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크 랑시에르, “민주주의에 반(反)하는 대의제를 목도하다”

2017-03-31     에릭 에쉬만 | 인터뷰어

철학자 자크 랑시에르는 기이하게 전개되고 있는 프랑스 대선 캠페인에 그리 놀라지 않는다. 그는 모든 권력을 직업 정치인들에게 일임하는 프랑스 시스템이 (기존 방식으로부터의) ‘완전한 단절’을 표방하는 후보자들을 기계적으로 찍어낼 뿐이라고 생각한다. 언론인 에릭 에쉬만이 랑시에르와 인터뷰를 가졌다(<르몽드>의 자매지 <옵세르바퇴르> 3월20일). 


-프랑수아 올랑드 대통령의 불출마 결정부터 프랑수아 피용의 법적 문제까지, 현 프랑스 대선 캠페인은 극적인 전개의 연속이었다. 그리고 당신은 이런 현상을 독특한 시각으로 관찰해왔다. 오랫동안 대의민주주의의 문제점을 공격하며, 대의제로는 진정한 민주주의를 일궈낼 수 없다고 주장해왔다. 현재의 정치 상황을 어떻게 분석하는가?

“대의민주주의라는 용어는 그 자체로 애매모호한 성격 외에도 국민들이 대표자를 선출함으로써 자신들을 표현한다는 ‘잘못된’ 생각을 의미한다. 그러나 국민은 정치과정에 선행해 존재하는 게 아니다. 오히려 이런 과정의 결과물이다. 어떤 정치 시스템을 갖추느냐에 따라서 그에 따른 국민이 만들어지는 것이지 그 반대가 아니다. 또한, 대의제는 사회의 일반적 이해관계를 대표하는 사회계층이 존재한다는 것을 전제로 한다. 미국 건국의 아버지들 관점에서는 계몽된 지주들이 그런 계층이었다. 대의제의 결과로 국민들은 자신들의 합법적 대표자들이 이런 계층 출신인 것으로 여기며, 투표를 통해 이를 정기적으로 재확인한다. 대의제는 전문가들을 위한 제도로 점차 바뀌어 갔고, 이들은 자신들과 똑같은 사람들을 만들어냈다. 하지만 그렇게 함으로써 이 제도는 자체 역설을 생성하게 됐다. 국민들은 전문가들이 자신들을 대표하기 보다는, 그들이 자신들을 정말 그대로 구현하는 화신이 돼주기를 갈망하는 신화적 사고를 가지게 된 것이다. 이는 선거 때마다 재현되는, 점차 저질이 돼가는 한 편의 연극과 같다.”

-매우 암울한 의견이다. 대의제는 본질적으로 편향된 제도인가?

“본래 대의제는 과두제이지 민주제가 아니다. 프랑스에서는 계몽된 지주들이 재산의 이해관계만을 대표하면서 이런 과두제가 정당성을 잃었다. 이는 1848년과 1871년의 ‘공화주의’ 집회에서도 드러났는데, 노동자들과 혁명파들에 격렬한 분노를 표출하는 왕정주의자들이 이 집회를 가득 메웠다. 과두제 집권층은 제도 자체만을 대표하는 정치인 계층으로 점차 변모해 갔다. 프랑스 제 5공화국의 다수결에 의한 대통령제는 이런 과정을 더욱 가속화해왔다. 현재 두 개의 집단이 번갈아서 모든 권력을 지배하고 집권한다. 이는 전문화를 더욱 강화시킨다. 동시에 사람들은 대통령이라는 인물이 이런 전문화에 의해 배신당하는 국민의 화신이 될 것으로 기대한다.”

-그렇다면, 왜 모든 이들이 ‘반(反) 체제’를 표방하는 것인가?

