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크롱 시대의 노조활동은 어디로?

2017-06-01     장 미셸 뒤메이 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기자
   
▲ <분리>, 2011 - 토마 르루이

노동법 개정에 박차를 가하려는 에마뉘엘 마크롱 신임 프랑스 대통령은 ‘개량주의적’ 노조들 중 특히 프랑스민주노동연맹(CFDT)에 기대를 걸려고 한다. CFDT는 1960년대와 1970년대에 단체행동의 근본적인 쇄신을 실현했는데, 30년 전부터 단체행동은 사회법의 가치를 고수한다고 단언하면서도 사회법 개정에 앞장섰다.


민간부문 대표 노조에 대한 최근 통계에 의하면, 프랑스 노조활동 역사상 처음으로 프랑스민주노동연맹(CFDT)이 노동총연맹(CGT)을 앞서게 됐다. 2013~2016년 실시된 선거에서 민간부문 노동자의 30%에 해당하는 520만 표를 기반으로 산출된 새 수치는 CFDT(득표율 26%에서 26.37%가 됨)의 전격적인 진보를 보여준다기보다, CGT(현재 득표율 24.85%)의 점진적 쇠락을 의미한다.(1)

양보를 통한 결과를 낳게 하는 협상과 타협을 중시하는 교의적 ‘개량주의’를 축하하면서, 미디어를 통한 정치적 축의를 앞세우고 프랑스인의 46%가 ‘친근하게’(2) 여기고 ‘선호’하는 노조의 승리를 포고했다. 지난 1월 프랑수아 셰레크 CFDT 전 사무총장(2002~2012년)이 작고한 후 각처에서 보내온 찬사가 이를 여실히 보여준다. 과거 레지스탕스였으며 1968년의 역사적인 그르넬 협정의 주역이었던 조르주 세기 CGT 전 사무총장이 2016년 여름에 타계한 후 세인의 기억에서 멀어진 것과 달리, 60세에 백혈병으로 사망한 ‘협상-타협-결과’라는 3원칙의 열렬한 예찬자였던 CFDT의 전 사무총장은 사후에도 잊히지 않았다. <르피가로>지는 셰레크의 ‘용기’를, <르푸앵>지는 ‘노조운동 개혁’을 가능케 했을 그의 ‘온건함’을 칭송하기까지 했다. ‘친구를 잃은 듯한 느낌’을 받은 로랑스 파리소 프랑스경제인연합회(Medef) 전 회장은 그를 ‘정치인’으로 기억했다.

 CFDT는 권력자들과 가깝다는 비난을 자주 받았다. 경쟁 노조인 ‘노동자의 힘(FO)’의 장 클로드 마이 사무총장은, CFDT가 지지한 개정 노동법(3)을 비판하는 글에서 다음과 같이 빈정거렸다.

“로랑 베르제(CFDT 현 사무총장)가 총리가 되면 마뉘엘 발스(전 총리)가 CFDT의 사무총장 후보가 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그 노동자들을 옹호할 노조들도 있어야 할 것이다.”

거리로 나온 시위자들은 더 단호했다. 2016년 봄, 시위 현장의 현수막들에 “배신은 끝났다!”고 단호히 적혀있었다. “사회당(PS)이 노예제를 부활시키면 CFDT는 사슬의 길이를 협상할 것이다”라는 글귀가 적힌 배지들도 있었다. 마이 FO 사무총장의 말처럼 정부와 함께 기업들 내의 “시스템을 공동운영”하려 한다는 비난을 받는 CFDT는 “권력과 동종교배를 한다”는 의심을 해소하려 애쓰곤 한다. 프랑수아 올랑드 대통령 임기 5년 동안 내각에 과거 CFDT 노조원들이 자리 잡고 있었다는 사실은 의혹만 증폭시켰다. 가령, CFDT 벨빌 중앙지도부의 아누세흐 카르바르 전 재무담당 미리암 엘 코므리가 노동장관의 공동비서실장으로 발탁됐던 일이 해당된다.

대선 결선 투표에서 에마뉘엘 마크롱에게 투표하기를 종용했던 베르제 사무총장은 마크롱 대통령에게 지난 대선의 ‘독특한 상황’으로 인해 대통령이 자신에게 지지를 보냈던 사람들을 고려할 수밖에 없게 된 사실을 상기시켰다. 그는 노동법 개정을 위한 행정명령 발동을 전혀 비난하지 않지만 ‘성급한 개정’을 원치 않는다. 그리고 신임 대통령에게 앞으로 닥쳐올 ‘거대한 도전’에 대통령이 ‘홀로 맞설 수’ 없을 것이라는 메시지를 보냈다. 

 이 노조를 지켜보는 이는 1960년대와 1970년대의 반자본주의적 자주관리주의를 표방했던 CFDT를 떠올리며 난감해 하거나 현기증을 느낄지도 모른다! 자칭 ‘노동자 연구소’라는 CFDT 중앙지도부는 소비사회를 격렬히 비판하고 진보의 폐해를 경고하며 궁극적 목적이 돼버린 이윤과 사회적 불평등을 함께 규탄했다. 그리고 경제‧사회‧정치‧문화적 지배를 구축하는 시스템 역할을 하는 자본주의도 비판했다. 반면, 노동공동체의 통제를 주기적으로 받는 선출직 지도부가 기업 내에서 출현하기를 희망했다. 

