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주의를 법에 가둔 법치국가
2017-04-28 안세실 로베르 |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부편집장
2017년 2월 2일, 유럽연합(EU) 집행위원회는 루마니아 측에 자국의 부패문제에 대해 방임적 태도를 보였다는 이유로 ‘단호한 주의’를 줬다. 또한 EU 집행위는 폴란드 정부에 대해 법치주의 훼손을 이유로 시정 권고했으나, 거부 당했다. 이런 긴장상황은 EU에 의한 일부 회원국의 권리 침해가 점점 늘고 있음을 여실히 보여준다. 이제 ‘법치국가’라는 개념 자체가 모호하게 됐다.
“폴란드에서 ‘법치주의’의 무시 문제가 새롭게 대두됨에 따라, EU 집행위원회는 폴란드 정부에 추가권고를 하기로 결정했다.”
프란스 팀머만스 EU 집행위원회 수석 부위원장이 2016년 12월 21일 밝혔다. 팀머만스 부위원장은 “사법부의 독립은 지극히 중요하다. 집행위원회는 이에 대해 폴란드와 타협할 의사가 없다”고 덧붙였다.(1) 2016년 7월부터, EU 집행위원회는 폴란드가 헌법재판소의 독립을 제한하는 헌법 개정의 시도에 대해 비난해왔다. 팀머만스에 의하면, 법률의 근간을 지키려는 유럽연합의 제재 조치는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이다. 이는 구대륙 지도자들에게는 널리 공유된 감정이다.
“논란의 여지는 있지만, 법치국가는 EU의 근간이다. 지난 몇 십 년간 EU가 역할을 가장 잘 수행한 분야가 바로 이 분야다”라고 안드레아스 포스쿨레 독일 헌법재판소장이 말했다. 그는 EU 집행위원회에 대해 “주요 문명의 증거”라고 언급하기도 했었다. 프랑스 헌법위원회 위원장인 로랑 파비우스는 한술 더 떠 TV쇼에나 나올 법한 오만한 표현으로 덧붙였다.
“유럽에서 법치국가는 선택이 아니라 의무다.”(2)
EU집행위를 핑계 대는
‘민주주의 결핍’ 국가들
이렇게, 유럽인은 마치 ‘미덕 수료증’을 수여받은 듯한 태도를 보인다. 노벨 위원회 의장이자 유럽의회 사무총장인 토르비에른 야글란은 이렇게 유럽 내 ‘평화와 화해, 민주주의, 인권’에 기여한 활동을 인정해 EU에 2012년 노벨 평화상을 수여했다.
그러나 EU가 그런 깃발을 휘두를 위치에 있는가? EU는 권력을 하나로 집중시키고자 했던 폴란드나 2017년 2월 사법권에서 부패척결을 위한 수단을 박탈하고자 했던 루마니아를 지체 없이 (정당하게) 비난했다. 그러나 EU 기관들의 ‘민주적 결핍’과 불합리성으로 인해 그들이 중시하는 권력 분립의 가치가 훼손된다.(3) 의회의 판단을 회피하고, 국민투표를 은밀히 피해가면서 자유무역협정을 관철시키려는 의도는 법에 대해 힘의 논리로 대응하는 그들의 이중적 태도를 드러낸다.
이런 모순은 정치적 선택만 반영하는 것이 아니다. 이는 ‘법치국가’라는 개념 자체의 모호성을 드러낸다. 중립적으로 묘사된 법치국가의 개념은 사실 자유의 구체적 실현을 위한 실효성보다 절차와 관련 깊으며, 정치보다 법 규정을 더 중시하는 경향이 있는 특수한 이데올로기적 세계의 표현이다.
우선, 독일과 영국에서 18세기부터 생겨난 이 개념은 경찰국가와 반대 개념이다. 다시 말해 계몽주의 시대 전에 대다수 유럽 국가가 겪었던 전제권력의 자의적 결정 및 독단적 권력행사와 반대다. 권력당국의 행동을 통제하기 위해, 법률가와 정치학자가 법적구조를 만드는데 특별히 공들였고, 점차 그 개념을 다듬었다. 권력분립주의, 법 앞의 평등, 사법부 독립, 규범 준수 등이 있다. 헌법에 근거한 입헌주의는 특히 지도자들로 하여금 사전에 규정되고, 공식서류(헌법)에 기재되며, 국민에 의해 받아들여진 규범에 따르게 하려는 의도를 나타낸다.
