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코포니 아프리카 작가의 딜레마
2017-03-31 부바카르 보리스 디오프 | 작가
“프랑스어의 사용을 권장하고 문화적·언어적 다양성을 장려할 것.”
이는 프랑코포니국제기구(OIF)의 가장 중요한 사명이다. 세네갈 작가 부바카르 보리스디오프는 주로 프랑스어로 작품을 집필하지만, 2003년 이후로는 월로프어로 작품 활동을 해왔다. 그는 아프리카 작가들을 향해 “프랑스어 사용운동에 관해 진지하게 고민하고, 아프리카 대륙의 언어를 수호하자”고 호소한다.
나는 1960년 세네갈이 독립한 직후, 소위 ‘아프리카 문학’이라는 것을 학교에서 배운 첫 세대에 속한다. 아르튀르 랭보와 오노레 드 발자크에서 레오폴 세다르 셍고르(1)와 몽고 베티(카메룬 출신의 소설가)로 넘어가면서, 우리는 먹잇감을 잡으려 하다가 그 그림자마저 놔준 듯한 느낌이 들었다. 비록 새로운 작가들 중 일부를 특히 더 아끼기는 했지만, 이 새로운 아프리카 작가군 모두가 저마다의 방식으로 아프리카의 정체성을 만들어냈다. 당시에는 아프리카의 국경이 지리적이라기보다는 정신적인 것에 더 가까웠기 때문에, 아프리카 대륙 출신이 아니더라도 누구나 아프리카의 온전한 자녀가 될 수 있었다.
프랑스어로 세네갈인의 마음을 표현한다는 것
예컨대 나는 내가 속한 학급의 그 누구도, 에메 세제르의 아프리카 성(性)에 관해 질문하는 것을 들어본 적이 없다. 이는 아마 프란츠 파농이 알제리인이 맞느냐는 질문만큼이나 몰상식한 질문이 될 것이다.(2) 에메 세제르와 프란츠 파농 모두, 특히 에메 세제르는 수업 내내 곳곳에서 등장했으니 우리에게는 아주 행복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반면 영어권, 포르투갈어권 작가나 북아프리카 작가들은 거의 찾아볼 수 없었다. 물론 페이지를 넘기다보면 모하메드 딥이나 카텝 야신, 아모스 투투올라, 치누아 아체베를 마주칠 수 있었지만, 그저 일종의 덤처럼 등장하는 것이 우려스러웠다. 셍고르의 나라 세네갈에서, 우리는 이미 그가 일생 동안 그리오(아프리카 전통의 구전역사가)를 자처했던 프랑코포니 문학의 한복판에 있었다.
이바단(나이지리아)에서나 캄팔라(우간다)의 마케레레대학에서나, 우리 세대의 나이지리아 청년들, 또는 우간다 청년들도 이런 혼란, 부분과 전체 사이의 필연적 혼란을 감수해야 했다. 1992년 제인 윌킨슨은 그 유명한 인터뷰 모음집, <아프리카 작가들과의 한담(Talking with African Writers)>(3)을 선보였다. 그러나 윌킨슨이 기나긴 인터뷰를 할애했던 인물들은 치치 단가렘바, 윌레 소잉카, 이솝 파텔, 먼게인 월리 세로트 등 영어권 작가들이었다. 다시 말해, 독립의 태양이 이제 막 떴는데 그 햇살은 이미 서로 갈라져버렸던 것이다. 훗날 셰이크 하미두 카네가 아프리카에 등장한 ‘서양의 첫 아침(아프리카와 서구권의 만남을 말함-역주)’이라고 불렀던 사건이야말로, 최초의 충격이자 이를 빼놓고서는 무엇 하나 고려할 가치가 없는 주요사건이 됐다.
