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생인권조례 시비 걸 때도 아이들은 세상을 등진다

2010-03-05     심우근

 “나 이제 겨우 중3이다. …남은 8년이 정말 자신 없다.”
 “너무 힘드네요. 고등학교 생활은, 한국이란 나라는….”
 “아버지는 허리 다쳐, 어머니는 일용직으로, 누나는 전문대 등록금을 마련하기 위해 가족이 동분서주하자 아르바이트를 하기로 결심…. 담임이 ‘야간 자율학습에 빠지는 학생은 한 명도 없다. 야간 자율학습 않고 아르바이트를 하려면 전학을 가라’.”(1)

 19살 이상, 나잇살이나 드신 어른들이여! 학생 때 이른바 ‘교칙’이라며 얼토당토않게 제멋대로 적용하던, 복잡해서 종잡을 수도 없던 생활 규정들을 어떻게 하면 피해볼까 궁리하지 않으셨습니까? 그때와 크게 다를 바 없는 규정에다, 예전과는 견줄 수 없는 극심한 입시와 성적 경쟁의 음험한 늪에 빠져 허우적대는 아이들을, 도대체 보고는 계십니까? 지나고 나니 추억이라서 다 아름답기만 하십니까? 오히려 그때 더 꽉 조여줬더라면 하고 생각하십니까?

 한 해 130명 사망, 5만 명 자퇴
 무례하지만 도발적이고 무겁게 글을 시작한다. 아이들의 목숨보다 더 무거운 건 없을 테니까. 누구나 어릴 때를 돌이켜보면 죽고 싶다 해본 적 있으리라. 그때는 다른 일들로 분하고 속상해서 그랬을 게다. 그런데 요즘엔 입시와 성적에 짓눌리고, 시대에 뒤진 억압적인 생활 규정과 획일적인 학교 운영 때문에 여린 새싹들이 된서리를 맞아 시들어 죽고 있다. 학교를 그만두는 초·중·고교 학생이 한 해에 5만 명이 넘고, 쉬쉬하는 학생 사망 건도 해마다 130명 안팎이다. 매몰차게 말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 정도도 못 견딘다면 험난한 세상 어떻게 살래!” 이제 3월이다. 4월보다 더 잔인한 3월. 새 감옥에 적응해야 하는 고1과, 급류를 거슬러 노 젓는 고3들이 압박감에 못 이겨 그 누군가는 생명이 움트는 3월에 삶을 접을 것이다. 내 자식이나 내 학생이 아니라고 ‘내 남 보살’ 할 것인가?
 이전에도 밀가루 범벅인 졸업식 뒤풀이를 보고 눈을 찌푸려왔다. 올 2월 중·고등학교 졸업식 뒤풀이는 벌거숭이 내달리기나 바닷물에 빠뜨리기 등으로 난리다. 그런데 이 소동을 보는 눈길의 중심이 좀 다르다. 하나는 “폭력과 난동이 도를 넘었고 정말 버르장머리 없다. 강력히 지도·처벌해야” 쪽이고, 다른 하나는 “과한 폭력도 있지만 대물림 성격이 강하고, 억압과 성적 제일주의로 찌들어 생기는 일로 당연하다”는 시선이다. 제대로 보자. 그 아이들이 잘했다는 게 아니다. 아이들은 어른의 거울이다. 이토록 야멸치게 죄수처럼 가둬, 노예인 양 강제로 학습시키고, 영업사원 볶듯 실적을 닦달해, 철도 제대로 들기 전에 인간 품질 딱지를 붙여 평생 살아가라 윽박지르니 그들이 온전하랴. 일부는 극단에 몰려 죽음으로 이 부조리를 고발하고 일부는 폭력과 은밀한 일탈로 비웃는다. 속 부글거리는 많은 아이들이 수면 아래 빙산이라면 그런 ‘짓’을 하는 아이들은 보이는 일부일 뿐이다.

