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제리 젊은이들에게도 희망이 있을까?

2010-03-05     장피에르 세레니

회복기에 접어든 알제리 사회가 다시 태어나고 있다. 수도 알제에서 500km 떨어진 틀렘센시에서는 부동산 붐과 대단위 공사가 실업 및 암시장과 어깨를 나란히 하고 있다. 이농 현상이 옛 중앙 마그레브 수도의 전형적인 모습을 확 바꿔놓자, 어떤 이들은 과거 틀렘센의 영광에 대한 향수에 젖어든다.

 옛 항독 지하 운동가이자 현재 알제리 서부에서 가장 큰 벽돌 공장의 사장인 자멜 벤디메레드는 “위기는 무슨 위기냐? 앞으로도 오랫동안 일자리에 돈이 돌 것이다!”라고 장담했다. 그 앞에는 25만 명의 주민이 거주하는 대도시 틀렘센이 20km 이상 펼쳐져 있다. 회색 콘크리트가 동쪽에서 서쪽으로 아래쪽 푸른 평원을 야금야금 잠식하고 있다. 이곳은 1970년대까지만 해도 과수원과 작은 올리브 숲이 있던 지대였다. 부동산 개발업자나 개인들은 각자 자신의 방식대로 수중에 있는 자금으로 건물을 짓고 있다. 틀렘센 먼지 구덩이 속에 기숙사와 위성도시들이 속속 들어서고 있다. 기업체 중역과 공무원들은 1980년대부터 위성도시 키판에 몰려와 거주하고 있고, 관청들은 신시가지의 중심인 이마마에 들어서 있다.

수도권의 개발 바람

 개발은 2000년대 들어 가속화됐다. 위성도시 울리자에는 벌써 3만5천 명의 주민이 거주하고 있고, 바로 맞은편 언덕에 자리잡은 불리자에는 2만5천 명이 거주하고 있다. 이곳에는 공공 부동산업체 ‘알제리주택개발기구’(AADL)가 지은 예쁜 정원이 딸린 그럴싸한 5~6층짜리 건물들이 즐비하다. 이 건물들은 AADL이 세입자에게 우선 임대했다가 국가가 주택 구입비의 절반을 부담한다는 파격적인 조건으로 분양한 것이다. 그러나 정작 연줄을 총동원해 이곳 국민임대주택에 입주해 저렴한 임대료 혜택을 누리는 세입자들은 임대주택을 탐탁지 않게 생각한다.
 민간 업체들은 건물을 지을 때 경기 상황을 살피기 위해 우선 1층을 주차장 용도로 지어 가게로 쓰며, 길게는 1년 정도를 기다렸다가 2·3층을 올리기 때문에 공사를 중단한 채 벽돌과 콘크리트 블록 위에 그대로 방치한 거친 철근 조각들이 사방에서 목격된다.
 부동산 붐을 타고 개발 바람이 일고 있다. 알제리 전국 48개 윌라야(행정구역상으로는 도 단위)에서 틀렘센 공사현장으로 사람들이 몰려들며, 이곳에는 특히 이들이 거주할 새로운 숙소가 우후죽순처럼 들어서고 있다. 정부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임시 주거 단지’로 공식 지정된 빈민가는 사라지지 않고 있다. 이 중 가장 거대한 단지는 랄라세티 고원 기슭에 위치해 틀렘센을 굽어볼 수 있는 부두간 단지다. 이곳은 1962년 알제리 독립 당시만 해도 주민이 3천 명에 불과했지만, 현재는 2만5천 명이 거주하고 있다. 단지는 이농 현상과 지난 세기말 10년간의 사회 불안을 틈타 비대해졌다. 사람들은 단지를 철거하는 대신 단지를 개선해나갔다. 주민들이 세운 이곳의 튼튼한 텔레비전 수신 안테나와 테라스, 4개의 회교사원(시가 경비를 부담해 외벽을 석회로 발랐다)과 구불구불하고 비좁은 거리들이 공권력과의 마찰을 피해 손쉽게 장사하고 싶어하는 장인들과 각종 고급 서비스 업종을 끌어들이고 있다.
 석유와 가스의 주요 수출국인 알제리는 2001년부터, 특히 2005년부터 유가 급등에 힘입어 상당한 자금을 투입해 ‘암울한 10년’, 즉 경제난 이후 꼭 정비가 필요했던 수도 틀렘센과 틀렘센이 속한 윌라야를 아름답게 꾸미기 시작했다.
 식수난, 열약한 의료시설, 과밀 학급 등의 문제를 해결하고 붕괴 직전인 많은 공공 건물을 정비해야 했다. 이 지역 출신의 압델 아지즈 부테플리카 대통령은 2004년 도의회 의장 압델와하브 누리를 이곳 왈리(도지사)로 전격 임명했다. 그는 4년의 임기 동안 중부 아인데플라에 위치한 도청을 예쁘게 꾸몄다. 이 지역은 오랫동안 이슬람혁명 게릴라의 본거지였다. 그의 임무는 틀렘센의 역사에 걸맞게 이 도시를 꾸미는 것이었다.