프랑스어권 지역에서 1926년 세네갈 작가 바카리 디알로는 <올바름의 힘(Force bonté)>이라는 책을 출간했는데, 이 책이야말로 지난 수십 년간 문학적 영역을 명확하게 구분해준 최초의 경계석이 됐다.(4) 1956년 파리, 이후 1959년 로마에서 열린 ‘흑인 예술가 및 작가 대회’는 두 개의 중요한 지표 역할을 했으며, 그로부터 10년 전에 전문지인 동시에 출판사인 <아프리카의 존재감(Présence africaine)>이 탄생했다. 이 유산은 결국 후대에도 어느 정도 명맥을 이어갔다. 세네갈이나 카메룬에서 <아프리카의 존재감>은 아프리카 작가들, 특히 프랑스에서 활동하는 작가들의 소설 및 에세이 출간 소식을 빠짐없이 보고한다. 그리고 르노도나 페미나 등의 문학상에서 아프리카인 수상자가 나올지를 점치고 학문적 논의를 이어가며 엄중한 질문을 던진다. 아마두 쿠루마(1927~2003. 말랑케 족 출신의 코트디부아르 작가. 르노도상, 장지오노 대상 등 여러 문학상을 수상했다-역주)의 경우 무척이나 성공적이었다. 그가 심사숙고해 이뤄낸 프랑스어와 말랑케어와의 ‘혼합’은 우리 문학의 미래가 될 수 있지 않을까? 멕시코 작가 후안 룰포의 <페드로 파라모>나, 콩고 작가 소니 라부 탄시의 <로사 로페즈의 일곱 가지 고독>에서 보이는 ‘마술적 리얼리즘’에도 같은 질문을 던질 수 있지 않을까?
활동 중인 작가들도 예외가 아니다. 우리는 이들이 온갖 연단과 방송용 무대에서 대단히 진지하거나 유쾌한, 그리고 언제나 결연한 태도로 아프리카를 재건하려는 것을 보게 된다. 그렇지만 이는 그저 하나의 수사법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후기식민주의’ 시대에, 아프리카의 미래에 대한 불안감은 그 어느 때보다도 분열된 이 세상에 더는 적합하지가 않다. 또한 일부 작가들은, 이유는 알 수 없지만 ‘정체성’이라는 단어만 나오면 사격자세를 취하고는 한다. 그런데 이런 작가들이야말로, 본인의 취향에 비해 지나치게 현학적이고 핏기 없는 프랑스어로 과한 양념을 치고 독자를 웃기며 으스대는 이들이다.
물론 이런 류의 문체적인 곡예는 필요 없겠지만, 사실 아이티 시인 레옹 랄로가 말했듯이 “프랑스의 단어들로 세네갈 출신의 마음을 말하기”란 너무도 어렵다. 작가라면 누구나 단어와 파란 많은 관계를 유지하긴 하겠지만, 아프리카 작가에게는 자신이 쓰는 문어(文語)가 그 자체로 문제를 제기한다. 나는 지난 몇 년 간 이런 질문을 받았다. “당신은 왜 프랑스어로 작품을 쓰는가?” 이후 소설 <두미 골로>가 출간되고 나자 “당신은 왜 월로프어로 작품을 쓰는가?”라는 질문으로 바뀌었다. 이런 류의 질문은 책을 읽지 않고도 누구나 던질 수 있는 질문이며, 실패로 끝난 인간적 교류의 모든 좌절감을 문학적 구상이라는 대척지로 밀어내버린다.
물론 언어적 신경증은 프랑스어 사용자만의 특성일지 모른다. 예를 들어 영어권 아프리카 국가인 짐바브웨나 케냐에서는 주어를 생략한다. 이는 과거 영국의 식민지 시절, 영어와 모국어가 모호하게 공존하던 시기의 영향을 받은 것이다. 반면 프랑스어권의 아프리카 지식인들은 자신들의 모국어가 프랑스어보다 못할 것이 없다고 생각하기를 망설여왔다. 이런 태도를, 그저 ‘자기경멸’이라고 명명하는 것은 지나친 속단이며 부당하다. 프랑스의 신(新)식민주의에 호의적이지 않은 작가들조차 아프리카 언어를 자제하는 태도를 보이는데, 이는 아프리카 언어에 실린 부족의 영향력에 대한 우려에서 비롯된 듯하다.
