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짜 뉴스’ 사태의 진범은 누구인가?
2017-03-31 예브게니 모로조프 | 언론인
영어로 가짜 뉴스를 의미하는 ‘페이크 뉴스’가 민주주의를 침몰시키고 있다. 브렉시트, 미국 대선, 이탈리아 국민투표에 실망한 2016년 패자 진영에서 최근 내린 결론이다. 그럴싸한 추론이다. 디지털 자본주의와도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는 이 침몰 현상의 실체를 밝힐 수만 있다면 말이다.
성실하고, 정직하고, 합리적인 후보들이 2016년 선거에서 패배했다. 보아하니 가짜 뉴스, 동영상, ‘인터넷 밈’(짤방)이 만들어낸 위험 현상 때문인 듯하다.(1) 이들에게 문제는 자본주의가 위험수역을 항해한다는 사실이 아니다. 어차피 상류사회에서는 자본주의의 침몰 가능성을 논하지 않을 테니 말이다. 더 큰 문제는, 오히려 수평선 너머의 거대 빙산에 대한 거짓 정보가 너무 많다는 것이다.
이 때문에 잘못된 해법들이 속속 등장하고 있다. 스페인 국민당은 인터넷 밈 금지안을 제안했고, 이탈리아 반독점기관은 정보의 진실성을 판별할 전문위원회를 창설할 것을 제안했다. 독일 정부는 트위터, 페이스북 등이 가짜 뉴스 확산을 방치하면 벌금을 부과하는 기관을 창설하자는 안을 냈다. 최근 이탈리아 볼로냐에 있는 넵투누스(바다의 신) 누드 동상 사진을 외설적이라는 이유로 삭제해버린 바로 그 페이스북 말이다. 여기서 독재국가들이 얻을 수 있는 한 가지 팁이 있다. 은밀히 인터넷 검열을 하고 싶다면, 맘에 안 드는 글을 ‘허위 정보’로 분류해버리면 된다. 서구국가에서라면 아무도 불평하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가짜 뉴스를 민주주의 몰락의 원인으로 봐야 할까? 아니면 훨씬 오래전부터 진행돼온 심각한 구조적 불안의 결과로 봐야 할까? 위기가 실재한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모두가 동의한다. 하지만 이 위기의 근원이 가짜 뉴스인지, 아니면 완전히 다른 것인지는 성숙한 민주주의 사회라면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하는 문제다.
하지만 우리 지도층들은 타조처럼 땅 속에 머리를 파묻은 채 현실을 외면하고 있다. 그들은 구조적 문제가 있다는 사실을 부정한 채, “모든 문제는 가짜 뉴스 탓”이라며 피상적이고 잘못된 해석만 내놓고 있다. 집권당, 싱크탱크, 언론 등 주류 기관들이 가짜 뉴스에만 문제의 초점을 맞춰버리는 행태만 봐도 이들의 세계관이 얼마나 편협한지 알 수 있다.(2)
진짜 원인을 부인하는 두 가지 형태
오늘날 서구사회가 직면한 진짜 위기는 외부사회에 등장한 비자유적 민주주의가 아니라 내부사회에 잔존하는 미숙한 민주주의다. 우리 지도층들이 자주 드러내는 이러한 미숙함은 두 가지 형태의 부인으로 나타난다. 첫째, 현재의 문제들을 초래한 경제적 원인에 대한 부인이다. 둘째, 전문가들의 부패에 대한 부인이다. 첫 번째 유형은 브렉시트나 트럼프 당선 같은 현상을 우선적으로 인종차별이나 유권자의 무지함 같은 문화적 요인 때문이라고 탓할 때 나타난다. 두 번째 유형은 많은 사람들이 기존의 유력기관들을 잘 몰라서가 아니라 반대로 너무 잘 알기 때문에 심각한 불만을 가진다는 사실을 부인한다.
