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르톨트 브레히트, 다시금 미소짓다
2017-06-01 마리-노엘 리오 | 작가
지난 1월 18일 피카르디 쥘 베른 대학에서 ‘오늘날 베르톨트 브레히트를 상연한다는 것’이란 제목의 심포지엄이 열렸지만, 그의 작품 중 <서푼짜리 오페라> 하나만을 다뤘을 뿐이다. 의도적인 배제를 넘어, 거의 수난의 시대라고 부를만 하다. 하지만 브레히트 작품이 최근들어 다시 수면 위로 조금씩 부상 중이어서 관심을 끈다.
프랑스에 베르톨트 브레히트의 작품이 처음 소개된 것은 1954년이었다. 파리 세계연극제에서 극단 베를린 앙상블(브레히트가 결성한 독일 국립극단-역주)이 프랑스 관객을 위해 <억척어멈과 그 자식들>을 무대 위에 선보였다. 당시로서는 선례가 없는 굉장한 사건이었다.(1) 국립민중극장(TNP)(문화를 널리 대중화하기 위해 창설된 공공 극장-역주)을 비롯해, 지방분산화 정책에 따라 설립된 각종 극장과 그 외 여러 개별극단들은 저마다 이 독일 극작가가 글쓰기와 극작술에서 이룩한 신기원에 박수를 보내며, 곧바로 이 혁명적 흐름에 동참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점차 뜨거운 열기는 사그라졌다. 브레히트 작품이 추구하는 주요 지향점은 이내 왜곡되거나, 혹은 조용히 은폐됐다. 어쩌면 이처럼 브레히트가 홀대받게 된 배경은 오늘날 이 극작가가 다시금 새롭게 재조명 받는, 도리어 본래 의도와는 정반대되는 현상이 일어나는 원인이 아닐런지.
1950년대, 브레히트가 몰고 온 충격
1950년대에 브레히트가 널리 환영(동시에 <르피가로>와 같은 우파 언론 등으로부터는 신랄한 비판을 받았다)을 받았던 이유는 말하자면 그가 세계를, 다시 말해 예술을 마르크스주의에 입각해 해석했던 미학적 급진성 때문이었다. 평화주의적 아나키스트에서 마르크스주의자로 변신한 예술가이자, 공산당 당원은 아니지만 무당파 공산주의자이며, 발터 벤야민의 벗이었던 브레히트(1898~1956)는 당시 배우로 활동 중이던 아내 헬레네 바이겔과 함께 1933년에서 1947년까지 근 14년을 스칸디나비아와 미국 캘리포니아 등지를 떠돌며 망명생활을 했다. 1949년 그는 귀국을 결심하고 베를린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독일민주공화국(동독)에 정착해 극단 베를린 앙상블을 창단했고 함께 연극 활동을 벌였다.
브레히트가 보기에, 새로운 형식을 창안하는 것은 곧 부르주아 진리에 대한 문제를 제기하는 것과 다를 바 없었고, 주류 극작 규범을 거부하는 것은 곧 자본주의 질서에 반기를 드는 것과 동일했다. 그는 말하자면 일반적인 사회주의 리얼리즘과는 상당히 동떨어진 길을 걸어갔던 셈이다.
브레히트의 기획은 일대 충격을 몰고 왔다. 롤랑 바르트의 말을 빌리자면, 브레히트가 보여주고자 한 것은 “영원불멸한 예술의 정수(본질)란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이었다. 말하자면 “모든 사회는 각자 스스로를 해방시킬 예술을 만들어내야 한다”는 것이었다. 한편 바르트는 “사람들이 ‘자연스럽다’고 여길 정도로 오랜 옛날부터 전승돼오는 선조의 예술에 반기를 들었던 브레히트의 급진성”을 높이 평가했다. 바르트는 브레히트 연극이 지닌 몇 가지 특성을 다음과 같이 강조했다.
