튀니지, 과거의 망령과 마주하다

2017-04-28     티에리 브레지용 | 언론인

지난 해 11월, 튀니지에서 본격적인 역사청산작업이 시작됐다. 비로소 지네 엘 아비디네 벤 알리는 물론 ‘독립의 아버지’로 불리던 하비브 부르기바 정권 하에 자행된 각종 인권탄압의 희생자들이 과거의 진실을 밝히기 위해 증언대 앞에 섰다. 은폐된 과거의 증언은 튀니지 사회에 공분과 함께 여론의 분열을 일으키고 있다. 불안정한 정국이 지속되는 가운데, 많은 구(舊)정권의 지도자들은 과거의 잘못에 대한 책임을 거부하고 있다.


2016년 11월 17일 이후, 진실존엄위원회(TDC: Truth and Dignity Commission)는 과거 독재정권이 자행한 인권탄압 희생자들을 상대로 증언청취를 실시 중이다. 진실존엄위원회란, 전환기의 정의(Transitional Justice: 정치적 체제 전환기에 진행되는 과거 중대한 인권 침해에 대한 책임자들의 처벌 및 재발방지 조치. 과거청산을 의미-역주)를 구현하려는 목적으로 설치된 튀니지의 공식 기구를 말한다. 튀니지가 프랑스 식민통치로부터 독립하기 1년 전인 1995년 7월부터, 진실위 설립관련 법률이 제정된 2013년 12월까지 일어난 각종 인권침해사건에 대한 진상조사 및 책임규명을 맡고 있다. 활동기간은 2017년 6월까지로 예정돼 있는데, 그 동안 100건이 넘는 피해자들의 증언이 국영방송과 각종 민영방송을 통해 중계될 것으로 보인다.

고통과 치욕의 증언들은 어떤 의미를 지니는가

매회 피해자들의 증언이 이어질 때마다, 과거 하비브 부르기바(1957~1987)와 지네 엘 아비디네 벤 알리(1987~2011) 독재정권에서 자행된 잔혹한 국가폭력이 낱낱이 실체를 드러내고 있다. 신체적, 정신적, 사회적으로 송두리째 삶이 파탄 난 희생자들의 참담한 증언은 많은 국민들의 공분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했다. 물론 벤 알리 정권의 몰락으로 혼란스런 정국이 이어지는 이 때, 과거청산을 진행하는 것이 적절한 지를 두고 논란이 분분하다. 그러나 이런 논란을 넘어, 분명 피해자들의 증언은 튀니지 국민들에게 수많은 중요한 의문을 제기하고 있다. 우리가 수호해야 할 전통가치는 무엇인가? 진정 국가를 위해 일한다고 말할 수 있는 자는 누구인가? 과거의 인권탄압행위에 대해 대체 어떤 의미를 부여해야 하나? 한 마디로 정치적 격변은 튀니지 역사를 새로 쓰는 계기가 될까?

지난 60년 간, 튀니지의 ‘합법적’ 역사를 진술할 수 있는 주체는 오로지 국가뿐이었다. 초기에는 사법적 차원의 여성해방과 교육을 바탕으로 봉건적 체제를 타파하고 튀니지를 현대적 사회로 개혁하는 데 앞장선 선지자라고 알려진 부르기바의 입을 통해 튀니지의 공식역사가 기록됐다. 그 다음 해방에 대한 어떤 야망도 비전도 없이, 그저 전임 대통령이 표방한 현대화라는 수사학만 되풀이하는 벤 알리가 바통을 이어받았다.(1)

공식역사에 대한 뒤늦은 반응이라고 해야 할까, 아니면 시민의 발언권 회복이라고 해야 할까. 증언대에 선 희생자들의 발언은 그동안 국가에 의해 기록된 튀니지 공식역사의 어두운 민낯을 고스란히 폭로했다. 피해자들의 입을 통해 그동안 독립국가 튀니지 건설에 기여한 수많은 여러 이념세력의 등장과 그들을 상대로 한 국가의 잔혹한 탄압의 역사가 줄줄이 밝혀졌다. 1955~1956년 튀니지민족운동의 일환으로 부르기바와 경쟁하던 라이벌 살라 벤 유세프(2)의 축출에서부터, 1960~1970년대 극좌파 세력에 대한 탄압, 1970년대 아랍민족주의 운동에 대한 탄압, 1978년 1월(검은 목요일)과 1984년 1월(빵 폭동) 발생한 사회운동에 대한 유혈진압, 이슬람주의 세력에 대한 1980년대 탄압과 1990년 축출, 극좌파 계열 학생운동에 대한 지속적인 탄압, 2008년 가프사 탄광촌 시위에 대한 무차별적 진압, 마지막으로 2010~2011년 겨울 민중저항에 대한 무력 저지에 이르기까지, 독재탄압으로 점철된 튀니지의 역사가 낱낱이 모습을 드러냈다.

