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그말리온’ 에마뉘엘 마크롱이 대선후보되기까지

2017-03-02     프랑수아 드노르, 폴 라뇨-이모네 사회학자
2015년 3월 17일, 에마뉘엘 마크롱의 일정은 꽉 차 있다. 프랑스 경제·산업·IT부 장관인 에마뉘엘 마크롱에게는 오전 7시 45분 <폴리티크 앵테르나시오날(Politique internationale)>지와의 조찬 겸 토론 일정이 잡혀 있다. 거기서 경제인, 외교관 및 정치가들에 대한 이야기를 하기로 돼 있고, 한 시간 후에는 베르시에 있는 경제·산업·IT부로 돌아간다. 마크롱 장관은 고위관료와 민간기업 총수들이 참석하는 수출진흥을 위한 공공정책 관련 컨퍼런스 개회식에 참석한다. 이후에는 성장·활동·경제적 기회 균등에 대한 법(일명 마크롱법)과 관련해 사회당 상원의원들과의 약속이 잡혀 있다.  

오후 1시 15분에는 경제·재정·사회 관련 싱크탱크 집단인 르 세르클 튀르고(le Cercle Turgot)와의 오찬 겸 토론 일정이 잡혀 있다. 르 세르클 튀르고의 회장인 금융사 BPCE 그룹의 프랑수아 페롤 회장이 마크롱 장관을 맞이한다. “에마뉘엘, 어서 오세요. 상원에 들렀다 오셨죠? 당신이 준비하고 있는 법안에는 조항이 아주 많지요? 모차르트 음악에 음표가 참 많았던 것처럼요.” 이 말은 자화자찬인 듯하다. 마크롱 장관의 이력이 페롤 의장의 이력과 비슷하기 때문이다. 이 두 사람은 모두 의사의 아들로 태어나, 프랑스 국립행정학교(ENA) 졸업 후 프랑스 재정감사총국(IGF)과 로스차일드 은행을 거쳐 정부에 합류했다. 마크롱 장관은 단 시간 내에 경제인과 언론인, 다른 간부직들의 눈에 들었고, 이들은 자신들 모임의 명예회원으로 마크롱 장관을 받아들였다. 의회의 대정부 질의에 답한 후 마크롱 장관은 피에르 가타르 프랑스 경제인연합회(MEDEF) 회장과 긴 면담을 나누기로 돼 있다. 이 날, 3월 17일은 패트릭 성인의 날이다. 그래서 그 이후에는 리차드 브루턴 아일랜드 고용기업혁신부 장관과의 면담이 잡혀 있다.  

2015년 3월 17일, 이 날 일정만 봐도 마크롱 장관은 깊은 발자국은 남기지 못하더라도 강한 인상을 남기려는 의지를 가지고 권력가들의 모임에 지속적으로 등장하는 프랑스 대선 후보로서의 행보를 보여준다. 마크롱은 고등사범학교(ENS)를 꿈꿨으나 파리정치대학(Sciences Po)에 진학했다. 이 곳에서 1999년 역사학자 프랑수아 도스는 <기억, 역사, 망각(La Mémoire, l’Histoire, l’Oubli)>의 원고 마무리를 위해 사람을 찾고 있던 철학자 폴 리쾨르에게 마크롱을 소개했다.(1)

‘제2 좌파’ 지지자들에게서 정책공약의 의미 찾아

이 작업 이후, 마크롱은 프랑스의 지성인 잡지 <에스프리(Esprit)>에 들어갔다. <에스프리>는 좌파를 지향하면서도, 1995년 알렝 쥐페 당시 우파 총리가 주도한 사회보장제도 개혁을 지지함으로써, 전통좌파와는 다르게 시장의 기능을 부분적으로 인정하는 이른바 ‘제2 좌파’(2)의 성향을 보여 온 매체다. 마크롱은 <에스프리>에서 권력 행사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이론화했다. “정치적 행동과 마찬가지로, 단순한 정치적 연설은 더 이상 투표를 독려하는 프로그램이나, 5년의 임기 기간 내내 적용할 만한 프로그램이 될 수 없다.”(3) 마크롱은 정치에는 정책이 적힌 카탈로그 그 이상의 영역이 필요하다고 보는 듯 했다. 마크롱은 자신의 정책공약에 의미를 선사할 이념을 ‘제2의 좌파’의 지지자들에게서 찾았다. 마크롱은 국립행정학교(ENA) 졸업 후 우아즈에서 인턴으로 일하던 2002년 가을에 앙리 에르망과 친분을 쌓았다. 상업 부동산 분야에서 큰 부를 쌓은 기업가 에르망(2016년 사망)은 좌파 기독교인의 수호자이자 옹호자였으며, 반공산주의자, 반식민주의자, 반과격파 등의 ‘반대주의자’였다.(4)

