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무원에게도 영혼이 있다!

2017-04-28     이재희 | 소통과 거버넌스 연구소 소장

박근혜 전 대통령에게 직언을 하다가 물러난 것으로 알려진 유진룡 전 문체부 장관은 “김기춘 실장이 부임한 이후 문화예술계 비판 세력에 불이익을 주라는 지시를 했고, 응하지 않은 문체부 간부들을 인사조치한 게 분명하다고 믿는다”고 주장했다. 유 전장관의 말과 9,473명에 이르는 블랙리스트에는 공무원과 문화예술인과의 관계는 물론 공무원의 적나라한 모습이 들어있다. 눈에 보이는 것은 두 가지다. 문화예술계 비판세력이 정부와 공공부문이 주도하는 사업에 참여할 기회를 제한할 수 있는 공무원의 권력(권한), 정치권력의 지시·주도를 따라 비판세력을 ‘관리’해 사회를 평온(?)하게 해야 할 공무원의 책임이 그것이다. 공무원의 권력은 참으로 광포해 가뜩이나 힘들게 창작활동을 하는 이들을 더욱 단련시켰고, 정치권력에 대한 책임에만 충실한 나머지 시민들에게는 추운 겨울 광화문을 분노에 타오르는 촛불로 가득 채울 기회를 제공해 무능부패정권을 종식시킬 수 있었다.

그리고 미처 발견하지 못한 것이 두 가지 더 있다. 문화예술인의 ‘생계’와 사상과 표현의 ‘자유’를 제한할 수 있는 공무원이 최종적으로 자신의 존재적 한계(인사조치)를 감안하면서 신중하게 선택할 수 있는 자기 결정권(명령에 대한 수용, 회피, 저항 등)이 들어 있다. 그리고 또 하나. 그 속에는 공무원이 자기의 태도를 결정하기 위해 거쳐야 할 고민의 과정을 생략할 수 있는 국가공무원법 제57조 (복종의 의무), 즉 “공무원은 직무를 수행할 때 소속상관의 직무상 명령에 복종해야 한다”는 약도 숨겨져 있다. 

이들 공무원은 부당한 지시를 거부하거나 스스로 목숨을 버린 일부의 사람을 제외하면 적극적으로 자기결정권을 사용하지 못했고, ‘눈 질끈 감고 복종’이라는 약을 삼켜버리고 말았다. 그래서 이들은 늘 그래왔듯 바닥에 납작 엎드린 채 새 정부가 들어서면 어떻게 해야 할 지 전전긍긍 이리저리 권력의 끈을 찾고 있다. 약을 남용한 데 따른 부작용이다. 

공무원 추락의 현주소

국가공무원법에 의하면, 공무원은 국민의 봉사자이며 민주적이며 능률적인 행정을 해야 한다. 따라서 공무원은 직무수행을 위해 적지 않은 의무를 지게 되고, 이를 어기면 징계를 받게 된다. 공무원은 무엇보다 법령을 준수하고, 성실히 직무를 수행해야 하며, 상관의 명령에 복종해야 한다. 그리고 국민 전체의 봉사자로서 친절하고 공정하게 직무를 수행해야 하며, 직무와 관련해 사례나 증여 또는 향응을 주고받을 수 없으며, 공무원 상·하간에 증여를 해서는 안 된다. 

그렇다면, 2017년 현재 대한민국 공무원은 법률이 규정한 것처럼 ‘국민전체의 봉사자’로서 책임과 의무를 다하고 있는가? 담당 공무원이 누구인가에 따라 결과가 달라지는 것을 겪어보지 않은 사람이 없을 만큼 공무원의 재량권(갑질)이 넘쳐나고(때로는 법 때문에 어쩔 수 없다며 ‘갑질’을 한다), 김영란법(부정청탁 및 금품 등 수수의 금지에 관한 법률, 2015년 3월 27일 제정)이 시행됐지만 갑을관계의 부패한 먹이사슬이 해체됐는지 아직 알 수 없다. 공무원은 여전히 국민들에게 엄청난 힘을 가진 ‘왕갑’이다. 

2016년 전부 개정된 공무원헌장은 1980년에 제정된 것과 달리, 민족중흥보다 헌법이 지향하는 가치를 실현한다고 돼 있다. 그리고 “공익을 우선시하며 투명하고 공정하게 맡은 바 책임을 다한다. 창의성과 전문성을 바탕으로 업무를 적극적으로 수행한다. 우리 사회의 다양성을 존중하고 국민과 함께하는 민주 행정을 구현한다. 청렴을 생활화하고 규범과 건전한 상식에 따라 행동한다”는 실천강령을 제시했다. 2017년 현재 대한민국 공무원은 헌장이 규정한 것처럼 ‘헌법이 지향하는 가치’를 실현하고, ‘국민과 함께하는 민주행정’을 구현하며 창의성과 전문성을 바탕으로 업무를 ‘적극적’으로 수행하고 있는가? 

기준조차 불분명한 문화예술인 블랙리스트가 만들어지고, 하루아침에 만들어진, 무슨 일을 하는지도 모를 재단이 어떤 이들의 돈벌이 수단이 됐다. 불과 며칠 만에 올라올 수 있었던 세월호는 1천 일이 넘도록 깊지도 않은 바닷속에서 모든 슬픔과 분노와 의혹을 안고 쓰러져 있었다. 우리나라 공무원은 최근 몇 달부터 지난 몇 년 간 인권을 담은 헌법적 가치도, 창의성과 전문성을 바탕으로 한 적극성도, 국민과 함께 하는 민주행정도 그 어느 것도 보여주지 못했다. 다만, ‘말도 안 되는’ ‘이상한 권력’ 앞에서 마치 비루먹은 말처럼 비명조차 지르지 못하고 탈탈 털렸을 뿐이다. 