피해자의 증언청취가 지니는 일차적 목표는 결코 국민들에게 역사 강의를 하려는 것이 아니다. 독재탄압이 인간에게 미친 영향을 생생히 복원하려는 데 있다. 피해자의 증언이 하나씩 이어질 때마다 서서히 고통과 공포, 치욕, 송두리째 망가진 삶, 산산조각 난 정의구현의 꿈, 국가폭력으로 파탄 난 가족들 등으로 이뤄진 커다란 그림이 차츰 완성된 모습을 드러냈다. 지면상 여기서는 그 중 일부만 복원하고자 한다. 가장 아픈 참담한 증언들이 역사상 처음으로 아주 자세하게 벤 알리가 이끄는 경찰국가의 잔혹성을 고스란히 폭로했다. 물론 1987년 11월 7일 ‘의료 쿠데타(당시 총리이던 벤 알리는 부르기바가 대통령직을 수행할 수 없을 만큼 건강이 나쁘다는 이유를 들어 부르기바를 강제 퇴진시켰다)’ 이후 잠시 자유화에 대한 희망이 꿈틀대는 듯 했다. 그러나 1990년 이후 또 다시 이슬람주의 세력에 대한 대대적인 국가 탄압이 시작됐다. 자유 말살에 앞장 선 벤 알리 정권은 세속주의 정당을 포함해 그 누구의 비판이나, 이견도 허락하지 않았다.  

대표적인 예가 1991년 10월 체포된 이슬람주의 지지자 사미 브라헴의 사례였다. 기소과정 내내 고문을 되풀이 당한 그는 재판소로 넘겨졌다. 이어 그의 눈앞에, ‘유혈투쟁에 가담한 증거’로 나무총이 내밀어졌다. 판사마저 어이없이 웃음을 터뜨릴 ‘증거’였으나, 그는 징역 8년형을 언도받았다. 그러나 진짜 지옥은 감옥에 발을 들인 그때부터 시작됐다. 사미 브라헴은 “아부그라이브 수용소(2003년 미군이 이라크 감옥으로 사용)에서 일어났다고 알려진 거의 모든 일들이 다 튀니지 감옥에서 일어났다고 보면 된다”고 말하며, 일례로 독립기념일인 1994년 3월 20일의 사건에 대해 증언했다.

“재소자 전원이 알몸으로 마당에 집합했다. 간수들은 몽둥이를 들고 위협하며 재소자들에게 강제로 성관계를 맺게 했다. 교도소가 고용한 ‘심리학자’ 한 명이 참관자로 이 장면을 지켜봤다. 나는 그 날 극심한 정신적 충격을 이기지 못하고 신경발작을 일으켰다. 그들은 기어이 나를 보건실로 끌고 갔다. 그리고 그곳에서 남자 간호사들이 내 정신을 철저히 파괴하겠다고 작심한 듯, 은밀한 부위에 에테르를 붓더니 거세를 하러 달려들었다.”  

노동조합원이자 교사인 바시르 라아비디도 2008년 1~6월 가프사 탄광촌 시위에 참가했다. 6월 6일 정부의 대대적인 진압이 이어진 뒤, 7월 1일 그도 경찰에 체포됐다. “그들은 아들과 나 사이를 이간질하기 위해 같이 체포된 아들이 나를 배신했다고 믿게 하려 했다. 그들은 바로 옆 감방에서 아들을 고문했다. 아들이 고통에 절규하는 목소리가 생생하게 들려왔다. 이어 2시간 뒤 경찰은 내가 보는 앞에서 아들을 강간하겠다고 협박했다.”