이러한 부인 행위들 때문에 눈이 멀어버린 정책결정권자들은 일전에 이미 국민의 반감을 샀던 정책들을 더욱 강화하는 방향으로 나아간다. 전문가를 늘리고, 중앙집권화를 강화하고, 규제를 강화하는 방향으로 말이다. 그러나 정치경제학적 사고력이 부족하다 보니, 결국 규제하지 말아야 할 것을 규제해버리는 상황까지 가게 된다. 가짜 뉴스에 대한 ‘도덕적 공황(사회를 위협한다고 간주되는 문제에 대해 다수의 사람이 표출하는 강렬한 감정)’을 보면, 이 부인 행위들이 어떻게 민주주의를 영원히 미성숙하게 만들었는지 알 수 있다. 가짜 뉴스 사태의 원인이 경제적 요인이라는 사실을 부인함으로써 러시아를 완벽한 희생양으로 만든 것이다. 지속 불가능한 디지털 자본주의 경제모델을 탓하는 대신 말이다.
하지만 러시아든 아니든, 외부간섭만으로 이 정도 규모의 바이럴 뉴스를 생성할 수 없다는 것은 너무나도 명백한 사실이지 않은가? 가짜 뉴스를 살포하는 비상식적인 활동은 이미 오래전부터 있어왔다. 음모론을 신봉했던 정치인, 린든 라루쉬를 기억하는가?(3) 당시 그들이 황당한 가설들을 퍼뜨리지 못했던 이유는 러시아의 정치·재정적 지원이 없었기 때문이 아니라, 오늘날처럼 온라인 광고라는 막대한 수입원을 갖춘 막강한 디지털 인프라가 없었기 때문이다.
문제는 가짜 뉴스 자체가 아니라, 뉴스가 너무 쉽고 빠르게 확산된다는 것이다. 현대는 이것이 일상이 돼버렸다. 오늘날의 디지털 자본주의 덕분에 거짓이지만 클릭하고 싶어지는 정보를 생성하고 유통하면 엄청난 수익을 얻을 수 있다. 구글과 페이스북만 봐도 알 수 있다. 가짜 뉴스 사태를 이해하고 싶다면, 먼저 지도층들이 앞서 말한 부인 행위들을 극복해야 할 것이며, 커뮤니케이션 정치경제학도 손봐야 할 것이다. 지난 30년간 중도좌파와 중도우파 정당들이 실리콘밸리의 천재들을 찬양하고, 통신사업을 사유화하고, 반독점법 시행에 느슨한 태도를 취했다는 사실은 아무도 인정하고 싶어 하지 않는다.
두 번째 유형의 부인 행위는 전문가들의 부패에 대해 눈이 멀게 만든다. 그 사이 씽크탱크는 외국 정부로부터 아무 거리낌 없이 재정지원을 받는다. 에너지 공급업체는 의심스러운 기후온난화 연구 프로젝트를 지원한다. 영국 여왕은 공개석상에서 경제학자들이 경제위기를 예측하지 못했다고 비난한다(알다시피 그녀는 고질적인 포퓰리스트다). 언론은 PR에이전시와 정치홍보전문가들이 말하는 대로 움직인다. EU집행위원회 간부들은 월스트리트에서 일하기 위해 공직을 떠난다. 이러니 국민들이 자칭 ‘전문가’들에 대해 회의적이라고 해서 누가 이들을 나무랄 수 있겠는가?
언론은 가짜 뉴스를 비판할 자격이 있는가
최악인 것은, 언론이 가짜 뉴스를 비판하는 것이다. 언론 자신이 온라인 매체 운영의 경제난 때문에 의심스러운 뉴스를 꾸준히 생성하는 장본인이면서 말이다. 요즘 꾸준히 수익을 내는 몇 안 되는 신문사, <워싱턴포스트>만 봐도 그렇다. 수익을 얻었을지언정 신뢰는 잃을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4) <워싱턴포스트>는 신중치 못하게 한 미심쩍은 단체가 발표한 보고서만 믿고 러시아 프로파간다 작업에 동원된 사이트들이 있다고 보도했다. 그리고 최근에는 러시아 해커단체가 미국 버몬트주 전력망을 침투했다고 보도했다. 실제 사이버공격은 일어나지 않았는데도, <워싱턴포스트>는 팩트 체크를 위해 전력회사에 확인하는 수고조차 하지 않았다. 온라인 광고의 지배를 받는 이 회사는 아무래도 ‘사람들의 이목을 가장 많이 끄는 뉴스가 곧 진실이다’라는 자신만의 진실론을 만들어낸 듯하다.
