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가 부리는 정치적 마술
2017-04-28 에블린 피에예 | 기자
선거공약에서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문화관련 프로젝트는 정당의 사상적 성향을 반영한다. 어떤 이들은 문화 프로젝트에서 정체성의 자양분을 찾고, 또 어떤 이들은 국민에게 배포될 교육 패키지를 구한다. 사회적 변혁의 동력으로서 문화의 역할은 잊혀진 듯 보인다.
‘문화’라는 단어의 정의만큼 유동적이고 다양하게 해석되는 단어도 없다. 1959년 ‘문화’라는 이름이 붙은 정부부처가 설립될 때 문화란 작품, 유산, 예술과 정신의 창작품을 의미했다. 라루스 사전에 의하면 문화란 “지적인 활동을 통한 정신의 고양”, 또는 “특정 분야의 지식”, 또는 “어떤 민족 집단이나 국가, 문명을 특징짓는 실제적이고 사상적인 현상의 총체”를 의미한다. 세 번째 정의는 “문화란 지식, 신앙, 예술, 도덕적 입장, 권리, 관례 및 한 인간이 사회의 구성원으로서 습득한 능력과 풍습을 포괄하는 복합적인 총체”(1)라고 본 국제연합 교육과학문화기구(Unesco)의 그것과 유사하다. 이렇게 차이 나는 견해는 “예술작품 자체에만 국한된 (단어의) 제한적 용법과 서로 다른 집단(국가, 민족, 계급)의 사고방식과 행동양식을 아우르는 좀 더 포괄적인 인류학적 접근법”(2) 간의 긴장관계에서 비롯된다.
지난 4월, 대선의 유력 후보자들은 놀랍게도 두 가지 사안에 관해서 거의 의견이 일치했다. 우선 문화란 핵심적이라 할 정도로 중요한 것이고, 공연예술 분야, 임시직 지위에서부터 문화적 예외성까지, 또 국위선양을 위한 역할부터 자국어 보호에 이르기까지 문화의 특수성을 보존해야 한다는 점이다. 그러나 거의 모든 후보들이 학교에서 문화예술교육을 개발해야 하는 문화대중화의 현실적 한계를 지적했다.
우파가 말하는 ‘문화’란 무엇인가
반면 국민전선(FN)의 마린 르 펜은 예외로 예술적, 특히 문화유산 보존 및 관리 관련 직업교육 홍보에 집중했다. 하지만 그들이 말하는 ‘문화’란 무엇일까? 한 집단, 더 나아가 그 집단에 속하는 개인의 본질로서 문화일까 아니면 ‘문화 일반’으로 통칭되는 문화일까? ‘문화영역의 확대란 무엇인가’, ‘공권력은 문화에 어떤 역할을 부여하고 어떤 기능을 수행하도록 해야 하는가’, ‘문화는 어떤 가능성을 품고 있는가’라는 의미론적 질문은 정치적으로도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우파 내에서 문화의 정의는 간단하다. 유네스코에서 내세운 문화의 정의를 빌리되, 용케 그 잠재적 결과까지 가져와 나열하지는 않았다. 프랑수아 피용(공화당)의 선거공약을 보면 “문화는 우리의 정체성, 생활양식, 문화의 초석이자 야만성에 맞서는 최후의 보루이며, 새로운 이민자들의 통합을 가능하게 해 국가적 매력도 향상과 국위 선양에 기여한다.”(3) FN에서 문화라는 단어는 등장하지 않지만, 문화가 ‘프랑스 문명의 전통과 가치’로서 무엇보다 정체성을 구축하는 유산이라는 생각은 동일하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의 역사적‧문화적 유산의 보호와 홍보”는 헌법에 명시돼야만 하는 일이다.(4) 결국 문화는 국가정신의 상징이자 관리자인 것이다.