“그는 모든 전통에 위배되게도 이렇게 주장한다. 그에 따르면 관중은 절반만 극에 몰입해야 한다. 그래야만 무대에서 전개되는 상황에 무심결에 빠져드는 대신 무대에서 펼쳐지는 것이 연극적 상황임을 알아차릴 수 있다. 또한 배우는 자신의 배역과 혼연일체가 돼 연기하기보다는 자신의 배역에 대해 비평적 자세를 취함으로써 관중이 그것이 연극적 상황이라는 사실을 의식할 수 있도록 유도해야 한다. 관객은 항상 극 중 주인공이 고통 받는 원인과 치유책을 자유롭게 판단할 수 있도록 자신을 주인공과 완전히 동일시하지 않도록 해야 한다.”(2) 한편 또 다른 프랑스의 저명한 비평가인 베르나르 도르도 브레히트의 연극을 일컬어 “이데올로기 파괴 시도”(3)라고 묘사했다.
베를린 앙상블이 1955~1960년 세 차례(코카서스 백묵원, 억척어멈과 그 자식들)에 걸쳐 프랑스를 찾는 동안 브레히트의 영향력은 꾸준히 확대됐다. 프랑스공산당은 많은 지식인이나 예술가들을 같은 길을 걸어가야 할 ‘동지’로 여겼다. 또한 예술의 정치 참여도 전혀 이상하지 않은 자연스러운 문제로 인식했다.
예술의 경계가 무너진 1970년대, 영향력을 잃다
그러나 1970년대에 이르면서 브레히트의 인기몰이에 자양분이 돼주던 토대가 무너짐과 동시에, 브레히트의 영향력도 함께 쇠퇴했다. 스탈린주의와 두 개의 전체주의(상반된 두 사조인 파시즘과 공산주의)에 대한 비판이 일면서, 공산주의가 힘을 잃게 된 것이다. 1989년 베를린 장벽 붕괴와 2년 뒤 소비에트 진영의 해체는 이런 현상에 더욱 쐐기를 박았다. 문화 부문에서는 이전에 찾아볼 수 없었던 본능과 즉흥성을 중시하는 새로운 조류가 등장했다. 이 새로운 사조는 텍스트를 홀대하고 육체를 신봉했다.
브레히트의 정치극은 새로운 시대의 흐름에는 부합하지 않았다. 바야흐로 “모든 사람이 예술가”라 일갈한 요셉 보이스와 예술과 거리(대중)의 경계를 허물자고 주장한 앤디 워홀이 새로운 영웅으로 떠올랐다. 또한 프랑수아 미테랑 정권에서 문화장관으로 활동하던 자크 랑 또한, “이제는 요리에서 고급패션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이 문화이며 예술”이라고 선언했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브레히트가 남긴 유산(그는 군더더기 없는 엄격한 작품을 통해 비평 정신을 고양시키기를 바랐고, 도덕적 판단 보다는 변증법의 실천에 더욱 역점을 뒀다)은 한물 간 공산주의로만 치부될 뿐이었다. 요컨대 정서, 감정이입, 동일시, 감정의 전염, 한 마디로 ‘정동(Affect)’이 한층 더 중시되는 시대가 찾아온 것이다. 1959년 문화부를 설립했을 당시 앙드레 말로가 머릿속에 구상했던 문화는 국가유산에 버금가는 중요한 작품이나 각종 예술 및 정신적 창작물을 대중이 널리 향유할 수 있게 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오늘날 문화의 기능에는 새로운 것이 추가됐다. ‘사회적 관계’를 공고히 하고, 더 나아가 “모든 야만적 행위를 가로막는 성벽” 역할까지 떠맡게 된 것이다. 가령 2015년 <샤를리 엡도> 테러 사건이 발생한 이후 국립 및 지방 연극센터(정부 지원을 받는 공공극장-역주)의 운영자들 대다수도 예술을 그런 식으로 설명했다.(4) 그러나 이런 사고관은 얼핏 9·11 테러 이후 미국의 조지 부시 전 대통령이 세상을 온통 선한 자와 악한 자(적어도 선택받은 자와 저주받은 자로 나눠지는 것이 아니라면 말이다)로 나눠 생각하던 불안한 세계관을 떠올리게 한다.
예술이란 대중 모두를 똑같은 (긍정적인) 감정으로 융합하는 기능을 지닌다는 이런 사고방식은 당연히 브레히트의 연극이 전파되는 데도 걸림돌이 됐다. 사실상 브레히트는 그와는 정반대로 “예술이란 통합이 아닌, 분열을 위한 것”이라고 주장하던 인물이 아니던가? 그는 사람들에게 있는 그대로의 세계를 보여주고, 세계 안에 도사리는 온갖 속임수들을 분석함으로써, 세계의 참모습을 대중에게 있는 그대로 이해시키기를 원한 예술가였다. 물론 그렇게 하는 목적은 단 하나, 바로 세계를 변혁하기 위해서였다.