그런데 1990년대부터 CFDT는 사회당처럼 이제 주변의 신자유주의의 궤변에 완전히 물들었다. ‘경제적 성과’와 ‘경쟁력’에 관심을 갖고, 기업 내 사회적 대화를 우선시하면서 노동현장의 삶의 질을 차선으로 두는 궤변을 지지한다. 또한 놀랍게도 노동자나 노동자라는 용어 대신 우회적으로 ‘협력자’(4)라는 용어를 사용하는 것을 포착할 수 있다. 역사학자인 파리 1대학 프랭크 조르지 조교수는 “CFDT는 하나의 황당한 역사적 주제다. CFDT의 진화는 그 주위 세계의 변화를 반영하는 듯하다”라고 분석한다.(5) 이는 초대 사무총장이었던 노동자 외젠 데캉이 염원했던 것처럼 소위 ‘현대적이면서도 매력적’이기를 열망하는, 지조 없는 노조활동의 특징이랄 수 있다. 

가톨릭 노조의 유산

1964년에, 이미 종교색이 완전히 사라진 사회 속에서 프랑스기독노동자연맹(CFTC)이 종교색을 벗는 근본적 첫 변모를 통해 CFDT가 탄생했다(1919년 설립된 CFTC는 변화를 거부한 소수 30%의 희망에 따라 여전히 초기 명칭을 사용하며 존속하고 있다). 창립된 CFDT는 시대에 부응하기 위해 국가사회주의와는 거리를 둔 독특한 좌파적 역동성이랄 수 있는, ‘사회주의적’이고도 ‘민주적’이며 종교를 배제한 노동운동 정립을 희망했다.

CFDT 창립과 함께 ‘교의적 노동 위원회’가 ‘CFDT의 이데올로기를 명시하고 주지시키는’ 책임을 맡았다.(6) 중앙지도부는 사회학자인 미셸 크로지에 또는 좀 더 후에 합류한 알랭 투렌이나 피에르 로장발롱 같이 다양한 영역에서 영입된 인재들의 책략을 의지했다. CFDT는 교의적 기반을 ‘경제 개화’를 위한 의지와 노동자들에게 권력을 재부여 하려는 의지, 그리고 해방을 향한 ‘기업 민주화’의 틀 내에서 ‘민주주의적 실행방법’으로 여겨진 협상을 중시하려는 의지에 뒀다. 또한 1968년 5월, 잠시 연합했던 경쟁노조인 CGT가 상당한 비용을 요하는 평균임금 10% 인상과 최저임금 35% 인상이라는 노동자들의 요구에 총력을 집중할 때, CFDT는 ‘산업·행정적 군주제’를 ‘민주적 구조’로 대체하기 위해 기업 내 노조의 권리 확장에 특히 화력을 집중했다. 

 CFDT는 그렇게 열망하던 사회적 민주주의의 길목에서 CGT, 노동자의 힘(FO)과 함께 기업 내 노조지부들을 창설하게 되는데, 이 지부들이 향후 1982년 오루법(Loi Auroux)이 제정되는 길을 열게 된다. 오루법은 당시 노동부 장관이자 로안시의 사회주의자 시장인 장 오루가 발의한 것으로 4개의 법률, 즉 직원대표기구(IRP) 발전에 대한 법률과 집단협상에 대한 법률, 노동분쟁 조정에 대한 법률, 위생·안전‧노동조건 위원회에 대한 법률(CHSCT) 등이다. 장 오루는 “노동자들은 기업과는 별개로 완전한 권리를 가진 시민이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영광의 30년(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1945년부터 석유파동이 발생한 1970년대 중반까지 급속한 경제성장을 이룬 황금기-역주)’에 적응하면서 CFDT는 당시의 이슈들에 대해 적극적인 입장을 취했다. 낙태권을 옹호하고 노동시장에 진출하는 여성들에게 다가섰다. 탈식민주의를 지지하고 이민자들의 운명에 관심을 가졌다. 1967~1969년 노조원 증가율 20%를 달성하면서 가톨릭 진보주의자들과 극좌파 활동가들의 관심을 끌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단일 정신을 따르도록 강권했다.