 이런 상황은 세계에선 거의 유일하고 한국에선 일상이다. 이유는 여럿 있다. 학력·학벌 구조 아래 이른바 ‘명문대’를 향한 벌떼 같은 돌진, 외통수 학제와 교육과정, 개인 능력과 차이를 무시하는 교과서와 전국 일제평가, 일제와 군대의 망령이 춤추는 생활지도라는 이름의 통제와 감시, 미성숙한 자가 언감생심 무슨 인격, 미래를 위해 저당 잡힌 청춘, 장식용 헌법과 유엔아동권리협약의 기본권들, 오래도록 많이만 하면 좋은 줄 아는 학습량(많이 먹을수록 건강에 좋은가?), 조폭처럼 머리 깎여 군인처럼 교복 입혀 돌부처로 앉혀놓으면 공부만 하리라 생각하는 무지, 때려서라도 가르치고 배워야 한다 믿는 황당한 애절함과 못 배워 사무친 한, 돈다발과 일등을 향해 죽자 사자 내달리는 목숨 건 천박한 한판 경주-주의! 패자부활전은 없음, 무한경쟁을 부추기는 돈벌이 대학과 학원가의 알량한 장사치들, 교육이 성직이라며 치살릴 땐 언제고 영업실적처럼 계량화할 수 있다 언죽번죽 주먹질 들이대는 교육 관료들, 이런 한판의 미친 푸닥거리 복판에서 순탄한 승진과 안일에 빠져 자연과 생명의 깊은 울림을 제대로 성찰 못한 반지빠른 일부 교사들이 함께 어울려 추는 망나니 춤판….

 

