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체가 사람 자체”라고?

2017-03-31     소피 디브리 | 작가
   
▲ 일러스트, 2017 - 셀쉭
자신의 문체를 찾는다는 것은 작가에게 있어, 지상과제이자 목표이며 모럴이다. 1753년 뷔퐁(Buffon)은 “문체는 사람 자체다”라고 했고, 이 말은 엄청난 호응을 얻었다. 소위 ‘큰 물’에서 놀기를 원하는 작가는, 판별되는 동시에 구분되기 위해서, 그 자신만의 문체를 개발하고자 한다. 기교가 극치에 이르면, 작품의 몇 줄만 읽어도 작가의 정체가 읽혀진다. 이런 경지에 이르지 못한 작가는 열등감에 빠지게 된다. 그렇게 되면 그 작가는 보잘 것 없는 존재, 아마추어, 심한 경우 정신분열증환자로 취급받기도 한다.

자신만의 문체를 향한 작가의 욕망

“자신의 문체를 찾아야 한다”는 생각은 모든 예술가들에게 자기 고유 언어를 창조하라고 독려한다. 그러나 대부분의 경우 이 생각은 작가 장 라우그(Jean Lahougue)가 ‘정체성 가설’이라고 불렀던 것, 다시 말해 인정받은 문체의 보금자리에 죽은 듯 박혀 있으라는 결론으로 변질된다.(1)

그러나 자기 특성을 표현하기 위해 ‘언어를 발명해내는 것’과 마치 ‘자기 영혼의 지문’처럼 ‘인지될 수 있는 문체’를 가지려는 자기도취적 의지 사이에는 큰 차이가 있다. 원래 자신의 문체를 찾는다는 것은, 마르셀 프루스트가 말했던 것처럼, 자신의 언어에서 특별한 개성을 찾아내, 내부에서 ‘일종의 외국어’가 솟아오르게 하는 것이다. 그것은 우리가 일상의 언어와는 완전히 다른 언어관계 속에 연루되는 것으로, 문학체험의 특이성 중의 한 가지라고 할 수 있다. 우리는 클로드 시몽(Claude Simon), 아르노 슈미트(Arno Schmidt), 클라리스 리스펙토르(Clarice Lispector)의 경우를 생각해 볼 수 있다. 우리는 이들의 책 각각에서 독창적이고 정겨운 악보를 발견한다.

모든 작가가 자신의 활에 꼭 들어맞는 시위를 가지고 있지는 않다. 그리고 예술가의 문학은 예술가로서의 권위를 손상시키지 않고도 다른 구상이 가능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문체를 가지고 싶다는 욕망을 포기하기는 어렵다. 그 때문에 상당수의 작가들이 어떻게든 문체를 찾아내고자 한다. 그래서 대다수의 사람들처럼, 자기 동료들과 구분되기 위해 꼭 필요한 만큼의 차이만을 드러내는 책들이 생겨난다. 누군가는 첫 문장을 동사들로 시작할 것이다. 누군가는 자신의 텍스트에 반복을 많이 집어넣을 것이다. 누군가는 대용표현을 사용할 것이다. 결과적으로 서로 큰 차이가 나지 않을 것이다. 다시 말해 독창적이되, 겉돌아서는 안 된다. 마침내 그 표현법이 통하게 되면, 사람들은 그 문체가 ‘그 사람의 것’이라고 말할 것이다.
그렇지만 문체를 신비스런 존재로 만들지는 말자. 작가는 글을 처음 쓸 때, ‘자신의 문체’라는 것에 대해 아무 생각이 없다. 작가는 국가 언어의 관습들과 자신의 예술가적 개성 사이에서 투쟁하게 된다. 하나의 원고는 이런 노력에서 탄생한다. 이 첫 번째 텍스트는 작가가 언어와 벌이는 싸움의 한 단계다. 이 첫 번째 텍스트는 불가피하게 어떤 ‘형식’을 취할 것이다. 이 형식이 일상적인 것이든 전대미문의 것이든, 이 안에는 여러 가지 영향력, 단어들에 대한 증오와 사랑, 구두법 사용방식 등이 뒤섞여 있다.

사람들이 텍스트를 인쇄하면, 사실들이 드러난다. 즉 이 책을 쓴 사람이 ‘그’ 또는 ‘그녀’임이 드러난다. 대부분의 경우 첫 번째 소설은 잘 팔리지 않는다. 그래서 젊은 작가는 또 다시 언어와의 전투에 몸을 던지고, 때때로 다른 형식을 취하는 다른 텍스트를 창조해낸다. 그리고 어느 날 편집자나 친구, 혹은 비평가가 “이 책으로 당신은 마침내 당신의 참모습을 드러냈다”고 말한다. 그 순간 작가가 사용하는 구두법은 율법이 되고, 작가는 그 자신의 작은 세계에 틀어박히게 된다. 인정받기 시작할 때 새로운 문체를 추구하려면 미칠 지경이 될 것이다. 