육체적, 정신적, 사회적으로 
철저히 파괴하려 하다

그들은 고문을 통해 희생자들의 육체와 정신에 폭력을 가하는 데 그치지 않고, 그들을 사회적으로도 철저히 파괴하려 했다. 벤 알리 정권이 이슬람주의 정당 엔나흐다당을 제거하려던 시기가 특히 그랬다. 그들은 하루에도 몇 번씩 경찰서로 불러들이거나, 번번이 고용주를 찾아가 취업을 방해하거나, 강제로 결혼생활을 파탄 내는 등 온갖 악랄한 방법을 동원해 엔나흐다당의 당원과 지지자들을 가난으로 내몰아 사회로부터 고립시키려 했다. 엔나흐다당뿐 아니라 다른 좌파 반체제인사들을 상대로도 마찬가지였다. 가령 2014년 6월 이후 진실존엄위원회의 대표를 맡은 인권운동가이자 언론인인 시헴 벤 세드린 역시 정부의 온갖 박해와 협박, 모욕에 시달렸다.

몇몇 증언에 의하면 잔혹한 인권탄압은 이미 부르기바 시대부터 자행됐다. 대표적인 예가 튀니지 중부도시 가아푸르에서 활동 중이던 공산당 당원, 나빌 바라카티의 사례였다. 그는 정권에 적대적인 유인물을 작성한 죄로 1987년 5월 8일 국가 근위대 초소로 끌려가 ‘개죽음’을 당했다. 형 리드하가 동생이 당한 잔혹한 수난에 대해 증언했다.

“세세한 부분까지 말씀드리지는 않겠습니다. 다만 그들이 동생의 손톱을 모조리 뽑아내고, 머리카락을 불태우고, 살을 갈기갈기 찢어버렸다는 정도만 말하죠. 동생의 얼굴은 만신창이가 됐습니다. 마치 저승사자를 물리치기 위해 사용했다는 흉측한 카르타고의 가면을 보는 것만 같았습니다!”

청문회의 하이라이트는 일부 희생자들이 가족의 만류를 물리치고 어렵게 털어놓은, 차마 입에 올리기도 수치스러운 성적 학대에 대한 기억이었다. 자신의 치욕스러운 부분까지 드러낸 희생자들의 생생한 증언은 독재탄압의 역사를 밝히는 데 큰 기여를 했다. 그들의 증언은 사실상 2011년 이래 가장 의미 있는 정치적 발언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희생자들의 증언은 치유의 시작이자, 무차별적인 정부탄압을 상대로 거둔 승리의 나팔이었다. 그들의 증언은 마침내 폭력으로 망가진 피해자들의 삶에 독재국가와의 투쟁이라는 의미를 부여해주며, 그들의 삶이 비로소 미래를 향해 나아갈 수 있게 했다. 몇몇 희생자들은 시민들의 지지와 감사 인사를 받았다. 이런 과정은 그들이 마침내 사회 안에 제 몫의 자리를 찾을 수 있게 해줬다. “당신은 우리 머리 위에 있는 영광의 월계관입니다.” 고통스러운 기억을 증언하기 위해 찾아온 한 여성을 향해 경찰관들이 말했다.

더러운 우물은 그냥 덮어버리는 것이 낫다?

라틴아메리카와 동유럽이 겪었던 탈독재 시대의 경험은 우리에게 중요한 가르침을 준다. 과거에 대한 성찰은 언젠가는 과거와 현재의 엘리트층의 화해에 매우 중요한 열쇠가 될 것이라는 사실이다.(3) 사실 과거 청산에서 가장 어려운 문제는 인권탄압이 ‘불가피했다’는 주장과 책임을 물어야 한다는 주장 간의 대립이다. 대개 구 정권의 지지자들은 국가범죄에 대해 일종의 기억상실증, 즉 망각이 지니는 평화적 미덕을 옹호하곤 한다. 가령 프랑코시대 이후의 스페인이 이런 ‘망각협정’의 가장 좋은 예다. 2014년 대통령으로 당선되기 전 치렀던 선거전에서 베지 카이드 에셉시 역시 비슷한 주장을 했다. “나는 과거사 청산에 반대한다. 지금은 튀니지가 앞으로 전진해야 할 때다. 그러기 위해서는 튀니지의 모든 자식을 전부 끌어안아야 한다. 화해에 유리한 분위기를 조성하는 것이 중요하다.” 한 마디로 그것은 재판도, 반성도, 회개도 없는 ‘국가의 화합’을 의미했다.

반면 진실존엄위원회는 진상조사와 책임규명, 사법절차의 연장, 지난 과오의 반성, 재발 방지책 마련, 국가탄압에 대한 올바른 역사 기록 등을 바탕으로 과거사를 철저히 청산하고 넘어가기를 바란다.

