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주의자들에게 속지 마라!

르 펜이나 마크롱이나···

2017-06-01     슬라보예 지젝  철학자
   
 

그렇다, 르 펜은 위협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우리 모두 마크롱을 지지한다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오히려 그 문제의 원인을 돕게 되는 일종의 악순환에 갇히게 되는 것은 아닌가?


반(反) 어산지, 친(親) 힐러리 성향의 자유주의 좌파를 대변하는 영국 일간지 <가디언(The Guardian)>에 실린 논평 제목이 모든 것을 말해주고 있다. “르 펜은 극우 성향의 홀로코스트 수정주의자다. 마크롱은 그렇지 않다. 어려운 선택인가?”

예상대로 이 글은 “투자은행가(1)인 것이 홀로코스트 수정주의자인 것과 유사한가? 신자유주의가 네오파시즘과 같은가?”라는 문장으로 시작하면서, 2차 결선 투표에서 “정말로 내키지 않지만 이제는 마크롱에 투표하겠다”는 좌파들의 조건부 지지조차 조롱하듯 묵살한다. 이는 최악의 자유주의 측 협박이 아닐 수 없다. “누구든 무조건 마크롱을 지지해야 한다. 그가 신자유주의 중도파라는 점은 상관없다. 오로지 르 펜에 맞선다는 점만이 중요하다”는 이런 논리는 힐러리 vs. 트럼프 대결에서도 등장한 케케묵은 스토리다. 파시스트의 위협에 맞서 우리 모두 힐러리의 기치 아래 함께 모여야 한다(그리고 힐러리 진영이 얼마나 잔인하게 샌더스를 제압했는지, 그 결과 대선에서 패배한 것 따위는 편히 잊어야 한다)는 바로 그 논리다. 적어도 우리는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져야 하지 않을까?

마크롱이 친(親) 유럽 성향인 것은 맞다. 하지만 그가 구현하려는 유럽은 과연 어떤 유럽인가?

변비를 일으키는 초콜릿으로 변비 치료를?

실패를 토대로 한 르 펜 포퓰리즘의 유럽, 신자유주의를 위해 일하는 익명의 유럽이 아니던가. 문제의 핵심이 바로 여기에 있다. 그렇다, 르 펜은 위협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우리 모두 마크롱을 지지한다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오히려 그 문제의 원인을 돕게 되는 일종의 악순환에 갇히게 되는 것은 아닌가? 유사한 예로 미국에서 판매 중인 초콜릿 설사제를 들 수 있다. 이 제품의 홍보 문구는 “변비를 앓고 있습니까? 그렇다면 이 초콜릿을 더 드십시오!”다. 즉, 변비를 치료하기 위해 변비의 원인이 되는 초콜릿을 더 먹으라는 말이다. 같은 맥락에서 마크롱은 질병을 일으키는 원인물질을 해결책으로 제시하고 있는, 초콜릿 설사제와 같은 후보다. 언론은 2차 결선에 오른 두 후보들이 프랑스에 관해 완전히 상반된 급진적 비전을 가진 것으로 보도하며 ‘독립 중도주의자 vs. 극우 인종주의자’의 대결구도를 형성한다. 틀린 것은 아니지만, 진정 이 두 후보 간에 차이점이 있는가?

여성성과 반체제성으로 위장한 그들의 정체

르 펜은 (그녀 아버지의) 악랄한 반(反)이민 포퓰리즘을 여성화된, 유연한 버전으로 제안하고 있다. 마크롱은 인간의 모습을 한 신자유주의를 보여주고 있는데, 그의 이미지 또한 부드럽게 여성화된 형태다(언론에서 그의 부인이 담당하는 어머니 역할을 보라). 부성이 사라지고, 여성성이 등장한 것이다. 그러나 이는 어떤 여성성인가? 알랭 바디우가 지적했듯이, 오늘날의 이념적 세상에서 남성들은 노는 데 정신 팔린 사춘기 청소년, 무법자들인 반면에 여성들은 단호함, 성숙함, 진지함을 두루 갖추고, 법을 지키며 징벌하는 존재다.

