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슬람국가의 거울놀이
2017-03-02 페테르 아를랭 국제위기그룹 연구원
시리아 북부와 이라크 북서부의 상당 부분을 장악한 이슬람 근본주의 수니파 무장단체 이슬람국가(IS)는 매우 단호하고 자신감으로 가득하다. 반면, 이를 둘러싼 주변지역 상황은 매우 혼란스럽다. IS를 절대 새로운 국가의 형태로 볼 수 없는 이유는 국경의 개념을 거부하고 제도를 필요로 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IS는 서구 대외정책을 논하지 않고도 근동의 상황, 특히 지역 내 국가들의 상황을 우리에게 알려주는 역할을 한다.
IS는 각지의 지원자로 이뤄진 구성과 태생에 있어 놀랄 만큼 명확한 정체성을 지니고 있다. 이 이야기는 2003년 미국의 이라크 공습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아프가니스탄 전쟁 당시의 옛 무자헤딘(아프가니스탄의 무장 게릴라 조직-역주) 일부가 알 카에다 지역 자치권에 발을 들여놓았다. 이들의 교리는 본부의 교리와 삽시간에 멀어졌다. 즉, 미국이나 이스라엘로 표방되는 먼 곳의 적보다 가까이 있는 적과 먼저 싸우기로 한 것이다. 미국 점령군에 관해서는 점점 관심을 끊은 채, 수니파와 시아파 사이의 종파 전쟁을 발발시키고 동족상잔이라는 귀결을 맞이한다. 이들의 극단적인 폭력성은 수니파 중의 배신자와 변절자, 즉 내부를 향하게 된다. 이러한 자기 파괴는 2007년과 2008년 사이 계속 이어져 이들의 영향력은 이라크 사막 국경지대의 따로 떨어져 나온 급진파 일부로 줄어들게 됐다.
이런 IS의 활동들은, 미미하게나마 그들 자신에게 도움이 됐다고 볼 수 있다. 지역전략무대의 인명사전을 방불케 하는 인상적인 목록을 지닌 공식 주적들이 IS에게 길을 열어주지 않았는가. 먼저 누리 알 말리키 총리의 이라크 정부와 바샤르 알 아사드 대통령의 시리아 정부가 있다. 이들 정부는 급진화하려고 애쓴 수니파 반군에 맞서 싸우고자 ‘테러와의 전쟁’이라는 미명 하에 상상할 수 있는 모든 가능한 수단, 그리고 시리아의 화학무기처럼 상상할 수 없는 수준의 수단까지 동원했다. 그 다음, 일시적 파트너인 미국과 러시아가 이들을 장려했다. 조건 없이 지원하고 그 이상으로 협조했던 이란은 점점 시아파 민병대의 자금에 의지하는 대외정책을 아랍세계에서 이어가고 있으며, 이는 종파 분열을 가져온다.
여기저기에서 쏟아지는 석유달러로 일부 은폐된 이슬람 경제를 지원하는 페르시아 만 왕정국가(사우디아라비아, 아랍에미리트, 쿠웨이트 등-역주)들도 빼놓을 수 없다. 터키는 한동안 프랑스와 나바라, 심지어 오스트레일리아에서 오는 지하드 단원들에게 시리아와의 국경을 열어줬다. 마지막으로 미국에 대해 말하자면, ‘부재중’이라 볼 수 있다. 조지 부시 전 대통령 하에 무분별한 선동의 10년을 보낸 후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은 정반대의 입장을 택했다. 즉 몰락 상태의 시리아와 이라크가 지하드 단원 양성소가 돼버렸음에도, 냉정하고 거만한 자세로 불간섭 정책을 고수한 것이다. 2년 만에 덩치가 커진 IS는 경계지역의 지하디즘에서 벗어나 점차 시리아의 라카, 이라크의 팔루자, 모술 등 대도시까지 침략하기에 이르렀다.
이 성공의 일부는 IS의 전략 덕분인데, 이를 ‘보강’이라는 개념으로 요약할 수 있다. IS의 신봉자든, 비방자든 대략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IS가 원하는 것은 ‘세계정복’보다, 그들이 차지한 공간에 단단하게 뿌리 내리는 것임을. 이 갈망이 IS로 하여금 극단적 실용주의로 나아가도록 몰아붙이고 있다. 이전 세대의 지하드 단원들은 충격요법으로 서양인 인질을 참수했던 반면, 오늘날의 IS 병사들은 인질의 몸값을 챙긴다. 또한, 엄청난 수준의 경제적 자립을 보장해주는 유전을 차지하려고 전력을 다한다. 그들이 선호하는 장소에서 허술한 수니파 라이벌 세력을 일부러 공격하기도 하지만, 이런 열정은 더욱 무서운 적과 한층 비싼 대가를 치러야 하는 대결 앞에서 바로 사그라진다. IS는 시리아 정부와의 싸움에는 거의 참여하지 않고 이라크 시아파 민병대와의 직접 대결은 피한다. 또한 자신의 세력권을 지키는 데 대단히 호전적인 쿠르드족(이란, 이라크, 터키 등에 걸친 쿠르디스탄 지역에 사는 소수민족-역주)과의 반목은 자제하고 있다.