 “그 시기에 권력 차원에 모종의 변화가 생겼고 CFDT는 이를 ‘자주관리’라 명명했다”고 조르지는 상기시킨다. 이는 자본주의를 넘어서기 위한 제의이자 신조이며 현실화해야 할 새로운 상황이었다. 그 때는 중앙지도부가 정치적 활동에 기대를 걸고, 사회당이 정비한 사회주의의 토대에 협력하며(1974), 일자리를 나누기 위해 주 35시간의 노동시간을 권장하던(1977~) 시절이었다. 또한 정예집단들을 형성하는데 이들은 기본적으로 로카르(Michel Rocard ; 프랑스 정치인이자 사회당원이며 프랑수아 미테랑 대통령 재임 시 1988년부터 1991년까지 총리직을 맡음-역주)를 지지하는 ‘제2의 좌파’ 집단들이었고, 1981년 프랑수아 미테랑이 권력을 잡았을 때 이들 중에서 내각의 구성원들이 나오기 시작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향후 지속될 것으로 보인 위기에 바로 직면하게 된 CFDT 지도부는 정치나 정부 이양, 법 개정에 모든 희망을 걸면 안 된다는 보고서를 작성한다. 한편, 사회당에서는 1979년 메츠 전당대회에서 미셸 로카르가 개혁주의 노선을 강화하지 못하고 좌파를 대표하는데 실패한 반면, 에드몽드 메르를 수장으로 한 CFDT 지도부는 그 때부터 단독 노조활동 ‘재정비’를 강권하며 ‘계약직 시스템 개선’을 권장했다. 2년 간 좌파의 권력 행사가 막을 내린 후 CFDT는 1983년에 혹독한 노선변경을 수용했고 그로부터 5년 후 ‘사회주의’에 대한 준거를 제거했다. 그리고 모든 좌파적 내용들을 삭제하고 점진적으로 사회당에 대한 애착까지 끊었다. 

그 때부터 지도부는 소위 ‘제의를 통한’ 노조활동의 토양을 마련했다. 어떤 이들은 이를 두고 ‘자유노조활동’을 향한 끝없는 갈망이라고 표현했다.(7) 1995년에 지도부는 알랭 쥐페 총리가 내놓은 연금 개혁안과 사회보장제도 개혁안을 수용했고, CFDT는 프랑스 노조활동의 지탄의 대상이 됐다. 2003년에는 장기고용에 찍힌 방점을 이용해 연금 및 간헐적 고용에 대한 또 다른 개혁안을 수용했다. 이로 인해 노조의 단일성이 와해됐고 다수의 내부 반대세력이 탈퇴해 민주단일연대(SUD)를 설립했다. 2013년, 덴마크나 핀란드의 모델과는 전혀 다른 ‘유연안정성’이라는 허상의 뇌관인 ‘경쟁력 및 고용안정화에 대한’ 협약을 조인했다. 결국, 그들은 2016년 개정 노동법을 지지했는데, 이 법은 현재 직업교육 부문에서 실시하고 있는 것과 같이 개인의 현재‧미래의 권리 목록을 마련하기 위한 보호장치인 ‘개인활동계좌’(CPA ;노동자 개인별로 경력 전반에 걸쳐 직업연수‧실직‧노동난도 정도에 따라 각종 권리를 적립해 필요에 따라 사용할 수 있게 함-역주)를 도입하는 대신, 노동시간에 대한 법적 기준의 위계를 허물어, 기업별 협약이 법률이나 산별 협약에 우선 적용되도록 했다. 

근본적인 변화는 상부에서만 이뤄진 것이 아니었다. 노동자 조합원이 감소함에 따라, 그리고 덜 급진적이면서도 교육을 더 많이 받고 정치에 무관심한 활동가들의 새 세대가 도래함에 따라 탈바꿈이 시작됐다. 이 활동가들은 기업 내 현대적 경영 기법 도입에 대한 두려움이 적었다. 오늘날, 전국연맹사무국 집행위원회를 맡은 사람들은 이제 노동자 조합원들이 아니라 중간 직업인들인데, 이들이 전체 노동자 중에서 차지하는 비율(26%)에 비해 노조원 중에서 차지하는 비율(31%)이 더 높다.(8)

그런데 1980년대 메르 사무총장 시절에 진행된 ‘재정비’로 인해 사라졌던 자주관리의 시대, 이후 2017년 대선 1차 투표 때부터 에마뉘엘 마크롱 후보에게 투표하도록 종용한 니콜 노타(1992년~2002년 CFDT 사무총장-역주)가 계류했던 그 자주관리의 시대는 과연 잊힐까? “자주관리? 나는 자주관리라는 흐름의 계승자라고 생각한다. 이 흐름은 여전히 아주 생명력이 강하다”고 베르제 사무총장이 지난 1월 단언했다. 그리고 심사숙고한 후 “사실, 사람들은 이제 더 이상 그렇지 않다고 말할 수도 있다. 그러나 나는 공동결정과 공동건설을 믿는다” 그렇다면 공동관리는 믿는가? “이 용어는 부정적인 의미를 내포하고 있어서 우리가 경영자와 이윤을 나누어 갖는 것으로 생각하게 한다”고 말한다. 그러니까 자주관리가 단순한 경영 참여의 개념으로 축소된 것 같다. 