문화를 국가의 영혼으로 설정하는 일은 분명 수많은 함의와 배제를 내포한다. 그러나 ‘전진당’의 에마뉘엘 마크롱이 사용한 단어를 통해 살펴본 그의 ‘진단’이 덜 애매하다 할 수도 없다.(5) 그는 문화가 “가치, 언어, 공감대”로 구성됐다고 본다. 문화는 “우리가 누구인지 규정”하고, “공동의 언어를 구축하고, 사회적 출신으로 정해진 거주지에서 벗어날 수 있게 한다.” 하지만 지식과 공동의 지표를 참고하고 유산, 양식, 가치의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는 이 ‘공동의 언어’가 어떻게 그 자체로 해방의 성격을 가질 것인가? “어떤 문화가 됐든, 모든 젊은이가 문화를 접할 수 있게 하겠다”는 욕심이나 지난 2월 7일 리옹에서 열린 모임에서 “프랑스 문화는 없다. 프랑스 내에서의 문화가 있고 그 문화는 다양하다”라고 했던 주장과 ‘공동’의 공감대를 어떻게 유기적으로 연결시킬 것인가? 의문점 투성이다.
문화는 파시즘에 대항하는
무기가 될 수 있는가?
반면 마크롱이 자신의 선거공약이 모두 문화적이라고, 그러니까 자신의 공약의 문화적 측면을 장밋빛으로 덧칠해 “해방을 위한 계획이자 사회가 만든 보이지 않는 장벽에 대한 응수”라고 주장했을 때, ‘해방’이라는 단어는 사실상 지배적인 문화의 습득을 의미하고, 비판적 사고나 지평을 넓히는 지식의 학습이라기보다는 경력 관리 계획에 가까웠다. 약간의 용기를 내 그의 비유를 비틀어본다면 문화가 사회적 계단을 올라가기 위해 장애물을 뛰어넘게 해준다는 말이다. 달리 표현하자면 학교에서 이뤄지는 예술 교육, 청년들을 위한 ‘문화 패스’ 등 다양한 조치를 통해 가속화된 그 유명한 문화의 대중화는 개인에게 성공의 수단을 제공한다는 의미다. 이점에서 피용이나 르 펜 후보의 공약에서 보았던, 단체음악활동 개발, 문화예술시설의 개관시간 확대, 메세나 지원 등의 항목이 연상된다. “우리 정체성의 기둥”(피용)이거나 “우리 동포애의 기둥”(마크롱)인 문화는 어떤 경우에라도 아름다운 결합체 내부의 차이를 해소할 것으로 간주된다.
브누아 아몽(사회당)에게 “사회적 관계를 만들고 이로부터 해방시키는” 문화는 “공화국에게 필수불가결”한 것이다.(6) 또한 문화는 “모든 형태의 파시즘에 대항하는 무기”이기 때문에 본질적으로 강력하게 고결한 것이라고 한다. 그러나 나무랄 데 없는 ‘문화적 소양을 갖췄던’ 수많은 나치들과 부역자를 떠올려보면 그의 표현은 많은 생각을 하게 만든다. 아몽이 문화와 공화국을 긴밀하게 연결 짓는 이야기를, 1936년 6월 국가교육순수예술부 장관으로 임명됐고 중요한 문화교육정책을 주창했던 장 제의 “공화국은 무엇보다 시민의 지성과 시민정신, 즉 시민들의 지적‧도덕적 교육을 기반으로 한다”(7)라는 사상의 변주로 들어야 하는가? 꼭 그렇지는 않다.
“작품에 대한 접근성이든 모든 문화의 인정이든 문화적 권리를 현실로 만들겠다”는 아몽의 ‘목표’가 다른 후보의 공약과 구별되는 점이다.(8) 문화적 권리에 관한 프리부르 선언은 모든 사람이 “단독으로나 공동으로 한 사람이 규정되고 구성되고 소통하고 존엄하게 인정받길 바라는 문화적 지표의 총체로서 이해되는 문화적 정체성”을 선택하고 존중받을 권리가 있으며, 덧붙여 “누구도 자신의 의사에 반해 어떤 지표를 강요당하거나 어떤 문화적 공동체에 동일시되지 않을 수 있다”고 규정했다. 2015년 ‘공화국의 새로운 국토 편성’(NOTRe) 법에 포함된 이 권리는 “선택적” 정책을 내포하고 있고, 아몽이 이를 다시 빌려온 것이다. 그래서 그에 의하면 모든 “예술적 장소”는 “기존 또는 잠재적 대중의 문화적 정체성”을 고려해야 한다.
그런데 이 정체성을 선정할 이는 누구인가? 돌려보면 이는 공동체의 특징으로서 행동을 판별하고, 소비자의 구미에 맞는 작품을 만들게 하려는 것인가? 문화가 공고히 해야 할 ‘사회적 관계’에는 어떤 의미를 부여하는가? 우리가 한 개인을 그의 문화적 공동체로 인식되는 틀 안에 가두는 것이 진정 ‘해방’인가?