지도의 빈 곳을 채우는 데 열심인 IS
그렇지만 IS는 보여주는 것이 거의 없다. 모술의 처참한 상황이 이를 여실히 드러낸다. 그들의 막대한 자원으로도 충분한 재분배가 불가능하다. IS 정부의 원칙은 이슬람 선지자의 계율을 부활시킨다는 시대착오에서 비롯된 것이므로, 이러한 계율이 제대로 받아들여진다 해도 비실용적일 수밖에 없다. 바탕부터 엉성한 이런 이상향 말고는, IS는 모순적이게도 그 어떤 이슬람 국가의 이론에도 기반하고 있지 않다. 이는 이란혁명 당시의 시아파 교의와는 대조적인 것으로, 일반적으로 수니파 세계에서 결핍된 요소라고 볼 수 있다. 최선의 경우 IS는 전쟁에 관해 더 체계화된 비전을 확립할 수 있는데, 순수하고 단순한 범죄행위에 몸을 내맡긴 무장단체들에게는 없는 장점이 있는 셈이다. 이런 체계화는 폭력적이다. 하지만, 비교적 공들여 구상한 실행과 담화를 통해 전체적인 결집력을 강화시켜준다.
사실상 IS는 무엇보다도 비어 있는 땅을 차지하는 데 만족하고 있다. IS가 시리아의 북동부를 차지한 것은 결국 시리아 정부가 이 지역을 단념했으며 그곳에 자리 잡을 수 있었던 반대세력이 그의 대부(代父)들, 특히 미국에 의해 잊힌 채 남겨져 버렸기 때문이다. IS가 팔루자나 모술 같은 도시로 들이닥친 것도, 이라크 중앙정부가 전혀 신경 쓰지 않은 곳이었기 때문이다. 덕분에 IS는 그곳에서 부패하고 권위적이며 불안정한 권력을 지속할 수 있었다. 쿠르드족 지배 지역이지만 일부 기독교도와 야지디족(이라크 북부의 쿠르드족 소수민-역주)이 거주하는 이라크 북부 지역으로 IS가 세력을 넓힌 것 역시, 자신들의 원래 영토에만 틀어박히는 것을 선호했던 쿠르드파가 이 지역 피해자에게 관심이 거의 없었기 때문이다.
경멸적인 뉘앙스를 지닌 아랍어 약자 ‘Daesh(داعش)’라는 명칭으로도 알려진 IS는 더 추상적인 지도의 빈 곳을 채우고 있기도 하다. 간단히 설명하자면, 수니파 세계는 과거를 이해하는 것만큼이나 그 미래를 계획하는 데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 일종의 후퇴기로 여겨진 오스만 제국의 기나긴 점령 이후 지리멸렬했던 20세기는 일련의 실패로 나타났다. 반제국주의, 범아랍주의, 국수주의, 사회주의, 다양한 형태의 이슬람주의, 자본주의는 모호하고도 쓰디쓴 경험으로 귀결됐을 뿐이었다. 튀니지의 경우를 제외하고, 2011년 아랍의 봄(중동과 북아프리카 등지에서 발생한 반정부시위-역주)에서 태어난 희망은 적어도 한동안 재앙으로 돌변했다. 영감과 자신감, 긍지의 원천을 찾기 위해 어디로 향해야 할까? 페르시아 만 국가와 이집트의 반동주의자들에게로? 오늘날 그 힘이 약화된 무슬림형제단(이슬람 가치 구현과 확산을 목표로 설립된 이슬람 근본주의 조직-역주)에게로? 이스라엘에서의 항전에서 끝없는 진퇴양난의 덫에 빠진 팔레스타인 하마스(이스라엘에 저항하는 팔레스타인 무장단체로 창설해 저항활동을 전개해오다 2006년 팔레스타인 자치정부의 집권당이 됨-역주)에게로?
