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적론의 범람은 진실을 삼켜버린다

촛불, 그 후···

2017-03-31     한성안 | 영산대 교수
촛불집회 기간, 수많은 시민들이 거리로 나왔다. 엄동설한 야밤에 고단한 몸을 이끌고 이들은 왜 이토록 거리를 걸었을까? 목적론을 믿지 않았기 때문이다. 불확실한 미래가 불안하고, 깨어있는 시민들의 정치적 실천이 없는 한, 진실은 침몰할 수 있으며 거짓이 참을 이길 수 있다는 사실이 지극히 걱정스러웠던 것이다. 나는 이번 촛불혁명을 우리 사회에 만연한 목적론에 대한 지성적 존재와 그 실천의 승리라고 본다. 

목적론(Teleology)이란 말이 있다. 만물에는 존재의 목적이 내재돼 있으며, 생성된 후 만물은 그 목적에 맞게 운동한다는 생각이다. 곧, 석유가 난로에 들어가 열을 생성하는 이유는 석유에 내재된 ‘열 생산’이라는 목적 때문이며, 거기서 열을 만든 후 기화되는 과정은 그 목적을 구현하는데 필요한 운동과정이다. 목적은 예정돼 있고, 그 목적에 따라 운동하는 과정은 자연법칙에 따른다. 따라서 이 모든 과정은 변하지 않고, 확실하며 필연적이다. 목적론은 결정론, 자연법칙, 불변성, 확실성, 필연성을 지닌다. 목적은 예정돼있고, 운동은 자연법칙에 따르므로 인위적 개입은 불가능할 뿐 아니라 불필요하다. 

목적론은 어떻게 
지성과 실천을 배제시켰는가

그러므로 목적론 속에는 ‘인간’이 없다. 또, 거기에는 행동과 실천이 필요하지 않다. 나아가, 목적에 대한 순응의 문화와 정치는 장려되지만 성찰, 비판, 회의, 토론의 지성적 문화와 반역, 투쟁의 실천적 정치는 비난받는다. 이 때문에 목적론에서 새로운 목적을 스스로 결단하는 문화와 정치를 상상하기는 불가능하다. 2천 2백여 년 전, 사물의 변화를 설명하기 위해 아리스토텔레스가 제시한 이 목적론은 서양문명에 강한 영향력을 미쳤다. 먼저, 목적론은 기독교에 동태적 프레임을 제공했다. 세상은 신의 뜻을 구현하기 위해 창조됐으며, 인간역사는 ‘예정된’ 목적에 맞게 운동한다. 역사는 신의 뜻이 관철되는 과정이다. 주의 뜻대로 되리라! 순종하는 것, 곧 목적에 이의를 제기하지 않고 충실히 따르는 것이 최고의 덕목이다. 중세기독교의 목적론에서 ‘사유’는 악덕이다. 성찰하고, 회의하며 비판하는 ‘지성적 존재’가 이 목적론에 들어갈 공간은 없다. 

중세 천년을 지배하던 기독교적 목적론은 17세기 말 칼빈의 선택예정론에서 극단적인 면모를 드러냈다. 구원받을 자는 이미 선택돼 있다. 구원에 관한 한 인간이 개입할 여지는 없다. 선택받은 자의 반응은 대략 두 가지로 예상된다. 첫째, 그 은총에 감사해 신의 목적에 적극적으로 동참하는 방법이다. 이는 개인의 성공과 이익에 매진함으로써 달성될 수 있다. 막스 베버는 <프로테스탄트윤리와 자본주의정신>에서 이런 청교도적 목적론으로 진화한 중세 기독교적 목적론을 부각시켰다. 청교도적 목적론이 서구사회를 지배하자 인간의 실천과 행위가 ‘개인의 공리’에 초점을 맞추게 된 것이다. 다른 반응도 충분히 예상된다. 목적은 물론 구원도 확정돼 있다. 그것이 개인의 구원이든 사회의 구원이든 상관없다. 이 경우 감사야 하겠지만 딱히 내가 나서 실천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구원은 필연적이기 때문이다. 신의 공의는 내 의사와 관계없이 필연적으로 이루어진다. 실천과 행동은 어차피 불편하고 거추장스러운데 잘 됐다. 사회를 위한 정치적 실천마저도 수면 아래로 잠긴다.