44개 희곡 중 주목 받은 것은 7개 뿐
브레히트 작품의 출간 및 공연 저작권 등을 관리하는 아르슈 출판사는 그동안 꾸준히 브레히트의 번역을 새로 내놓는가하면, 대중이 이해하기 쉽게 일부 작품을 만화로 각색(5)하는 등 다각적인 방면에서 온갖 노력을 기울여왔다. 그러나 브레히트가 저술한 에세이, 산문, 방대한 시 작품(9권)의 판매율은 지극히 미미한 수준에 머무르고 있다. 물론 희곡의 경우 상황이 조금 더 낫긴 하다. 그러나 브레히트의 연극 총 44개 타이틀 가운데 최근 10년 동안 특히 극장 운영자들의 주목을 받은 타이틀은 고작해야 7개에 불과하다.(6) 가령 젊음을 풍자적으로 표현한 연극, <소시민의 결혼>(1919)이 40회에 걸쳐 재연출 됐고, 존 게이와 요한 크리스토프 페푸슈의 오페라(1728)를 흥미롭고도 도발적인 스타일로 각색한, 쿠르트 바일 작곡의 <서푼짜리 오페라>(1928)가 23회에 걸쳐 새로운 무대로 탄생했다. 반면 그와는 대조적으로, 안톤 체호프의 <갈매기>는 최근 몇 달 동안에만 무려 최소 4회 이상이나 새롭게 재연출 돼 프랑스 대형 무대에 올랐다. 더욱이 프랑스에서 상연된 브레히트 작품은 정치적 색채가 짙지 않거나, 혹은 손쉽게 도덕적 교훈에 대한 해석으로 흐르거나, 혹은 전혀 불온하지 않은 오락거리로만 즐길 수 있는 작품들이 대다수를 차지했다.(7) 그러나 다행히도 전문 및 아마추어로 활동 중인 개별극단들은 그보다는 좀 더 대담한 연출을 선보이며 브레히트의 작품을 자주 무대 위에 올렸다.
공교육에서도 미미하게 다뤄졌던
브레히트의 재부상
지난 10년 간 공교육 현장의 상황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물론 일부 역사 교사들은 개인적으로 중학교 졸업반 학생들에게 나치즘의 온전한 이해를 위해 <제3제국의 공포와 참상>을 가르친 사례가 있긴 했다. 그러나 프랑스 대학입학자격시험 바칼로레아의 연극 선택과목시험에서 브레히트의 작품이 출제범위에 포함된 적은 찾아보기 힘들었다. 유일한 예외는 1955년에 잠시 <연극을 위한 짧은 오르가논>이 이론시험 범위에 들어간 것이 전부였다. 프랑스 고등사범학교(ENS) 입시준비반에서도 독일어 전공 프로그램으로 브레히트의 희곡보다는 시 작품, 원숙기보다는 아나키즘에 경도됐던 청년기의 글이 더 선호됐다. 그런가하면 대학의 연극 수업에서는 브레히트의 비평서가 주로 다뤄졌다.
한편 2009년 고등사범학교(ENS)의 독일어 주해 프로그램으로는 <망명자들의 대화>를 발췌한 일부 글만 다뤄졌다. 2012년 윌름가의 한 연극 클럽에서도 허무주의에 빠진 반부르주아 시인을 주인공으로 등장시킨 <바알> 정도가 상연됐다. <바알>은 브레히트가 고작 21살 때 쓴 첫 작품이었다. 한편 2014년에는 물리학자이자 인식론학자인 장마르크 레비르봉이 ‘브레히트, 과학 시대의 작가’라는 제목으로 컨퍼런스를 개최했다. 고등교육독일어학자협회(AGES)의 웹사이트를 참조해 보면, 2017년 대학 차원에서 열린 브레히트 관련 행사도 단 한 건에 그친다. 1월 18일 피카르디 쥘 베른 대학에서 열린 ‘오늘날 베르톨트 브레히트를 상연한다는 것’이란 제목의 심포지엄이다. 그러나 그마저도 브레히트의 작품 중 오로지 <서푼짜리 오페라> 하나만을 다루었을 뿐이다. 그것도 미국판 각색과 ‘오프브로드웨이’(소형 공연장 중심의 공연-역주)(1954~1961년) 공연이 주제였다.