 

고유가 덕에 도시 재건 박차
 결과는 탁월했다. 시내 중심지에서 30km 떨어진 곳에 위치한 제나타 공항을 빠져나오자마자, 시내 입구 쪽으로 뻗은 2차선 도로(야간에는 밤새도록 불이 켜진다)와 외곽도로 그리고 형형색색의 물줄기를 뿜어내는 분수대, 가장자리를 빨간색과 흰색 블록으로 번갈아 깐 영국식 인도가 나온다. 주말 나들이에 나선 가족들은 최근에 설치된, 서부 지역과 해발 1200m가 넘는 랄라세티 고원을 잇는 케이블카를 자주 이용한다. 2개의 거대한 담수공장이 건설 중이고, 도로를 파헤치고 물·전기·천연가스 그리고 배수시설 등을 깔고 있다.
 도지사가 “외딴집까지도 선을 끌어다 전기를 가설해주겠다!”라며 열광했지만, 얼핏 그는 알제리 전력·가스 공사(Sonelgaz)가 고객 만족을 빌미로 매년 요금 인상을 미룬 탓에 감당하기 힘든 부채에 시달리고 있다는 것을 모르는 듯했다. 여하튼 30년 만에 처음으로 틀렘센 주민들은 극심한 인플레에도 평화로움과 개발 초기의 복지 혜택을 누리고 있다. 주요 공사는 여전히 진행 중이다. 제다에 본부를 둔, 사우디아라비아가 1978년 창설한 ‘이슬람 교육·과학·문화협회’(ISESCO)가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 시리아의 알레포, 파키스탄의 라호르 그리고 모로코의 페스에 이어 틀렘센을 2011년 ‘이슬람 문화의 해’ 개최지 후보로 선정했기 때문이다. 알제리 정부는 이 행사를 치르기 위해 15개의 야심찬 시설물 보강 프로젝트를 확정했다. 그중 하나가 중국 기업이 랄라세티에 건설 중인 대형 호텔이다. 틀렘센 주민은 이곳에 투입된 중국인 노동자들이 24시간 일하는 것을 보고 놀라움을 금치 못한다. 만약 이 프로그램이 중단된다면 그 여파로 ‘이슬람 문화의 해’ 콘텐츠가 불분명해질 것이다. 49개 ISESCO 회원국은 이 행사가 열리는 일주일 동안 자국의 문화를 소개하게 된다. 알제리는 무엇을 소개할까? 그것에 대해 아는 사람은 아직 아무도 없다.
 ‘알제리 전국 자우이아(코란학교) 연합’(UNZA)(1) 창립 회원이자 의학 및 문학 박사인 사리알리 히크메는 이 기회를 이용해 마그레브 지역의 세속적인 이슬람 문화의 이상을 회복할 계획이다. 할아버지가 이 지역 첫 무슬림 의사였던 히크메는 “우리는 사우디아라비아에서 들어온 와하브파의 이슬람 교리와 달리 알제리에 처음 이슬람을 전파한 이 도시의 수호성인 시디 부메디엔이 12세기에 지시한 대로 한시적인 정치 권력과 정신적인 종교 권력의 분리를 항상 설파하며, 왕을 존중해야 했다”고 말했다.
 1989~92년에 자우이아는 전반적으로 이슬람 원리주의를 표방하는 신생 ‘이슬람 구국전선’(FIS)에 대한 지지를 거부했고, 이들의 많은 지도자가 그 와중에 목숨을 잃었다. 알제리 정권은 이들에게 감사했고, 정부는 이들이 펼치는 ‘라마단 광주리’(라마단 때 빈민에게 광주리에 음식을 담아 나눠주는 자선활동)에서부터 ‘사랑의 식당’까지 다양한 자선활동을 지원하고 있다. 하지만 정부가 UNZA의 요구를 받아들여, 대부분의 알제리 국민이 가입해 있는 주요 무슬림 평신도 공동체 9곳과 제휴를 맺고 있는 8900개 자우이아가 공식 교육기관으로 뿌리내리도록 언제까지 방관만 하고 있을까?
 UNZA에 대한 불신은 사라지지 않았다. 테르니 고원의 한 지주는 “이들은 기회주의자다. 이들의 온건한 이슬람은 이들의 목적 달성, 즉 이슬람 정권을 세우기 위한 우회에 불과하다. 사람들은 틀렘센이 이슬람 도시가 되는 것을 원치 않는다”며 우려를 나타냈다. 그러는 사이 영화관, 극장, 변변한 식당조차 없는 이 엄격한 도시에서 그나마 술을 팔던 16곳의 술집 중 15곳이 문을 닫았다.
 종교가 이 도시 사회생활의 핵이 되어버렸다. 회교사원이 하루의 리듬을 조정하고, 정신과 대화를 지배하고 있다. 청소년들은 서로 동네에 있는 미너렛(회교사원 첨탑)에 올라가 기도하는 영광을 얻기 위해 다툰다. 겨우 잠들었다가 첫 기도 소리에 잠을 깨는 불면증 환자들에겐 안된 일이지만, 주민들은 성스러운 기도 소리를 경청하고 싶다며 스피커 시설을 늘려달라고 호소한다. 수염을 기른 한 배관공은 “난 일하는 시간을 빼곤 이슬람에 헌신한다”며 황홀해했다.
 경찰이 틀렘센의 34개 회교사원에 대해 철통 경계근무를 서고 있다. 한 도청 공무원은 “우리(정부)가 다시 사원을 장악했다. 이맘은 국가의 신하다. 우리는 그에게 이슬람의 기도의 날인 금요일 집회 때 해야 할 설교의 주요 개요를 지시한다. 그리고 설교는 20분을 초과할 수 없다. 이전에는 이맘이 당국의 지원을 받지 못해 아무나 이맘 대신 설교를 했다”고 침착하게 설명했다. 이 관계자는 대회교사원의 열쇠를 주머니에 가지고 있었다. 당국이 사원의 개방 시간을 관장한다. 점심시간 1시간 전에 첫 기도회, 일일기도회 ‘두르르’를 위해 개장했다가 다시 오후 4시에서 밤 10시까지 마지막 기도회를 위해 개장한다. 그는 “예전에는 너무 많은 사람들이 사원에서 밤을 지새우며 사원을 훼손했다”고 했다.

