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등을 위한 선언

2017-03-02     지젤 알리미 여성학자

2000년 채택된 정치적 평등에 관한 법은, 당시 반대자들 입장에서 보면 프랑스 국민을 두 부류로 갈라놓으며 프랑스 공화국을 위태롭게 하는 것이었다. 반면, 한 공화국의 원칙을 두고 변호사이자 전 국회의원인 지젤 알리미는 여성참여가 배제된 정치를 타파할 필요성을 1994년부터 강력하게 주장해왔다

 

여성의 낮은 공직 참여율에 익숙해지는 것은 민주주의의 효력이 어느 정도 퇴색했다는 신호다. 더딘 의식변화를 내세워 이를 정당화하는 것은 기만적 세태를 반영한다. 개선의 노력 없이 이를 유감스럽게 생각하거나, 체념하고 받아들이는 것은 프랑스 공화국의 반反여성관을 드러내는 일이다. 실제로 2000년대 초에 작성된 보고서에 따르면 프랑스가 도달해야할 남녀평등의 목표는 현실과 큰 괴리를 보였다.

 

한 번 살펴보자. 전 세계 국가의 국회에서 여성의원 비율은 평균 20%를 간신히 넘겼다.1 프랑스는 1944년 4월 21일, 민족해방위원회의 명령에 따라 여성에게 참정권을 부여했다. “여성은 남성과 동등한 조건으로 선거권과 피선거권을 가진다(제17조).” 여성을 왜곡하고 멸시하는 논쟁 끝에, 프랑스가 다른 국가들보다 한참 뒤늦게 여성의 참정권을 인정한 점이 역설적으로 보일 수 있다.2 프랑스는 1848년부터 ‘보통’선거를 도입한 최초의 국가라는 점에 자랑스러워하지 않았던가? 하지만 그 보통선거의 혜택을 받은 사람은 남성들뿐이라는 사실을 밝혀야 한다. 여성들은 제외됐던 것이다. 미칠 노릇이다!

 

1945년 10월 21일, 제헌의회의 첫 총선에서 선출된 여성은 33명으로 전체 당선자들 중 6%를 차지했다. 거의 반세기가 지난 오늘날에도 프랑스 의회에서의 여성 비율은 5.6%에 불과하다. 인구가 3억 2,700만 명인 유럽에서 여성이 51.5%를 차지하는데, 당선자 중 여성 비율은 11.3%에 불과하다. 한편 프랑스는 그리스와 함께 여성의 정치 참여율이 가장 낮은 국가라는 불명예를 안았다.3

이와 같은 여성의 낮은 정치참여율은 프랑스 혁명의 자유주의 선언, 계몽주의 사상과 모순된다. 하지만 이상한 점이 있다. 당시 입법자들은 평등원칙의 보편성과, 여성의 공직 배제 간에 어떤 모순도 심어 놓지 않았으며, 여성을 속박하는 상황을 유지하도록 한 것도 아니었다는 점이다. 그러나 실제로 프랑스 인권선언(1791년)이 정의한 정치적 권리의 주체는 남성과 백인, 성인, 그리고 ‘모범 납세자’였다. 또한 성 구분은 사회적 차별, 혹은 성 역할 분리(영어로 ‘Gender’라 일컫는 것)의 원인이 됐다. 남성은 공공의 영역, 여성은 사적인 영역으로 나뉜다. 확실히 성 역할은 공정하지 않으며, 여성의 역할을 과소평가한다.

가정의 수호자인 여성들은 시장가치를 조금도 인정받지 못하는 가사노동에 얽매여 있다. 국민총생산GNP에서 제외되고 잉여가치 창출도 아닌 가사노동은, 시대착오적인 마르크스주의에 따르면 ‘하찮은’ 일이다. “남성들은 법을 만들고 여성들은 풍속을 만들고, 남성들은 권리를 가지고 여성들은 의무를 지닌다.”4 이처럼 영구히 남성이 제시하고 결정하며, 여성이 재현하고 동의하는 대의민주주의가 이어질 것이다. 대의민주주의 형식은 시민의 절반이 정치적 결정에서 배제된 채 머무는 우스꽝스러운 형태로 변화할 것이다.