아리스토텔레스의 목적론은 18세기에 등장한 경제학에도 적용됐다. 아담 스미스의 <국부론>은 목적론이 경제현상에 적용된 첫 번째 사례다. 인간이 아무리 사악하고 이기적으로 행동하더라도 시장에서 그것들은 균형에 이른다. 균형에서는 안정과 조화라는 최고선이 달성된다. 시장에는 ‘일반균형’의 선이 예정돼 있기 때문이다. 예정조화설! <국부론>은 청교도적 목적론의 경제학적 버전이다. 이제 지성적 사유와 모든 작위적 행동을 멈추고 시장에 모든 것을 맡기자! 목적을 위해 문화적으로 반역하며 정치적으로 투쟁할 필요가 없다. 행위와 실천은 악덕이고, 관조와 정좌가 미덕인 것이다. 신고전학파경제학자들은 경제는 물론 문화와 정치 분야에서도 이 목적론을 설교하며 인간의 행동과 실천을 깎아내린다. 신고전학파적 목적론이 근대 세계에 부여한 정치적 함의다. 

목적론은 그로부터 약 70~80년 후 등장한 마르크스경제학에도 적용됐다. 인간의 역사는 기술의 발전과정이다. 그와 함께 인류사회는 필연적으로 공산주의로 이행한다. 기술력으로 대표되는 생산력은 그 안에 ‘공산사회’라는 목적을 내포하고 있다. 인류역사는 이처럼 예정된 공산주의를 향해 법칙적으로 진보하고 있다. 하지만 마르크스의 목적론은 신고전학파경제학의 목적론과 약간 다르다. 그의 목적론에는 예정된 목적을 방해하는 행위자들이 존재한다는 점이다. 따라서 그 목적은 자동적으로 달성되지 않는다. 그것은 행위자들끼리의 투쟁을 통해서 비로소 달성된다. 비록 미리 결정돼 있지만 정치적 실천과 참여 없이 그 목적은 구현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사람 없이 구현될 수 없는 목적론, 그리고 정치 없이 달성될 수 없는 목적론이 마르크스적 목적론의 요체다. 하지만, 목적이 예정돼 있어 변하지 않기 때문에 확실하며, 필연적으로 달성될 수밖에 없다는 점은 아리스토텔레스, 중세기독교는 물론 청교도, 신고전파적 목적론과 다르지 않다. 

목적론에서 비롯된, 대조적인 두 가지 태도

청교도적 목적론자는 마르크시즘의 정치적 목적론자와 얼마나 다를까? 청교도적 목적론의 사례를 여기에 적용해보자. 예정된 목적에 대한 신념은 낙관주의를 낳는다. 이것이 정치적 목적론자와 결합할 때 두 가지 방향의 태도가 기대된다. 첫 번째 태도는 정치에 대한 적극적인 참여다. 불변의 확실한 목적은 노력에 대한 강한 동기를 부여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같은 조건 하에서 완전히 다른 태도도 가능하다. 정치에 대한 참여의지가 약화되는 두 번째 태도다. 확고 불변의 결과가 예상되면 오히려 노력에 대한 소극적 태도를 보이는 경우는 수없이 발견된다. 예컨대, 미래가 보장된 부잣집 자녀들은 노력을 하지 않는 경우가 많다. 이런 경우 정치적 참여와 행동은 오히려 실종된다. 목적은 필연코 이루어지리라! 그들은 신고전학파경제학처럼 정치를 혐오하지 않고 실로 지지한다. 하지만 정치적 실천으로부터 그들은 해방된다. ‘비실천적인’ 정치적 목적론자인 셈이다. 이런 유형은 청교도적 목적론에서도 이미 발견됐다. 그들은 거리에서 행해지는 동료의 정치적 활동을 안방에서 ‘관람’한다. 모든 마르크스주의자들이 정치적 실천에 참여하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이 결과, 마르크스적 목적론에서 정치적 실천자의 수는 현격히 줄어든다. 마르크스적 목적론이 정치적 실천에 미친 긍정적 영향은 기대한 만큼 크지 않다.  