종교로 지배하고 종교를 통제하고

 그러나 사실 정부가 사원을 철통 경계하는 것은 종교외교부가 20년 전 사원 관리를 소홀히 하는 바람에 FIS가 쉽게 성장할 수 있었다는 것을 파악했기 때문이다. “어린 형제들”이란 별명으로 불리던 이슬람 급진 무장단체가 자취를 감춘 것은 아니지만, 하얀 드젤라바(긴 드레스) 차림으로 거리를 활보하던 이들의 모습은 뜸해졌다. 이들이 조용히 지내고 있는 것이다. 젊은 여성들은 전신 차도르 패션 대신 가벼운 스카프를 선호한다. 대학도시 틀렘센의 수많은 고등학교 여학생과 여대생들은 머리에 히잡을 착용하지 않는 것을 자랑스러워했다. 이 중 한 학생은 “제가 얼굴을 가리면 어떻게 남편감을 찾죠?”라고 반문했다.
 회교사원 건축은 신중하게 계획됐다. 국가가 부지를 마련하고, 당국이 위임한 건립추진위원회가 사원 건축을 주도했다. 당국은 원칙적으로 주요 사원에서 금요예배 때 신도들이 낸 헌금을 환수해 왈리의 재량에 따라 이들 사원에 재분배했다.
 왈리가 회교사원도 예외 없이 관장하는 것이다. 왈리는 틀렘센과 틀렘센도의 모든 영역을 관장하는 권세가다. 그의 동의 없이는 아무것도 되지 않고, 그의 권한을 제한하겠다고 나서는 중재 단체는 아예 없다. 전지전능한 왈리는 알제리의 수도 알제가 탄화수소(2)로 벌어들인 막대한 돈을 끌어다 모두 관리한다. 한편 공직에 몸담고 있는 저명한 지방 호족은 찾아보기 힘들다. 그들 대부분은 1962년부터 사기를 당했다고 생각하고 있다. 틀렘센은 프랑스와 이슬람 합작 고등학교가 있는 알제리의 세 도시 중 한 곳이었다. 프랑스 식민 시절, 이 교육기관은 프랑스 중등 교과과정을 아랍어로 엄격하게 가르치는 독특한 학교였다. 이 학교는 수많은 젊은이와 뛰어난 인재들을 배출했다. 이들은 먼저 알제리 독립운동을 위해 투쟁했고, 이후 신생 알제리 독립정부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 장관, 공기업 사장, 행정 각료 등 이 고등학교 출신들이 군부와 경찰을 제외한 핵심 부서를 오랫동안 장악했다.