오늘날의 지배 이데올로기는 여성들에게 복종을 요구하지 않는다. 오히려 여성들이 판사, 행정관, 장관, CEO, 교사, 경찰 및 군인들이 될 것을 요구하고 요청하며 또한 기대한다. 보호 기관에서 여성 교사/판사/심리학자가 미성숙하고 반사회적인 비행소년을 돌보는 모습은 매일 볼 수 있는 전형적인 풍경이다. 따라서 새로운 모습의 여성성이 부상하고 있다. 냉철하고 능력 있는 권력의 대리인으로서, 한편으로는 매혹적이고 사람을 교묘히 조종할 줄 알면서도 “자본주의 하에서 여성들이 남성보다 더 잘 할 수 있다”는 역설을 입증하는 그런 존재 말이다(바디우). 물론 이는 자본주의 대리인으로서의 여성의 존재에 대해 그 어떤 의심의 여지도 남기지 않는다. 단지 지금의 자본주의가 사람의 얼굴을 한 냉철한 행정 권력을 상징하는 이상적 여성상을 자체적으로 만들어냈다는 점을 암시할 뿐이다. 

두 사람 모두 자신을 반(反)체제적 인물로 포장한다. 르 펜의 방식은 분명한 포퓰리스트 노선을 취하는 것이고, 마크롱의 경우는 좀 더 흥미롭다. 그는 기존의 정당과는 동떨어진 아웃사이더다. 하지만 바로 그렇기 때문에 기존의 정치적 선택에 대한 무관심한 체제 자체를 상징하기도 한다. 제대로 된 정치적 열망, 그리고 우리 vs. 그들이라는 적의(이민자들부터 비애국적인 금융 엘리트들까지)를 상징하는 르 펜과는 대조적으로, 마크롱은 정치에는 무관심한, 모두를 아우르는 관용(tolerance)을 상징한다. 르 펜의 정치적 힘은 두려움(이민자들, 익명의 국제금융기관들의 두려움)에 기반을 둔다는 말을 종종 듣는데, 마크롱도 마찬가지가 아닌가? 그가 1차 경선에서 1위를 할 수 있었던 것은 유권자들이 르 펜을 두려워했기 때문이다. 이로써 악순환의 고리가 연결된다. 두 후보 그 누구에게도 긍정적 비전은 찾아볼 수 없다. 그들 모두 두려움의 후보들인 것이다.

현재 상황을 역사적 맥락에서 좀 더 넓게 이해한다면 이번 선거에 걸린 중요한 사안이 무엇인지가 명확해진다. 서유럽과 동유럽에서는 정치지형이 장기적으로 재편될 조짐이 나타나고 있다. 최근까지 정치공간은 전체 유권자들을 대표하는 두 개의 주요 정당이 장악해왔는데, 하나가 중도 우파당(기독민주당, 자유보수당, 인민당)이고 나머지 하나가 중도 좌파당(사회당, 사회민주당)이다. 그리고 나머지 소규모 정당들이 소수 유권자들(생태학자, 네오파시스트 등)을 대변하는 구조였다. 그러나 최근에는 글로벌 자본주의를 옹호하는 정당이 점차 부상하는 추세인데, 이들은 상대적으로 낙태, 동성애자들의 권리, 소수 종교 및 인종 등에 관대한 편이다. 이들의 반대편에는 훨씬 더 강력한 반이민자 포퓰리즘 노선을 취하는 정당이 존재하고, 이런 정당의 주변부에는 인종차별적인 네오파시스트 단체들이 포진해 있다. 