이후 2007년, 니콜라 사르코지 대통령이 유럽담당 국무장관으로 영입한 장 피에르 주예 재정감사총국(IGF) 국장은 이 전도유망한 청년 마크롱을 자크 아탈리에게 소개했다. 프랑수아 미테랑 정부 시절 국정 자문이었던 아탈리는 사르코지 정부에서 성장촉진위원회 위원장을 맡고 있었는데, 마크롱을 위원회의 문서보고 담당 부책임자로 임명했다. 최종 문서를 보면, 이후 마크롱 대선 후보가 연설 때마다 큰 소리로 외친 ‘분열을 뛰어넘고자 하는 의지’를 엿볼 수 있다. “이것은 보고서도 아니고, 조사도 아니다. 시급하고 근본적인 개혁을 위한 사용설명서이다. 그는 당파주의자도 아니며, 양당제를 지지하는 자도 아니다. 그는 어디에도 소속돼 있지 않다.” 성장촉진위원회의 ‘비당파주의자’들은 “부동산으로부터 파생된 엄청난 이득과 특권층의 결탁과 엘리트 고용에서 파생된 엄청난 특혜”를 격렬하게 비판했고,(5) 경쟁과 규제완화에 기초한 사회를 위한 계획을 지지했다.  

이런 생각으로부터 영감을 받은 사람들은 2008년 재정위기가 일어나기 6개월 전, 프랑스인들의 저축 자금을 주식시장으로 대거 이전하는 것을 권유하는 데 그치지 않았다. 경쟁이 일반화되면서 결국 서민들, 즉 공무원들과 민간기업 노동자들, 우버 택시 운전사에 반대하는 기존 택시운전사들 간에 분열이 일어났다. 이런 상황은 의욕적인 재정 감독관이었던 마크롱에게 딱 맞아떨어졌고, 마크롱은 <에스프리>지의 편집위원회 외에도 ‘앙 탕 레엘(En temps réel)’이나 ‘레 그라크(Les Gracques)’ 등 지금 모습 그대로의 유럽 건설을 지지하는 사람들과 사회자유주의자들의 모임에 자주 참여했다. ‘앙 탕 레엘’은 스스로를 “개혁주의의 안건을 위한 강력한 지적 기반을 건설할 목적으로 자신들의 경험과 분석을 활용하고자 하는 공공부문과 민간부문의 관계자들의 모임”라고 소개하고 있다. ‘레 그라크’는 “시장이 있는 모든 곳에는 재분배를 원하고, 금리가 있는 모든 곳에는 시장 조절을 원하는 현대적 좌파”라고 주장한다. 

마크롱이 누렸던 사회적 특혜는 ‘현대성’이라는 거센 바람의 영향을 받지 않았다. 2008년 에실로 사의 자비에 폰타네 회장, 로랑 파비우스의 자문을 맡았고 사노피 사의 회장 겸 와이버그 캐피털 파트너스 기금 회장인 세르주 와인버그 회장, 장 미셸 다루아 기업변호사 및 알랭 맹크(이들 중 유일하게 아탈리가 이끄는 성장촉진위원회 위원이 아닌 인물)는 로스차일드 은행에 마크롱을 추천했다. 마크롱은 2012년 네슬레 관련 계약을 성사시키면서 로스차일드 은행에서 출세가도를 달렸다. 네슬레의 페터 브라베크-레트마테 회장은 아탈리가 위원장을 맡았던 성장촉진위원회의 위원이었다.

아탈리는 2008년 프랑수아 올랑드에게 마크롱을 소개한 것을 자랑스러워했다. 당시 올랑드는 사회당(PS) 지도부에서 물러났고, 2011년에 있을 경선에서는 도미니크 스트로스-칸이나 마르틴 오브리가 높은 순위를 차지할 게 확실할 듯 보였다. 마크롱은 아탈리가 이끄는 성장촉진위원회 소속이었던 필리프 아기옹과 마찬가지로 프랑수아 올랑드 차기 대통령을 위해 경제업무를 맡았다. 2012년 올랑드가 대선에서 승리를 거둔 후, 아탈리와 주예(사르코지와의 인연을 뒤로 하고 올랑드 정부에 합류함)는 마크롱을 엘리제궁의 경제수석비서관으로 천거했다. 