“지금의 체제는 자체적으로 재생되는 과정에서 모순적인 이중성을 초래한다. 실제로 다수당이 고작 유권자의 20%만을 대표함으로써 진정한 의미의 다수 국민을 대표하지 못하고 있다. 그러나 그 밖의 다른 정당들도 자신들이 집권할 차례가 오면 점차 서로 닮아간다. 따라서 국민들이 모욕당하고 배신당하는 일이 또 다시 반복되는 것이다. 국민을 직접적으로 대표한다고 하는 대통령제가 제도 자체의 내부 긴장을 가중시키는 셈이다. 따라서 후보자들이 “나는 대변되지 못하는 국민들의 후보다!”라고 공언할 수 있는 여지를 제공한다. 르펜은 상당수의 고통 받는 사람들을 대변하는 입지를, 마크롱은 정당 간의 양극화에 반대하는 국민 세력을 대변하는 입지를 다졌다. 이 둘이 중첩되는 경우가 멜랑숑인데 그는 ‘충직한’ 좌파와 고통 받는 국민 모두를 대변하는 그만의 영역을 구축했다. 과거 특정시기에는 외부에서 체제를 압박하는 조직화된 집단세력을 노동자들의 정당이 대표하던 때가 있었다. 오늘날 ‘실질적 국민’은 체제 자체에 의해 만들어진다. 우리는 누가 서로 다른 역할을 맡을 것인가를 더 이상 알지 못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억만장자들에 의해 모욕당한 사람들을 또 다른 억만장자가 대표할 수 있는 것이 지금 사회다.”

-좌파나 우파 모두 집단적 의지를 대표하는 리더들이 정치의 화신이 돼야 한다고 말한다.

“화신은 정치적 개념이 아니다. 이는 종교적 개념으로서 종교의 영역에 남겨 둬야 한다. 오늘날의 정치에서 이 단어가 끈질기게 거론되는 것은 실제의, 더 진정한 의미의 국민이란 개념과 관련 있기 때문이다. 극우파가 이용하는 것이 바로 그 점이다. ‘좌파 포퓰리즘’은 대안 모델을 제시함으로써 국민을 극우파들에게서 떼어낼 수 있다고 주장하는데, 우고 차베스의 방식으로 국민들의 화신이 돼 그에 따라 국민을 구성하는 리더의 모델이 그것이다. 그러나 화신이라는 개념은 민주주의와는 엄밀히 대치된다.”

-그렇지만 조레스, 드골, 그리고 루스벨트처럼 훌륭한 정치인들도 있지 않았는가?

“일반적인 게임의 법칙이 깨지고 무언가 기존과는 다른 것을 만들어낼 필요가 있을 때 이례적인 인물들이 출현한다. 그때 당시 상황 자체로도 예외적이었던 조건에서 사람들이 기대하던 수준을 뛰어넘는 능력을 발휘했던 인물들이 있었다. 1940년 드골은 준장이었던 자신의 지위를 넘어서는 전례 없는 결정을 내렸다. 그러나 프랑스국민연합(RPF, 전후 시기 중도우파 정당)의 수장으로서는 그 누구와도 별반 다르지 않은, 사람 조종에 능한 정치인이었다. 모두의 삶을 악화시키는데 크게 공헌한 제 5공화국 헌법을 출범시킨 사람도 드골이다. 오늘날 좌파들이 그를 존경해 마지않는 것을 보면 그저 웃음이 나온다.”

-그렇다면 대표자들 없이 집단생활을 조직할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인가? 2005년 저서 <민주주의에 대한 증오(Hatred of Democracy)>에서 주장했던 추첨 방식으로 할 수 있는가?

“우리는 위임과 대표를 구분할 필요가 있다. 민주주의 사회에서 몇몇 사람들이 다른 이들을 대신해 특정활동들을 수행하는 개념은 충분히 논리적이다. 그러나 위임받은 자는 자신의 역할을 단 한 번 수행할 뿐이지만, 대표들은 그렇지 않다. 한때 추첨제는 모두의 능력이 동등하다는 원칙에 입각해 위임받을 사람들을 지정하는 평범한 민주적 방법이었다. 나는 점차 전문화돼가고 있는 민주주의의 방향을 되돌리기 위해 이 방식의 부활을 제안했었다. 그러나 이는 그리 간단한 사안이 아니다. 이런 방식들은 광범위한 민중운동에서 다룰 때만 관심을 받는다. 제도 밖에서 생겨나는 이런 압력, 즉 최근의 ‘광장운동’에서 볼 수 있듯이 국가의 제도들을 전반적으로 개혁하려는 압력 없이 민주주의는 존재할 수 없다. 국가구조 및 국가 어젠다와는 별개인 제도들이 이와 같은 평등주의노력들을 지속시킬 수 있다는 것을 전제로 하고 있는 것이 민주주의다. 

