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IA가 푸코, 데리다, 알튀세르에게 각별한 관심을 가진 이유
2017-03-31 비올렌 모랭 |<르몽드> 기자
스파이들은 철학서적을 읽는다. 게다가 냉전 시대에 미중앙정보국(CIA)이 지식인의 생활을 감시하고 문화 프로젝트에 자금을 지원하며 ‘문화 전쟁’을 이끌었다는 사실은 더 이상 기밀사항도 아니다. 2011년 기밀 해제된 한 연구보고서에는 이런 행태에 대한 놀라운 해석이 등장한다. 1985년 파리에서 활동한 미국 비밀정보원들이 제출한 이 보고서를 보면, 곧 미국에서 ‘프랑스 이론(French theory)’으로 불리게 될 걸출한 구조주의 학자들에 대한 관심이 드러난다. <로스앤젤레스 리뷰 오브 북>의 의뢰로 이 보고서를 비평한 프랑스계 미국인 철학자 가브리엘 록힐은 “지금까지 그 무엇보다도 난해하고 기교적이라고 평가받는 철학이론의 골자를 연구하는데 CIA가 막대한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고 말했다.
‘프랑스, 좌파 지식인들의 전향’이라는 제목의 이 보고서는 학계와 좌파정당 간의 강력한 연합이 맹위를 떨치던 전후 수십 년이 지난 뒤 프랑스에서 좌파 지식인들이 영향력을 잃어가고 있음을 입증하려 했다. 또한 1970년대 미셸 푸코, 롤랑 바르트, 자크 라캉, 루이 알튀세르가 가담한 구조주의의 흐름은 “마침내 마르크스적 전통을 재고하고 거부했다”고 단언했다. 좌파 지식인들이 자초했을 프랑스 지식계의 ‘우경화’를 목도한 CIA는 반대로 1980년대를 풍미하게 되는 ‘반전체주의적 휴머니즘’을 주장한 베르나르 앙리 레비와 앙드레 글룩스만 같은 반마르크스주의 ‘새로운 철학자들’의 등장을 반기는 듯 했다. 미국 스파이들은 경멸을 감추지 않으면서 이 젊은 철학자들이 가져올 정치적 영향력에 대해 윗선을 안심시키려고 했다.
“새로운 철학자들은 흥미를 자극하는 언론형 인물로 탈바꿈해, 프랑스인들이 좋아하는 TV와 라디오의 길고 지적인 프로그램에 출연합니다. 그리고 거기서 자신의 견해를 옹호하면서 자신의 글에 담긴 난해함을 보완합니다. 하지만, 그들은 새로운 정치계획을 세우기 위한 실질적인 제안을 별로 내놓지 못했기 때문에, 그들의 영향력은 우선 미미했습니다.”
미국 스파이들이 난해하기로 유명한 라캉, 알튀세르의 글과 씨름했음을 보여주는 이 보고서의 범상치 않은 측면을 차치한다면, CIA는 실질적으로 이들의 사상을 더 이상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고 결론을 내렸다. 반마르크스주의가 승리했다. 그러나 굳이 그런 고행을 한 이유가 무엇일까? 이 이야기의 모든 아이러니는 이 보고서가 적절치 않은 시기에 작성됐다는 데 있다.
1985년 프랑스에서 한풀 기세가 꺾인 미셸 푸코나 롤랑 바르트나 자크 라캉이 미국 대학가에서 엄청난 인기를 끌게 된다. ‘프랑스 이론’이라는 이름으로 명명된 프랑스 철학자들의 글들은 미국 동부 대학가의 문학 학과에서 다뤄졌고, 문화연구를 전담하는 학과들이 분리, 신설됐다. 미국 대학에서 흑인 연구, 여성 연구, 탈식민주의 연구 등의 학과가 등장하던 시기였다. 프랑스에선 더 이상 좌파 지식인들을 두려워할 이유가 없었다. 한편, 로널드 레이건이 이끄는 보수 미국은 걱정하기 시작했다. 파리 우에스트 낭테르 대학에서 미국학을 가르치며 정치지성사를 연구하는 프랑수아 퀴세 교수는 이 역설적인 상황을 이렇게 요약했다.
“이 보고서가 작성되고 불과 몇 년 뒤에 미국 보수 지식인들의 반대 시위가 일어났다. 그들은 1990년대 초부터 대학에서 학생들에게 프랑스 니힐리즘을 가르친다고 항의했다.”
CIA가 예언자적 직감을 발휘한 것일까? CIA는 오히려 1947년 기관 창설을 이끌었던 반공산주의적 관례를 충실히 따른 것으로 보인다. 퀴세 교수는 “요약하자면 사르트르를 감시하던 스파이의 후임자들이, 시대적 변화는 인지하지 못한 채 사르트르의 계승자들을 감시한 셈”이라며 흥미로워 했다. 그러나 정보원들은 초점을 제대로 맞추지 못한 채 감시를 한 것이고, CIA도 엉뚱한 곳에 촉각을 곤두세운 셈이다.
“CIA는 자국의 영토 내에서 일어나는 정체성 정치로 인한 위험은 보지 못하고 공산주의의 위험만 찾았다”고 볼 수 있다. 후자의 위험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인정하면서도 말이다. 반대로 ‘새로운 철학자들’은 미국을 안심시키며 그들의 관심을 끌었다. “CIA는 반공산주의 지식인들이 지배적인 위치에 있음을 확인할 수밖에 없었다. 그 이유는 간단했다. 그들에게 맞설 이들이 더 이상 아무도 없었으니까”라고 퀴세 교수는 결론을 맺었다.
미국 스파이들이 프랑스 좌파 지성계의 쇠락을 확인하며 기뻐하는 모습을 담은 연구보고서를 읽으니 다소 묘한 기분이다. 하지만 가브리엘 록힐이 지적한 바와 같이, 이 사실은 CIA가 사상이 형성되고 번성하다가 쇠퇴하는 과정을 중요하게 여겼다는 것을, 그리고 어쨌든 이론적 산물이 감시 대상이 될 만큼 충분히 위협적인 요소로 간주됐다는 반증이 아닐 수 없다.
글·비올렌 모랭
<르몽드> 기자
번역·서희정 mysthj@gmail.com
한국외국어대 통번역대학원 졸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