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의 엘리트 민주주의엔 ‘이유’가 있다!

2017-04-28     장루이 로카 | 파리 시앙스포 교수

한편에는 국민에 의한, 국민을 위한 통치를 옹호하는 ‘민주주의자들’이 있고, 다른 한편에는 일당 독재를 지지하는 ‘권위주의자들’이 자리한 모습. 대부분의 서방 언론들이 그려 보이는 중국의 정치구도다. 하지만 실제로 두 진영은 그렇게 동떨어져있지 않다. 양측 모두 국민에 의한 통치가 안정과 화합 속에서 공익을 증진시키려면 어떤 조건이 필요한지를 규명하고자 하는 듯하다. 


그런데, 중국의 자유주의자나 반체제 인사들조차 직접 민주주의로는 이런 공익증진이 불가능하다고 여긴다. 농민과 이주민(1)이 대다수를 차지하는 국민은 본연의 욕망과 본능에 사로잡혀 있기에 온갖 조종 앞에서 취약하며, 따라서 ‘참된’ 민주주의는 인구 중 ‘시민’ 계층, 즉 도시 중산층을 기반 삼아 국민적 결정의 방향을 잡아줄 수 있는 엘리트를 통해서만 비로소 가능하다는 이야기다. 

대중은 세속적이고 비천한 행복을 원한다?

민주주의에 대한 이런 이해방식은 새로운 것도, 중국 고유의 것도 아니다. 19세기 유럽에서도 국민을 이끌기에 적합한 체제가 갖추어졌을 때만 선거를 고려했으며, 오늘날에도 많은 이들이 민주주의에도 관리가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오늘날 중국에서는 민주화와 대의제라는 문제가 정치토론을 지배하고 있다. 지극히 당연한 이야기지만, 강력한 국가와 안정적 체제를 지지하는 이들은 국민의 직접적 의사표현을 과도하게 허용하는 개혁에 반대한다. 중국의 과거 혁명 경험에 비추어서든 아니면 일종의 유교사상 회복을 지지해서든,(2) 이들 ‘보수주의자’는 천박한 물질적 이해관계에는 무심하며 카리스마를 갖춘 엘리트 통치자들만이 국민의 이익을 수호할 수 있다고 여긴다. 

이보다 놀라운 것은, 내로라하는 자유주의자들조차 국민주권의 확대에 관해 매우 신중한 태도를 취한다는 사실이다. 중국 전문가인 에밀리 프렌키엘(3)이 지적하듯, 이들은 투표권 부여에 찬성하면서도 개인들이 이런 권리를 누리기에 앞서 자신의 책무를 온전히 자각하는 시민이 돼야 하며, 그렇지 않으면 나쁜 지도자들을 선택할 위험이 있다고 여긴다.(4) 이런 맥락에서 역사학자 쉬지린은 “개혁을 점진적으로 실시할 필요가 있다”고 강조한다. 또한 철학교수 런젠타오는 “(중국공산당 스스로) 당의 개혁은 운명이며 이를 피할 수 없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게 바람직하다”고 말한다. 상하이 푸동대 교수인 덩정라이는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중국은 거대하고 인구도 매우 많다. 하나의 정책만으로 변화를 일으킬 수 없다. 경제개혁만 봐도 전국에 걸쳐 단번에 획일적으로 실시되지 않았다. 이런 게 바로 중국인들이 지닌 일종의 지혜다. (…) 인내심을 발휘해야 한다. (…) 그래야 필요할 경우 후퇴할 줄도 안다.”

한편 정치학자 리창은 투표권을 부여하기 이전에 현대적 국가 및 시장경제를 구축하고 개인의 자유를 보장하며 시민사회도 어느 정도 허용할 필요가 있다고 주장한다. 이것은 보다 야심찬 개혁에 앞서 달성할 ‘제1단계’라고 리창은 말한다. 그가 말하는 보다 야심찬 개혁도 ‘서구 현대 민주주의’를 뜻하지는 않는다. 리창은 “우리(중국) 전통의 무게 때문에 그건 불가능하다”고 본다.

