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렇게 대통령제는 망가졌다

2017-04-28     실비 아프릴 | 릴(Lille) 3대학교수

대통령 직선제를 토대로 한 프랑스 대통령 중심제는 1962년 10월 28일에 국민투표로 채택된 헌법 개정에서 유래됐다. 보나파르트주의(나폴레옹 보나파르트 왕가 치하의 프랑스 제국을 복고시키려 시도하는 것-역주)의 관례를 따라, 드골 장군은 1848년에 시작될 때부터 행정권에 의한 국민주권 존중에 대해 문제가 제기됐던 대통령 직선제를 다시 채택하기로 결정했다.

 
‘대통령 군주제’를 극렬하게 비판하는 장 뤽 멜랑숑은, 자신이 당선된다면 ‘프랑스 제 5공화국의 마지막 대통령’이 될 것이라는 공약을 걸었다. 필립 푸투(프랑스 반자본주의 신당, NPA)나 브누아 아몽(사회당)과 같이, ‘프랑스 불복종당’의 장 뤽 벨랑숑 후보는 제도의 근본적 개혁과 제 6공화국 창설을 위한 운동을 벌였다. 반면 그는 (샤를로트 마르샹디즈(LaPrimaire.org)와 마찬가지로) 오늘을 빛나게 한 1848년의 역사 속 혁명가의 발자취를 따라, 권력을 국민에게 되돌려주기 위한 제헌의회 확립을 주장하면서 두각을 드러냈다.  
 
대통령 직선제는 제 2공화국 헌법에 의해 처음으로 확립됐다. 1848년 2월에 일어난 혁명은 부정 사건과 점점 더 독단적인 정치로 쇠약해진 7월 왕정에 종지부를 찍었다. 임시정부는 새로운 정치규범 확립을 담당할 제헌의회를 구성하기 위해 가능한 한 최단 시간 내 선거를 조직하길 바랐다. 하지만 급진적이고 위험하기까지 한 절차를 비난하는 목소리가 높아졌다. 공화주의자인 프랑수아 뱅상 라스파이유나 사회주의자인 루이 블랑은 “국민은 준비돼 있지 않다”고 말했다. 이들은 국민에게 투표에 대한 책임을 부여하기 전에 국민을 계몽하고, 사회적 대책이 정치문제보다 선행돼야 한다고 주장했다. 1848년 4월 23일, 제헌 의회가 선거를 통해 구성됐다. 의회 구성원은 800명에 달했는데, 이 중 300명은 예전에 대표적인 왕정주의자였으나 공화주의자로 돌아선 사람들이었다.  
 
이윽고 헌법은 봄부터 가을까지 순식간에 마련됐다. 5~6월에 토론이 이뤄졌고, 일주일 후 선출된 18명의 국회의원으로 구성된 ‘헌법 위원회’가 그 업무를 넘겨받았다. 사회주의자 빅토르 콩시데랑과 함께, 오를레앙파인 오딜롱 바로와 쥘 뒤포르, 보수주의자 알렉시 드 토크빌이 모였다.(1) 위원장과 위원회의 보고 책임자 자리는 온건공화주의자 루이 마리 드 라에이에 드 코르마낭과 아르망 마라가 차지했다. 5월 말부터 계획은 의회위원회 앞으로 보내졌지만, 토론은 ‘6월 봉기’ 이후에나 시작됐다. 6월 봉기는 국립작업장(실업자 구제를 위해 1848년에 설립됨-역주)폐쇄 문제를 두고 공화국에서 두 관점이 충돌해 일어났다. 하나는 노동자들의 민주적이고 사회주의적인 ‘참된 공화국’의 관점이고, 다른 하나는 의회제의 관점이었다.   
새로운 헌법을 구상한다는 것이 당연한 생각은 아니었다. 가장 극단적인 공화주의자와 사회주의자는 오히려 1793년 헌법을 시행하거나 1830~1840년대에 구상된 계획에 다시 착수하길 바랐다. 한 번도 적용된 적 없는 (평화를 기대하는) 1793년의 헌법은 처음으로 보통선거(여성을 제외한)와 반직접민주주의를 계획했다. 또한 국민이 직접 집행위원회 후보를 지명하고 모든 법률에 대한 의사를 표명할 수 있도록 의회에 권력을 집중시키려 했다. ‘최초의 의회’에서 뽑힌 국회의원은 1년 동안 국민의 시한적인 대리인으로 여겨졌다. 7월 왕정 치하에 세운 계획에서 이들은 행정권에 제한을 두는 것을 우선시했으므로, 국민주권을 인정하고 필요한 사회개혁을 받아들이도록 행정권을 강제할 방법을 찾았다. 당시 사회문제에 관한 당면과제는 다음과 같았다. 1832년의 ‘인민동지사회’ 계획에서, 프랑수아 뱅상 라스파일은 행정권 문제에 대해 단 몇 줄만을 할애했는데, 행정권은 몇 가지 방법으로 ‘부여’되지만 철회될 수 있으며, 세습되거나 연속될 수 없었다.   
 