2014년 자신의 측근인 마크롱이 경제부 장관에 임명됐다고 알렸던 사람도 당시 엘리제궁 대통령 비서실장이었던 주예였다. 주예는 개각 단행이 발표되자마자 마크롱에게 전화로 설명했다, “그 나이에 경제, 기업, 산업, 이 모든 걸 책임을 지게 되다니 놀라운 일이야. 알겠지만 IT는 내가 하고 싶었던 일일세! 프랑스 재정감사총국(IGF)에 있었을 때는 내가 잘 나간다고 생각했는데, 이제 자네의 시대가 열렸네.”(6) 비범한 마크롱은 기차보다는 버스 교통체계를 촉진하고, 상점의 일요일 영업과 야간근무를 허용하는 법(앞에서 얘기한 성장·활동·경제적 기회 균등에 대한 마크롱법-역주)을 신속하게 추진했다. 마크롱은 집단해고규정을 완화했고, 지역공항 운영의 민영화를 서둘렀다. 

영향력 있는 피그말리온, 
3년 이상 머문 곳 없어

지금까지의 마크롱의 이력만 보면, 어떤 특징을 파악할 수 있다. ‘영향력 있는 피그말리온’, 즉 자신을 아끼고 성공으로 이끌어주는 사람을 통해서 힘 있는 기관에 들어가고, 인맥을 쌓을 만큼만 그 기관에서 시간을 보낸 후 더 높은 명성을 얻을 수 있는 직위로 갈아타는 것이다. 마크롱은 프랑스 재정감사총국(IGF)이나 로스차일드 은행이나 대통령실에서도 오래 머무르지 않았다. 모두 3년이 안 되게 있었다. 마크롱은 2016년 4월, 39세의 나이에 ‘전진!(En marche!)’당을 창당했다. 마크롱은 경력의 매 단계마다 인맥을 동원했다. 

마크롱은 국립행정학교(ENA) 졸업 후 파리정치대학(Sciences Po)에서 ‘일반교양’ 과목을 가르쳤다. 그는 이곳에서 리샤르 데쿠앵 학장의 오른팔이자 이후 싱크탱크 단체인 앵스티튀 몽테뉴(Institut Montaigne)의 대표를 맡게 된 로랑 비고르뉴와 친분을 맺었다. 마크롱의 ‘전진당’의 주소지는 비고르뉴의 사택 주소로 돼 있다. 마크롱은 전진당에 홀데 그룹(폴 빵집과 라뒤레 제과점)의 공동경영자인 프랑수아즈 홀데를 영입했다. 마크롱은 잠시 리틀 윙 커뮤니케이션 에이전시에서도 근무했다. 그렇다고 해서 마크롱이 정치적으로 다른 편에 속하는 싱크탱크 집단을 기피한 것은 아니었다. 마크롱은 프랑스 민주노동연합(CFDT)의 전직 간부이자 친사회당 성향을 보이는 테라 노바 재단장인 티에리 페슈와도 친밀한 사이다. 

아탈리의 성장촉진위원회에 소속돼 있었던 다른 위원들도 ‘전진당’을 위해 ‘전진’했다. 수필가 에릭 오르세나는 선두에 서서 뮤투알리테 컨퍼런스 센터(La Mutualité)에서 열린 전진당 창당을 지지했다(<라 트리뷴(La Tribune)>지, 2016년 8월 31일). 성장촉진위원회에서 보고책임역을 맡았던 조셀린 드 클로사드(참사원을 거쳐서 카지노 그룹 경영진으로 자리를 옮김), 프랑스 민주노동연합(CFDT)의 사무총장을 역임했고 이후 사회 전략 컨설턴트를 맡고 있는 장 카스파르, 기업변호사 장 미셸 다루아와 암스테르담·브뤼셀·파리 증권시장을 모두 관리하는 유로넥스트의 스테판 부즈나 사장은 2016년 12월 10일 포르트 드 베리사이유에서 열린 첫 선거유세에 참석했다. ‘도미니크 스트로스 칸의 측근’이었고 싱크탱크 단체인 ‘앙 탕 레엘’의 부회장이기도 한 부즈나는 이후 마크롱에게 대선 캠페인 기금을 모금할 인물로 크리스티앙 다르냐를 소개했다. 다르냐는 BNP와 크레디 아그리콜(Crédit Agricole)의 전직 CIO(경영 및 투자책임자)였으며, 2010년부터 2013년까지 프랑스 경제인연합회(MEDEF)에서 ‘통화 및 국제통화 시스템’ 위원회의 위원장을 역임했다. 아탈리의 성장촉진위원회에 소속돼 있었으며, 로랑스 파리조 회장 재임 시기 프랑스 경제인연합회(MEDEF)의 경영진으로 있었던 액센츄어의 CEO, 피에르 낭템은 ‘전진당’에 7천 5백 유로(법정기부금 한도)를 기부하겠다고 밝혔다(<레 제코(Les Échos)>, 2017년 1월 27일).