이러한 사태의 원인은 무엇일까? 우선, 우리 문명의 기저에 유대‒기독교적 터부taboo로 가득 찬 문화가 쌓여있기 때문이다. 여성 혐오자이며 반유대주의자인 교부 테르툴리아누스(160~220, 로마시대의 기독교 연구가로서 삼위일체론과 원죄설을 주장‒역주)의 영향 탓인데, 그는 파문을 일으킨 책 『여성은 악마의 성性이다』 및 유대인의 매일기도 중 “나를 남성으로 창조하신 신께 감사드립니다” 등의 여러 구절을 골자로 한 책 『유대인들에 맞서Adversus Judaeos』의 저자이기도 하다. 프랑스 공화국의 정교분리원칙은 위험하게도 별다른 저항 없이 이런 사상에 물들었다. 흔히 기록된 것과 달리, 혁명의 서사시와 계몽주의 시대에는 여성의 제한적인 역할을 공고히 했다. 장 자크 루소는 남성에게 사회계약을 제안하면서, 아마 여성을 위해 『에밀Emile』(에밀이라는 가상의 주인공이 유년기부터 성인이 될 때까지, 이상적인 교육이란 무엇인가를 탐구한 소설‒역주)을 썼을 것이다. 그는 이 저서에서 소피(장차 에밀과 결혼하게 될 여성‒역주)에게 “여성으로서의 품위는 드러내지 않는 데 있다”는 점과, “소피는 가정을 관리하는 것으로 만족해야 한다”는 점을 상기시킨다. “(당신의) 배우자가 되면, 에밀은 (당신의) 지도자가 되기 때문이다.”

어떻게 하면 이 같은 ‘이례적'인 여성관에 종지부를 찍을 수 있을까? 선언문과 헌법이 만들어지고, 시간이 소요돼도 우리의 인식이 변화하지 않을 때, ‘의지적’ 방법을 사용하는 수밖에 없다. 사회 불균형은 언제나 민주주의 기능을 위협한다. 법치국가는 공동으로 ‘살아갈 의지’로 맺어진 여성과 남성 간에 필요한 평등을 바로 세우기 위한 법률을 제정하고, 심대한 기능장애에 대처하기 위해 개입해야 할 의무가 있다. 조화로운 생존을 위해서는 그만한 대가를 치러야 한다. 앙리 라코르데르(1802~ 1861. 프랑스의 도미니크수도회 수도가이자 설교가 ‒역주)는 앞서 “강자와 약자 사이를 억압하는 것은 자유이고 해방시키는 것은 법률이다”라고 말해왔다.

게다가 대의민주주의는 유권자와 피선거권자의 연령 제한, 일정 규모의 선거인단 구성, 친족 간 입후보 제한 등을 통해 필연적으로 시민들의 정치적 권리를 일부 제한한다. 부의 축적과 개인주의 같은 자유는 국가연대와 사회균형 확립을 위해 부분적으로 규제된다.

이처럼 국민에게 전적으로 부여된 국가주권에 대한 공화국의 원칙을 훼손하지 않으면서, 어떻게 정치적 대표행위에 관한 법률을 제정할 것인가? ‘인간 및 시민의 권리선언’이 주장했던 것처럼, 프랑스 국민을 다양한 유형으로 구분하지 말아야 할까? 1982년 10월 21일, 의회는 나의 발의에 따라 이른바 ‘여성할당제’라는 수정안을 표결했다. 여성 후보자들에게 유리하게 마련돼야 함에도, 수정안은 남성과 여성의 엄격한 평등을 지향하고자 했다. “후보자 목록에서 같은 성별이 75% 이상 포함될 수 없다”고 명시했다.

여성의 정치참여를 막는 빗장을 뚫고 나아가기

여성할당제가 왜 25%일까? 의회투표 만장일치로, 여성의 정치참여를 가로막는 빗장을 돌파하기 위해서다. 한번 얻어낸 원칙이 40%, 45% 그리고 50%까지도 확대되도록 하기 위함이다. 다시 말해 합리적이고 공정한 여성할당제로 양성 간에 정치참여 평등을 이뤄낼 수 있다. 수정안은 유권자와 피선거권자, 그러니까 프랑스 국민들을 ‘유형’으로 나눴다. 헌법 위원회가 1982년 11월 18일에 수정안을 무효화하면서 주장한 것처럼, 이는 헌법에 위배되는 것일까? 그렇지 않다. 남성도 여성도 여기에서 이 단어에 주어진 의미의 ‘유형’에 속하지 않는다. 단지 남녀는 인류의 성을 가진 두 가지 구성 요소일 뿐이다.

사실, 민주주의에서 남성과 여성의 정치참여 평등은 다음의 논리를 근간으로 한다. 바로 남녀 차이에 입각한 양성평등의 민주주의다. 서양인, 백인, 남성에게만 국한된 피선거권을 거부하는 길이야말로 평등주의적 정치 기반을 세우고 다질 수 있다. 하지만 양성평등구현과 거리가 먼, 남성중심의 보편 선거 제도는 국가에서 여성을 완전히 제외시키면서, 문화적으로 여성을 남성에게 복종시켰다. 따라서 남녀평등을 토론의 중심에 두고, 성性의 이원성을 인정해야만 민주주의가 바로 설 수 있다. 그렇지 않으면 정치적 틀이 훼손된다.