해외에도 잘 알려진 중국의 자유주의자 위커핑은 민주주의를 ‘좋은 통치’, 즉 정직한 기술관료(Technocrat)들의 지배와 동일시한다.(5) 유명 블로거 한한의 시각은 단호하다. “지식인들은 민주주의를 자유와 동일시한다. 하지만 대부분의 중국인들은 자유를 언론, 문학, 예술, 선거, 여론, 정치 등과 하등 상관없는 것으로 여긴다. (…) 인맥이 없는 이들(즉, 권력자들과 알고 지내거나 사회적 자본을 가지고 있지 못한 이들)에게 자유란 소리를 지르고 길을 마구 건너다니고 바닥에 마음대로 침을 뱉을 수 있는 것을 뜻한다. 인맥을 약간 누리는 이들에게는 자유가 자신이 원하는 대로 법을 어기고, 법과 규정의 허점을 이용해 자신이 바라는 온갖 해를 유발할 수 있는 것을 의미한다.”(6) 즉, 민주주의를 속속들이 이해하고 온전히 누릴 수 있는 계층은, 엘리트밖에 없다는 것이다.

어쩌면 이 모든 부정적 판단은 그저 중국공산당의 선전이 워낙 막강하며 권위주의 전통이 여전히 유효하기 때문에 생긴 걸지도 모른다. 하지만 2010년 노벨평화상 수상자이자 ‘08헌장’(7) 서명자이며 자신이 발표한 글들 때문에 2008년부터 수감생활 중인 류샤오보의 말도 다르지 않다.

“이익을 우선시하는 비천함과 대조적으로 자유를 우위에 두는 고결함은 소수 엘리트에게서나 찾아볼 수 있다. (…) 구시대 귀족들이 사라진 이래 현대사회의 자질을 평가하는 기준은 다수를 견제하는 소수의 역량이다. (…) 이들 소수의 엘리트는 약자의 운명을 걱정하고 정치권력을 비판하는 한편 대중의 취향에 저항할 줄도 안다. 즉 이들은 동시에 권력과 대중을 상대로 자신들의 자율성과 비판정신을 지킬 줄 안다. 이들은 비판을 통해 정부를 감시하며 대중을 이끈다.” 류샤오보는 또 이렇게 덧붙인다. “대중이 원하는 건 세속적이고 비천한 행복이다.”(8) 
민주주의를 가장 지지하는 지식인들조차 엘리트주의를 주장하는 것은 지난 30년 동안 놀라운 생활수준 향상을 경험한 동포들이, 이제 그저 소비에만 혈안이 돼있음을 확인하고 씁쓸함과 환멸을 느꼈기 때문일까? 실상, 민주주의 지지자들은 이른바 ‘중국의 기적’ 이전에도 그다지 민중을 가까이 하길 원치 않았다. 1989년 톈안먼 광장 운동의 분석 자료를 다시금 읽어보면 알 수 있다. <톈안먼 페이퍼>에서 저자 장량은 당시 운동이 실패한 원인으로 중국공산당 수뇌부 개혁주의자들의 취약성, 학생운동 내부의 의견 불일치, 지식인 대 노동자·농민으로 나뉜 단절 구조, “그리고 엄격한 조직과 상세한 계획의 부재”(저자가 강조한 부분)를 꼽았다.(9) 
 
이런 단절의 이유는 학생들이 자신들이 벌이는 활동의 순수성을 지키고자 했기 때문이다. 이들의 정권 비판은 정치적·도덕적 측면에 초점이 맞춰졌을 뿐, 경제적 이해관계가 동기는 아니었다. 이들은 질서 유지와 경제생산성 보전에 애쓰는 국익의 수호자로 자리매김하기를 원했다. 학생지도자 및 단식투쟁자들은 자신들의 ‘순수성’과 평안을 지킨다는 명목으로 천박한 경제적 이해관계를 방어하는 이익집단들(노동자 및 농민)이 제공하는 호위를 받았다. 이들을 만나기 위해서는 신원확인까지 거쳐야 했다.(10) 

시대를 거슬러 올라가 중국의 초기 자유주의자들의 저술을 한번 살펴보자. 량치차오(1873~1929)는 중국에 민주주의를 도입했다는 평가를 받는 인물로, 중국 민주주의의 주요 사상가였다. 그가 과거의 세력이나 전체주의의 영향을 받았을 리는 만무하다. 그럼에도 그가 미국여행에서 돌아와 쓴 글은 류샤오보의 주장과 일맥상통한다.