 그러나 “자주관리 계획의 핵심은 노조의 내부관계까지 포함한 종속관계 타파였다”고 1973년 브장송 립(Lip) 공장의 노동자 투쟁의 상징적 인물이었던 91세의 샤를 피아제 씨가 회상한다. 참으로 많은 변화가 일어났다. “철저히 정치적이던 CFDT에서 정치적인 면모가 완전히 사라졌다”며 오래 전부터 CFDT와 거리를 뒀던 이 과거 노조활동가는 탄식조로 말한다. “CFDT는 노사 동수 대표제를 전면에 내세우면서 일종의 사회‧경제회의소로 변했다”며 역사학자인 니콜라 드포는 이를 ‘노사 동수대표 조직에 깊이 동화된 노사관리기구’라고 묘사한다.(9) 

특히 다수의 노선에 반대하던 과거 노조원들 사이에서 비판이 확산되고 있다. “함부로 ‘개량주의적’이라고 불리는 노조활동은 어떤 것도 개혁하지 않는다. 그것은 다수의 빈곤을 대가로 갑들의 부를 축적하는 자유주의적 유희의 규칙을 따르는 호위 노조활동이다”라고 에티엔 아담 CFDT 바스 노르망디 전 지부장이 일침을 가한다. 하지만 조심하시라! 조르지 교수가 다음과 같이 분위기를 완화시키기 때문이다. “우리는 CFDT 내에서 기성질서가 수용되고 또 다른 한 사회가 끝났다고 생각하는 오류를 범할 수 있다. 자주관리와 더불어 권력관계의 점진적 변화라는 필연적 귀결이 있었다. 과정이 목적보다 중요했다.”

자주관리의 이상에서 타협 숭배로

자주관리 계획에 대한 인식 속에 존재하는 이 점진적인 변화에 이어 CFDT는 두 개의 논리가 기업을 관통한다는 사실을 인식했다. 그것은 노측의 논리와 사측의 논리인데, CFDT는 양측의 논리가 모두 정당하다고 봤다. 자본주의도 시장경제도 더 이상 문제 되지 않는다. 목적에도 방법에도 더 이상 혁명적 관점은 없다! 작은 행동을 통해 세상을 변화시키려면 세상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야 한다. “어떤 값을 치르더라도 전진하는 것이 낫고 발걸음을 전혀 떼지 않는 것보다 작은 걸음이라도 내딛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한 노조활동가가 간략히 말한다. ‘재정비’가 단행된 이래 경제위기와 실업은 지속됐고 사측과의 알력관계는 필연적으로 심화됐다. 그 때부터 협상만 남았다. 

그것으로 다 설명이 될까? 확실치 않다. 왜냐하면 기업을 ‘할 말이 있는’ 노동자들의 ‘인간집단’으로 이해하는 것, 수호해야 할 ‘공익’이 기업에 존재한다는 믿음,(10) 법에 우선하는 계약의 승리, 대립에 우선하는 타협의 승리, 유토피아에 우선하는 실용주의의 승리 등은 자주관리 시대의 이데올로기와의 결별을 보여주기 보다는 과거 CFDT의 이데올로기와의 연속성을 더 부각시킨 듯 하기 때문이다. CFDT의 정신을 계승한 사회주의적 가톨릭 노조는 덜 알려져 있는 사실이긴 하지만, 데캉이 이끌던 CFDT와 베르제가 수장으로 있는 CFDT 사이에 단단한 연결고리로 남아있다. 이 둘은 모두 젊은 시절 가톨릭노동청년회(JOC)의 사무총장을 역임했다. 

  “가령, 가톨릭의 사회교리에서도 찾아볼 수 있는 보충성 원리와 국가에 맞선 시민사회의 비전에 공통되는 발상이 있다”고 파리정치대학 정치연구소(Cevipof)의 기 그루 연구원이 밝혔다. 보충성 원리라는 이 정치적 원리는 어떤 행동의 책임을 관계자들과 가장 가까운 층위에 위임하는 것을 말한다. 이는 노동법에서와 마찬가지로 혹독한 비판의 대상이 된 규범 위계 전복을 향한 길을 열어줬다.(11) 또한 이런 가톨릭과의 연계성 속에서 자본주의 체제 자체를 포기한 것이 아니라 자본주의 체제의 남용을 포기한 것이었다. 이는 2014년 CFDT가 정관을 개정하면서 확인한 사실이다. 

“나는 완벽한 것을 팔지 않는다”

  “CFDT에는 고용주을 포함한 인간은 선하다고 보는 경향과 ‘선행하기’라는 윤리적 가치를 따르는 성향이 있다!”

지부노조 위원장이 이렇게 넌지시 알려주자, 이어 베르제 사무총장이 말한다. “나는 위대한 저녁(Le grand soir ; 공산주의와 목적론의 개념으로 자본주의 체제의 전복을 통한 새로운 사회 건설을 의미함-역주)을 한 번도 믿은 적이 없다. 각자 자신의 역할을 담당할 때 선을 창조하게 된다.”