노조 쪽에서는 카스파르 외에도 친마크롱 인사로 피에르 페라치를 들 수 있다. 페라치는 친프랑스 노동총동맹(CGT) 성향의 컨설팅 기업인 세카피를, 노조와 직원 대표 및 기업 경영진을 대상으로 하는 컨설팅 전문기업인 알파 그룹으로 개혁했다. 페라치의 아들 마크와 손녀 소피도 마크롱의 측근으로서 중요한 위치를 점하고 있다. 마크롱 부부의 결혼식 증인을 서기도 했던 마크는 경제학 교수이자, 알파 그룹, 용역회사인 란스타드, 프랑스 고용국 및 고용부의 공동출자로 파리정치대학(Sciences Po)에 개설된 ‘경력 안정화’ 프로그램의 협동연구원으로 있다. 기업변호사인 소피는 경제·산업·IT부 장관실 실장으로 있다가 마크롱 캠프에 합류했다.  

경제·산업·IT부 장관실의 다른 인사도 전진당에 합류했다. 알렉시스 콜러 경제·산업·IT부 장관실 총책임자(7)는 세계2위의 컨테이너선사인 MSC의 금융부로 되돌아갔지만, 마크롱의 보좌관인 줄리앙 드노르망디가 대선 캠프에서 상근으로 일하게 되자 마크롱의 고문역할을 계속 맡고 있다. 콜레와 드노르망디는 모두 피에르 모스코비치 전직 경제·산업·IT부 장관 시절부터 장관실에서 근무했다. 현재 모스코비치 전직 장관은 유럽연합의 위원으로 있다. 경제·산업·IT부에서 마크롱의 커뮤니케이션 및 전략 담당 고문이었던 이즈마엘 에멜리앙은 유권자들의 요구사항에 알맞은 맞춤형 정치 ‘제안’을 하기 위해, 대량데이터 수집 및 분석 전문기업들에게 도움을 요청했다(<르몽드>, 2016년 12월 19일). 전진당의 대변인인 뱅자맹 그리보는 경제·산업·IT부 장관실 소속은 아니지만, 장관실에서 근무했던 젊은이들의 이력을 전부 가지고 있다. 그리보는 파리 경영대학원(HEC)과 파리정치대학(Sciences Po)에서 모두 학위를 받았고, 사회당 내에서 우파 성향을 보였으며(스트로스 칸과 모스코비치 쪽), 마리솔 투렌 보건복지부 장관 시절 장관실에서 근무했다. 그리보는 이 외에도 브르타뉴 상호공제조합(Mutuelles de Bretagne)의 조합장을 지냈고, 전진당의 사무총장이자 하원의원 겸 피니스테르 주 의회의원인 리샤르 페랑과 마찬가지로 샬롱쉬르손과 손에루아르 주에서 선출직 공무원으로 근무했다. 

마크롱은 스스로를 과거도, 유착관계도 없는 새로운 인물로 소개를 하고 있지만, 개인적으로도 그리고 주변인물들을 보더라도 국가의 고위 귀족 신분(경제·산업·IT부)과 지식인 위주의 정치집단 및 경영자들의 금융모임 등, 이 모든 것들의 유산을 대표한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즉, 마크롱은 정·재계 및 문화·언론인들의 모임인 르 시에클 클럽(club Le Siècle)의 일원인 것이 확실하다. 