“세계 곳곳의 사회들을 보면, 샌프란시스코의 중국인 공동체처럼 무질서한 곳은 없다. 이유가 뭘까? 답은 자유다. 중국에 있는 중국인들이라고 그 본성이 샌프란시스코의 중국인들보다 나을 건 없다. 하지만 중국인들이 적어도 자기나라에서는 관료들의 통치를 받고 아버지와 형들의 통제를 받는다. 오늘날 자유, 입헌주의, 공화주의는 다수에 의한 통치를 뜻한다. (…) 만일 우리가 지금 민주주의 체제를 도입한다면 그건 바로 국가적 자살행위와 다름없다. 요컨대 현재로서는 중국국민을 전제적 방식으로 통치할 수밖에 없다.”(11)

이쯤 되면 더 말할 게 없다. 시대를 통틀어 대부분의 중국 지식인들은, 민주주의를 국민의 직접적 정치주권 행사로 생각하지 못했다. 그들에게 민주주의는 기껏해야 국민에게 양도된 일체의 시민적 자유였으며, 이런 자유 덕분에 각자 자신의 시각을 표현하고 자신의 이익을 수호하며 나아가 자신이 선호하는 바를 드러낼 수는 있으나, 이는 어디까지나 소수의 통치자들이 실시하는 과두정이라는 틀과 통제 하에서 이뤄져야 한다고 봤다.

이런 개념은 ‘민주주의적 대의’를 지지하는 서구 투쟁가들에게 절망감을 안겨 줄 뿐이다. 하지만 아울러 이를 환영하는 관측자들도 있다. 이들은 중국식 민주주의가 서구 모델에 대안적 해법을 제시해줄 수 있다고 본다. 이들이 유교사상이나 공산주의 같은 중국전통의 영향을 받아서 그러는 건 아닐 것이다. 미셸 아글리에타와 궈바이의 <중국적인 길>은 이런 시각을 보여주는 대표적 저서이다. 저자들은 대의민주주의가 아닌 다른 방식으로 정치 변화를 이룩할 수 있다고 장담한다. 그들은, “정치에서 윤리의 역할에 대해 교육을 받은 고위책임자들이 하위책임자들을 긴밀하게 통제하는 관료주의 조직을 통해 이것이 가능하다”고 주장한다. 이런 체제의 중심에는 “유교주의 윤리원칙에 따라 통제를 받는 관료주의”가 자리 잡고 있다. 자본주의와 세계화의 폐해가 횡행하는 가운데 “진정한 귀족을 규정짓는 것은 지적, 도덕적 우월성이며 이는 합당한 사회적 지위, 정치적 기능, 물질적 풍요함으로 보상받아야 한다”고 저자들은 말한다.(12)

두 저자는 엘리트 스스로 규정한 성과주의 제도에 따라 선발된 엘리트에게 권력을 맡겨야 한다는 중국 자유주의자들의 생각에는 동의한다. 그러나 이들은 중국의 관료조직이 효율적이고 공정하며 고로 중국이 필요로 하는 엘리트를 대표한다고 생각한다. 이점에 있어서 중국 자유주의자들과는 의견이 다르다. 

그들이 말하는 ‘국민’은 어떤 이들인가

그런데 한번 생각해보자. 국민의 욕구를 충족시켜주되 이들이 권력을 쥐는 것은 막아야 한다니, 대체 그 국민은 어떤 이들인가? 19세기 이래 국민은 가난하고 못 배운 사람들을 총칭해왔다. 국민은 농민과 소상인, 그리고 시대에 따라서는 노동자(1990년대 말까지) 혹은 이주노동자(현재)까지 아우른다. 이런 사회계층의 구성원들은 ‘자질’ 미달로 시민 역할을 수행하기에 역부족이라는 평가를 받는다. 여기서 ‘자질’은 교육수준 뿐만 아니라 좋은 취향, 매너, 아울러 예의, 위생, 교양, 정신고양 수준까지 의미한다. (교육 받은) ‘도시’와 (무지한) ‘농촌’의 구분은 오늘날에도 중국사회 내부를 나누는 주요 경계선을 이룬다. 과거 노동자 계층의 상당수는 중산층, 즉 교육 받은 계층에 합류했고, 사회계층구조의 하위에는 농민과 이주민들만이 남아있다. 문제는 이들이 여전히 인구의 대다수를 차지하며 잠재적 유권자층을 형성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들에게 나라의 열쇠를 맡기기를 꺼려하는 이유가 여기 있다.