그러는 동안 시아파는 부분적이기는 하지만 분명한 성공을 거뒀다. 이란은 서구국가들에게 불가피한 교섭상대처럼 자리 잡았으며 아랍세계에서 더 큰 역할을 하길 바라고 있다. 헤즈볼라(레바논의 시아파 무장단체-역주)는 레바논에서 자신의 법을 강요하고 있으며 레바논, 시리아, 이라크, 이란을 잇는 신앙적 축이 강화되고 있다. 바로 여기서 새롭고도 염려스러운 현상이 생겨난다. 이 지역의 대다수를 차지하는 수니파들이 소수파로서의 콤플렉스, 즉 혼란스럽지만 강력한 소외감과 박탈감, 모욕감 등을 키우게 된 것이다. 더 많은 곳에서, 더 많은 수니파들이 기본적인 권리를 빼앗겼으며 박해당한다고 생각하고 있다.
진짜 소수파라고 할 수 있는 시아파, 기독교도, 알라위파(시리아의 터키 국경지대에 사는 시아파의 한 분파-역주), 쿠르드족 등은 그들 나름의 피해의식을 키우고 있으며 이 다수파의 운명에 무관심하다 못해 동조하는 모습까지 보인다. 서구사회도 예외가 아니다. 신자르산에서 필사적으로 도주한 후 굶어죽을 위기에 처한 야지디족의 운명이 서구국가들의 최대 관심사라면, 다마스쿠스의 포위당한 지역주민들, 시리아 정부에 의해 굶주리고 있는 훨씬 더 많은 수의 수니파 주민들 운명에는 무관심하기 그지없다.
“IS가 우리를 위협하고 있으니···”
아마도 가장 염려스러운 사실은, IS가 보편화된 정책의 공허함을 덮는 도구가 됐다는 사실일 것이다. 부시 전 미국 대통령의 ‘테러와의 전쟁’에서 ‘방화를 즐기는 소방관’이라는 어리석은 생각을 엿봤든, 제국주의적 논리의 비정상적인 잔상을 엿봤든, 그 정책을 혐오했던 이들 모두 이제는 이런 동어반복을 찬양하고 있다. 이는 이 지역이 제기하는 진정한 딜레마에 관해 고민하지 않게 해주기 때문이다. IS는 수니파의 만행에 대한 대응으로서 더 극심한 시아파 파벌주의를 향해 전방으로 퇴각하는 이란 정부의 극단성을 정당화하는 역할을 한다. 어찌해야 할 바를 모르는 서구사회는 양가감정으로 가득하고, 아랍세계의 엘리트 대부분이 반혁명 폭력에 연루돼 있으며, 소수파들은 자신의 환경에서 점점 더 소외되고 있다. 소수파들은 이러한 소외감의 피해자인 동시에 주범이기도 한데, 문제를 악화시키는 진압이라는 형태에 이들이 매달리고 있기 때문이다.
이로부터 하나하나 터무니없는 문장들이 이어지게 된다. 이란은 서구사회에 “IS가 우리를 위협하니 우리를 지켜달라”고 청하며, 아랍국가들은 국민들에게 “IS가 우리를 위협하니 우리는 아무 것도 양보하지 않을 것”이라고 하고, 시리아 반군은 “IS가 우리를 위협하니 우리 스스로 우리를 구하겠다”고 한다. 헤즈볼라는 레바논인들에게 “IS가 우리를 위협하니 모든 것이 허용된다”고 하고, 미국은 “IS가 우리를 위협하니 시리아에는 개입하지 않지만 이라크는 쳐들어가겠다”고 한다. IS가 우리를 위협하고 있으니까.
전방위로 퇴보가 일어나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국제관계사의 쓰레기통 속에서 ‘테러와의 전쟁’이라는 카드를 꺼낼 수밖에 없다. 또한 동요된 다수의 폭격이라는, 식민주의적 형태의 ‘소수민족 보호’라는 카드도 끄집어낸다. 이라크의 몇몇 표적이 미국 전투기와 드론의 폭격을 받은 것은, 자신의 운명이 다른 요소에 달려있는 야지디 족에게는 그렇지 않지만, 어깨만 으쓱한 채 지난 3년간 모든 종류의 폭력에 고개를 돌렸던 오바마 행정부의 사고로는 ‘해방적 행위’인 셈이다. 결국 미국이 이라크에 개입했던 것은 큰 피해 없이 끝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즉, 당장의 보복수단을 갖고 있지 않은 IS와의 전쟁이 확대될 리 없기 때문이다. 미국 내 혹은 전 세계 여론에서 항의의 목소리도 들리지 않으며, 이러한 명분에 대부분 동의하는 모습이다. 외교적으로 복잡해질 소지 또한 전혀 없다. IS에 대한 공습은 이라크 정부나 쿠르드족 지도자들이나 인접 국가인 이란, 터키, 사우디아라비아 모두에게 합의를 얻고 있기 때문이다.