즉, ‘책임감 있는’ 태도를 보이는 것이다. CFDT 중앙지도부는, CGT나 FO 또는 단일노조연맹(FSU)과 같은 쟁쟁한 경쟁 노조들에 책임감이 없다고 보기 때문에, 빈번히 합의(Compromission)로 오해되는 타협(Compromis) 추구와 ‘노사대화’를 철저히 우위에 두는 책임감의 윤리를 끊임없이 강조하기 때문이다. 
“타협은 책임감을 고취한다”고 CFDT 간부연맹의 전 사무총장이자 간부사원 퇴직연금기관 총연합회(Agirc)의 장 폴 부셰 현 회장이 한 가톨릭계 잡지에서 밝힌 바 있다. “왜냐하면 타협은 조직들이 주역이 되게 하기 때문이다(‧‧‧). 타협의 노조활동은 공익을 창출하는 것이다.”(12) 그리고 때로 어쩔 수 없이 후회할 각오를 해야 한다. 2004년에 CFDT가 협상한 실업급여보험공단(Unedic) 협상으로 인해 수만 명의 실업자들이 실업급여에 대한 권리를 박탈당한 ‘재협상’ 항목들에 대해 셰레크 전 사무총장이 그 후회를 다음과 같이 표현했다. “우리는 사람들에게 미칠 영향은 생각하지 않고 냉혹한 관리자들처럼 행동했다.”(13) 

‘진보의 개념’(14)을 재발견하기를 촉구하는 베르제 사무총장은 이제 다음과 같은 문구를 제시한다. “노조활동의 목표는 사회 전부를 바꾸는 것이 아니라 사회 일부를 바꾸는 것이다” 어떻게 바꿀 수 있을까? 그의 설명에 의하면 개인에게 권리를 최대한 부여하고, CFDT의  지도부가 이룬 자랑스러운 최근의 ‘성과들’을 계속 시행함으로써 가능하다. 그 성과는 개인활동계좌, 청년보장, 비상근직 관리, 보충건강보험의 일반화, 실업보험 충전권 등과 같은 것인데, 그에 의하면 5년 임기 동안 프랑수아 올랑드 대통령의 무능으로 인해 이 모든 개혁들이 의미를 갖지 못했다. 

지난 1월 노조 선거 때 초소기업(TPE) 노동자들에게 연설하면서 사무총장은 다음과 같이 그의 로드맵을 분명히 했다. “우리는 사회정의와 해방의 가치를 수호합니다. 그러나 동시에 상황을 있는 그대로 보고 여러분의 기대에도 부응하면서 기업에도 적합한 해결책들을 제시하려 합니다.” 이제 향방은 분명해졌다. 각 상황에 따라 노동자들의 기대에 다음과 같이 부응하는 것이다.

 프낙(Fnac)의 일요근무에는 찬성하지만 칼레 지역의 오샹(Auchan)이나 카르푸의 대형매장 일요영업에는 반대하기, 아쟁지역의 데카트론(Décathlon)에서와 같이 근무조건에 이의 제기하기, 운전수가 있는 승객운송 차량(VTC) 기사의 보수를 지키기 위해 우버(Uber)에 맞서 노조의 새로운 토양 개척하기 등이다. 따라서 가변적인 가치들을 수호하면서 최대한 현장의 기대에 부응하는 것이다. 사회정의를 위한 것이긴 하지만‧‧‧. 베르제 사무총장은 인정한다. “나는 완벽한 것을 파는 게 아니다.”

CFDT의 변신은 무죄?

CFDT는 오늘날 이 불완전한 기반 위에서 86만 명에 이르는 노조원(노동자의 4% 이하지만 경쟁 노조들의 조합원보다는 많음)과 전국적으로 다양한 업종의 노조지부 1,100개를 확보하고 있다. 노조원의 2/3는 민간부문(주로 상업과 서비스, 제련, 운송 부문)에, 1/3은 공공부문(병원, 사회복지, 지자체)에 종사한다. 그들 중 80%가 40세 이상으로 대체로 연령대가 높지만, 모두 CFDT의 교의적 개량주의의 일관성을 분명하게 보여줄 것이다. 

따라서 노조활동가와 노조원에 대해 실시한 Cevipof의 조사는 ‘고용계약과 노조활동, 가치, 정치와의 관계’에 대한 ’견해와 태도에 강한 일관성이 있음’을 확인했다.(15) 연구자들에 의하면, 이 모든 것이 어우러져 ‘사회적이면서 정당 색을 탈피한 실용적‧자유주의적 세계’를 구축하는데, 이는 중도 개량주의적 사회민주주의 진영을 축으로 한 좌파에 뿌리 내린 것이다(그러나 조합원의 19%는 우파 또는 중도 성향을 표방하며 20%는 좌파에도 우파에도 속하지 않는다). 그리고 CFDT는 외부 사회보다 더 보편적으로 ‘시장과 기업의 가치 정당성’을  인정한다. 

분석에 의하면, CFDT의 구조도 연맹의 정신을 해치면서 기업 문화를 흡수한 것처럼 보인다. 상부에는 사상과 전략이 생성되는 원심적 성격을 띤 권력의 장인 동시에 전문가 세계와 연결된 그야말로 노조의 지주회사 격인 ‘중앙지도부’가 존재한다. 하부에는 거대지부들, 즉 거래의 바탕이 되는 ‘협상’이 체결되는 작전 지대를 감독하는 하부 연맹들이 있다. 모든 층위에는 노조 ‘발전’팀들이 자리하고 있다. 필요한 경우 중앙지도부는 ‘행사’를 준비하는데, 한 쪽에서는 노동에 대한 대규모 온라인 조사를 실시하고, 다른 쪽에서는 36세 이하 노동자들을 노조로 포섭하기 위한 축제인 ‘워킹타임 페스티벌(Working time festival)'을 진행하는 식이다.