20세기 말 동유럽에서 사회주의국가가 붕괴하는 대사건이 일어났다. 이로써 인류의 역사에 공산주의가 예정돼 있다는 마르크스의 목적론은 파탄으로 종결됐다. 예정된 목적을 위해 싸웠지만 실패한 것이다. 마르크시즘 내 실천적 목적론자들이 혼란에 빠질 수밖에 없었다. 그들 중 일부는 실천적 목적론자로 남을 가능성을 완전히 배제할 수 없다. 하지만 결정적인 패배를 경험한 목적론자들이 가열찬 실천을 지속할 가능성은 높지 않다. 많은 마르크스주의자들이 칩거를 선택했다. 마르크스의 원전으로 돌아가 마르크스 목적론의 재구성에 전념한 것이다. 그 결과는 사회학 분야에서 ‘구조주의’로 귀결됐다. 

1960년대부터 알튀세르로부터 시작된 구조주의적 마르크스주의는 마르크스의 ‘과학화’를 지향한다. 과학으로 승격되려면 마르크스주의에서 주관주의, 주의주의, 인본주의가 추방돼야 한다. 이는 인간과 그 실천적 행위를 구조 안에 철저히 가두어 둠으로써 가능하다. 자본주의는 단순한 생산양식이 아니라 견고한 ‘사회구성체’다. 이것은 경제는 물론 정치, 이데올로기 등과 긴밀히 상호작용하며 서로를 중층적으로 결정하면서 견고한 체제를 형성한다. 이 속에서 이루어지는 인간의 행위는 이 체제 안에 포섭되며, 더 나아가 체제의 ‘개량’에 기여한다. 정치적 실천은 무익함을 넘어 마르크스적 목적에 해로울 뿐이다. 구조주의 마르크스주의가 인본주의는 물론 사회민주주의적 복지를 개량주의와 수정주의로 맹공하는 이유다. 구조는 행위에 우선한다!

정치경제학자들이 
정치와 실천에 거리를 두는 역설

이런 관점은 경제학에서도 발견됐다. ‘자본논리학파’로 지칭되는 독일의 마르크스경제학자들은 20세기 후반의 자본주의국가를 <자본론>의 ‘가치법칙’에 따라 조명했다. 자본주의국가는 욕망에 눈이 먼 무식한 자본가의 착취에 이용되는 단순한 ‘도구’가 아니다. 그것은 자본의 가치법칙이 관철될 수 있도록 자본의 ‘옆’과 그 ‘위’에서 노동은 물론 자본마저 통제함으로써 자본주의의 체제 안정에 기여한다. 자본이 가치법칙의 ‘무의식적’ 측면이라면 국가는 그것의 ‘의식적’ 측면이다. 이로써 자본주의 사회구성체는 자본의 논리 아래 완벽하게 포섭된다. 자본의 논리에 완벽히 포섭되는 인간으로부터 정치적 반역을 기대할 수 없을 것이다. 부정하고 싶겠지만 자본논리학파의 생각은 오늘날 정치경제학자들의 사고를 강하게 지배하고 있다. 경제적 개량에 의한 포섭! 이는 바로 정치적 실천의 결과다. 적지 않은 수의 정치경제학자들이 역설적으로 정치와 실천에 거리를 두는 이유다.

신고전학파경제학과 달리 마르크스경제학에서는 투쟁하는 인간이 등장한다. 하지만 그는 예정된 목적을 의심하거나 바꿀 수 없다. 이곳의 인간은 예정된 목적을 향해 돌격하는 정치적 존재일 뿐 진격을 멈추고 성찰하며 회의하는 지성적 존재는 아니다. 목적 그 자체를 의심하지 않는 비지성적 존재는 구조주의와 자본논리학파에서도 그대로 발견된다. 비지성적 존재로서의 행위자는 모든 목적론의 특징이다! 구조와 자본논리에 갇힌 자, 그러나 그 철창으로부터 해방될 가능성은 없다. 

한국사회는 근대화의 길을 걸어오고 있다. 근대화는 서구문화의 산물이다. 개항 이후 아리스토텔레스의 헬레니즘, 중세기독교의 헤브라이즘, 청교도주의가 물밀 듯이 몰려왔다. 1960년대  산업화과정에서 신고전학파경제학이 모든 영역의 표준으로 자리 잡았다. 1980년대 민주화과정에서 마르크스경제학이 급하게 수입됐고, 동유럽사회주의붕괴 후 자본논리학파의 정교한 논리가 정치경제학자들의 사고에 착근됐다. 이 모든 서구문화는 목적론 위에 서 있다. 이 때문에, 현재 우리 사회는 목적론으로 충만하다. 그 결과, 우리 사회는 인간의 지성을 ‘의식화’로 조롱하고 자유의지에 입각하는 인간의 행위와 정치적 실천을 ‘경박함’과 ‘쌈박질’로 혐오한다. 

