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익명의 괴물, 거리의 사람들”
우파 포퓰리즘을 경멸하는 엘리트의 시선
2017-04-28 르몽드디플로마티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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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득 찬 사람들>, 에르베 디 로사-1984 |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에 의해 우파 포퓰리즘이 권력을 장악하기 시작한 가운데, 민주당 진영에서는 투표를 잘못한 서민층을 향한 경멸이 거세지고 있다. 2016년 미국 대선에서 참패를 맞은 후 사기를 잃은 민주당 지지자들은 우월성에 대한 환상을 품으며 상처를 감싸 안고 있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 오랜 과거의 사상을 되살리고 있는 것이다.
포퓰리즘은 전통적인 이념의 구분을 초월했다.(1) 미국 공화당과 백악관에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의 반이민 민족주의가 들이닥치는 동안, 좌파 쪽에서는 버니 샌더스 상원의원이 고등교육 무상화, 공공의료, 역차별적 조세정책 등, 19세기 말 은행과 기업의 지배에 대한 반발로 등장했던 인민당의 영향을 받은 여러 대책을 내놓으며 노동자들을 결집시키고 있었다. 대서양 너머 유럽에서는 반세계화를 내세운 민족주의 우파 정당인 영국독립당(UKIP)의 추진 하에 ‘브렉시트’ 찬반투표가 진행됐고, 그 한편에서는 제레미 코빈 노동당 대표가 토니 블레어 정권 이후 영국좌파의 중심부를 갉아먹어온 ‘신 노동당’이라는 신자유주의적 원리를 거부하기에 이르렀다.
엘리트들이 무지한 대중에 맞서 일어날 때?
대선 참패 후 분노에 휩싸인 민주당 세력이 외국인 혐오로 가득찬 공격적인 우파의 포퓰리즘에 맞서기 위해 좌파식 경제 포퓰리즘을 내세우리라고 생각하기 쉽다. 하지만 실제로는 전혀 그렇지 않다. 오히려 일부 진보주의자들은 대중에 대한 반감을 점점 더 강하게 표출하고 있다. 미국 HBO채널의 평론가인 빌 마허도 그 중 하나다. 그는 대선 전 방송에서 트럼프 캠프의 켈리안 콘웨이 선거대책본부장과 인터뷰를 나누던 중 부동산 재벌인 트럼프가 국민들의 지지를 얻고 있는 이유에 대해, “사람들이 멍청하기 때문”이라고 아무렇지 않게 말하기도 했다. 여기에서 나타난 어조는 2016년 6월 외교전문지 <포린 폴리시>에 실린 ‘이제는 엘리트들이 무지한 대중에 맞서 일어날 때’라는 의미심장한 제목의 기사 속 어조와 완전히 동일한 것이었다.
이런 마음의 소리는 솔직하기는 하나 독창적이지는 않다. 오늘날 좌파가 보여주고 있는 인간혐오주의적 태도는 우파가 과거 오랫동안 보여 온 태도와 일치한다. 현재 트럼프 대통령을 지지하는 우파진영은, 때로는 자신들이 수십 년 간 맞서온 노동조합 운동가들의 장황한 연설을 연상시킬 만큼 평범한 사람들을 위한 포퓰리즘적인 표현들을 사용한다. 하지만, 그 전까지는 공공연히 엘리트주의적인 슬로건들을 사용하곤 했다. 마일로 이아노풀로스도 “그만 좀 가난해(Stop being poor)”라고 적힌 티셔츠를 거리낌 없이 입고 다녔었다. 트럼프를 지지하지도 않았고, 우파 동성애자로서 미디어 상의 주요 인물로 떠오르지도 않았던 때조차 말이다.
새로운 보수노선 개척을 시작한, 지칠 줄 모르는 미국의 우파 선동가 앤 코울터는 현대성의 등장 이래 자신의 계층을 특징짓는 어떤 도덕적 공황에 오랫동안 빠져 있었다. 그것은 바로 쉽게 감성에 빠지고, 정서적으로 불안정하며, 과도하게 번식하는 인간 무리에 대한 두려움이었다. 앤 코울터는 ‘어떻게 진보주의 패거리가 미국을 위험에 빠뜨리는가’에 대해 서술한 저서 <데모닉>을 통해 귀스타브 르 봉(1941~1931)의 업적을 예찬했다.(2) 프랑스의 사상가이자 1895년 출간된 <군중심리학>의 저자인 귀스타브 르 봉은 아돌프 히틀러에게도 영향을 줬으며, 이후 수많은 인감혐오주의자들과 우생학자들에게도 기준을 제시하는 역할을 했다. 최근 트럼프 대통령의 멕시코 국경장벽 설치에까지 이어진 반(反)이민 논리는 이미 바글대는 대중과 내외국인을 막론한 서민계층에 대한 두려움이라는 전통적 맥락에 포함됐던 셈이다. 이런 경계심은 먼저 서구사회 내부의 백인 노동자들에게 향했고, 이후 그 표적은 최근 정착한 소수 민족들로 바뀌었다.