1848년 헌법의 축조심의는 9월 4일부터 10월 27일까지 진행됐다. 격렬한 논쟁과 열띤 토론이 7주간 지속됐다. 특히 두 가지 주제가 주의를 끌었는데, 바로 노동권 인정과 단원제(1개의 협의체로 의회를 구성하는 제도-역주)였다. 왕정에 대항해 투쟁했던 노동자들에게, 노동권은 공화국이 했던 약속의 이행이자 동시에 사회문제를 해결할 방법으로 보였다. 9월 5일에 자유주의자 조셉 알콕은 ‘노동권이 증오와 분노, 욕구, 복수의 법’이라고 말했다. 또한 그의 동료인 프로스페르 뒤베르지에 드 오란은 ‘노동권이 사회 붕괴로 향하는 길’이라고 언급했다. 알렉상드르 르드뤼 롤랭의 다음과 같이 말했다.
 
“사람들은 노동권이 사회주의라고 말한다. 나는 대답했다. 그렇지 않다. 노동권은 공화국의 공식적 출범을 의미한다.”
 
롤랭의 이 말에 의하면, 공화주의자와 사회주의자는 2월 25일에 임시정부가 발표한 이 조항을 새로운 공화국의 특수성으로 여겼다. 단원제는, 1791년과 1793년 헌법의 관례를 따라, 선거자격이 직접세의 지불액에 따라 제한됐던 7월 왕정의 ‘상원’이나 총재정부 시대 양원제 입법의회인 ‘500인회’와 ‘원로원’으로 불리게 될 두 번째 합의체의 존재를 거부했다. 양원제를 주장했던 수정안은 289대 530의 득표율로 거부됐다. 한편 국회의원의 임기는 3년으로 정해졌다. 
 
헌법위원회의 계획안은 이 단원제 도입과 직접보통선거로 대통령을 선출하려 했다. 이 계획의 타당성을 입증하기 위해, 미국을 예로 들었다. 이런 체제가 기능을 잘 수행하고 총재정부에 의해 구현된 합의제에 내제된 문제를 피하기에 미국의 형식이 적합하다고 판단한 것이다. 또한 권력이 균형을 이루게 하고, 단일 행정권은 단일 의회와 맞서도록 했다. 오직 두 개의 위원회만이 의회가 5명의 후보를 미리 선발하게 될 복합체제를 변호할 수 있게 했다.
 
왕이든 대통령이든, 
1인에게 부여된 권력은 같다
 
이에 대한 토론은 10월에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들었다. 5개의 주(州)에서 당선된 루이 나폴레옹 보나파르트가 9월 17일에 열린 보충선거에서 압승했다. 펠릭스 피야트 좌파 의원을 비롯해, 이 성공에서 감춰진 왕정을 봤던 입헌의회의원들의 근심이 커졌다. 쥐라 주 공화당 의원인 쥘 그레비는 현재까지도 널리 알려진 수정안을 통해 공식적으로 의회를 계획했다. 그레비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보통선거의 유일한 사실은 대통령에게 지나친 힘을 부여한다는 것이다. 당신들은 나폴레옹 1세가 다시 권자를 세워 그 자리에 앉을 권력을 부여한 것이 공화력 10년의 선거였다는 점을 잊었는가? 바로 당신들이 세운 권력이다! 그런데 당신들은 민주주의 공화국을 건립하고 싶다고 말하지 않았던가! 왕이든 대통령이든, 결국 한 사람에게 부여된 권력은 군주제의 권력일 뿐이다. 당신들이 세운 군주제 권력은 당신들이 타도한 권력보다 더 막강할 것이다. 이 권력은 세습되는 대신 선거로 부여되며 일시적이지만, 자유에는 더 큰 위험이 될 것이다.”
 
그레비가 지적한 위험으로부터 공화국을 보호하기 위해, 입헌의회의원들은 다음과 같은 방책을 마련했다. 의회는 군사력을 가지며 그 규모는 직접 정한다. 또한 대통령이 의회를 해산하고, 업무를 중단하며, 직무 수행을 방해하는 모든 행위는 특별배임죄에 해당한다. 특별배임죄로 인해 대통령의 자격이 박탈되고 법에 따라 고등법원 회의가 소집된다. 게다가 헌법은 퇴임한 대통령이 바로 재선할 수 있는 가능성을 금지하고, 재선 가능성은 4년이 지난 후에만 인정된다. 쥘 그레비는 이 방책에 다시 제한을 걸었다. 이 방책이 권력을 유지하고자 임기 동안 공화국이 전복되는 상황을 피하기 위해 국민에게 약속을 팔아 이득을 취하는 한 사람의 야망을 억누르기에 충분한가? 
 