문체를 고정시키는 것이 자기 자신에 대한 진실도 고정시키는 방법이라는 것을(만약 진실이 어렵게 발견된 것이라면), 그리고 특수효과를 내는 방법이라는 것을(만약 특수효과가 다른 식으로는 생산될 수 없다면) 우리는 부인하지 않는다. 또한 소위 ‘독창적인 문체’를 어떻게든 스스로 만들어내는 것은 문학놀이를 존중하는 하나의 방법이다.

작가는 다음의 세 가지 이점 때문에 자신의 문체의 보금자리에 안주한다. 첫 번째 이점은 모든 사람들에게 인식될 수 있는 문체를 만들어낸 ‘위대한 작가’라는 신화를 재생산하는 행복감이다. 그리고 두 번째 이점은, 스스로가 유일하다는 허영심을 가질 수 있다는 점이다. 마지막으로 세 번째 이점은 어느 누구도 당신의 영역을 침해할 수 없다는 확신감이다.

작가가 자신의 문체를 고정시키면 독자들은 시간을 벌게 된다. 무슨 책을 선택해야 할지 몰라 서점에서 방황하던 독자들은, 이전에 맛본 것과 같은 독서의 즐거움을 또 다시 찾기 위해 무슨 책을 사야 할지 알 수 있게 된다. 첫 장의 몇 줄만 읽어보고도 독자들은 자신들이 좋아하는 저자를 알아보게 될 것이다. 그것은 책 구매를 효율적으로 만들어줄 것이다.

정체성 가설은 출판사들에 이윤을 창출해준다. 출판사의 이익은 일정 수준의 미적 고유화와 연관돼 있다. 다소 장기적인 관점에서 저자들은, 재정적으로든(책 판매에 의해) 혹은 상징적으로든(출판사가 목록 내에 저자들을 포함시킨다는 명성에 의해) 수익성을 낼 수 있어야 한다. 출판사들은 경쟁이 치열한 시장에서 인정받고 구분되는 저작물을 제시할 수 있어야 한다. 그래야 이익을 얻을 수 있기 때문인데, 자산에서 이익을 내려면 고유성과 안정성이 필수다. 미뉘(Minuit) 출판사는 1990년대부터 잘 알려진 ‘전위의 제도화’라는 효과를 통해 스타일을 갖춘 대표적인 출판사가 됐다. 미뉘 출판사는 자신들의 편집 색채에 맞게 저자들을 선택한다는 이미지를 풍긴다. 심지어 이 출판사의 신인 저자들조차 ‘고급 문체’를 지닌 작가들로 간주될 정도다.

마지막으로, 문체적 단일성은 상당수 비평가들에게 아주 실용적인 도구다. 사람들은 Y나 Z의 마지막 작품을 읽기 위해 어떤 안경을 써야 하는지 미리 알 수 있다. “문체가 곧 사람이다”라는 말이 사실이라면, 책은 결국 그것을 쓴 남성이나 여성을 드러낼 것이다. 이런 자명한 이치에 의해 기자들은, ‘만남’이나 ‘인물 묘사’를 통해서도 텍스트를 평가할 수 있다고 간주한 나머지, 텍스트 분석을 하지 않은 채 저자에 대한 이해로 슬며시 넘어가 버린다. 자신의 문체를 찾으려는 지상과제는 여러 가지 문제를 해결해 주기도 한다. 그러나 수전노가 자기 재산에 집착해 소액 금리생활자가 되듯이, 작가들이 자기 문체에 집착해버린다면 애석한 일이다.

강박관념으로부터 
자유로워져야 한다

대중처럼 작가도 모순된 존재다. 그래서 작가들은 사람들이 그들에게 부여해준 정체성에서 벗어나기를 원한다. 작가들은 사람들이 ‘문체적 복수성’이라고 부르는 것을 실행한다. 작가들은 뷔퐁의 말을 따르기보다 페르난도 페소아(Fernando Pessoa)의 말을 따른다. 페르난도 페소아는 알바로 데 캄포스(Alvaro de Campos)라는 필명으로 1917년 출간한 <최후통첩>에서 “개성에 대한 편견을 버릴 것”을 주장했다. 페소아에 의하면, “가장 위대한 예술가는 가장 정의하기 어려운 사람일 것이고, 가장 많은 장르에서 가장 많은 모순과 가장 큰 상이성을 가지고 글을 쓰는 사람일 것이다. 어떤 예술가도 단 하나의 인격만을 가져서는 안 된다. 예술가는 여러 개의 인격을 가져야만 하고, 각각의 인격은 서로 닮아있는 정신들을 구체화시킨 복합물로 구성돼 있어서, 단일하고 분할 불가능한 조잡한 소설을 파괴하는 것이다.”(2)

문학에서는 책에 따라 문체가 바뀔 수 있다. 소설, 시, 연극 사이에서 장르를 바꿀 수 있다(특히 자크 루보는 장르변화를 좋아한다). ‘장르’라고 불리는 문학에 따라 대중이 바뀔 수 있다. 조르주 페렉(Georges Perec), 로맹 가리(Romain Gary), 앙투안 볼로딘(Antoine Volodine), 조이스 캐롤 오츠(Joyce Carol Oates) 등은 위에 언급된 다양한 길을 선택했다.