 교육이 아니라 망나니 춤판
 교사로서 욕스럽고 가슴 아픈 점은, 이런 한국 사회의 모순들이 켜로 쌓인 교육제도 아래, 학생 인권을 늘 억누르는 학교 구조 속에서, 어쩔 수 없이 나 자신도 학생 인권을 내리누르면서, 학생들의 하소연과 좌절·분노를 보며 천연덕스럽게 바로 그들에게 정의와 양심과 인권을 얘기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다 반색할 소식을 마주했으니, 김상곤 경기도 교육감이 지난해 취임하면서 자문위원회를 구성해 적극 추진해온 학생인권조례 제정 사업이다. 이는 이제까지 학생 인권을 무시해온 일부 어른들의 참회 서린 때늦은 반성이다. 그러나 조례 초안을 발표한 뒤 ‘조·중·동’의 논조나 공청회 등에서 나온 의견은 반대가 적잖다. 교육감이 최종 검토해 올린 학생인권조례안은 반대 일색인 경기도의회 성향을 볼 때 통과가 불투명하다. 2월 24일 경기도의회가 연 경기교육포럼에서 부산교대의 한 교수는 조례안이 위헌적·초법적이라고까지 주장했다. 견강부회, 곡학아세가 따로 없다. 세상사 흑·백을 넘어 청·홍·녹·황으로 볼 것도 많지만 인권 존중, 자유, 평등, 배려, 관용, 복지 등은 반대가 있을 수 없는 시대 양심이며 역사 발전의 결과다. 조례안은 인간의 기본권, 곧 두발과 야간학습 자율권, 체벌 금지 등을 보장하는 내용이다. 그런데 왜 반대하나. 단순하게 답하면 기득권자들이 그들의 패권을 지키기 위해 고집과 횡포를 부리기 때문이다. 여기서 기득권자들이란 돈과 권력과 그 잘난 이름과 지위를 가진 사람들은 물론, 나이를 무기로 조선의 사랑과 일제 철창, 군대 철조망에 갇혀 한 발짝도 내디뎌본 적 없는 사람들이다.
 학생 억압의 역사와 구조 근대 학제를 도입하면서 유교의 엄한 전통과 일본 군국제도의 칼날 아래 교사는 군복을 입고 칼을 차고 학생들을 감시·통제했다. 아직도 등굣길에 학교 교문에 서는 선도부의 전신인 ‘훈육부’가 그것이다. 해방 뒤에도 이승만 정권은 친일파를 들여 일본 군대식 학교 규율을 청산하지 못했고 뒤이은 군사정권들도 마찬가지였다. 게다가 적은 교육재정 투입으로 전교생 1500명에 학급원 40명 정도인 거대학교·과밀학급들을 추스르려니 일사불란한 군대식 통솔을 활용한다. 큰 양계장 살풍경을 보자. 비좁은 철망에 갇혀(거대학교·과밀학급) 서로 뒤엉켜 쪼고, 짓밟고, 눈멀고, 날개가 부러지는 등(학교 폭력) 아수라장이다. 이에 익숙한 주인은 죽은 놈과 다친 놈을 골라내 튀김집으로 보낸다(전학·퇴학). 이반 일리히가 지적한 대로 ‘사회 계급을 낙인찍고 소비자를 양산’하는 구조일 뿐이다.
 학생 인권의 실태 어른들이 제 논 물 대기식 ‘글로벌’을 외치자 엉뚱하게도 학생들이 권리에 눈떴다. 다른 나라는 안 그러는데 왜 우리나라만 이러냐 하면서 불법, 비교육, 금지 사항 일색의 불필요한 규정을 금지옥엽처럼 들이대는 교사들을 비웃는다. ‘머리 반삭, 머리핀, 덧옷, 실내화 색깔, 원색은 안 되고(학교가 수녀원?), 실반지나 종교성 목걸이, 무스, 스프레이…’ 별걸 다 금지하고, 중앙현관 출입 금지, 심지어 사고 난다고 자전거 통학 금지 등….
 여기에 교육과정, 교과목, 교과서 선택권은 사실상 없다. 방과후 학습(보충수업), 강제 야간자율(?) 학습이 여전하다. 온 나라 학생들에게 똑같은 차림표의 음식(교육과정), 똑같은 양(교과서 한권)을 같은 시간(1년) 안에 누구나 다 먹으라고 한다. 못 먹으면 억지로 떠먹이고(보충수업), 심지어 쑤셔넣는다(때려 가르치는 학원들, 과외). 이에 적응 못하면 낙오자, 불량학생, 심지어 정신병자라 한다.
 오늘의 상황은 해나 아렌트가 지적한 ‘악의 평범성’을 닮았다. 자신의 믿음과 행위가 진정 아이를 위해 바르고 교육적인 것인지도 생각 못하고, 평범하게 체계와 효율과 관료적 동기를 갖춰 교육 관료와 학부모, 사회가 요구하는 대로 아이를 가둬 감시하고 닦달한다.
 학교생활 규정의 적법성·정당성 문제 현재의 초중등교육법 시행령의 체벌 허용 조항과 각 학교생활 규정들은 잘라 말해 적법하지 않다. 헌법과 유엔아동권리협약, 청소년보호법, 초중등교육법을 무시하고 임의로 정한 학교생활 규정, 모법을 위반한 초중등교육법 시행령의 체벌 인정 조항은 무효다.
 인간의 기본권적 자유권은 어리다 해 제한할 수 없고(헌법 제37조), 그런 규정도 없다. 오히려 초중등교육법 제18조의 4(2) 학생의 인권보장 조항을 그 시행령 제31조 ⑦항(3)이 부정하고 있다. 덧붙여, 법이란 그 적용을 받을 사람들이 만들어야 정당하다. 그런 면에서 학생 참여와 그들의 실질 의사를 반영하지 못한 학교생활 규정은 당연히 정당성이 없다. <사회>나 <법과 사회> 교과서로 원론을 배운 학생들이 이런 모순을 꼬집어 질문하면 난감하다.
 사회 일반 인식의 문제점 인권은 보편이다. 청소년을 미성숙하다고 이른바 ‘에비’ 의식으로 묶어두려는 관점은 이미 한물간 교육 철학이다. 배려와 존중, 차이를 무시하고 ‘원색은 요란해서 공부를 방해하고, 머리카락은 짧아야 단정하다’ 는 등 일방 기준을 강요하는 억지 논리에 학생들이 뒤집어진다. 민법의 미성년자 규정은 ‘권리만을 얻거나 의무를 면하는 행위에 한’하며(4) 형법에서도 14살 미만자는 처벌할 수 없다. 다시 말해 미성년자란 청소년을 보호하기 위한 개념이다. 아이들의 미성숙함보다 어른들의 미성숙한 인권 의식이 문제의 본질이다. 요새 군대와 교도소에도 체벌이 없다. 학생 통제를 빌미로 불가피함을 주장하는데 거대학교와 대집단 동원식 학교 운영으로 인한 문제를 학생에게만 떠넘긴다. 잘라 말한다. 체벌은 야만이고 ‘사랑의 매’는 없다. 매를 드는 교사는 화를 잘 다스릴 줄 모르거나, ‘윗분’이나 주변의 눈치에 지나치게 반응하거나, 결과지상주의에 기울어 매를 애정이라 억지 자리매김하고 자기만족에 빠지는 사람이다. 간장종지 소갈머리와 하늘을 찌르나 뒤틀린 소신, 고뇌 없는 무능을 반성할 일이다. 어떤 교사의 신념은 무섭다. “내가 공부 안 할 때 날 때려 가르친 선생님, 고맙다. 나도 때려서 가르치는데 맞은 아이들 가끔 찾아오더라.” 되묻는다. 당신께 얻어맞아 평생 상처 안고 살아가는, 혹 다수일지 모르는, 찾아오지 않는 학생들도 생각해보셨는지. 교복은 제국주의 유물이다. 적당한 수준의 노동자 교육, 복종과 통제, 전시 긴급 동원을 위해 학교 체제를 만들고 군복을 입혔다. 위화감을 말하는데, 값비싼 전자기기나 해외여행, 고액 과외가 더하다. 한발 양보해 교복을 정하더라도 입고 안 입고는 개인에게 맡겨야 한다. 경쟁을 교육 수단으로 보는 의식 역시 낡은 유물이다. 교육은 나와 남의 경쟁이 아니라 내 어제와 오늘을 견줌이다. 핀란드는 학생을 경쟁시키지 않는다. 경쟁을 없애니 경쟁력이 커졌다(국가경쟁력 세계 1위).