파리에 사는 소설가 친구 한 명은 “나는 현실주의적인 현상(現狀)을 선호한다”고 했는데, 그는 그 이유에 대해, 지극히 사소한 언어적 논쟁조차 자신의 모국 카메룬을 대혼란으로 몰고 갈 수 있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그는 모국어 실력이 점점 떨어질 뿐 아니라, 심지어 모국어를 글로 쓰는 법은 전혀 모른다고 털어놓았다. 서양에서 태어나 성장한 수많은 아프리카 작가가 이런 상황에 처해 있다. 따라서 그들이 프랑스어를 명백히 선호하는 것은 전혀 불명예스러운 일이 아니다. 어쩌면, 자신이 잘 알지도 못하는 아프리카 언어들을 비방하지만 않으면 될 일일지도 모르겠다.
프랑스어로 책을 쓰면
잘 팔릴 것이다?
한편, 역사적 혼란을 경험한 이들은 아마 이렇게 빈정댈지도 모른다. 수수어, 세누포어, 퐁어로 된 소설이 정말 제대로 된 소설일까? 그렇다 해도 누가 그런 소설을 읽을까? 어디서든 등장하는 이 수익성 논쟁은 상식적인 차원으로 보인다. 하지만 실상, 상업적으로 좋은 성적을 거두려는 것이 목적이라 해도, 그 목적을 위해 프랑스어로 작품을 쓰는 것은 비상식적이다. 문학을 논하는 한, 공급자에게 소설을 주문한 후 물건을 받아 돈을 내는 ‘대중’이라는 이름의 상인은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다. 그런 논리라면, 장폴 사르트르와 알베르 카뮈 두 작가의 작품을 전부 다 합쳐도 그보다 훨씬 더 많은 책이 팔렸을 기 데카르(20세기 후반의 대표적인 프랑스 베스트셀러 작가-역주)야말로 20세기 프랑스의 가장 위대한 작가가 아니겠는가. 어떠한 흔적을 남겼는가가 관건이 되는 시점부터, 대중을 만들어내는 것은 문학작품의 텍스트지, 대중이 텍스트를 결정하는 것이 아니다. 스탕달은 1830년에 출간된 자신의 소설 <적과 흑>의 집필을 복권 구입에 비유하면서 다음과 같이 단언했다. “만일 이 책이 1930년에도 읽힌다면, 나는 복권에 당첨된 것이나 다름이 없다.”
덧붙이자면, 스탕달의 시대에 비해 2017년에는 여느 텍스트가 무관심 속으로 사라질 가능성이 훨씬 더 적다. 어느 언어든 번역될 수 있으므로, 10억 명의 중국인을 위해 쓰든, 1천만 명의 그리스인을 위해 쓰든, 1천4백만 명의 세네갈인을 위해 쓰든 상관없다는 얘기다. 여기서 유일한 위험은, 영어나 스페인어처럼 세계적으로 활용도가 높은 언어에만 집중될 위험이다. 나와 내 친구들은 쥘마 출판사의 ‘세이투’ 총서를 출간함으로써, 문화들의 만남에서는 모든 목소리가 다 동등한 존엄을 지님을 보여주려 했다. 실제로 이 총서는 주요 세계문학작품을 월로프어로 번역하는 것을 소명으로 삼고 있다.
아프리카는 작가들과 그 나라 국민 간의 격차가 유난히 큰 대륙이다. 이제는 심지어 자신들의 고유한 언어로 진정 문학을 할 수 있는지조차 의심하며, 이러한 선입견은 예상보다 훨씬 더 넓게 퍼져 있다. 한 젊고 영민한 세네갈 연구자의 사례가 좋은 예다. 그는 자신의 논문에서 키쿠유어나 월로프어로 쓰인 소설이 선형적이고 지극히 단조로운 작품이 될 수밖에 없음을 입증하는 데 골몰했다. 하지만 이후 내 소설 <두미 골로>를, 더 나중에는 셰이크 알리우 은다오의 <음밤 아키무>를 읽고난 후 완전히 생각이 바뀌었다. 월로프어로 쓰인 이 두 작품은 프랑스어로 쓰인 여타 아프리카 소설에 비해 손색없는 훌륭한 작품이며, 오히려 언론이나 서점계의 관심을 더욱 많이 받았다.