기자들이 언론인으로서의 책임은 저버린 채, 가짜 뉴스를 비판하는 것을 보면, 전문가에 대한 신뢰는 더욱더 떨어진다. 민주주의를 집어삼킨 것이 가짜 뉴스든 아니든, 한 가지 사실만은 확실하다. 민주주의를 침몰시킨 것은 지도층의 위선이다. 두 가지 부인 행위에 갇혀 옴짝달싹 못하게 된 지도층들은 가짜 뉴스 위기를 해결할 혁신적인 해법을 찾기 전까지 절대 멈추지 않을 것이다. 기후변화에 대한 해결책을 찾을 때처럼 말이다. 가짜 뉴스와 기후변화 사태에는 공통점이 하나 있다. 기후변화가 화석연료 중심적 자본주의의 필연적 결과인 것처럼, 가짜 뉴스는 디지털 자본주의의 산물이다.
머지않아 천재적인 정책기획자가 나타나 현재 거론되는 정책들의 권위적 성향을 끊어내고, 시장의 독창성이 모든 문제를 해결하도록 그 흐름에 모든 것을 맡길 것이다. 못할 것도 없다. 예를 들어서 언론기관들이 정부가 발행하는 가짜 뉴스 보도권을 거래할 수 있는 ‘탈진실(Post-vérité)’ 보도권 거래 제도를 만드는 것이다. 말도 안 되는 이 비효율적인 제도가 사회혁신대회라도 나간다면 분명 상을 탈 것이다.
가짜 뉴스 문제를 해결하려면 디지털 자본주의의 본질이 무엇인지 처음부터 다시 생각해봐야 한다. 이것만이 잘못된 판단도 피하고, 지도층에 과도한 권력을 부여하는 상황도 막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다. 그러려면 우리가 생활하고, 일하고, 소통하는 방식에서 온라인 광고가 차지하는 비중을 줄여야 한다. 그리고 온라인 광고를 보면 ‘클릭하고 공유’하고 싶은 광적인 강박증을 자제해야 한다. 또한, 부패에 취약한 전문가나 기업보다는 시민에게 더 많은 의사결정권이 주어져야 한다.
다시 말해, 페이스북과 구글이 현재와 같은 영향력을 행사하지 않는 세상, 모든 문제를 기술로 해결할 수 있다는 ‘기술적 솔루셔니즘’에 연연해하지 않는 세상을 만들어야 한다. 성숙한 민주주의만이 해결할 수 있는 만만치 않은 도전이다. 안타깝게도 오늘날의 민주주의는 온갖 형태의 부인에 눈이 멀어, 자신을 제외한 다른 모든 이를 탓하고, 실리콘밸리에 더 많은 문제들을 떠넘기고 있다.
글·예브게니 모로조프 Evgeny Morozov
벨라루스 출신 작가이자 저널리스트로 기술이 사회와 정치에 미치는 영향을 연구한다. <To save everything, click here. Technologie, solutionism, and the urge to fix problems that don’t exist>(Allen Lane, London, 2013)의 저자
번역·이보미
한국외국어대 통번역대학원 졸업
(1) ‘인터넷 밈’은 인터넷에 대량으로 만들어지는 이미지, 영상, 텍스트를 가리킨다.(위키피디아)
(2) 프레데리크 로르동, ‘Politique post-vérité ou journalisme post-politique?’, 르디플로 프랑스어판 블로그, 2016년 11월 22일.
(3)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프랑스어판, 1987년 5월호의 ‘L’art de la désinformation’와 2015년 5월호의 'Vous avez dit “complot”?’ 참고.
(4) 피에르 랭베르, ‘Les chauffards du bobard’,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프랑스어판 2017년 1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