 이것이 헌법 정신이자 법치
 인권조례에 좌우 이념을 들씌우지 말자. 억압 일색의 생활 규정 늪에서 허우적대는 아이들을 구해내야 한다. 오늘 우리가 머뭇거리는 사이 군대나 교도소보다 못한 학교를 비관해 누군가는 학교를 뛰쳐나가고, 누군가는 원망에 가득 차 세상을 등지고 있다. 그 어떤 가치가 이들의 목숨보다 더하단 말인가?

글•심우근
경기 의정부 효자고 교사. 국가주의와 집단 획일 교육제도가 버거운 역사 교사로, 구조와 규정에 힘겨운 학생들을 연민해 학생부장을 자청했다.

<각주>
(1) 2005년 1월 6일 여중생, 2003년 12월 17일 고2 학생, 2007년 8월 28일 고등학생 유서.
(2) 제18조의 4 (학생의 인권 보장) 학교의 장은 헌법과 국제인권조약에 명시된 학생의 인권을 보장하여야 한다.
(3) 제31조 (학생의 징계 등) ⑦ 학교의 장은… 교육상 불가피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학생에게 신체적 고통을 가하지 아니하는 훈육·훈계 등의 방법으로 행하여야 한다.
(4) 민법 제5조 (미성년자의 능력) ① 미성년자가 법률행위를 함에는 법정 대리인의 동의를 얻어야 한다. 그러나 권리만을 얻거나 의무만을 면하는 행위는 그러하지 아니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