그들에게 쏟아지는 수사적 표현은 두 경우 모두 완벽하게 동일하다. 인구도 너무 많고, 아이도 너무 많이 낳으며, 한정적인 자원을 마구 소비하고, 공간도 충분하지 않으며, 우리의 문화를 파괴하고 훼손하리라는 것이다. 하지만 새로운 정치적 질서가 세워지는 가운데 가장 충격적인 사실은 이런 의견들이 얼마든지 상호 대체 가능하다는 것이다. 만약 미국 대선에서 민주당 쪽의 힐러리 클린턴 후보가 당선됐다면, 또는 영국 국민들이 브렉시트에 대해 대거 반대하고 나섰다면, 그 경우에는 좌파 사회민주주의 진영에서 열성적으로 포퓰리즘을 따랐을 것이며 우파진영에서는 더 큰 인간혐오주의를 보여줬을 것이다.
이게 전부가 아니다. ‘대안우파(Alt-right)’운동의 등장과 함께 온라인상에서 널리 퍼져가기 시작한 백인우월주의적 하위문화를 통해 대중에 대한 불신은 점점 더 커져가고 있다. 이들은 성인임에도 사회 주류로부터 자신을 차별화하는 청소년기적 충동을 지니고 있으며, 그렇지 않은 사람들을 가리켜 ‘평범남(Normie)’, ‘평범녀(Basic bitch)’라고 조롱하고, 백인 분리주의를 마치 암울한 펑크 장르처럼 여긴다. 또한 인터넷상에서 활동하고 있는 민족주의 우파의 글과 비유 속에도 동일한 적대감이 스며있다. 결국 백만장자 대통령을 따르는 반동세력이 많아질수록, 포퓰리즘으로 선회한 그의 선택이 기회주의적이었던 것으로 드러나고 있다.
문학계 거장들조차 폄하해 온
‘대중’이라는 존재
대중에 대한 불신의 표적은 시대에 따라 계속해서 바뀌어왔다. 서유럽에서는 19세기말부터 20세기 상당 부분까지 대중매체에 대한 지식인층의 혐오가 상당했다. 오늘날에는 오히려 대중매체가 엘리트층 비평가들을 12사도 급으로 떠받들고 있는 것과는 다른 양상이다. 1930년대 영국의 문예평론가인 프랭크 레이먼드 리비스는 “영화와 신문과 모든 형태의 광고”에 대항하는 캠페인을 펼치고, 문맹퇴치와 신기술 발달이 역사상 유례없는 “문화의 위기”를 낳은 원인이라고 여기며 경계하기도 했다.
영국의 문학교수 존 캐리에 따르면, 미국 태생의 영국 시인이자 평론가 T.S.엘리엇은 신문 구독자들에 대해 “자기만족적이고 편견 가득한, 판단력 없는 대중들”이라고 표현하기도 했다.(3) 영국 소설가 데이비드 허버트 로렌스는 “학교의 문을 닫아버려야 한다. 수많은 인간 무리들에게 읽고 쓰는 법을 결코 가르쳐서는 안 된다”고 말하며 악을 근절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또한 영국 소설가 올더스 헉슬리는 “보편적 교육이 ‘신 얼간이들’이라고 부를만한 거대한 계층을 만들고 말았다”라고 말하기도 했다. 프랑스 시인 샤를 보들레르는 사진기술에 대해 “천한 군중에게 자신의 저속한 모습을 바라보게 해주는 불경한 것”이라고 비판했다. 보들레르가 오늘날의 셀카 열풍을 본다면 얼마나 경악할 것인가.
한편 존 캐리는 인구증가에 대한 공포를 더욱 심각한 문제로 꼽았다. 1800~1914년 유럽 인구는 1억 8천만 명에서 4억 6천만 명으로 증가했다. 엘리트층의 눈에는 급증하는 인구가 문화적 타락의 위협이었고, 이것이 그들에게 공포의 씨앗을 뿌렸다. 영국 소설가 허버트 조지 웰스는 이를 “새 생명을 출생하는 기괴한 무리”라고 표현하며 “19세기의 주된 재앙”이라고 규정하기도 했다. 이런 인구증가에 대한 공포는 원형적 파시즘 정책이나 우생학적인 집단학살 계획들과 뒤섞일 때 절정에 달했다.