실행위원회인 ‘코멕스(Comex)’의 위원장이며 거의 CEO라 할 수 있는 베르제 사무총장은 동영상을 통해 CFDT는 “노동자들의 일상을 바꾸기 위해 결집돼 있다”며 미래의 노조원들에게 확신을 준다. 그는 마치 상품을 광고하듯 다음과 같이 공약을 제시한다. “바로, 후한 봉급이 보장된 노동을 통해 삶을 영위할 수 있는 일자리, 훌륭한 노동조건을 갖춘 모두를 위한 양질의 일자리를 말하는 것입니다.” 자칫 그가 구인 중이라고 오해받을 수 있겠다! 

중앙지도부는 또한 노조원을 위해 최근 개설한 전국 콜센터 ‘맞춤형 해결’이라는 '고객 서비스‘ 및 노동 난도로 피선거권을 가늠해볼 수 있는 최신 인터넷 어플, 지부노조를 위한 회계지원 등을 부각시키고 있다. 이 중앙집권적 활동은 물론 지원을 위한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도 역시 지도부가 하부를 장악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때로는 과도하게 말이다.

결과적으로 연맹은 정관의 절차를 무시한 채 지부 중 하나인 파리교통공단(RATP) CFDT를 지배함으로써 2016년에 ‘권력남용’ 판결을 받아 내부갈등에 휩싸였다. 정관에 ‘모든 형태의 권력남용’과 ‘권위주의’에 대한 투쟁을 명시한 ‘민주적’ 기관으로서는 한마디로 어불성설이 아닐 수 없다. 마찬가지로 2014년에 CFDT 서비스연합이 작년까지 지부였던 일드프랑스 상업노조(SCID)를 지배해 논란이 됐고, 그 후로 노조 자유와 CFDT의 정관을 침해한 일로 두 노조가 갈등을 겪었으며 결국 지난 1월에 CFDT 서비스연합은 법정판결을 받았다. 2015년에 다시 SCID를 지배했던 CFDT에 대한 또 다른 소송이 계류 중에 있다. 그 후로 지도부가 행동에 나섰다. 내규가 개정돼, 전국사무소가 최대 3개월 간 ‘CFDT의 이익을 보존’하기 위한 모든 ‘보존 대책들’을 ‘긴급하게’ 결정할 수 있게 됐다. 필요하다면 바로 지부노조를 통제할 수도 있다.
이따금 지나친 중앙집권화와 수직성이 괴리를 낳는다. 이를테면, 사회적 대화를 통해 품게 된 수뇌부의 이상주의와 하부 조직에서 맞닥뜨리는 현실 사이의 괴리 같은 것들 말이다(박스기사 참조). 릴 1대학의 세실 기욤 조교수는 노조활동가에게 교육을 실시하면서 그 괴리가 점점 커지고 있음을 감지했고 이렇게 말한다.

“가치와 고용계약을 매우 중시하는 이 당사자들은 기업 내 권력관계에 아주 강한 불균형이 있음을 느낀다. 그들은 참여하고 싶어도 자신들은 그저 들러리일 뿐임을 깨닫는다. 그래서 좌절한다. 왜냐하면 그들은 진심으로 대화는 선하다고 믿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무리 조치를 강화해도 별 소용이 없음을 그들은 안다. 안건들은 협상 테이블에 발목이 묶이고 힘 있는 인적자원부에 맞설 방법이 없다고 불만을 터뜨린다.” 

르노에서 거둔 참으로 상대적인 승리

따라서, 2013년 프랑스관리직총연맹(CFE-CGC) 및 FO와 함께 르노 지도부와 경쟁성 협약에 조인한 CFDT 지도부의 프랭크 다우 중앙노조 대표는 협약체결이 특히 고용 부분에서 ‘경제적 성공’을 거둔 것으로 받아들였다. 노조는 해고와 공장폐쇄를 막기 위해 연장근무 수당 없는 노동시간 연장과 8,260명의 명예퇴직, 2013년의 임금동결을 포함한 임금억제를 수용했다. 협약은 연초에 갱신됐다. 그런데 노조 책임자는 협약의 사회적 영향력을 상대화했다. 즉 노조들의 교섭상대인 인적자원부는 "지휘관을 잃었고 대화는 힘이 빠졌다"고 했다. 협약은 상상을 초월하는 총수 카를로스 곤의 연봉(2015년에 주주들의 승인 없이 720만 유로 수령)으로 인해 상징이 된 임금불평등 문제나 직원들이 일자리 보존에 몰두하는 동안 인상된 10대 고액 연봉자들의 연봉(35% 인상) 문제도 제대로 해결하지 못했다.