-대선 캠페인으로 인해 기본소득과 같이 새로운 주제가 부상할 것으로 보인다. 어떻게 생각하든 그 자체로 좋은 소식이지 않은가?

“일자리는 없애면서 고용률을 회복하려 했던 사르코지와 비교하면 상황이 나아지긴 했다. 그러나 기본소득은 육체노동의 소멸, 산업 자동화의 일반화를 천명하는 미덥지 못한 분석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 여기에는 이런 요구에 혁명적 성격을 덧입히는 비물질 노동자의 개념이 접목돼 있다. 하지만 육체노동은 사라지지 않았다. 단지 비용을 더 절감하고 노동자의 속박이 더 쉬운 지역으로 옮겨갔을 뿐이다. 따라서 프랑스 시골 지역에서 진행되고 있는 산업공동화를 만회하고자 설계된 기본소득은 RMI와 RSA(프랑스 실업자들과 저임금 계층을 위한 수당이지만 매월 몇백 유로에 불과하고 여러 가지 조건들을 전제로 함)의 연장선상에 있다. 그러나 일부에서 주장하듯 해방적 수단은 아니다. 그리고 그 보편성은 매우 제한적이다. 비물질 노동에 필요한 물질을 채굴하는 콩고 광산의 어린이들이나 방글라데시 공장의 노동자들에게 그런 소득을 보장한다고 상상해봐라! 상황이 달라질 것이다.”

-당신은 특별한 경우에만 투표를 하는 것으로 안다. 2차 결선 투표 전날 밤, 만약 여론조사 결과 마린 르펜의 지지율이 48%라면, 그것이 마크롱이나 피용에 표를 주는 것이 될지언정 르펜의 당선을 막기 위해 투표할 의사는 없는가?

“그것은 5분이면 결정할 수 있는 딜레마다. 물론 르펜이 이기면 좋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여기서 우리는 제대로 된 결론을 내려야 한다. 이에 대한 해결책은 마린 르펜과 같은 사람들을 배출하는 제도와 싸우는 것이지, 제일로 부패한 정치인에 투표함으로서 민주주의를 수호한다고 생각하면 안 된다. 나는 아직도 2002년 대선 당시 ‘파시스트에 투표할 바에는 차라리 사기꾼에 투표하라’라는 슬로건을 기억한다(자크 시라크와 장 마리 르펜이 맞붙은 2차 결선). 파시스트를 피하려고 사기꾼을 선택하는 사람은 그 둘을 모두 얻어 마땅하다. 그리고 그 둘 모두를 맞이할 준비를 해야 할 것이다.”  

인터뷰이·자크 랑시에르 Jacques Ranciere
1940년 알제리 출생으로 파리8대학에서 1969~2000년까지 철학 교수로 재직했고, 현재 이 대학의 명예교수로 재직 중이다. 루이 알튀세의 제자로서 1965년 <자본론 독해(Lire le Capital)> 작업에 참여해서 명성을 얻었으나 1968년 프랑스 학생운동을 기점으로 알튀세와 결별했다. 결별 이유는 마르크시즘의 엄격한 과학성과 결정론적 사상에 충실했던 알튀세와 실천 중심의 마오이즘에 경도돼 있던 랑시에르의 견해가 달랐기 때문이었다. 특히 알튀세의 단정적 언어해석 원칙에 반감을 갖고 있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이후 알튀세와는 다른 노선을 추구했고, 1974년 <알튀세로부터의 교훈(La leçon d’Althusser)>을 출간하면서 알튀세의 사상을 비판했다. 1970년대 말 이후에는 노동해방 연구에 몰두하면서 <프롤레타리아의 밤>, <노동자의 꿈에 대한 보고서>를 집필했다. 랑시에르는 1980년대 중반부터 과거와는 다른 인물들을 연구하기 시작했는데 그 결과물이 <무지한 스승(le Maître Ignorant)>이었고, 이 저서를 발표하면서 명성을 얻음과 동시에 마르크시즘과의 결별을 공인받게 됐다. 그는 다수의 책을 집필한 영화애호가이기도 해서, 미학과 정치의 관계를 분석한 저술활동도 활발하게 펼치고 있다. 

번역·오정은
한국외국어대 통번역대학원 졸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