이토록 수많은 문학계 거장들이 대중을 열등한 존재로 여겼다는 사실은 실로 충격적이다. 프랑스 소설가 귀스타브 플로베르는 “나는 군중, 대중, 무리가 영원토록 혐오스러울 것이라고 믿는다”라고 말했으며, 파시즘에 빠지기도 했던 에즈라 파운드도 인류를 “멍청이 집단”이라고 표현한 바 있다. 버지니아 울프 역시 “익명의 괴물인 거리의 사람들”이라고 말하면서, 대중사회를 “때때로 증오, 복수, 감탄 따위의 본능에 따라 이리저리 흔들리는, 거의 형태가 없는 물컹한 인간들의 거대한 젤리덩어리”라고 비유했다.
대중에 대한 대중의 혐오를 담는 ‘대중문화’
오늘날에는 누구나 이런 소리들을 엘리트주의의 극치라고 여기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대중문화 역시 이런 환상들에 다수 동화돼 있다. 심지어 과거에는 군중들에게 횡포를 부릴 길을 열어줄 것이라고 비판받았던 미디어마저, 대중에 대한 대중의 혐오를 담아내기 바쁘다. 1990년대는 그런 면에서 일종의 터닝포인트 역할을 했다. 당시 인류에 대한 경멸은 환멸의 모습을 띠었고, 대항문화적 자세를 주류로 바꾸어 놓는 경향이 있었기 때문이다. 미국의 유명 코미디언 빌 힉스가 공연에서 ‘출생의 기적’에 대해 비꼬았던 것도 같은 이유에서다. 인류애와 계급의식이 맞붙는 이 스탠딩 코미디 공연에서 그는 입으로 음향효과까지 넣어가며 이렇게 조롱했다.
“이 세상의 어떤 음양이든 그것이 아홉 달마다 질질 짜는 양배추 같은 자식을 이 땅에 쑥쑥 낳아놓을 수 있다면 그건 기적이 아닙니다. 최근의 미혼모 통계를 혹시 못 보셨을까봐 그런데, 기적은 이미 불길처럼 퍼져가고 있다고요. 할렐루야! 전 세계의 트레일러 파크마다 작은 기적들이 가득하답니다.(4) (중략) 그런데 진짜 기적적인 게 뭔지 아니? 내가 네 아비의 이름을 기억하고 있다는 거란다, 젠장! 쑤욱! 너는 트럭운전수 2세란다. 쑤욱! 자, 여기 네 동생 피자배달부 2세가 나왔네. 그리고 여기 다른 동생인 해충박멸부 2세도 있고, 한 명 더, 잡역부 2세도 있지!”
그로부터 30여 년이 흘렀지만, 극우파들의 새로운 온라인 포럼에서 동일한 어조를 찾아볼 수 있다. 그곳에는 흑인이든, 중남미계든, 가난한 백인이든 아이를 낳는 여성의 몸에 대해 분노 섞인 경멸이 가득하기 때문이다.
빌 힉스와도 아주 가까운 관계이면서 지식인층의 높은 평가를 받았던 헤비메탈 그룹 툴(Tool)은 1996년 앨범 애니마(Ænima)를 발표했는데, 이들은 동명의 타이틀곡에서 로스앤젤레스의 인간구조를 성경 속 대홍수의 세속적인 버전처럼 씻겨 내려가야 할 변기 속 오물로 비유하고 있다. 노래 속에서 보컬리스트인 메이너드 제임스 키넌은 “LA라고 불리는 이 망할 구멍을 봐, 이걸 고칠 방법은 물을 내리는 것 뿐”이라고 소리치고 있다. 이런 비유는 수많은 그런지·메탈 장르의 밴드들에 의해 반복되고 있다. 슬립낫(Slipknot)도 그 중 하나인데, 이 밴드는 2001년에 <People=Shit>이라는 간결하기 짝이 없는 제목의 앨범을 발표하기도 했다.
대중혐오가 인간혐오로,
그리고 우생학까지
1990년대의 인간혐오주의는 정반대의 문화 분야에서도 반향을 일으켰다. 2014년 사망한 프레드 펠프스 목사를 비롯한 종말론적 증오 설교가들의 경우가 그렇다. 펠프스 목사는 신이 천박하고, 북적대며, 세속적이고, 참을 수 없을 만큼 육체중심적인 미국 대중들에게 예정해놓은 마땅한 종말을 받아들여야 한다고 주장한 바 있다.