20세기에 법치국가의 정의는 논쟁거리였다. 대학교수들은 법의 존엄성이나 사회복지를 언급하면서 정의에 상당한 의미를 부여해 뜻을 확대하고자 했다. 이들은 원칙을 효과적으로 시행하기 위해서는 정의나 공정성과 같은 가치추구가 필수적라고 주장했다. 반면, 실무가들은 그 개념을 형식적 측면(절차)에 제한하고자 했다. 법률가 플로랑 파르망티에는 “다양한 해석을 넘어, 우리는 법치국가를 절차와 제도, 힘의 관계와 같이 물질적이고 실제적인 요소와, 표현, 문화, 사상 등과 같은 비물질적 요소를 아우르는 복합적 현실이라고 평가할 수 있다”는 표현을 통해, 이 개념에 관한 연구 부족에 유감을 표명하기도 했다.(4)
따라서 일반적이면서도 상당히 추상적인 이 원칙들은 기능과 법 절차에 대한 하나의 해석으로 귀결된다. 따라서 법률의 효율성과 사회적 차원의 문제에 대해서는 과소평가되거나 심지어 배제된다. EU 집행위원회는 2016년에 폴란드 측에 한 권고와 헝가리 총리인 빅토르 오르반과의 팽팽한 대담에서 사법부 독립과 권력분립주의를 강조했다. EU 집행위원회는 사회 불평등보다 ‘포퓰리즘’ 확산에 대해 더 걱정하는 모습을 보였다.
1991년 소련붕괴 이후, 중앙유럽과 동유럽에서 법치국가의 개념은 유럽 및 국제 재정기관에 의해 대대적으로 조직된 ‘변화’를 맞이했다. 1993년 EU 집행위원회는 머지않아 유럽연합이 될 공동체 가입을 위한 세 가지 병합 조건을 정했다. “법치국가를 보장하는 안정적인 제도 시행과 민주주의, 인권, 소수민족 존중 및 보호”, “지속가능한 시장경제 및 경쟁 압력과 EU내 시장의 권력에 대항할 수 있는 능력”, “의무를 받아들이고 특히 정치 및 경제, 통화를 통합하려는 목표에 동의할 수 있는 능력”이 그것이다.
우선, 소련에 의한 지배로 인해 온 국민이 빼앗긴 정치적 자유를 확립하는 것이 문제였다. 그러나 법치국가의 설립은 시장사회(시장경제가 오히려 민주주의를 무력화해 인간을 상품화한 사회-역주)를 확고히 했다. 법적 테두리는 사유재산을 신성화하고 공적영역 파괴를 위한 수단을 제공했다. 20세기 말 유럽에서, 법치국가는 이렇듯 자유경제의 필연적 귀결이었다. 특히 민영화와 규제철폐 촉진을 위한 ‘훌륭한 거버넌스’와 관련이 깊다.
여기서 논의되는 이 개념은 힘에 대한 법의 우위를 확실히 보여줄 수 있는 법적 장치로서 수많은 정치적 문제를 낳는다. 첫째로, 정의에 대한 일반성은 이 개념을 가변적으로 적용되게 한다. 폴란드와 헝가리는 정당한 이유로 EU 집행위원회의 감시 대상이 됐지만, 프랑스의 경우와 같이 유럽인권재판소(ECHR)에 의해 사법처리 지연이나 감옥 내 비인도적 행위로 비판받는 국가들에 대해서는 어떻게 말할 수 있는가? 마찬가지로 전체 회원국에서 빈곤율이 15%를 넘는다는 것은 기본적 자유 침해를 고려할 수 있지 않은가?
‘법치국가’란 대체 무엇인가?
그 다양한 해석들
게다가 법치국가는 법적 관례에 따라 다르게 해석될 수 있다. 유럽인권재판소는 프랑스 최고행정재판소를 모방해 설립된 룩셈부르크 최고행정재판소가 역사적 잔재로 인해 정부의 고문이자 동시에 최고행정법원이기 때문에 권력분립주의를 지키지 않았던 것으로 판단했다(1995년 9월 28일 룩셈부르크에 대한 프로콜라 판결). 반면 프랑스 최고행정재판소는 공권력으로부터 독립돼 있음을 주기적으로 보여준다. 2016년 8월 26일, 최고행정재판소는 마뉘엘 발스 총리의 의사와 달리 ‘부르키니’ 착용을 허락하는 판결을 내리면서 이를 잘 보여줬다.
결국 규정의 우위를 원칙으로 삼는 법치국가의 합법성의 원칙과 국민주권의 이름으로 이 규정을 개정하려는 정부 정책의 정당성은 서로 대조를 이룬다. 법치 국가에서는 일반적으로 국민에 의해 승인된 헌법을 준수하는 것 이상으로, 공개토론에서 제외되고 꼭 기재돼 있는 것이 아닌 신성불가침의 원칙이 존재한다는 사상을 조금씩 불어넣었다. 테러방지법과 관련해, 프랑스헌법위원회 위원장인 로랑 파비우스는 정책보다 우위에 있는 이 보호방책을 수용했다. 그는 “말하자면, 우리 제도와 같은 시스템이 장기적 전망과 독립성을 갖추고, 우민정치나 특권을 따르지 않으며, 정당하게 신뢰를 주는 ‘기준 제도’가 될 수 있다는 점이 중요하다”고 덧붙였다.(5) 중립적으로 보이는 이 발언은 사실 논란이 될 만한 암시로 가득하다.