 

성공과 순종, 이중적 여성관

 1990년대 ‘알제리의 사회주의’가 시장경제로 전환되는 혼란 속에서 공공기업들은 살아남지 못했다. 이 공장들은 폐쇄되거나 휴면 상태에 들어갔다. 공기업 사장들은 급성장한 민간 기업과 사업가들에게 밀려났고, 돈이 있거나 돈 버는 방법을 아는 사업가들이 새로운 사회 카테고리를 형성했다. 의사들만 이런 사회적 신분 하락을 피했다. 정부가 1974년부터 무료 의료 서비스를 실행하고 있지만, 치료를 받으려면 개인이 돈을 내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틀렘센에는 10개의 병원이 있다. 일부 병원은 1947년 옛 프랑스 식민지 시절 들여놨던 낡은 장비로 부유층 환자들을 유혹하고 있다. 캠퍼스 부지가 140ha에 이르는 거대한 틀렘센 아부 베크르 벨카이드 대학 내에 짓고 있는 새 대학병원(CHU)의 공사가 마무리 단계다. 이 대학에는 이미 3만5천 명의 학생들이 다니고 있고, 여학생 비율이 58%에 달한다. 누레딘 구알리 대학 총장은 “여학생들은 성공을 원한다. 여학생이 남학생보다 더 열심히 공부한다. 여학생들 가족도 여학생이 결혼 전에 공부를 마치고 그들이 일하는 데 찬성하는 남자와 결혼하길 원한다”고 했다.
 하지만 정작 틀렘센 본토박이들은 시골에서 집단 이주해온 이주민들을 보며 자신들의 도시에 강한 자부심을 갖는다. 이농민들이 본토박이보다 5배나 많기 때문이다. 이들의 점포 때문에 도심의 인도는 혼잡스럽다. 이들은 도심에 있는 낡은 집을 구입한 뒤 철거하고 그곳에 통로를 가로막고 육중한 콘크리트 블록 건물을 지어 도시 미관을 해치고 있다. 결혼문화가 마을을 이분시키는 상징이 되고 있다. 한 주부는 부모의 뜻을 어기고 틀렘센에서 300km 떨어진 아인-세프라 출신 총각과 혼인한 친구의 딸 얘기를 하며 “내 딸을 절대 이농민 출신과 결혼시키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알제리 정부가 지속적으로 하달한 칙령들은 조상이 이룬 지역경제 기반을 약화시켰다. 1960년대, 아흐메드 벤 벨라 전 알제리 대통령이 농산물 판매를 국유화한 데 이어, 1970년대에는 우아리 부메디엔 전 대통령이 토지를 공유화했다. 베틀장, 유기장, 구두수선장, 보석세공장은 종종 관료들의 종잡을 수 없는 심한 간섭에 몸살을 앓았다. 하여 이들이 근무하던 수백 개 작업장이 틀렘센의 부흥을 이끌었지만 이들의 세대 교체는 이뤄지지 않았다. 젊고 역동적인 제약업자 체킵 메레드는 “이제 겨우 40여 개의 중소기업밖에 남지 않았으며, 이 중 10여 곳만 제 수준을 유지하고 있다”고 했다. 이 중 가장 큰 중소기업 2곳에는 각각 1천여 명의 직원이 국가를 위해 일하고 있다. 현지 프랑스투자은행 나테식스 지점장은 “아무튼 이 지역의 투자가 상당히 회복됐다”고 강조했다. 하지만 산업투자는 거의 이뤄지지 않고 있다. 캐러브(carob) 콩(3)을 전량 해외로 수출하며, 틀렘센에 비즈니스스쿨을 창설하기 위해 젊은 기업인협회를 운영하는 압델하크 부브렌자는 “자본, 관리자, 자격을 갖춘 인재가 부족하다”며 안타까워했다. 문구류 업체인 ‘메가 페이퍼’를 경영하는 시드 아흐메드 카멜 합리는 “비공식 부문(보수가 고정돼 있지 않은 자영업자와 비정규직이 일하는 분야, 예컨대 지하경제)의 잘못 때문에 우리는 불공정 경쟁을 할 수밖에 없다”고 했다.
 기업의 저조한 비즈니스 활동과 고용 부족(4)이 암시장을 급성장시킨 원인과 결과가 됐다. 지하경제는 규정을 피해 의료보험료와 세금, 관세를 회피하고 있어 아무것도 창출하는 게 없다. 이들은 모든 것을 수입해 면세로 번창하고 있다. 알제리 전 지역으로 종양처럼 전이되는 지하경제 때문에 진풍경이 생겼다. 알제리와 모로코의 국경이 15년 전부터 폐쇄된 것이다. 물론 국경이 폐쇄됐다고 통행이 막히겠는가! 알제리 랄라-마르니아에서 지중해로 이어진 국경도로는 차량으로 붐빈다. 낡은 메르세데스 벤츠와 르노21 혹은 출시 연도를 알 수 없는 고물 트럭이 끊임없이 국경도로를 질주하고 있다. 차량에 실린 화물은? 이들은 수다니에서 부카눈 사이에 즐비한 카센터에서 오일탱크를 추가로 설치해 기름을 숨겨 운송했다. 알제리는 의원들이 고집을 부린 덕분에 지난 10년 동안 유가 변동이 없었지만, 모로코는 유가를 점진적으로 유럽의 가격에 맞춰 인상했다. 두 나라의 큰 유가 차이 때문에 기름 밀매는 이윤이 많이 남았다. ‘장사꾼’들은 국경에서 불과 몇m 떨어진 곳에 커다란 기름저장탱크를 파놓고 소중한 기름을 저장했다가 수로를 송유관처럼 이용해 밤사이에 모로코 쪽으로 기름을 빼돌리거나, 혼자서도 척척 길을 찾아가는 나귀를 이용해 국경선 너머에 있는 고객에게 기름을 배달했다.
 경찰·국경수비대·세관 등이 묵는 막사(알제리 쪽은 흰색으로, 모로코 쪽은 빨간색으로 칠함), 즉 초소를 아무리 늘려도 차량 통행이 멈추지 않는다. 장사꾼들은 국경지대에 위치한 석유제품 공급업체인 공기업 나프탈사의 주유소 17개 중 한 곳에서 기름을 구입해 알제리 최저임금(120유로)보다 4배나 많은 이윤을 남겼다. 퇴직한 전직 세관원은 “일부는 하루에 14번까지 드나든다”며 분개했다.