국민투표에 의해 비준된 헌법 개정을 통한 정치적 평등이야말로 상황을 바꿀 수 있다. ‘슈와지르 라 코즈 데 팜므Choisir la cause des femmes(여성들을 위해 선택하기)’의 발의로 작성된, 두 개의 법안이 1994년 3월 23일과 24일에 의회와 상원에서 상정됐다. 이 중 법안 하나는 헌법 제3조에 다음의 문장을 추가해 개정하려는 목적이 있었다. “여성과 남성의 동등한 정치 참여는 평등원칙으로 보장돼야 한다.”5 두 번째 법안의 목적은 통상 법률로 하여금 다양한 방식으로 평등원칙을 적용토록 하는 것이다.6

내가 그토록 자주 들었던 것처럼, 누가 법률 개정을 강제하고 강요했다고 우리를 비난할 수 있을까? 남성과 여성 모두 시민으로서 자유롭게 주권을 가지고 자신의 의사를 표명할 수 있다. 우리는 프랑스 공화국의 기본법, 글자 그대로의 뜻과 그 속에 담긴 정신, 본문과 전문을 모두 준수하면서 엄격한 절차에 따라 행했다. 그렇기 때문에 1946년 헌법과 다시 수정된 1958년의 헌법은 “법은 여성에게 모든 분야에서 남성과 동등한 권한을 보장한다”고 규정한다. 보고서와 선언, 성명서 안의 형식적 자유를 실질적 권리로 이행하도록 보장했다.

역사는 무엇을 말하는가? 역사는 여성들의 진보가 항상 민주주의를 강화했음을 보여준다. 이와 반대로, 히틀러 나치와 페탱(제2차 대전당시 독일에 항복하고 독일에 협력해 비시에 새 정부를 세워 정부 수반에 올랐으나 종전 후 사형선고받은 뒤 병사함‒역주) 치하의 법에 따라 낙태 시 사형을 선고했거나 여성을 강제로 가정의 틀에 묶어 놓았으며, 시민법보다 종교법의 근본적 우월성을 강조했던, 즉 여성을 억압하던 체제는 ‘전체주의를 향한 행보’라고 역사는 기록한다. 그래서 여성을 향한 채찍은 국민을 향한 채찍이라고 우리는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글·지젤 알리미 | 변호사이자 전 국회의원
열렬한 페미니즘 운동가. 튀니지 유대인 가정에서 태어난 그녀는 14살 때 파리로 이주해, 1956년부터 프랑스에서 여성 인권 변호사로 활동하면서 튀니지 및 알제리 독립운동에 참여했고, 1971년 시몬 드 보부아르와 함께 여성 임신중절 금지에 반대하는 ‘여성 343인 선언문’에 서명하고, 같은 해 운동단체 ‘여성들의 대의명분을 택하라(Choisir la cause des femmes)’를 만들어 보부아르의 뒤를 이어 이 단체의 협회장을 맡았다.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프랑스판의 발행인 세르주 알리미가 그의 둘째 아들이기도 하다. 2000년 채택된 정치적 평등에 관한 법은, 당시 반대자들 입장에서 보면 프랑스 국민을 두 부류로 갈라놓으며 프랑스 공화국을 위태롭게 하는 것이었다. 반면, 변호사이자 전 국회의원인 지젤 알리미는 여성참여가 배제된 정치를 타파할 필요성을 1994년부터 강력하게 주장해왔다.

1 편집자 노트. 반면 2016년 8월 1일에는 22.8%(국제의원연맹, 2016년 8월)였다.
2 뉴질랜드는 1893년에 최초로 여성의 참정권을 인정한 첫 번째 국가다. 이후 1906~1920년 스칸디나비아 국가들과 미국(1869년부터 참정권을 부여한 와이오밍주를 제외), 독일, 영국(1928년), 스페인, 포르투갈(1931년)이 여성의 참정권을 인정했다.
3 편집자 노트. 평균적으로 유럽(러시아 제외)에서 여성은 국가 의회 의석수 중 25.6%를 차지했다. 국회의원 중 여성 비율이 25.7%로, 프랑스가 그리스(19.7%)보다 앞섰다. 유럽연합국의 동쪽으로 확대해보면, 루마니아가 그리스를 제치고 불명예의 자리에 올랐다(국제의회연맹, 2016).
4 쥬느비에브 프레스, 〈여성의 도리〉, 플롱, 파리, 1992년.
5 편집자 노트. 평등지지자들은 5년 후에 헌법 개정을 이뤄냈다. 1999년 6월 28일, 양원합동회의에서 헌법 제3조에 다음의 문장이 추가됐다. “법은 선거위임과 선거직에서 여성과 남성의 동등한 접근을 돕는다.” 슈와지르 다 꼬즈 데 팜므의 법안에서처럼, ‘돕는다’이지 ‘보장한다’가 아니다. 제4조는 이제 정당은 “법이 규정하는 조건에 따라 제3조의 마지막 항에서 언급된 원칙을 실행하는 데 동참한다”라고 명시한다.
6 편집자 노트. 헌법 개정에 이어서 2000년 6월 6일에 공포된 2000‒493호 법이 행해야 할 역할이다.

 
 
*본지의 페미니즘 관련들은 <르몽드 디플로마티크>의 자매 격월간지인 <마니에르 드 부아>2016년 12~2017년 1월호에 실린 글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