이러한 진척은 거저 이뤄진 것은 아니다. 세네갈 과학자이자 역사학자 셰이크 안타 디오프는 어릴 때부터 세리녜 모르카리예와 세리녜 무사 카의 월로프어 시를 읽고 자란 덕분에, 이 월로프어 문인들과 서구화된 지식인들 간의 연결고리를 만들어내는 데 성공했다. 그는 1948년 아프리카인들에게 더 이상 아프리카의 상상계에 대한 모독에 굴복하지 말자고 격려하면서, 이 문인들의 글을 상기시켰다. 디오프는 세네갈의 선각자였다. 월로프어와 관련한 모든 발전은 전부 그의 연구에 기인한 것이다. 또한 언어학자 아라메 팔은 자신이 디오프의 연구를 기준으로 삼고 있으며, 월로프어 교육, 특히 고등교육 분야에서 유용한 학문적 출판물은 모두 디오프에게 빚진 셈이라고 강조했다. 생루이의 가스통베르제 대학은 다카르 캠퍼스보다 훨씬 늦게 이 분야에 뛰어들었는데, 풀라어와 월로프어 산문에 집중해 혁신을 도모했다.
최후에 쓰는 자가 진정한 승자가 되리라
그렇다 해서, 벌써부터 문화의 해방을 논한다면 너무 성급한 접근이 될 것이다. 변화는 언어적 애국주의를 통해 실현되지 않는다. 정부의 결함을 메우려고 노력하는 투사들은 다소 억지스러운 낙관주의와, 뿌리 깊은 낙담 사이에서 끝없이 흔들린다. 사실상, 세네갈의 엘리트 계층은 유일한 공식어인 프랑스어를 계속 존중하고 신실하게 사랑해 마지않고 있다. 더군다나 헌법부터가 세네갈공화국의 모든 대선후보들에게 프랑스어의 사용을 요하는 현실이다. 유려하고도 고급스러운 풀라어, 세레르어, 월로프어 작품들이 이토록 존재감이 없는 만큼, 아프리카 작가들은 프랑스어로 글을 쓸 수밖에 없는 것이다. 실제로는 교육제도의 붕괴만이 돌파구를 여는 계기가 될 수 있었고, 셰이크 안타 디오프의 말을 빌리자면, 그리하여 세네갈은 언어적 운명이라는 비탈길에서 언제든 급변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이러한 문화혁명을 가능하게 해줄 것으로 인식되는 텍스트들은, 대중이 즉각 수용할 것이라는 환상에 현혹되지 않는 작가들에 의해 어둠 속에서 구상되고 있다. 그런데, 아프리카 언어의 투사라고 보기는 어려운 남아프리카공화국 작가 존 쿠체는, <엘리자베스 코스텔로>에서 미학과 정치가 연결되는 정확한 접점으로 우리를 인도한 바 있다. 이 작품집의 단편 <아프리카의 소설>에는 ‘건방진 성격’으로 설정된 나이지리아 작가 엠마뉘엘 에구두가 등장한다. 그는 여주인공에게 다음과 같이 호된 꾸지람을 듣는다. “영국소설은 무엇보다도 영국인을 위해 영국인이 쓴 소설이야. 그 자체가 바로 영국소설의 본질이고, 그래서 ‘영국소설’이라고 부르는 것이지. 러시아 소설은 러시아인을 위해 러시아인이 쓴 소설이야. 그런데 아프리카 소설은, 아프리카인이 썼지만 아프리카인을 위한 소설이 아니야. 물론, 아프리카 소설가들은 아프리카를 얘기하고 아프리카의 경험을 묘사하지만, 그네들의 소설을 읽어보면 작가들이 늘 어깨 너머로 외국인의 시선을 의식하고 있다는 게 느껴져. 그 시선이 마음에 들든 아니든, 그들은 ‘해설자’라는 역할을 체념하며 받아들였고, 아프리카에 대해 설명해. 그런데 소설가가 외국인에게 아프리카를 설명하는 데 온 에너지를 다 쏟으면, 어떻게 한 인간의 세계를 그 심원까지 온전히 탐구할 수 있겠어?”