이런 방식으로 문학에 활기를 준 작가들은 각각의 텍스트 속에 구상된 계획에 따라 자신의 문체를 조정할 것이다. 이런 변형이 문체의 가치를 절하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이런 변형은 귀스타브 플로베르(Gustave Flaubert)가 말했던 것과 상당히 비슷하다. 그가 한 말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프랑스 작가들을 짓누르고 있다. “문체가 모든 것이다”라고 플로베르는 기록하고 있다.(3) 만약 우리가 더 세심히 고찰한다면, 플로베르의 문체에 대한 생각이 개인적 특이성의 표현과 연관돼 있지 않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플로베르가 스스로를 “문인인 사람(homme-plume)”이라 칭했을 때, 그것은 자신의 전 생애가 글쓰기에 의해 인도받았다는 점을 말하기 위해서였지, 자신의 문체를 일종의 자기 확장으로 삼기 위한 것은 아니었다. 플로베르는 “써야 할 각 작품에는 그 자체에 적합한 시학이 있다. 그 시학을 찾아내야 한다”라고 주장했다.(4)

즉, 작가가 자기 내부에 시학을 보유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진행되고 있는 텍스트가 그에 맞는 시학을 보유하고 있는 것이다. 플로베르의 주장을 극단적으로 말하자면, 그는 자신의 자아에 일치하는 문체를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텍스트에 일치하는 문체를 추구했다. <마담 보바리>와 <살랑보> 간에 공통적인 요소가 있음에도 두 작품이 그토록 다르게 느껴지는 것은, 플로베르가 <마담 보바리>에서는 ‘회색 톤을 주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고, <살랑보>에서는 ‘자줏빛이 나는 어떤 것’을 추구했기 때문이다.(5) 다시 말해, “나 자신을 어떻게 표현하느냐?”라는 질문 대신에, “내 텍스트의 미적·도덕적 목적이 무엇이고 이 텍스트에 가장 적합한 문체 수단이 무엇일까?”라는 질문을 던져야 할 것이다.

작가들은 오랜 세월 “예술가는 상스럽지 않아야 한다”는 강박관념에 사로잡혀 왔기 때문에, 하나의 문체를 추구하다가 손쉽게 자아의 흥분 상태로  내던져진다. 문체적 복합성을 가지려 노력하는 것은 이와 반대로 ‘세상에 오직 하나뿐인 나라는 작가’에 대한 허영심에서 벗어나게 해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러 개의 문체를 가져야 한다는 지상과제는 하나의 유일한 문체를 가져야 한다는 지상과제만큼 어리석은 것이다. 문체의 복수성은 한계가 있다. 호기심을 끊임없이 자극한다고 하더라도, 폭넓은 독서를 하더라도, 익명의 이름으로 활동하더라도, 페소아의 표현을 빌면, 작가가 새벽이 올 때마다 새롭게 태어날 수는 없다. 삶이 우리를 그런 식으로 만들기 때문에 마치 플로리앙(Florian)의 말(馬)처럼,(6) 우리는 고국을 떠난다고 생각하면서도 푸른 풀밭에 되돌아와 있는 것이다. 이렇듯, 우리는 항상 무의식적으로 강박관념에 사로잡히기 때문에, 의식적으로 강박관념의 길을 찾지 않도록 해야 한다.  


글·소피 디브리 Sophie Divry
작가. <Quand le diable sortit de la salle de bain(악마가 욕실에서 나올 때)>(Notabilia, Paris, 2015)의 저자, 최근 저서로 <Rouvrir le roman(소설을 다시 열다)>(Notabilia, 2017)가 있다.

번역·고광식
파리 8대학 언어학박사로 대학에서 프랑스어를 가르치고 있다. <르몽드 세계사 3> 등의 역서가 있다.


(1) 장 라우그(Jean Lahougue)와 장 마리 라클라베틴(Jean-Marie Laclavetine) 간의 서한, <Écriverons et liserons(우리는 쓸 것이며 읽을 것이다)>, Champ Vallon, Ceyzérieu, 1998.
(2) 페르난도 페소아(Fernando Pessoa), <Ultimatum(최후통첩)>, Mille et nuits, Paris, 1996.
(3) 1854년 1월 15일자 루이즈 콜레(Louise Colet)에게 보내는 편지.
(4) 1852년 1월 1일자 편지.
(5) <Journal des Goncourt(공쿠르 형제의 일기)>, 1861년 3월 17일자 주해, 로베르 라퐁(Robert Laffont), 1989.
(6) Jean-Pierre Claris de Florian(1755~1794), <Fables(우화)>의 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