하지만 그의 논증은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루이 나폴레옹 보나파르트 후보가 가진 위험성은 여전히 납득할 수 없는 수준이었다. 일부 사람들이 그 위험에 대해 분명히 파악했다고 하더라도 말이다. 온건공화주의자 의원인 앙토니 투레의 경우가 이에 해당된다. 북부 지방에서 선출된 그는 프랑스에서 세력을 떨쳤던 보나파르트의 가족들과 마찬가지로 그의 피선거권을 박탈하자고 제안했다. 그러나 그의 수정안은 거부됐으며, 의회는 130대 627의 득표율로 공화국 대통령 선거를 보통선거로 실시하기로 결정했다. 여성이 제외된 ‘보통’선거의 한계성은 전혀 고려되지 않았다. 11월 4일에 헌법이 가결됐다. 헌법 전문은 “신 앞에서 프랑스 국민의 이름으로”라고 선언한다. 한편 제 4조에는 “공화국은 자유와 평등, 박애의 원칙을 기조로 삼는다. 공화국은 가정, 노동, 소유권, 공공질서를 근간으로 한다”는 문구가 기재됐다. 이미 1848년 봄에 노동자들이 꿈꿨던 민주주의 및 사회주의적 공화국과는 거리가 멀었다. 국립작업장이 폐쇄되어 분노한 혁명가들이 항거했던 ‘6월 봉기’가 일어나자 군에 의해 처참히 진압됐을 뿐이었다. 
 
1848년 12월 10일, 나폴레옹 1세의 조카인 루이 나폴레옹 보나파르트가 543만 4,226표를 얻어 당선됐다. 경쟁자인 유진 카베냑이 그나마 그와 가장 근접한 득표율을 얻어 144만 8,107표에 그쳤으며, 사회주의 후보인 프랑수아 뱅상 라스파일은 겨우 3만 7천표를 얻었다. 나폴레옹 1세의 전설적인 위업을 재구현할 새로운 대통령이면서도, 어느 당에도 속하지 않았던 루이 나폴레옹은 새로운 인물로 보이기도 했다. 또한 공상적 사회주의에 물든 <빈곤의 절멸(1844)>의 저자로서, 각계각층의 지지를 받았던 그는 일부 좌파 유권자들의 마음까지 사로잡았다. 질서와 가정, 종교, 소유권의 수호자로서, 그는 ‘푸아티에 거리 위원회’의 우파 왕정주의자들의 지지도 얻었다. 하지만 그의 뛰어난 참모인 중 하나였던 아돌프 티에르는 쉽게 그를 마음대로 부릴 수 있을 것이라고 확신했다. 후에 “그는 우리가 조종하게 될 멍청이다”라고 밝히기도 했다.  
 
1852년에 도래하는 선거일은 선거를 앞둔 1851년에 매우 중요한 문제가 됐다. 재출마가 불가한 퇴임 대통령 외에는 출마를 선언한 후보가 없었다. 왕정주의자인 니콜라 샹가르니에 장군을 비롯해 왕위를 원하는 다른 사람들은 공화국에 반대하거나, 1848년 6월 봉기를 탄압한 캬베냑처럼 신임을 잃었던 이들이다. 이 투표에서 긍정적인 결과를 기대할 만한 사람은 거의 없었다. 단일 행정권의 필요성과 보통선거에 대해 확신하는 사람은 이미 거의 없었고, 일부 공화주의자가 여전히 직접 민주주의에 더 가까운 다른 형태의 정부 채택을 주장하고 있을 뿐이었다. 빅토르 콘시데랑은 “해결책은, 그 자체로 국민의 정부를 구성하는 것이다”라고 말했다. 르드뤼 롤랭은 1793년 헌법의 복귀와 대통령 직무 폐지에 대해 찬성을 표명했다. 
 