 

오래되고 강한 암시장
 한편 모로코인들은 마약을 운송했다. 국경 바로 근처에 대마초의 주요 생산지인 리프 산악지대가 있다. 상품은 신중하게 규격에 맞춰 포장됐다. 메르세데스 벤츠의 엠블럼인 별 표시를 한 포장은 유럽으로, 벌 표시를 한 포장은 동아프리카와 근동 지역으로, 나머지는 대마초 수요가 눈에 띄게 증가하고 있는 알제리의 대도시로 운송됐다.
 밀매의 결실은 전 국경지대에서 드러난다. 그중 가장 눈에 띄는 지역은 마르니아다. 이곳은 국경 폐쇄로 고통을 받기보다는 검은돈의 세탁지로 최대한의 혜택을 누리고 있다. 연립과 호화 호텔들도 확산되고 있다. 알제리 독립 이후 이곳의 주민은 13배나 증가했다. 이곳의 부동산 붐은 현재 경쟁 지역인 그랜드틀렘센 지역보다 한층 거세게 일고 있다. 최고 마약 밀매 부자들은 5~6층짜리 ‘별장’을 지어 둥근 지붕을 씌우고 첨탑을 세웠다. 강렬한 색상으로 칠한 지붕 때문에 다른 국경 지역에서도 그들의 집은 한눈에 쏙 들어온다.
 지난해 8월 밀수한 휘발유를 실은 트럭이 알제리 북서부 지역 도시인 가흐자우에트에서 폭발해 20여 명이 사망했다. 알제리 정부는 충격에 빠진 국민을 감안해 며칠간 차량 통행을 금지했지만, 금세 정상화했다. 폭동이 일어났기 때문이다. 휘발유 밀매업자들이 “우리에게 일자리를 달라”며 항의했다. 세관 책임자는 “차량 통행을 막은 뒤 상황이 나빠졌다. 사람들은 사회적 평화를 명목으로 불법행위를 방조한다”며 불평했다. 틀렘센의 장래뿐만 아니라 어쩌면 알제리의 장래가 이런 불법행위의 방조에 달렸다고 볼 수 있다. 틀렘센에서 500km 떨어진 알제에 있는 알제리 정부는소소한 밀매나 속임수로 근근이 살아가는 수천 명의 젊은이에게 어떻게 일자리를 제공할 것인가? 어떻게 현재 대세를 이룬 지하경제를 정상화해 지역 발전에 기여하도록 할 것인가? 또 어떻게 지하경제를 공식 부문 반열에 편입시켜 이 부문이 법을 준수하며 알제리 정부가 절실히 필요로 하는 기업과 일자리를 창출하도록 할 것인가? 답변을 해야 한다.

