리오 작가의 이름에서 가져왔다. 화려하게 치장된 정치이념이자 “민족적이고 대중적인 운동”인 페론주의의 지지자들, 지도부들, 명사들, 동지들이 “화기애애하고도 정치적”인 만찬이 차려진 시몬볼리바르룸에 모였다. 

페르난도 데라루아(급진시민연합)가 정권을 잡은 1999년부터 2001년 12월 사이의 2년 10일을 제외하면 1989년부터 2015년 대선까지 페론주의자들이 아르헨티나를 이끌었다. 기업가 출신의 마우리시오 마크리는 군부와 연고가 없고 페론주의자가 아닌 첫 번째 우파 대통령이다. 그렇지만 그들을 관통하는 일관성과 연속성은 존재한다. 페론주의자들은 신자유주의자이며 카를로스 메넴 정권(1989~1999)에서 국제금융기구의 일방적인 강압에 시달렸고, 네스토르 키르치네르(2003~2007)에 이어 그의 부인 크리스티나 페르난데스 데 키르치네르(2007~2015)가 이끄는 정부에서 미국과 외국투자자에 적대적이었다. 

아르헨티나 정치사의 독특한 산물인 페론주의는 참으로 다양한 정치색과 정파를 아우른다. 페론주의는 등장 이래 자국의 사회경제적 격변과 지정학적 상황 변화에 발맞춰 전략적인 진화를 이뤘고, 내부적인 투쟁을 통해 새로이 나아갈 방향을 구현하고 이끌어갈 신진세력을 등장시켰다. 오늘의 페론주의가 어제의 페론주의가 구현하던 것을 부인하게 될지라도 말이다. 

제2차 세계대전이 종식되고 엘리트들은 연합군(영국과의 경제적 관계 때문)과 추축국(독일 자본과 연관된 부르주아와 군부의 민족주의 분파 중심) 진영으로 갈라져 대립했다. 그런 상황에서 후안 도밍고 페론이 나타났다. 그의 목표는 영국과 미국의 제국주의에 맞서 자국의 생산성, 산업화, 독립 등을 중시하는 국가개입주의적 정부를 수립하면서 민중을 정치와 사회에 참여시키는 것이었다. 

연대장에서 노동부 장관이 됐다가 1946년 아르헨티나 공화국 대통령 자리에 오른 페론(연대기 참조)이 시작한 정치운동은 ‘국가’의 이름으로 생산자와 노동자 계급 간 화해전략을 세웠다. 페론주의는 1930~40년대 부상한 산업 프롤레타리아를 동원해, ‘공산주의의 위협’에 대비해 고대 로마의 대토지 소유제도인 라티푼디움 경영방식으로 착취당하던 농민과 신흥 산업부르주아의 일부, 전통적인 과두제에 거부감을 지닌 도시의 프티부르주아, 정부기관과 군부는 물론 가톨릭 세력의 일부를 모으는 계획을 세웠다. 이 계획을 총괄, 조정하는 구심점은 정의당(1)의 카리스마 넘치는 대표 페론이었다. 

빈틈없이 장식된 시몬볼리바르룸의 네 개의 벽은 1945년 페론이 시작한 정치운동의 발자취를 담고 있다. 초상화, 사진, 데생, 회화, 선전물 등이 영웅과 순교자를 기린다. 그 방에 들어선 이들의 시선은 몇 초 내에 후안 페론과 그의 부인 에바, 네스토르 키르치네르와 그의 부인 크리스티나 같은 국가적 우상들과 5월 광장의 어머니들, 프란체스코 교황, 역사적으로 다양하게 등장했던 페론주의 분파, 다시 말해 노동총연맹(CGT)을 비롯한 정부와 정당 소속의 노동운동, 여성운동, 청소년운동의 지도자들의 얼굴이 서로 교차되는 만화경 속으로 빠져든다.  

오늘날, ‘페론주의자’의 의미는 무엇인가

이 저녁 만찬에 초대된 손님 2백 명은 200페소(약 12유로)에 특별한 날을 위한 서민메뉴로 구성된 ‘페론주의’식 요리를 맛보게 된다. 부유층에게 어울리는 햄 대신 모르타델라(대형 소시지), 러시아식 샐러드(프랑스에서는 피에몬테 샐러드로 더 알려져 있다), 마탐브레(속을 채워 구운 소고기), 티라미수(이탈리아식 디저트)에 멘도사에서 생산된 와인 ‘엘 페로니스타’를 곁들인다. 

2016년 4월 그날에는 페론주의의 추종 여부와 무관하지만 경제주권, 국민주권, 사회정의, 민중의 이익 수호라는 페론주의의 기본 이상을 구현한 귀빈 세 명에 대한 ‘애국’ 서훈이 있었다. 세 명 모두 크리스티나 키르치네르 전 대통령의 측근이었고, 그들이 수상소감을 발표하는 연단 아래에는 그녀의 초상화가 좌중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대선에서 ‘승리를 위한 전선(FPV)’의 온건파 후보 다니엘 시올리에게 패한 후 페론주의 내부의 새로운 알력관계에 대비하는 시점인지라, 중립적인 메시지를 기대할 수는 없었다. 많은 이들이 신임 대통령의 카리스마 부족과 재정비 정책에 개탄했다. 대선 실패의 책임은 전임 대통령에게 돌아갔고, 그는 현재 정의당 내 계파 일부에게 비난받고 있다.