국민을 미심쩍어하는 건 비단 중국 민주주의자들만이 아니다. 사실 민주주의 실시를 제한하려 드는 건 모든 자유주의자들의 공통된 반응 아니던가? 19세기 후반 프랑스에서 벌어진 정치 논의가 이를 잘 보여준다. 당시의 논의는 오늘날 중국에 관한 질문들과 공통점이 많다. 프랑스에 제2제정이 등장하자 공화주의자들은 충격을 받았다. 역사가 클로에 가보리오는 이렇게 말한다.(13)

“농민들은 과거 유력인사들과 집권 공화주의자들로부터 등을 돌리고 루이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에게 (…) 지지를 보냈다. 그들의 충성심은 시간이 갈수록 굳건해졌다. 농촌 유권자들은 20년 넘도록 제정의 최고지지 세력을 형성했다.” 가보리오에 의하면 대부분의 공화주의자들은 농촌주민들(당시 프랑스 인구의 70% 차지)이 민주주의를 배신했다고 여겼고 “프랑스 국민 대부분이 시민권과 공화정에 부적합하다고 간주”했다. 이처럼 농민을 “시민권의 반(反)모델로 제시”했는데 이는 농민들의 본성 때문이 아니라 그들이 생활여건상 정치의 의의를 이해하지 못하고 “국가에 통합되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본 것이다. 농민들의 정치적 무관심은 보편적 문제들에 대한 교육과 시야가 미흡하기 때문이라는 이야기다. 가보리오는 말한다.

“공화주의 역사에서 필연적으로 반복되는 반전의 상황 속에서, 공화국이 시민 일부를 규합하는 데에 겪는 어려움은 국민 통합 자체의 어려움으로 탈바꿈한다.”

당시 프랑스에서처럼 오늘날 중국에서도 문제는 농민이다. 그런데 가보리오는 “보나파르트파 농민 중에는 배운 이들이 못 배운 이들보다 많았다”고 지적한다. 물론 농민들이 보수파에게 표를 던지고 파리코뮌 혁명을 거부한 건 사실이다. 그러나 이들은 선거제를 어떻게 이용할 수 있을지를 금세 간파했다. 

이후 유럽에서는 민중의 표상에서 농민을 ‘서민계층’이 대체했다. 그렇지만 다수결 원칙이나 직접 민주주의 시행 이외의 방식을 토대로 총체적 의사를 결정할 필요성을 주장하는 목소리는 여전하다. 일부 정치인들은 국민투표에서 자신들이 던지는 질문을 시민들이 과연 제대로 이해할 수 있는지, 그 역량에 의구심을 품는다.(14) 그러면서 기술관료 및 전문가들의 분석을 바탕으로 ‘보다 합리적인’ 선택을 하자고 주장한다. 하지만 이들 법률가와 전문가와 통치자를 과연 어떤 방식으로 선발할지에 대해서는 아무런 언급도 하지 않는다. 이들의 정당성을 인정하는 건 ‘엘리트’의 몫임을 암묵적으로 의미하고 있다.

다시 한 번 말하건대 중국이 택한 우회로는 시사하는 바가 크다. 국가의 현대화에 기여해야 한다는 요구를 마주한 중국 지식인들이 ‘현대’사회가 수십 년 전에 진작 풀었어야 할 의문들을 다루고 있다. 그들은 신화화된 민주주의를, 마찬가지로 신화화된 중국적 특수성에 적용시키려 하고 있다. 이를 계기로 19세기부터 오늘날까지 어떻게 민주주의 대원칙들이 역설적이게도 민주주의 실시를 제한하는 장치 및 이데올로기를 탄생시키는 방향으로 이용돼 왔는지를 재발견하게 된다.