글•장피에르 세레니 Jean-Pierre Sereni
언론인으로, <르몽드 디플로마티크>를 비롯해 <젊은 아프리카> <누벨 에코노미스트> <렉스프레스>에 글을 기고하고 있다. 주요 저서로 <프랑스 석유의 모험>(1998), <베르시(프랑스 재무부)의 자살: 프랑스에서 개혁은 불가능한가?>(2007) 등이 있다.

번역•조은섭 chosub@ilemonde.com

<각주>
(1) 자우이아(zaouïas)는 지역사회 생활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는 전통적 종교구조로서, 기도와 교육, 회합이 이뤄지는 장소를 중심으로 조직되어 있다. 대표적인 조직이 코란학교다.
(2) 알제리 수출의 98%를 탄화수소가 차지한다. 그리고 대부분의 알제리 세금 수입이 탄화수소에서 생긴다. 2006년 4월 <르몽드 디플로마티크>에 실린 기사 ‘탄화수소에서 벌어들인  돈은 어디로 가는 것일까?’ 참고.
(3) 캐러브 콩은 제약 및 농업식품 산업에 이용된다.
(4) 실업률(공식적으로 10%)은 여전히 높은 수준이다. 직업은 비정규직(건설 현장이나 상점)이 대부분이다. 젊은 대학 졸업생들이 직장을 구하기 힘들어진 반면 틀렘센에서 20km 떨어진 헤나야 올리브 농장에서는 올리브를 딸 노동력이 부족하다. 


   옛 수도의 비애

 믿기 힘들지만, 13~15세기에 틀렘센은 중앙 마그레브 제국의 수도였다. 전성기 때 이 제국의 영토는 현 알제리 영토(콘스탄틴 지역이 빠지고 모로코 동쪽이 포함됨)와 맞먹었지만, 암울한 쇠퇴기를 거치며 현재 틀렘센 성벽 경계선까지  영토가 줄었다. 그 기원은 야흐모라상 벤 쟈양이 틀렘센에 지야니드 왕조를 세우면서 시작됐다. 사람들은 이 용맹한 베르베르족의 전사가 47년간 집권하는 동안 이 제국 수도의 주민이 12만5천 명에 달했으며, 이들은 수도를 경제 번영과 교육 및 종교의 요충지로 만들었다고 했다. 틀렘센대학의 네가디 시디 모하메드 교수는 “무슬림들이 1212년 스페인 해안의 라스나바스데 톨로사 전투에서 패배해 함대를 잃은 이후 기독교인이 서쪽 지중해를 장악하는 바람에, 마그레브 서쪽과 동쪽 사이를 이동하려면 틀렘센을 지나가는 육로를 반드시 거쳐야만 했다”고 말한다. 그래서 서쪽과 동쪽 지역 국가들은 틀렘센을 탐냈고, 틀렘센은 이들의 위협에 직면할 수밖에 없었다. 16세기, 틀렘센 성곽도시는 스페인과 터키 협공 작전에 함락됐다. 이후 왕조는 왕권 쟁탈전과 내홍으로 부족 연맹이 깨지며 분열됐고, ‘마그레브의 진주’는 급격히 쇠퇴했다. 현재 알제리 전체 이슬람 건축문화 유산의 75%가 이곳에 있다.
 알제리는 1962년 7월 프랑스로부터 독립하며, 알제리 독립전쟁의 영웅 아흐메드 벤 벨라와 알제리민족해방전선(FLN) 대표인 우아리 부메디엔은 틀렘센에서 동맹협정을 맺었다. 이후 벤 벨라가 알제리 독립정부 초대 대통령에 선출됐으나, 1965년 6월 19일 부메디엔이 쿠데타로 정권을 찬탈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