본래 정치 지도자는 변덕스러운 유권자에 의해 좌우된다. 감정이 없는 재판관은 럭비공 같은 유권자 위에서 완고한 태도를 유지할 것이다. 다소 고차원적인 이 견해는 때때로 재판관에 의해 고안된 원칙이 적법한지에 대한 문제를 낳는다. EU사법재판소는 이 헌법 재판관과 같은 논리로 국내법보다 EU의 법이 우위에 있다는 원칙만을 생각했다(1964년 코스타에넬사건). 이 원칙은 법원으로 하여금 별로 민주적이지 않은 방법으로 채택된 유럽 규정에 유리하도록 합법적으로 가결된 국내법을 배제시킬 수 있도록 한다.
예컨대, 자국의 해외 지원병을 보호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는 영국은 1951년에 채택돼 스트라스부르에 위치한 유럽인권재판소(ECHR)가 보증한 인권에 대한 유럽 헌법을 비난했다. “우리는 스트라스부르에 있는 재판관의 명령을 수용할 필요가 없다!”고 2014년 10월에 데이비드 캐머런 영국 총리가 외쳤으며, 후임자인 테리사 메이 영국 총리도 그의 입장을 따랐다. 당시 내무부 장관이었던 테리사 메이는 ‘영국 의회의 운신의 폭을 제약’할 수 있는 협약을 비난했었다. 한편 프랑스에서는 정치정세에 반동적 과격주의가 자리 잡는 가운데, 유럽 판례의 역할이 커지고 있어 격론의 여지가 있다. 2015년부터 2016년까지 대리출산으로 해외에서 출생한 아이의 신분 등록에 관한 법에 대해 프랑스 법과 유럽인권재판소 법이 상충했는데, 법원은 유럽인권재판소의 손을 들어 신분 등록을 명했다(플롱과 부베사건).(6)
정치계급이 ‘재판관의 통치’를 비난하기에 유리한 입장이라면, 법치국가의 개념이 차지하는 위치가 커져가는 것은 대립된 추론에 의해 정치권력이 붕괴될 징후가 아닐까? 정치권력은 유권자 앞에서 자신들의 선택에 대해 책임을 지는 것보다 사법관에게 책임을 돌리는 것을 선호할 것이다. 이는 입헌주의 지지자들의 신념이다. 소르본 파리 1대학 교수인 도미니크 루소는 다음과 같이 지적했다.
“규정을 정할 수 없는 정치인들은 재판관에 관한 귀찮은 문제를 피하고자 할 것이다. 재판관이 중단하도록 내버려두면서 잘못된 규정을 만든다.”
특히 안락사 문제처럼 민감한 사안의 경우가 이에 해당될 것이다. 또한 이는 시장경제나 공공적자 금지와 같은 일부 원칙에 ‘합헌성을 부여’하려는 의지의 표현이기도 하다. 2012년에 프랑수아 올랑드 대통령이 재교섭을 약속했던 ‘유로존의 안전, 협력 및 거버넌스 협약(TSCG)’처럼 수정하기 특히 어려운 조약에 같은 원칙을 넣었다. 경제적 교훈으로 과장된 법치국가는 자유주의를 확고한 법으로 탈바꿈하는데 기여한다.
“EU 집행위원회의 잘못이다!”라는 말은 이제 자연스럽게 “재판관의 잘못이다!”와 동일한 말이 될 것이다.
글·안세실 로베르 Anne-Cécil Robert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부편집장
번역·김세미
한국외국어대 통번역대학원 졸업
(1) http://ec.europa.eu
(2) <르몽드>와의 인터뷰, 2016년 10월 21일자.
(3) 수잔 와킨, ‘유럽의회가 진정 해결책일까?’,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프랑스어판, 2016년 2월호.
(4) 플로랑 파르망티에, ‘법치국가의 길. 유럽과 러시아 사이 국가들의 좁은 길’, 시앙스포. 정기간행물, 총서. <시민 도서관>, 파리, 2014.
(5) <르몽드>와의 인터뷰, 2016년 10월 21일자.
(6) 카롤린 매카리, ‘대리출산, 법치국가에서, 법 적용하기’, <리베라시옹>, 파리, 2014년 7월 17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