문화적 단절을 비판하다,
하지만 원인을 알고 있을까
‘문화’라는 단어를 사용하는 것이 민주주의, 불평등 해소 투쟁, 질기게 이어진 ‘해방’에 대한 열렬한 지지자로서 자신의 존재를 각인시키기 위해 피해갈 수 없는 하나의 통과 의례를 의미하는 것은 아닌지 자문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놀랍게도 피용을 비롯한 후보들은 의례적으로 ‘문화적 단절’을 비판하고 있지만 이것이 어떤 사회적 불의와 조금이라도 연결됐다고는 생각하지 못한다. 문화에서 ‘소외된 자들’은 노동자, 실업자, 빈곤층으로 지칭되지 못하므로 스스로 자신의 자리를 찾아야 할 것으로 보인다.
장뤼크 멜랑숑(불복종 프랑스)의 선거공약(9) 역시 “문화가 우리로 하여금 출신, 한계, 관례, 우리에게 주어진 자리를 벗어나게 만들기 때문에 개인적, 집단적 해방의 동력이자 반영”이라고 설정하며 클리셰를 벗어나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한때 비판적 지식의 교육과 개발에 부여되던 계몽의 힘에 대한 신뢰라니 아름답지 않은가. 어떤 점에서 이 공약은 ‘앙드레 말로의 부처’로 불리는 문화부의 설립 동기와 유사하다. 여기서 문화란 “다수의 정신적 작품, 즉 예술‧자연 유산 등을 포함한 인류의 자산”을 뜻하기 때문이다. 이것들은 모든 시민에게 공통된 것이고 공공활동을 통해 모두가 향유할 수 있어야 함을 의미한다.
또한 여기에는 다국적기업의 권력에서부터 메세나를 거쳐 유럽연합 차원의 긴축정책까지 (결정적인) 돈 문제에 대한 구체적인 관심이 담겨 있다. 다소 덧없이 표현된 이런 신념은, 아몽의 제안에서 살짝 드러났듯 “대중과 함께 문화 프로그램을 공동으로 구축하도록 독려”하고, 시설의 “지도부 임명과 전략적 방향 설정까지 대중의 대표들이 참여”하게 만든다. 민주주의여, 그대가 우리의 손을 꼭 잡을 때라도 우리는 이런 일이 인기영합술과 여론 지지도만을 좇게 만드는 것은 아닌지 예의 주시할 수 있다.
이들의 공약은 놀랍게도 음향영상, 언론, 스포츠 등에 치중되고 사회교육(민중교육)에 대한 고찰은커녕 과학문화도 감안하지 않았다. 명확하고 때로는 합당한 제안에도 불구하고 대선 후보자들의 야심에서는, 문화로 세상을 바꾸겠다는 적극적인 의지나, 적어도 그에 대한 진지한 성찰이 전혀 보이지 않는다. 그런 점에서 다분히 계산적으로 보인다.
글·에블린 피에예 Evelyne Pieiller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기자이며, 문화예술 비평가로 활동하고 있다.
번역·서희정 mysthj@gmail.com
한국외국어대 통번역대학원 졸업
(1) 국제연합 교육과학문화기구, www.unesco.org
(2) Gisèle Sapiro, ‘Culture, vue d’ensemble(문화, 총론)’, Encyclopaedia Universalis.
(3) 프랑수아 피용의 선거운동 웹사이트, www.fillon2017.fr
(4) ‘대선 공약 144’(Frontnational.com)를 참조
(5) ‘전진!’당 홈페이지(https://en-marche.fr)
(6) ‘프랑스의 심장을 뛰게 만들기 위한 저의 제안’, www.benoithamon2017.fr
(7) Antoine Prost (엮음), <Jean Zay et la gauche du radicalisme(장 제와 급진주의의 좌파)>, Presses de Sciences Po, Paris, 2003.
(8) Benoît Hamon, ‘Ce que je propose pour le monde de la musique(음악계를 위한 제안)’, <Le Huffington Post>, 2017년 2월 9일. 이어지는 인용문도 해당 기사에서 참조함.
(9) 연구보고서 ‘Les arts insoumis, la culture en commun(불복종 예술, 공동의 문화)’, https://avenirencommun.fr/le-livret-cultur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