올랑드와 주예를 비롯하여 사회주의 유력인사들이 “좌파가 움직인다”(8)를 주장한 지 30년이 지난 지금, 마크롱의 ‘늙은 감시인과 청년 튀르크당’은 현대주의의 영원한 역사를 재연하고 있다. 즉, 여러 진영 위에 선 한 사람이 국가를 이끌기 위해 기술적 역량과 최신식 방법을 동원하고 있다. 따라서 핵심은 정책공약 마련이 아니다. 좌파의 우파(예를 들면, 제라르 콜롱브 사회당 상원의원 겸 리옹 시장은 천주교에서 높은 위치에 있는 이들과 친분이 있는 것으로 유명하다)에서부터 우파의 좌파(실비 굴라르 유럽의회 의원은 <청맹과니들을 위한 세계화>라는 믿기 힘든 책을 썼다)까지 사람들을 모으는 것이 핵심이다. 

마크롱이 프랑스 총리실 소속 미래전략총괄위원회(CGSP)의 위원이었던 장 피사니-페리를 비롯한 영향력 있는 인물들뿐만 아니라 자신의 여정에 끌어들인 수많은 전문가들의 지지를 기대할 수 있는지가 중요한 문제다. 스트로스 칸과 주예의 전직 고문이었던 페리는 이런 위치가 가지는 불편함에 대해서 잘 알고 있다. 페리는 ‘브렉시트’ 사태가 벌어진 지 얼마 지나지 않았을 때 다음과 같이 인정했다. “우리는 전문가입니다. 영국인 중 52%가 우리를 싫어하죠.”(<르 피가로>, 2016년 7월 4일). 마크롱이 스스로 영국인의 52%가 싫어하는 사람들에 속하지 않는다는 환상을 유지하려면, 강한 카리스마가 필요하다. 진보적 성향의 젊은 후보 마크롱에게, 국정을 이끄는 방법을 알았던 교양 있는 은행가 출신의 조르주 퐁피두 전직 대통령의 신화와 지스카르 데스탱 전직 대통령 식의 환상을 녹여내는 것만으로 충분할까?   


글·프랑수아 드노르 François Denord, 
폴 라뇨-이모네 Paul Lagneau-Ymonet
사회학자. 저서로 <Le Concert des puissants(권력자들의 콘서트)>(Raisons d’agir, Paris, 2016)가 있다.

번역·이연주 brise0703@naver.com
한국외국어대 통번역대학원 졸업


1) Marc Endeweld, <L’Ambigu Monsieur Macron(모호한 에마뉘엘 마크롱)>, Flammarion, Paris, 2015.
(2) la deuxième gauche; 마크롱이 천명하는 제 2좌파는 자본주의와 시장경제를 통제하기 위해 국가의 주도적 역할을 강조하는 프랑스 사회주의의 전통에 대해 시민사회의 역할을 상대적으로 강조하면서 시장의 기능을 부분적으로 인정하고 활용해야 한다고 주장한다(인용: <지구촌의 선거와 정당>, 강경희, 한국외국어대학교출판부, 2007). 반면에 1968년 5월 혁명 당시에 등장한 신좌파 또는 제 2좌파는 기존의 수구적이며 형식적인 좌파와는 달리, 일상적 삶의 해방을 부르짖어 문화운동적 성격이 강하다. 
(3) Emmanuel Macron, <Les labyrinthes du politique. Que peut-on attendre pour 2012 et après?(정치의 미로. 2012년과 그 이후 우리는 무엇을 기대할 수 있는가?)>, Esprit, Paris, 2011년 3월-4월.
(4) Vincent Duclert, <La deuxième gauche(제2의 좌파)>, Jean-Jacques Becker와 Gilles Candar가 총괄한 <Histoire des gauches en France. XXe siècle: à l’épreuve de l’histoire(프랑스 좌파의 역사. 20세기: 역사의 시험대에 오르다)>, vol. 2, La Découverte, Paris, 2004.
(5) <Commission pour la libération de la croissance française présidée par Jacques Attali, 300 décisions pour changer la France(자크 아탈리가 이끄는 프랑스 성장촉진위원회, 프랑스를 변화시키기 위한 결정 300가지)>, XO Éditions – La Documentation française, Paris, 2008.
(6) Yves Jeuland, <À l’Élysée, un temps de président(엘리제궁에서, 대통령의 한 때)>, France 3에서 방영된 다큐멘터리, 2015년 9월 28일.
(7) 장관실 총책임자와 실장의 역할은 다르다. 장관실 실장은 조직에 관련된 업무를 맡고 있다. 
(8) Jean-François Trans(가명으로 공동집필), <La gauche bouge(좌파가 움직인다)>, Jean-Claude Lattès, Paris, 198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