1852년 5월 선거는 끝내 열리지 않았다. 루이 나폴레옹 보나파르트가 1851년 12월 2일에 쿠데타를 일으켜 선거를 폐지했기 때문이다. 파리에서 자행된 탄압으로 인한 사망자가 400명에 달했고, 프랑스 전역에서 3만 명의 사람들이 체포됐다. 프랑스의 1/3지역에서 계엄령이 선포됐다. 역설적이게도 이 상황에서 루이 나폴레옹은 불과 15일 만에 국민투표 형식의 보통선거를 통한 대선을 실시하기로 결정했다. 7백만 명의 프랑스인이 이 국민투표에 ‘긍정적’으로 답했다. 반면 64만737명의 용감한 사람들은 ‘부정적’으로 투표했는데, 대부분이 파리 사람들이었다. 탄압과 공포 분위기 외에도, 루이 나폴레옹에 의한 부정행위가 행해졌다. 그런 상황에도 불구하고 기권자는 150만 명에 달했다. 공화주의자 상당수가 조르주 상드처럼 ‘그 모든 게 없었다면’ 국민 모두 한 마음으로 투표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1년이 흐른 뒤에 제정 복고로 군주가 복귀하고, 보통선거를 통한 대선 원칙의 가치가 결국 한 세기만에 떨어지게 됐다. 
 
빅토르 위고는 망명 중 작성한 <나폴레옹 르 프티> 팸플릿에서, 1852년 5월의 두 번째 일요일은 “어제는 노동자, 오늘은 유권자, 내일은 노동자, 언제나 군주인 국민이 투표하러 오는 고요한 일요일이 될 수 있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글·실비 아프릴 Sylvie Aprile
릴(Lille) 3대학의 현대사 교수, <미완의 혁명(1815~1870)>(베를린, 파리, 2010년)의 저자. 
 
번역·김세미
한국외국어대 통번역대학원 졸업
 
(1) 1830년 7월에 루이 필립 도를레앙에 의해 창설된 입헌군주제의 지지자. 
 
 
박스기사 
 
대통령의 배신
 
 
“유럽은, 각국 국민들로부터 멀어짐에 따라, 그들의 기대에 더는 부응하지 못함에 따라, 시장의 힘 앞에 무능하고 규제 완화에 열을 올리며 자유주의적 세계화에 견뎌내지 못한다는 것이 드러남에 따라 약해졌다. 나는 이런 유럽을 더는 바라지 않는다. 이런 유럽을 새로운 방향으로 이끌려고 한다.”
“이 예산관련 조약이 규율과 제재로 이뤄져 각국 국민의 삶을 옥죌 긴축정책에 불과하다면, 균형예산의 성공은 불가능하다. 그렇기에 나는 수차례, 그리고 현재도 여전히 엄숙히 반복하건대, 단지 프랑스만이 아니라 전 유럽을 위하여 예산조약을 재협상하겠다고 단언했다.”
 
“심지어는 조인을 마친 일부 보수적인 정부들도 이는 지킬 수 없는 조약이라고 밝혔으며, 자국에 할당된 목표의 재검토를 이미 요구했다. 스페인을, 네덜란드를 떠올려보라. 다른 국가들도 곧 행동에 나설 것이다. 나는 또한 당장은 의견을 표명하지 않거나, 심지어 보수적 성향의 사람이라 해도, 우리가 예산조약 재협상에 승리하길 바란다는 것을 안다. (…) 조약은 조인됐지만 아직 비준되지는 않았다. 그러니 협상의 여지가 있는 셈이다.
 
따라서 나는 프랑스 국민에게 대통령직 임기를 요구했다. 국민이 내게 프랑스공화국의 대통령직을 맡겨준다면, 나는 이 조약을 재협상할 의무와 책무가 있다. 왜냐하면 바로 프랑스 국민이 조약의 재협상을 자주적으로 결정했기 때문이다. 내 결의는 확고하다. (…) 이는 단지 개인적인 선택이 아니다. 또한 나는 대선 다음 날에 프랑스 국민이 선택할 새로운 상하원에서, 진지한 재협상이 이뤄지지 않는다면 이 조약을 비준시키지 않을 것을 안다.”
 
“나는 혼자가 아니다. 전 유럽에 진보적 변화가 나타나고 있으므로. 나는 혼자가 아니다. 내게 대통령직을 부여할 프랑스 국민의 투표가 이루어질 터이므로. (…) 나는 혼자가 아니다. 나는 EU 파트너국을 존중할 것이고, 그들은 내 의지라는 것을 절대 무시할 수 없을 터이므로. 또한 나는 일구이언하지 않을 것이다. EU에 하는 말과 프랑스 국내에서 하는 말이 다르지 않을 것이다.”   
 
2012년 3월 12일, 파리의 겨울서커스원형극장에서 가졌던 EU회담 중 
프랑수아 올랑드(당시 사회당 대선후보)의 연설, ‘유럽을 위한 르네상스’. 
 
번역·박나리 
한국외국어대 통번역대학원 졸업. 저서로 <세금혁명>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