또한 성공회 신부인 토머스 맬서스는 1798년 그의 명저 <인구론>을 통해 통제불가한 출생에 대한 두려움에 도덕적이고 철학적인 정당성을 부여하기도 했다. 이를 통해 산업혁명 동안 구빈원과 고아원에서 행해진 가혹한 대우에 과학적 근거를 부여할 수 있었고, 뒤이어 사회적 다윈주의와 유럽 제국주의의 우생학 발달에도 영향을 줬다.
거의 인간혐오에 가까운 맬서스주의 이론들은 1990년대 좌파 진영에서 다시 한 번 인기를 얻었다. 이 이론들은 이미 수십여 년 전에 전후시대 생태주의적 대항문화에서 나타났던 것이었다. 독일의 생물학자 파울 에를리히가 1968년 출간한 신맬서스주의 서적인 <인구폭탄>은 2백만 부가 넘게 팔려나가기도 했다. “대중의 단종을 위한 물질 개발”을 주장한 에를리히는, 자신이 “인구과잉에 대해 의식하게 된 것은 인도 델리에서 보낸 덥고 냄새나던 밤”이었다고 말하면서 그곳엔 “택시 창문 틈으로 손을 뻗어 구걸하는 사람들, 곳곳에서 대변과 소변을 보는 사람들, 버스에 매달린 사람들, 가축을 키우는 사람들, 사람들, 사람들, 사람들”이 있었고 곧 “군중에 대한 공포”가 생겨 서둘러 호텔로 돌아오고 말았다고 서술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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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적 좌파의 가장 큰 옹호자이면서 동시에 이에 대한 강력한 비평가이기도 한 머레이 북친은 90년대에 “깊이 자리 잡은 문화적 불안”에 대해“인간이라는 종이 지닌 창조력에 대한 신뢰의 상실을 반영하는 것”이라고 받아들였다.(5) 그는 대중의 과도한 자원소비를 억제하기 위해 거의 우생학의 경계에 놓인 일종의 ‘정신적 위생’을 주장하는 자칭 진보주의자들에 대해 비난을 쏟아냈다.
문화에 집착했던 과거 보수주의자들은 예절, 바른 몸가짐, 훌륭한 관습과 전통의 수호 등을 주장해왔다. 이는 암묵적으로 인간의 존엄성과 완벽성에 대한 신뢰에 기반을 두고 있다. 근대의 인간혐오주의 지식인층의 경우도 대중화가 지닌 부식성으로부터 상위문화를 보호하는데 매달려 왔으므로, 이 또한 최소한 인류의 예술창작이 지닌 우수성에 대해 어느 정도 애착을 가지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그러나 오늘날, 대중을 바보로 여기는 클린턴 진영의 지지자들은 무엇을 보여주고 있는가? ‘평범남’, ‘평범녀’들을 경멸하는 인간혐오 허무주의자들이 보여주고 있는 것에는 생물학적 결정론에 따라 규정된, 앞날이 존재하지 않는 운명론적 시각 외에 무엇이 있는가?
트럼프에 대해 목소리를 높이는 비판가들 중 일부는 시민권 운동이나 노동조합 운동 등 과거의 포퓰리즘적·휴머니즘적 대결집을 본받기는커녕, 공포와 경멸로 가득한 엘리트주의적 전통을 따르고 있다. 오늘날 우리가 진정으로 맞서야 할 대상은 고삐 풀린 포퓰리즘이 아닌, 포퓰리즘이 무엇인지를 규정하고 서민계층이 품을 수 있는 열망은 무엇인지를 규정하는 혼란스러운 논의일 것이다.
* 본 기사의 영문판은 미국의 온라인 저널 <더 배플러>(The Baffler) 3월호에 게재됐다.
글·안젤라 네이글 Angela Nagle
언론인
번역·김보희 sltkimbh@gmail.com
고려대 불문과 졸업. 한국외국어대 통번역대학원 졸업. 역서로 <파괴적 혁신> 등이 있다.
(1) 제라르 모제, ‘종잡을 수 없는 포퓰리즘의 여정’,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한국어판, 2015년 2월호
(2) Ann Coulter, <Demonic. How the Liberal Mob Is Endangering America>, Crown Forum, New York, 2011
(3) John Carey, <The Intellectuals and the Masses. Pride and Prejudice Among the Literary Intelligentsia, 1880-1939>, Faber, 1992
(4) 트레일러에는 주로 빈민층이 거주한다. 브누아 브레빌, ‘내팽개쳐진 미국의 트레일러족’,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한국어판, 2016년 2월호
(5) 벤자민 페르난데즈, ‘머레이 북친의 생태주의 또는 야만주의’,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한국어판, 2016년 8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