4년마다 우리가 맞이할 슬픈 미래의 모습

이런 추세를 대표적으로 보여주는 예가 바로 폴란드다. 기존의 공산당이 사라진 이후, 도날트 투스크 전 총리의 “반(反)이데올로기적인” 중도 좌파당, 그리고 카진스키 형제들의 보수 기독당이 폴란드의 주요 정당을 이룬다. 오늘날 급진 중도의 이해관계는 다음과 같다. ‘두 개의 주요 정당, 즉 보수 또는 진보 중 과연 어느 당이 이데올로기를 벗어난 비정치적 이미지를 구축할 수 있을 것이며, 그에 반해 나머지 다른 당은 “아직도 낡은 이데올로기의 유령에 사로잡혀 있다”고 조롱받을 것인가?’ 90년대 초에는 보수가 이에 능했고, 그 이후에는 진보 좌파가 우위를 점한 것처럼 보였다. 그리고 마크롱은 순수 중도파의 가장 최신 인물이다.

따라서 우리는 정치적 삶의 최저점, 그야말로 가짜 선택에 이르렀다. 르 펜이 승리했다면 위험한 상황이 됐을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개인적으로 그에 못지않게 두려운 것은 마크롱의 의기양양한 승리에 뒤따를 안도감이다. 곳곳에서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하느님 감사합니다. 위험한 상황을 막고 유럽과 프랑스의 민주주의를 되살려 이제 다시 자유주의적 자본주의 하에 단잠을 청하게 될 수 있게 됐네요’라며 안도의 한숨을 내쉴 것이기 때문이다. 4년마다 우리가 맞이하게 될 슬픈 미래의 모습은 이렇다. 공포에 사로잡혀 일종의 “네오파시스트적 위험”에 두려움을 느끼고, 그 어떤 긍정적 비전도 없는 의미 없는 선거들에서 “문명화된” 후보자에 표를 행사하라는 협박을 당하는 상황이 그것이다. 이것이 마크롱에 대한 모든 비판을 멈추라고 주문하는 공황상태에 빠진 진보주의자들이 틀린 이유다. 지금은 마크롱이 위기 상황의 체제와 공모하고 있다는 점을 거론할 시기다. 그가 당선된 시점에서 때는 너무 늦고, 자기만족의 분위기 속에서 해당 사안은 시급성을 잃을 것이다. 

누구에게 투표해도 잘못된 선택이 되는 이런 절망적 상황에서는 투표를 그만두는 용기를 냈어야 한다. 투표를 멈추고 생각을 시작했어야 한다. “이야기는 충분히 했다. 이제는 행동하자”는 이 평범한 문구는 상당히 기만적이다. 이제는 정확히 그 반대를 해야 한다. ‘무언가를 해야 한다는 압박은 충분히 됐다. 이제는 진지하게 이야기하기 시작하자, 즉 생각하자!’

이는 급진 좌파들의 자아도취도 잊자는 의미이기도 하다. 이들은 우리가 맞닥뜨린 선택들이 얼마나 잘못된 것인지, 그리고 어떻게 새로운 급진 좌파만이 우리를 구원할 수 있는지에 대해서 말하기를 끊임없이 되풀이한다. 한편으로는 그들의 말이 맞다. 하지만 그렇다면 왜 이런 좌파들이 부상하지 않는 것인가? 좌파는 민중을 동원하기에 충분히 강력한 비전을 가졌는가? 르 펜과 마크롱이라는 악순환의 고리에 우리가 갇히게 된 결정적 원인이 실행 가능한 좌파적 대안이 없었기 때문이란 점을 절대 잊어서는 안 된다.  


글·슬라보예 지젝 Slavoj Žižek
슬로베니아 류블랴냐에서 1949년 출생. 정신분석학과 영화에 열정을 가진 이색적인 철학자인 지젝은 전(全)세계의 비판적 젊은이들로부터 많은 영감을 받고 있다. 최근 저서로는 <잃어버린 대의를 옹호하기 위해>(플라마리옹, 2012년), <폭력>(오 디아블로 보베르, 2012년), <라캉과 침묵의 파트너들>(누, 2012년), <우리의 구원자들에게서 우리를 구원하자>(스렉코 호르바트Srecko Horvat와 공저, 포스트, 2013년)등이 있다.

번역·오정은
한국외국어대 통번역대학원 졸업

(1) 마크롱이 과거에 투자은행에서 일했던 전력을 빗댄 것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