촛불혁명은 목적론에 맞선 도전이다

그렇다면 지성과 실천을 조롱하는 목적론은 얼마나 타당한가? 현대사회에서 석유는 불을 때서 열을 내는 목적에만 봉사하는 것이 아니다. 플라스틱, 화장품, 심지어는 치료의 목적을 위해서도 쓰인다. 즉, 석유에 예정된 목적이란 없다. 수요조건과 기술의 발전에 따라 석유의 목적은 진화한다. 석유의 미래에 대해 결정된 것은 아무 것도 없고, 그것에 대해 우리는 알지 못한다. 만물에 예정된 목적이 없듯, 역사에도 예정된 목적이 존재하지 않는다. 확신과 심리적 안정을 선물하는 예정선택, 일반균형, 공산주의는 지극히 비현실적인 여러 가정들 위에 세워진 상상물일 뿐이다. 모든 목적론은 미신에 불과하다.

역사에 예정된 목적이 존재하지 않듯이 인간에게도 예정된 목적이 없다. 우리는 민족중흥의 역사적 사명을 띠고 이 땅에 태어나지 않았다. 어떤 누구로부터도, 그리고 아무런 목적을 부여받지 않은 채 그냥 던져진 존재일 뿐이다. 지성적 존재는 이 한계 상황에서 자신의 목적을 스스로 정하며, 비판과 성찰을 통해 수시로 바꾼다. 지성적 존재는 목적론을 거부한다. 그는 스스로 목적을 찾고, 그것을 지속적으로 성찰하기 위해 깨어있어야 한다. 자신이 결단한 목적의 미래에 대해 결정된 것은 없고 불확실하기만 하다. 목적론을 맹신하지 않는 그의 삶은 항상 불안하고 초조하다. 그는 자신의 결단에 책임을 지기 위해 실패가 전망됨에도 끝없이 실천한다. 실로 그는 무거운 바위를 지고 비탈을 쉬지 않고 오르는 ‘시시포스’다.   

촛불집회 기간, 수많은 시민들이 거리로 나왔다. 연인원 천만이상으로 추산되고 있지만 사실은 중복계산의 결과다. 같은 사람이 여러 번 나왔다는 말이다. 겨울밤은 실로 추웠다. 생업으로 몸은 지쳐 있었다. 목이 터져라 외치는 구호와 서너 시간의 행진으로 인해 다수는 몸져누웠다. 엄동설한 야밤에 고단한 몸을 이끌고 이들은 왜 이토록 거리를 걸었을까? 

그들이 목적론을 믿지 않았기 때문이다. 결정되지 않고 불확실한 미래가 불안했기 때문이며, 깨어있는 시민들의 정치적 실천이 없는 한 진실은 침몰할 수 있으며 거짓이 참을 이길 수 있다는 사실이 지극히 걱정스러웠기 때문이다. 나는 이번 촛불혁명을 우리 사회에 만연한 목적론에 맞선, 지성적 존재와 그 실천의 승리라고 본다. 최후의 승리를 위해 더 많은 비(非)목적론적 지성인들의 땀과 눈물이 필요하다. 어둠은 밤을 이길 수 없다. 이는 자연의 법칙이다. 하지만 인간의 역사에서 진실은 침몰할 수 있고 거짓이 참을 이길 수도 있다! 그래서 우리는 포기할 수 없다.   


글·한성안
영산대 경제학과 교수, 독일 브레멘대학교 경제학 박사. 2006년 BMW 코리아 학술상(우수상)을 수상했으며 부산경실련 정책위원장과 부산광역시 교육청 논술교육자문교수를 역임했다. 저서로 <사회적 자본과 인적 자본개발>(공저), <상식이 그리운 시대, 인문학으로 풀어본 블로그 경제학>, <인문학으로 풀어보는 통계학> 등이 있다. 현재 베블런과 슘페터, 케인스의 영향을 받아 진화적 제도 경제학적 방법론으로 지식(기술)과 제도의 문제를 연구하면서 진보적 경제학의 새로운 패러다임을 고민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