무능감에 더해 때로 사막에서 훈계하는 듯한 느낌도 준다. 지난 1월 심각할 정도로 저조한 초소기업들의 노조 선거 참여율(7.35%)로 인해 프랑스 고용의 절반 이상이 집중된 이 분야에서 지지층이 감소했다. 선거에서 CFDT와 CGT는 각각 15.4%와 25.1%의 지지율을 확보했다. CFDT가 소중히 여기는 한 세기 넘게 이어져 온 기업 민주화에 대한 노력은, 사실상 노조원의 대부분(75%는 노동자 50명 이상의 기업에서 일한다)이 속한 곳이면서 직원대표기구(IRP)가 존속할 수 있는 대기업들에 집중됐다. 그 곳은 시스템에 가장 잘 동화된 노동자들이 모인 곳이다. 하지만 동시에 이제 하청업체에 의한 가치사슬모형 파괴와 재정의 논리로 인해 사회적 대화의 실효성이 가치를 상실한 곳이기도 하다.(16)

CFDT는 결코 정치적으로 특정인을 위해 일하기 원치 않는다. 다만 마린 르 펜 후보를 공개적으로 지지한 월풀 CFDT의 노조대표를 제재하지 않고, 대선결선 투표를 앞두고 국민전선에 반대하는 것으로 만족했다. 그러나 CFDT 사무총장은 “중앙지도부의 목표들에 대한 주요 걸림돌들은, 조직화된 세력 속에서 체계적인 사회적 대화를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사측, 기업 내 노동을 재고하지도 않으면서 노동자를 대표한다고 자처하는 좌파, 노조의 반동적인 비전을 가진 우파”라고 한다. 요컨대 “사회민주주의를 믿지 않는 당사자들”이다. 따라서 베르제 사무총장은 기업 내 힘의 관계의 현실에 대해서는 이렇게 말한다. “이제, 우리가 충분히 강하지 않으면, 노조활동은 미래가 없다고 말하는 것을 받아들여야 한다!” 다시 한 번 맹신을 면밀히 검토할 때다.  


글·장 미셸 뒤메이 Jean-Michel Dumay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기자

번역·이상순 leesangsoun@hotmail.com
한국외국어대 통번역대학원 졸업.

(1) Karel Yon, <Malaise dans la représentativité syndicale(대표 노조의 거북함)>, www.mondediplomatique. fr/57552 참조.
(2) 2016년 5월에 실시한 BVA사의 연구
(3) Jean-Claude Mailly, Les Apprentis sorciers. L’invraisemblable histoire de la loi travail(마법사의 제자. 이상한 노동법 이야기), Les Liens qui libèrent, Paris, 2016. 
(4) <Laurent Berger (CFDT) : “Le compromis, ça marche”(로랑 베르제(CFDT) : ‘타협, 순조롭다’>, L’Usine nouvelle, Paris, 2016년 12월 15일 ;<La QVT, un levier de compétitivité(노동생활의 질, 경쟁력의 원천)>, 2016년 11월 13일, www.cfdt.fr.
(5) Cf. Frank Georgi, CFDT : l ’identité en questions. Regards sur un demi-siècle(1964-2014)(CFDT : 정체성 문제. 반세기의 고찰(1964-2014), Arbre bleu Éditions, <Le corps social(사회체)> 총서, Nancy, 2014.
(6) Maïlys Gantois, <Être à la CFDT ou croire en la négociation(CFDT에 속하거나 협상을 믿거나)>, Cécile Guillaume(지도교수), La CFDT. Sociologie d’une conversion réformiste(CFDT. 개량주의 전향의 사회학), Presses universitaires de Rennes, <Pour une histoire du travail(노동의 역사를 위해)> 총서, 2014.
(7) Cf. Jean-Claude Aparicio, Michel Pernet et Daniel Torquéo, <La CFDT au péril du libéral-syndicalisme(자유노조주의 위기 앞의 CFDT)>, Syllepse, Paris, 1999.
(8) Martine Barthélemy, Claude Dargent, Guy Groux et Henri Rey, <Le Réformisme assumé de la CFDT(CFDT를 맡은 개량주의)>, Sciences Po Les Presses, Paris, 2012.
(9) Nicolas Defaud, <La CFDT(1968~1995). De l’autogestion au syndicalisme de proposition(CFDT(1968~1995), 자주관리에서 제의의 노조활동까지)>, Sciences Po Les Presses, Paris, 2009.
(10) Cf. Laurent Berger, <L’entreprise est d’abord une collectivité humaine(기업은 원래 인간집단이다)>, Le Monde(르몽드), 2016년 4월 21일자.
(11) Sophie Béroud, <Imposture de la démocratie d’entreprise(기업 민주주의의 위선)>,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프랑스어판, 2016년 4월. 
(12) Jean-Paul Bouchet, <La fabrique de l’intérêt général(공익산출)>, Responsables, <revue du Mouvement chrétien des cadres et dirigeants(간부 및 경영자 기독운동 잡지)>, n° 417, Paris, 2012년 12월.
(13) 2012년 9월 19일 기자회견.
(14) Laurent Berger et Pascal Canfin, Réinventer le progrès. Entretiens avec Philippe Frémeaux(진보 다시 보기. 필립 프레모 인터뷰), Les Petits Matins, Paris, 2016.
(15) Martine Barthélemy, Claude Dargent, Guy Groux et Henri Rey, Le Réformisme assumé de la CFDT(CFDT를 맡은 개량주의), 전게서 
(16) Cf. <Le dialogue social en France face aux recompositions de la chaîne de valeur(가치사슬모형 재구성을 향한 프랑스의 사회적 대화)>, 2015년 4월, www.cfdt.fr

박스기사

노조의 일사분란한 만장일치주의?