오늘날 튀니지에서는 경제위기가 만성화된 가운데 민주주의의 지속성을 의문시하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튀니지 국민들은 전환기의 정의 실현(과거청산)에 대해 각기 엇갈린 입장을 보인다. 어떤 이들은 과거사 청산에 박수를 보내는 반면, 또 어떤 이들은 정치적 갈등을 부채질한다며 과거청산이 몰고 올 후폭풍을 두려워한다. “더러운 우물은 그냥 덮어버리는 것이 낫다.” 물론 벤 알리를 비롯한 전 정권을 용서하려는 마음은 없을 테지만, 어쨌든 많은 이들이 이 속담처럼 과거사 청산에 회의를 느끼는 것은 사실이다.

더욱이 진실존엄위원회는 2013년 12월 엔나흐다당과 그 연대세력이 주축이 된 제헌의회를 통해 출범한 이후 현재 복잡한 상황에 직면해 있다. 지금은 튀니지의 표심이 과거로 회귀한 데다, 역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했던 민주화 운동의 불씨도 많이 사그라진 상태다. 2014년 총선에서는, 2012년 현대화 세력과 옛 집권당 세력을 결집해 이슬람주의 세력을 견제할 목적으로 창당된 세속주의 정당 니다투니스가 승리를 거뒀다. 현 이집트, 리비아, 시리아의 정국 혼란도 ‘아랍의 봄’을 촉발한 혁명의 동력을 상당히 약화시켰다. 정치적 안정을 위해 에셉시 대통령은 엔나흐다당과 연립정부를 구성했다. 그로 인한 간접적 영향 중 하나는 새로운 이슬람주의 지도자들을 정치무대에 참여시키는 대신 구 정권 인사들의 신변을 어느 정도 보호해주는 것이다.(4)

“그들에게 정의를 되찾아줄 때, 
편히 눈 감으리라”

어느새 벤 알리 시대의 인물들이 서서히 정치무대로 복귀하고 있다. 물론 실업자, 민간기업의 노동자, 공해산업의 희생자들이 사회운동을 통해 힘겨운 투쟁을 지속하고 있다. 그러나 주요 언론매체는 이런 상황을 보도조차 하지 않는 실정이다. 혁명기에 싹튼 개혁의 불씨는 조금씩 수그러들고 있다. 엘리트 기득세력이 국제사회의 지지를 얻어 하는 일이라고는 그저 과거와 똑같은 경제정책을 시행하고 현상을 유지하는 것뿐이다.  

현재 진실존엄위원회 활동의 법적 위상은 위태로운 상황에 처해 있다. 특수실에 배치돼 최악의 인권유린행위를 심판할 판사 인선이 지체되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진실위의 교육적 역할 역시 한층 퇴색돼가고 있다. 과거사 청산에 피로를 느끼는 많은 시민들이 더 이상 희생자 증언을 방송하는 TV 시청에 관심을 두지 않기 때문이다. 정치세력과도 무관하고, 엘리트층과의 뒷거래에서도 자유로운, 오로지 혁명으로 상처를 입거나 ‘순교한 자’들의 가족만이 여전히 힘의 논리나 근시안적인 정치체제 앞에 무릎 꿇기를 거부하고 있다. 벤 알리 정권에 반대하는 지역위원회에 참가했다가 2011년 1월 13일 다리에 총상을 입은 모슬렘 카스달라는 이렇게 말했다.

“순교한 자들과 상처 입은 자들의 어미가 이제야 제 자식의 영혼이 평화를 얻었다고 느낄 때 비로소 나도 편안히 눈을 감을 수 있을 것이다. 그들에게 정의를 되찾아주는 바로 그 날에 말이다.”  


글·티에리 브레지용 Thierry Brésillon
언론인

번역·허보미 jinougy@naver.com
서울대 불문학 석사 수료. 한국외국어대 통번역대학원 졸업. 


(1) Kamel Labidi, ‘La longue descente aux enfers de la Tunisie(지난한 튀니지 지옥으로의 하강)’,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프랑스어판, 2006년 3월.
(2) 프랑스 식민정권을 상대로 강경노선을 추구한 정치인이자, 민족주의 정당 신헌정당의 사무총장.
(3) Sandrine Lefranc, <Politique du pardon(용서정책)>, Presses universitaires de France, Paris, 2002년.
(4) ‘Alliance conservatrice à l'ombre de la menace djihadiste(지하디스트의 위협으로 미래가 암울한 보수주의 연대)’,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프랑스어판, 2016년 1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