결국 이 모든 논의는 피상적이며 반복적일 뿐이다. 논의 주체 대다수가 본질에는 합의점을 찾은 상태에서 사회의 올바른 통치를 위해 마련해야 할 기술과 규범에 관해서만 이견을 보이기 때문이다. 이들은 정부가 공익을 도모해야 한다고, 즉 국민의 복지를 보장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 방법은 지식을 갖추고 이미 통치를 하고 있는 자들만이 알고 있다고 본다. 성실한 직무 수행에 적합한 우월한 역량과 윤리의식을 갖춘 (어떻게 갖추는지는 모르겠지만) 능력중심 엘리트가 이끄는 민주주의를 실시하자고 이들이 제안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이는 곧 국민과 엘리트, 통치자와 피통치자, 배운 자와 그렇지 못한 자 간의 비대칭 원칙의 수용으로 이어진다. 민주주의 제도는 이런 현실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물론 민주주의적 혹은 능력주의적 절차를 통해 어느 정도는 엘리트의 쇄신이 이루어질 수도 있다. 가령 선발시험을 실시하거나 관료 ‘감독위원회’를 설치할 수도 있고, 미디어, 법, 비정부기구(NGO)에 더 많은 권력을 부여할 수도 있으며 각종 참여민주주의 절차들을 마련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이런 혁신의 혜택을 보려면 문화, ‘구별성’, 기술역량, 사회적 편안함, 인간관계 등 지배자들이 규정한 자질들을 갖추고 있어야 한다. 미디어, 법원, NGO, 행정기관들은 이미 임의적으로 성공의 기준을 설정해 권력관계와 선별관계를 두고 있다. 

중국처럼 대의민주주의를 채택하지 않은 사회도 이런 합의(Consensus)에서 예외는 아니다. 엘리트가 국민을 통치하는 정부의 필요성에는 신유교주의자, 자유주의자, 기관원, 반체제인사 할 것 없이 모두가 동의한다. 대의민주주의의 최적 운영을 보장해줄 만한 수준의 교육, 소득, 품위, 성실성을 갖추고 헤게모니를 쥔 중산층의 출현을 모두가 염원하고 있다. 그렇게 되면 중국에는 잘 벌고 잘 배운 개인들, 행복한 소유주와 소비자들, 고로 무엇이 중요한지 완벽하게 알고 있는 시민들이 충분히 많아질 것이다. 이들은 (공익과 일치한다고 간주되는) 자신들의 이익을 방어하고 법과 현대성뿐만 아니라 안정성을 수호하는 데에 앞장설 것이며, 그러는 과정에서 식견 있는 지도자들을 택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요컨대 그 모든 사상가들 간의 의견충돌은 나라에 필요한 엘리트의 유형에 관한 것일 뿐이다. 이로써, 중국이 정치 분야에 있어서도 현대세계의 어엿한 일원임이 증명됐다.   




글·장루이 로카 Jean-Louis Rocca
파리국립정치대학(시앙스포) 교수 겸 국제연구센터(CERI) 연구원. 저서 <The Making of the Chinese Middle Class. Small Comfort and Great Expectations, Palgrave Macmillan>, New York, 2017.