IS의 성공 뒤에는 무엇이 있는가
그렇지만 이러한 폭격이 중립적이지는 않다. 오히려 지역적 특성을 고려할 때 이번 폭격은 의미를 지닌다. 근동에서 일어난 대량학살의 시기를 고려하면 우연히도 이번 폭격은 미국이 그 운명에 필사적으로 무관심했던, 가자 지구 민간인들이 폭격을 당한 지 한 달 후에 발생했다. 이는 지역 당사자들에게 매우 분명한 메시지를 보내고 있다. 즉, ‘테러와의 전쟁’과 ‘소수민족 보호’를 적당히 섞으면 미국의 힘을 끌어들이고 동원할 수 있는 것이다. 쿠르드자치정부(KRG)의 마수드 바르자니 대통령은 이를 잘 이해했기에 <워싱턴포스트>에 애타는 심정으로 원군을 요청하는 글을 실었다.(1) 근방의 다른 정치가들도 역시 이에 동의하고 있으며 어쨌거나 이들은 긍정적인 변화를 요하는 목소리를 모른 척하지는 않는다.
IS는 불안정하기 그지없는 레바논에 나타나 나라를 짓누르는 마비 상태를 뒤흔들기도 했다. 그러나 일보전진은 일보후퇴이기도 하다. 레바논의 정치가들과 외국 스폰서들은 군사적 지원을 선호하는데, 이는 헤즈볼라에 관한 민감한 문제에는 눈 감으면서 수니파 색출에 사람들을 가담시키는 역할을 하고 있다. 헤즈볼라가 시리아와 이라크 정부의 편에서 싸우도록 내버려두는 것이다. 게다가 지역 내 다른 곳에서와 마찬가지로, 불안정을 일으키는 구조적 요소는 IS에 대적해야 하는 시급성에 비해 부차적인 것으로 여겨진다. 수니파 내부에서는 공격당한다는 감정이 커질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주요 당사자들이 오랜 악습을 정당화하기 위해 개입할 뿐이라면, IS의 미래는 매우 밝다고 할 수 있다. 시아파 이슬람주의자들, 일반 대중, 서구정부들은 그 자체로 목적이 돼버린 일종의 ‘성스러운 전쟁’을 기반으로 해 그들의 행위에 대해 부분적으로 재정의하고 있다. 이농 덕분에 국토의 경계지역마저 대도시의 변칙적 거리와 잘 연결되는 등 국경을 넘어, 혹은 각국 내부에서 강력한 지역적 통합을 경험한 세계의 일부에서 가자, 예멘, 시나이, 리비아, 심지어 튀니지까지 IS의 영토 확장에 적합한, 비옥한 땅들이 있다.
또한 IS는 이민자 유입과 새로운 정보기술로 재형성된 서구사회와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는데, 이는 새로운 세대의 지하드 지원자를 양성하고 있다. 서구 젊은이들은 시리아나 이라크와 쉽게 접속해 총알처럼 트윗을 날리며 소통하고, 자신의 경험을 자랑한다. 그 자체로서는 별반 내세울 게 없는 IS는 시스템의 효과를 단단히 누리고 있는 것이다. IS는 뿌리 깊은 위기를 겪고 있는 수니파에게 일종의 자연스러운 구원인 동시에 일시적인 동맹, 사회신분 상승의 사다리, 준비된 정체성이 될 수 있다. 가장 파렴치한 모략가들에게는 과시할 만한, 또는 기분전환이 될 만한 거리로 작용하고, 자기 자신의 실패와 맞닥뜨린 당사자들에게는 다분히 합리적인 공포를 그러모은 허수아비의 역할을 할 것이다. 이러한 다의성(多義性)이야말로 이 무질서한 변화의 시대를 특징짓는 혼돈 속에서 IS의 성공을 가능케 하는 요인이라고 할 수 있다.
글·페테르 아를랭 Peter Harling
국제위기그룹(International Crisis Group) 연구원
번역·박나리
한국외국어대 통번역대학원 졸업. 저서로 <세금혁명> 등이 있다.
(1) 마수드 바르자니, “쿠르드족은 IS를 물리치기 위해 더 많은 미국의 힘이 필요하다”, <워싱턴 포스트>, 2014년 8월 10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