만찬이 끝나갈 때쯤 육십 대 여성 두 명이 다른 참석자들을 따라 검지와 중지로 페론주의의 승리를 뜻하는 V자를 만들어 높이 들고 1940년대 말부터 전해진 페론주의자들의 찬가 ‘라 마르차 페로니스타’를 부르기 시작했다. “우리는 페론이 돌아오기 전까지 서로 투쟁하고 심지어 총까지 쐈어요!” 그 여성들은 웃으며 설명했다. “그렇지만 지금 이곳에 함께 모였지요. 누가 뭐라고 해도 우리는 모두 페론주의자니까요!” 그 여성들은 1973년 6월 20일, 페론의 아르헨티나 귀환을 축하하기 위해 모인 역사적인 집회에서 있었던 좌파 성향의 페론주의자(특히 ‘몬토네로스’)와 극우 성향의 페론주의자(엑토르 호세 캄포라 정부에서 사회복지부 장관을 역임한 페론의 개인비서인 호세 로페스 레가가 조직한 아르헨티나 반공산주의자동맹(트리플A)의 군사 조직) 간의 유혈마찰사건인 에세이사 공항의 대학살을 암시한 것이다. 페론은 이 사건의 모든 책임을 페론주의 좌파에게 돌렸지만, 이는 잘못된 것이었다. 이 사건을 계기로 페론주의 운동은 분열됐으며, 좌파와 극좌파에 대한 억압은 한층 심해졌다. 이로써 아르헨티나 사회는 급격한 변화를 맞았고 1976년 쿠데타로 그 정점을 찍었다. 

그렇다면, 오늘날 ‘페론주의자’의 의미는 무엇인지를 물었다. 그들은 이에 대해 답변하면서, 멀리서 온 손님에게 지역 특유의 세속종교 계율을 설명하는 것만큼 흥미와 부담이 함께 담긴 기색으로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들 대부분은 “설명하기 쉽지 않다”며 얼버무렸다. 한 사람이 “페론주의자라는 것은, 역사 속에서 올바른 쪽에 선다는 의미지요. 독립투쟁에 나서고 민중의 이익을 수호하는 편에 속하는 것입니다”라고 덧붙였다. 수수께끼 같은 정의였다.  


글·크리스토프 방튀라 Christophe Ventura
특파원. 저서로는 <대륙의 기상, 라틴 아메리카와 카리브 국가들의 지정학>(Armand colin, Paris, 2014)가 있다.

번역·서희정 mysthj@gmail.com
한국외국어대 통번역대학원 졸업 
(1) 1947년 “페론당”이라는 명칭으로 설립됐다.


박스기사

페론보다 더 오랜 기간 
통치한 페론주의자들


1943년 6월 4일. 
라몬 안토니오 카스티요 대통령이 이끄는 정권을 찬탈하기 위해 민족주의/반공산주의 성향의 장교 집단인 통일장교단(GOU)이 주도한 쿠데타가 발발하다. 쿠데타의 주역인 젊은 연대장 후안 도밍고 페론이 노동부 장관이 되며 급부상하다. 
1945년 10월 9일. 
군사정권의 옛 동료들이 페론을 체포.
1945년 10월 17일.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페론의 복귀를 촉구하는 노동대중의 대대적인 집회가 이어지다. 지지기반이 취약해지고 비난의 대상이 된 정부는 대선을 치르기로 결정하다.
1946년 2월 24일. 
페론이 공화국의 대통령으로 당선. 1951년, 재선에 성공. 
1955년 9월 16일. 
중산층과 서민층에게 영향을 끼친 경제위기가 발생한 상황에서 군사 쿠데타가 일어나다.
1955~1972년. 
1972년 페론 장군이 (프랑코 정권의 스페인으로 떠난) 망명에서 복귀할 때까지 “페론주의 저항”의 시대가 이어지다. 
1973년 9월 23일. 
페론이 대통령으로, 그의 두 번째 부인인 이사벨이 부통령으로 선출되다. 좌파 성향의 페론주의자들을 조직적으로 억압하다.  
1974년 7월 1일. 
페론이 사망하고 이사벨이 그의 뒤를 잇다.
1976년 3월. 
쿠데타가 일어나 군사독재정권이 수립되다.
1983년 10월. 
민주주의가 재건되고 라울 알폰신(급진시민연합)이 대통령으로 당선되다.
1989년 7월 8일. 
카를로스 메넴 당선(1995년 5월 14일 재당선).
2003년 4월 27일. 
네스토르 키르치네르 당선.
2007년 10월 28일. 
크리스티나 페르난데스 데 키르치네르 당선. 2011년 10월 23일 재당선.
2015년 11월 22일.
페론주의자 후보 다니엘 시올리가 마우리시오 마크리에게 패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