이쯤 되면, 의도적인 배제를 넘어, 거의 수난의 시대라고 불러야 하지 않을까. 집단의 역사가 개인의 이야기 뒤에 묻혀 지워지고, 계급투쟁이 ‘더불어 살아가는 삶’이라는 미명 아래 흔적 없이 자취를 감춰버린 이 사회에서 과연 브레히트를 위한 자리는 존재할 수 있을까? 80년 전 최초로 프랑스 무대에 브레히트의 작품을 올린 에마뉘엘 드마르시모타 단장도 2014년 브레히트 상연 80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베를린앙상블의 <억척어멈>을 다시 초대했을 때, 정작 시즌구호로 ‘카타르시스를 위한 예술’(8)이라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케케묵은 개념을 내걸었다. 연극의 상연을 통해 관객의 감정을 정화하는 것을 의미하는 카타르시스는 사실상 브레히트가 표방한 즐거운 깨달음을 주는 예술과는 상당히 거리가 멀었다.
그러나 최근 들어 브레히트가 다시 수면 위로 조금씩 떠오르고 있다. 가령 최근 졸리 몸므 극단이 <예외와 규칙>을 무대 위에 올리는가 하면, 코메디프랑세즈도 6월 말까지 <아르투로 우이의 출세>를 상연할 계획이다. 특히 이 연극은 베를린앙상블의 거목 카타리나 탈바흐가 연출을 맡아 채플린식의 생동감을 아주 맛깔스럽게 되살려냈다. 해방의 웃음을 이끌어낼 줄 알았던 브레히트의 귀환은 우리에게 한 가지 깨달음을 줄 수 있을지 모른다. 그것은 바로, 마지막으로 한 번 더 바르트의 말을 빌려 표현하자면, “인간의 불행은 인간 자신의 손에 달려 있다”는 사실이다.
글·마리노엘 리오Marie-Noël Rio
작가
번역·허보미 jinougy@naver.com
서울대 불문학 석사 수료. 한국외국어대 통번역대학원 졸업.
(1) 그보다 몇 해 전 장 비야르가 프랑스어로 작품을 올린 적이있다.
(2) Roland Barthes, ‘La Révolution brechtienne(브레히트 혁명)’, 잡지 <Théâtre populaire(대중연극)>(1955년)에 실렸던 칼럼, <Essais critiques(비평선집)>에서 발췌, Seuil, Paris, 1964년.
(3) Bernard Dort, <Lecture de Brecht(브레히트 강독)>, Points Seuil, Paris, 1960년.
(4) 2015~2016년 시즌 프로그램북에 실린 글 참조.
(5) Bertolt Brecht, <제3제국의 공포와 참상>, Pierre Vesperini의번역, 해설, 및 후기, L'Arche Editeur, Paris, 2014년. 이 글에 언급된 만화는 <코이너씨의 이야기>, Rudolf Rach, Claire Stavaux 번역, Ulf K 그림, L'Arche Editeur, 2015년.
(6) 오늘날 프랑스에서 정부의 지원을 받고 있는 극장으로는 국립극장 5곳, 연극센터 38곳, 국립무대 72곳, 그리고 오페라무대 24곳을 꼽을 수 있다. 또한 연극만 전문으로 올리는 어느 정도 상시로 운영되는 개별 전문극단 975곳 가운데 680곳도 2016년 정부 지원의 혜택을 누렸다. 개별 아마추어 극단은 조사대상에서 제외됐다.
(7) 원숙기에 속하는 희곡 작품으로는 1938년작인 <제3제국의 공포와 참상>(36회 제작), <사천의 선인>(21회 제작), <갈릴레이의 생애>(16회 제작) 세 작품과 1945년작인 <코카서스의 백묵원>(17회 제작) 한 작품을 꼽을 수 있다.
(8) 자세한 내용은 테아트르들라빌(Théâtre de la Ville) 웹사이트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