여기서 쿠체가 일깨우는 바는 다음과 같다. 작가란 자신의 언어를 일종의 유산으로서 물려받는 사람이다. 언어를 자신의 의지 아래 복종시키려 한 끝에, 결국 이 언어를 끝없이 재창조하게 된다. 그는 한 국가가 스스로에 부여한 생각을 차츰 바꿔나가다가 그것을 아예 쇄신하는 지경에 이른다. 초기에 이런 과정은 사회의 ‘말’에 대한 절대적인 친밀성을 전제로 한다. 그런데 우리는 모국어로 말하지 않으며, 그 메아리만을 붙잡을 뿐이다. 실제로, 주변에서 절대 들을 일 없는, 심지어는 자기 입에서도 나오지 않는 단어를 가지고 씨름하는 작가의 머릿속에서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겠는가? 그는 살아있는 말과 생명력 없는 사전 상의 단어들 간의 긴장에서 생겨나는 음성적 풍요로움을 빼앗기고 만다. 이 점은 아프리카-프랑스 문학(아프리카 문학이랄 수도, 프랑스 문학이랄 수도 없는)에서 왜 종종 자연미가 결여되는지 설명해준다. 이런 결여가 아프리카 문학에 나타난 형식상의 혁명에 원인이 된다는 점을 고려한다면, 이렇게 두 언어 사이에서 존재한다는 것은 일종의 구조적인 불행을 야기한다. 또한 이 점은 “프랑스어를 강간해 자그마한 사생아를 낳을 수도 있다”고 자부하던 말리앙 마사 마칸 디아바테 같은 이들의 의도를 설명해주기도 한다.
그러나 몇몇 재능 있는 작가들로 덮을 수 없는 진실이 있다. 그것은 이와 같은 아프리카 문학의 몰개성 현상이 프랑스에는 점차 막연한 전략적 편의품이 돼가고 있다는 것이다. 아주 독특하게도, 프랑스는 과거 피식민국의 문학에 대한 전적인 재정 지원을 승인하는 나라다. 특히나 제 코가 석 자인 이 와중에도, 제 지위에 맞게 처신해야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프랑코포니(프랑스어권)’라는 중장비로 지탱되는 이런 지배의 제도는 숨이 가쁘다는 신호를 보내고 있다. 접목은 이뤄지지 않았고, 우리는 프랑스어로 표현한 아프리카의 창작물이 언제나 결국에는 과도기 문학이었음을 단번에 알아차렸다. 세네갈에서는 월로프 문학이 생각보다 훨씬 더 빨리 프랑스어를 대체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것이 언제가 될까, 20년 후? 아니면 30년 후? 기간은 중요치 않다. 전체 역사로 미루어보자면 눈 깜짝할 사이에 흘러가버릴 시간에 불과하다. 만일 이것이 이 친(親) 프랑스 성향의 세네갈에서 모두에게 불가피한 일이 된다면, 언제든, 그리고 아프리카 대륙 어디서든 마찬가지 일이 벌어질 것이다.
요컨대, 최후에 쓰는 자가 진정한 승자가 될 것이다.
글·부바카르 보리스 디오프 Boubacar Boris Diop
작가, 에세이작가. 저서로 <Murambi, le livre des ossements(무람비, 해골의 책)> (Zulma, Paris, 2011)이 있다.
작가, 에세이작가. 저서로 <Murambi, le livre des ossements(무람비, 해골의 책)> (Zulma, Paris, 2011)이 있다.
번역·박나리
연세대 불문학과 및 국문학과 졸업. 한국외국어대 통번역대학원 졸업. 역서로 <세금혁명> 등이 있다.
(1) Léopold Sédar Senghor, (1906~2001) 세네갈의 시인이자 교사, 문화이론가이며 정치가다. 세네갈의 초대 대통령을 지냈으며, 5번 연임해 1960년부터 1980년까지 재임했다. 아프리카의 문화적 긍지를 주창했으며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아프리카 연방체의 설립을 위해 노력했다.(역주)
(2) Samia Ghezali, <Rendez-vous avec Frantz Fanon(프란츠 파농과의 만남)>,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2012년 7월호.
(3) Jane Wilkinson, Talking with African Writers : Interviews with African Poets, Playwrights and Novelists, James Currey, Londres, 1992.
(4) 바카리 디알로(Bakary Diallo, 1892~1979)는 이 책에 1914~1918년 세네갈 저격병으로서 복무했던 경험을 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