대체 무엇이 문제인가?

국민들에게는 힘이 넘치는 왕갑인데 안으로는 비루먹은 말처럼 힘이 없는 이유가 무엇인가? 이론적으로 보면 법과 행위자, 제도(환경)의 세 가지 차원에서 문제를 찾을 수 있겠지만 여기서는 행위자 차원에서 이유를 찾아보기로 한다. 왜냐하면 법은 개별 사례가 너무 많아 특정한 대안을 제시하기 어렵고, 제도(환경)는 그 범위가 너무 넓어 분석과 대안설정의 범주를 설정하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그래서 한편으로 모든 것을 개인차원으로 치환함으로써 아무런 해결방안도 찾지 못할 위험이 있으나, 뚜렷하게 세대(Generation)적 특성이 드러나기 때문에 그 특성을 도출하는 것으로 문제해결의 출발점을 삼고자 한다.

2017년 현재, 대부분 1950년대 후반부터 1960년대에 태어난 중앙정부의 과장급(3급 부이사관) 이상 고위직급의 공무원에게서 문제의 원인을 찾을 수 있다. 즉, 전체 관료조직을 이끌고 있는 1~3급의 1천여 명에 이르는 고위공무원단이 가지는 고유한 특성이 앞서 언급한 공무원의 문제와 가장 밀접하게 연관돼 있다고 보는 것이다. 이들은 2000년대 들어와서 5급 초급 간부로 재임 중이거나 현재 공무원시험을 준비하고 있는 1980년대 이후 세대와는 현격히 구분되는 특성을 가지고 있다.

이 세대의 공무원은 “민족중흥의 역사적 사명을 띠고 이 땅에 태어났고”(국민교육헌장, 1968.12.5.) “자랑스런 태극기 앞에 조국의 통일과 번영을 위해 몸과 마음을 바치겠다”(국기에 대한 맹세, 1972.08.09.)고 함께 약속한 사이다. 이 헌장과 맹세는 1960-70년대에 초중등교육을 받았던 이들에게 너무나 익숙한 것이어서, 마치 같은 유전자를 가지고 태어난 형제처럼 친밀하게 느껴진다. 이들의 뼛속 깊은 곳에는 ‘조국’ ‘민족’ ‘충성’ ‘태극기’ 등 집단적이며 획일적인 단어가 젊은 시절 목매어 외치던 ‘민주주의’나 ‘시민’, ‘다양성’, ‘행복’ 등의 단어보다 더 깊이 새겨져 있다. 이들은 1970년대 중반 독재정권의 폭압이 극대화되던 긴급조치시대부터 군사쿠데타로 집권한 신군부 정권 치하의 1980년대 사이에 숨죽이며 대학을 다녔다. 그리고 암울한 그 시기에 한편으로는 무력감과 죄의식 속에서(물론 단순히 입신양명을 위해 공무원이 되려던 사람도 있겠지만) 조국과 민족에 무한 봉사하겠다는 애국심과 충성심을 다지면서 고시와 공무원시험을 준비했다.

그리하여 80년대 중반부터 90년대 초반 사이에 사무관으로 임용된 이들 세대는 독재정권의 군사문화에 길들여진 선배와 상사로부터 권위주의, 형식주의, 가족주의 등의 조직문화를 전수받으며, 동시에 국가와 민족을 책임지고 이끈다는 다소 배타적인 주인의식으로 무장한다. 상명하복 문화와 엘리트의식을 기반으로 완벽한 ‘갑’으로서의 지위와 권한을 확보한 이들에게는, 다소의 양심적 거리낌을 제외하면, 그 어떤 걸림돌도 보이지 않았다.

이들은 1990년대 이후 네 번의 전혀 다른 성격을 가진 정부를 경험하면서 스스로를 지킬 수 있는 그들만의 보신주의와 복지부동을 연마했다. 이들은 생애 전 과정을 통해 적응과 순응, 그리고 다소 위악적인 자부심을 배웠다. 이들은 이제 내부적으로 순한 양으로 길들여지고 외부적으로는 투철한 사명감과 자부심을 가진 ‘왕갑’으로 재탄생해 오늘에 이르렀다. 

2017년, 새로운 시대를 앞두고 이들이 할 일은 무엇인가? 답은 정해져 있다. 스스로 자신들의 특성을 이해하고 그것을 극복해야 한다. 자신의 한계를 인정하고 고답적이며 이중적인 행태를 반성해야 한다. 그리고 복지부동 무책임이 아니라 적극적이고 창의적인 조직문화를 만들어 가야 한다. 안정된 직장으로서의 공직, 안락한 삶을 누릴 수 있는 직장인으로서의 공무원이라는 생각을 (현재 고위공무원 보다 더 많이) 가진 후세대 공무원들과 더불어, ‘헌법의 지향하는 가치’를 담아 ‘민주적’으로 ‘창의성과 전문성’을 바탕으로 적극적으로 일하는 ‘국민전체의 봉사자’로 거듭나야 한다.  


글·이재희 
행정학박사.  소통과 거버넌스 연구소 소장으로 정책의 민주성과 효율성 확보를 위해서는 정부가 시민사회의 동의와 지지를 얻는 것은 물론 정책과정 전반에 시민이 책임과 권한을 가지고 참여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주장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