번역·최서연
한국외국어대 통번역대학원 졸업


(1) 도시에서 일하는 농촌 출신 중국인. 농민공(農民工).
(2) 1990년대 말부터 정치학자들은 중국의 민주화라는 과제에 유교적 원칙들을 접목시키려 하고 있는데, 통치자에게 도덕적 권위를 요구하는 것이 대표적이다. Cf. Daniel A. Bell, <China’s New Confucianism: Politics and Everyday Life in a Changing Society>, Princeton University Press, 2010.
(3) Émilie Frenkiel, <Parler politique en Chine. Les intellectuels chinois pour ou contre la démocratie (중국에서 정치를 이야기하다. 민주주의에 찬성 혹은 반대하는 중국 지식인)>, Presses universitaires de France, Paris, 2014.
(4) Émilie Frenkiel, <La Démocratie conditionnelle. Le débat contemporain sur la réforme politique dans les universités chinoises(조건부 민주주의. 정치개혁에 관한 중국대학의 현대적 논의)>, 2012년 6월 25일 발표 논문, 파리 국립사회과학고등연구원(EHESS).
(5) Yu Keping, <Democracy Is a Good Thing: Essays on Politics, Society, and Culture in Contemporary China>, Brookings Institute Press, coll. <The Thornton Center Chinese Thinkers Series>, Washington, DC, 2009.
(6) Han Han, ‘혁명에 관해’, 2011년 12월 23일, http://blog.sina.com.cn(중국어)
(7) 2008년 발표된 선언문으로 민주적 헌법 도입을 주장.
(8) Liu Xiaobo, <La Philosophie du porc et autres essais(돼지의 철학 그리고 기타 에세이)>, Gallimard, coll. <Bleu de Chine>, Paris, 2011.
(9) Zhang Liang, <Les Archives de Tiananmen(톈안먼 페이퍼)>, Le Félin, Paris, 2004.
(10) Craig Calhoun, ‘Revolution and Repression at Tiananmen Square’, <Society>, 제6권, 26호, 1989년 9~10월.
(11) Liang Qichao, <Land Without Ghosts: Chinese Impressions of America from the Mid Nineteenth Century to the Present>, University of California Press, Oakland, 1989.
(12) Michel Aglietta, Guo Bai, <La Voie chinoise. Capitalisme et empire(중국의 길. 자본주의와 제국)>, Odile Jacob, coll. <Économie>, Paris, 2012.
(13) Chloé Gaboriaux, <La République en quête de citoyens. Les républicains français face au bonapartisme rural(시민을 찾는 공화국. 농촌 보나파르트주의에 대항한 프랑스 공화주의자)>, Presses de Sciences Po, Paris, 2010.  
(14) 독일 사회민주당 소속 유럽의회 의원 마르틴 슐츠의 2016년 4월 12일자 LCI 방송 발언 참고. 알랭 가리구, ‘국민투표의 위험한 일반화’,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한국어판, 2016년 8월.


선거 확대에 인색한 중국

중국 정치제도에서 선거의 역할은 부수적이다. 권력은 중국공산당 중앙위원회 총서기가 쥐고 있는데, 이 자리는 원칙적으로 선출직이지만 사실상 정치국 위원들이 정한다. 국가 주석과 부주석, 국가 중앙군사위원회 주석은 전국인민대표대회(약칭 ‘전인대’)에서 선출한다. 그러나 전인대의 선거정당성은 매우 한정적이다. 기초의회들(주로 현급·향급 행정구)이 보통선거(후보와 당선자들은 엄격하게 선별)로 구성되는 반면 3천여 명의 전인대 인민대표들은 기나긴 간접선거 과정을 통해 선출된다. 전인대는 주로 성급 정부 대표들 및 다양한 사회부문과 조직의 대표들로 구성된다. 군인, 노동자, 소수민족, 지식인, 민간기업인들까지 아우르며 30여 명의 갑부들도 포함돼 있다. 

지방선거에 무소속 후보도 출마할 수 있으나 당선될 가능성은 희박하다. 반면 지방당국의 추천을 받아 당선된 민간기업인들의 수는 점차 늘어나고 있다. 요컨대 이들 지방의회는 각종 사회분야를 대표하며 당 기관의 선택을 받은 이들이 모인 곳이다.

지방의회 선거를 제외하고 중국 국민이 투표권을 행사할 수 있는 기회는 단 두 번이다. 도시의 경우 주민위원회 선거가 있는데 심혈을 기울여 선정한 후보자 명단에서 위원을 뽑는다. 그러나 주민위원회의 영향력이 약하다보니 참여도가 별로 높지 않으며, 간혹 위원들을 지명하기도 한다. 

촌민위원회의 경우는 보다 흥미롭다. 60만 곳이 넘는 중국의 촌들이 거의 모두 직접선거를 실시한다. 그러나 대부분의 경우 그 의미는 크지 않다. 이들 위원회의 권한이 일상적 업무로 제한돼 있는데다가 그나마 당 위원회에 밀려 더욱 축소되기 때문이다. 그래도 이들 선거는 적어도 한시적으로나마 무능하거나 부패한 인사들을 배제시키는 수단이 되기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