“중앙집권화는 다른 노조보다 CFDT(프랑스민주노동연맹)에서 더 강력하게 진행됐으며, 이 노조에 속한 결정기구들의 동질성도 증가했다”


파리정치대학(시앙스포)의 마르틴 바르텔레미 연구원이 분석한 내용이다.(1) ‘모든 이의를 배격하는 대가’로 오랫동안 개량주의 이데올로기가 다수의 지지를 받아 온 사실을 발견한 이 연구원은 “CFDT의 근간인 노조원들의 세계를 공고하게 하는 만장일치주의가 존재한다”며 이는 정치적 무관심이라는 대가를 치르게 되고 “조직의 총체적 사고력 약화”로 귀결될 수 있다고 한다.


CFDT가 일사불란한 조직인가? “외부에서 보면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다”고 로랑 베르제 사무총장이 인정한다. “하지만 매주 두 번씩 방문하는 현장 노조활동가들의 토론에서 가슴이 찡해짐을 느낀다”고 한다. 물론 그럴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여전히 지난 2014년 대의원 대회에 상정된 수정안들에서 혹시 성장주의를 탈피하자는 조심스런 제안이 부결된 것은 아닌지, 소수 반대의견의 흔적과 의견대립의 흔적이 있는지 애써 찾으려 한다. 하부의 기능 자율성에 대한 강조는 CFDT의 주도권 논쟁을 부추기기보다 현장에서 CFDT의 발목을 잡는 일이 더 많을 듯하다. 그런데 2016년 봄, 노동 법안으로 인해 만장일치주의는 겉모습뿐일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 정부의 개정안에 발 빠르게 동조한 CFDT의 입장으로 인해 내부적으로 파문이 일었고 난감함을 넘어 비판적인 공식성명까지 나오기에 이르렀다. 십중팔구 그것은 돌풍에 지나지 않았다.


‘CFDT의 공모자가 되고 싶지 않았던’ 장 루이 가르시아 몽펠리에 노조지부장은 39년간 충실했던 노조원의 삶을 청산하고 CFDT를 박차고 나가 노동총연맹(CGT)을 피난처로 삼았다. “예전의 CFDT는 행동했고, 본질에 대해 토론했다. 사람들은 내가 시대에 뒤처졌다고 말했다”며 “사람들은 선출임기 때문에 생각하는 바를 말하기를 주저한다. 왜냐하면 선출되지 않으면 대가를 치러야하기 때문”이라고 단언한다. 하지만 특이하게도 만장일치의 입장을 취하지 않았던 지역지부도 있다. 리옹 페라슈에서 철도정비 공사 때 뜻을 관철하려는 사람들이 시위참여를 촉구했던 일이 바로 그 경우에 해당한다.


CFDT의 집행부가 전화를 하고 현장을 방문하며 ‘지도’했다. 2016년 3월 31일 결정기관에 맞서 파업을 종용했던 CFDT 문화노조의 미셸 뒤크레 사무총장은 “우리는 질책을 받았다”고 토로하면서 “본질에 대한 문제라기보다 방법에 대한 문제’라며 “이제 우리는 항복했다”고 말했다. 그 후로 베르제 사무총장이 방문한 CFDT 제련노조인 시메탈 쉬드 프랑실리앙(Symétal Sud Francilien)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이 노조는 “중앙지도부와 동일한 노선을 견지한다”고 했다. 그러나 지난 해, 지도부는 인터넷 사이트에서 이 노조의 행위를 “여전히 위험하다. 불만스럽다”는 관점과 입장을 드러냈다.


“사실, 많은 이들이 반감을 느꼈다”고 CFDT 기자노조의 이사벨 보르드 전 사무총장이 인정한다. 그러나 문화‧자문‧통신연합(F3C)을 통한 저항은 순조롭지 못했다. 그는 “중앙지도부는 우위를 확보한 기업별 협약을 바탕으로 이상주의를 보여줬지만 공감을 얻진 못했다”고 평가했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상부에서 결정한’ 이 계획에 이미 ‘주사위는 던져졌다’.


글·장 미셸 뒤메이 Jean-Michel Dumay

번역·이상순 leesangsoun@hotmail.com

(1) Martine Barthélemy, <Une mutation trop bien réussie? (과도히 이룬 변화?>, dans Martine Barthélemy, Claude Dargent, Guy Groux et Henri Rey, Le Réformisme assumé de la CFDT(CFDT를 맡은 개량주의), Sciences Po Les Presses, Paris, 20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