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바스, 우크라이나 없이 사는 법을 배우다

우크라이나도 러시아도 인정하지 않는 분리주의 지역

2017-06-01     로익 라미레즈 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특파

우크라이나와 분리 독립을 주장하는 돈바스 간의 분쟁이 시작된 지 3년이 지났지만 아직 어떤 해결법도 없는 듯하다. 페트로 포로셴코 우크라이나 대통령은 단호한 봉쇄조치 수립과 제한적인 경제관계 회복 사이에서 고민하며 당근과 채찍을 함께 쥐고 있고, 도네츠크에서는 불확실한 군사개입이라는 기대 속에서 국민들이 결집하고 있다.


“그들은 2월 3일에서 4일로 넘어가는 밤에 건물을 향해 총을 쐈다, 우리는 가게를 20일, 이번 주에나 다시 열 수 있었다.”

가게 점원이 손님을 맞기 전, 우리에게 우크라이나 군대의 공격으로 인한 피해상황을 보여줬다. 도네츠크의 모든 외곽도시들처럼, 키예프스키 구역도 우크라이나 정부와 돈바스 분리주의자들 간에 일어난 분쟁의 상흔을 안고 있었다. 부서진 건물과, 포탄 파편들에 패인 건물의 정면은 2014년 4월부터 약 1만 명의 목숨을 앗아간 전쟁의 심각성을 상기시키고 있었다.

“마지막 순간까지도 나는 우리 군대가 우리에게 총을 쏠 수 있으리라고는 생각도 못했다”라고 마을 도로 곳곳에 뚫린 웅덩이 사이를 헤쳐 나가던 도네츠크 주민 사샤가 분노하며 말했다. 양측에서 모두 사망자가 나왔지만, 키예프 지역에서 자칭 ‘도네츠크 인민 공화국(DNR)’과 루간스크 인민 공화국, 두 인민공화국의 권리회복 전망은 요원하다. 2015년 2월 러시아, 우크라이나 그리고 이들의 서방 지원국인 프랑스와 독일 사이에 조인된 민스크 평화 협정의 궁극적 목표도 마찬가지다. 더욱이 이들 분리주의 영토에서는 러시아의 영향력 아래, 수도에서는 멀어진 채, 일상이 다시 제자리를 찾고 있다.

2014년 5월 11일 국민투표로 승인된 DNR은 국제연합(UN)의 어떤 국가들로부터도, 심지어 러시아로부터도 인정받지 못하고 있다. 하지만 지금 이 지면에서도 칭하듯, 이 ‘공화국’은 하루하루 그 실체가 더욱 확고해지고 있다. 공공건물들의 박공 위에는 우크라이나의 파랗고 노란 국기가 DNR의 국기에 자리를 내줬다. 검정색과 파랑, 빨강 바탕 위에 머리 둘 달린 독수리가 자리 잡고 있는 DNR의 국기는 러시아 국기의 문양만큼이나 당당한 모습이다. “전쟁 전에는 800명이던 학생이 지금은 665명만 남았다.” 키예프스키 구역 내 61학교의 안드레이 우도비옌코 교장이 설명했다. 학교 입구의 홀에는 나치독일에 대항했던 ‘대애국전쟁’에서 전사한 노병과 ‘영웅들’의 사진이 최근의 분쟁에서 사망한 몇몇 민병대원의 젊은 얼굴 옆에 전시돼 있다. “모두가 이 학교 졸업생들이다. 2014년에서 2015년 사이 전투가 가장 치열했을 때 학생들은 6개월 동안 원격수업을 들었다. 학교는 폭격 피해를 입었고, 따라서 학부모들과 우리 교사들이 자발적으로 재건에 참여했다”라고 우도비옌코 교장이 거대한 어깨와는 어울리지 않는 부드러운 미소를 띠며 설명했다.

“교사들은 2014년 9월에서 2015년 4월까지 DNR로부터 단순 보조금 3천 흐리우냐(환율에 따라 약 130~180유로, 이 기간 동안에는 특히 유동적이었음)를 받았는데, 전쟁 전에는 4천 흐리우냐(2014년 1월 환율 기준 350유로)를 받았다. 현재 DNR은 우리에게 매달 1만에서 1만 2천 루블(170~200유로) 정도의 진짜 급여를 주고 있다.”

도네츠크 시내 중심가에서는 연인들이 손을 맞잡은 채 한가로이 산책을 즐기고 있고, 아이들은 공원에서 세발자전거를 타고 있다. 몇몇 담벼락에 어설프게 쓰인 ‘대피소’라는 글씨와 화살표가 이런 평화로운 분위기를 깨뜨린다. 갑자기 폭발음이 들리고 뒤이어 다른 폭발음이 계속됐다. 발포음 덕분에 불과 몇 킬로미터 떨어진 곳에 전장이 있다는 사실을 떠올릴 수 있었다. 이곳은 올 초부터 무역 봉쇄와 관련해 우크라이나와 분리주의 지역 간의 충돌이 재발하고 있다(하단 기사 참조). 이번 겨울에는 2월 27일 우크라이나 군대가 재탈환한 도네츠크 외곽의 라시노바타이아 정수처리장을 두고 긴장감이 고조되고 있다. 이 여과시설에서는 인접한 구역들에 물을 공급하고 있다.
밤이 되자 길이 텅 비었다. 야간 통행금지령으로 민간인들은 밤 11시에서 새벽 6시까지 통행이 금지되고, 폭발음의 메아리만이 도시의 주인이 된다. 아침이면 자동차와 버스들이 도로에 생기를 더하고 전날 밤 전투의 흔적을 모두 덮어버린다. 점심시간이면 카페테리아에는 젊은 대학생들로 북적거린다. 이들은 휴대폰에 시선을 고정시킨 채, 수업에 돌아가기 전 휴식시간을 만끽한다.
 

 
지도층의 도피로 신분상승이 가능해지다

 

“전쟁 동안 대학생과 교수들의 30%가 학교를 떠났다. 학생들은 되돌아왔지만 교수들의 경우, 돌아오지 못한 사람들도 많다”며 라리사 카스트로페트가 우리에게 차를 한잔 권했다. 우리를 맞이한 경영·행정 전문학교의 학장인 카스트로페트는 전임자의 사임으로 2014년 11월 이 자리에 앉게 됐다. 다른 사람들은 왜 남는 것을 택했을까? 강의실로 불려온 두 대학생은 이 질문에 당연하다는 듯 답했다. “여기는 우리나라니까요.”

수많은 지도층들의 도피는 공백을 만들어냈고 이는 행정기관 내 요직에 초보자들이 뜻하지 않게 입성하는 결과를 낳았다. 이런 신분상승 혜택을 얻은 이들은 여럿인데, 그 중에는 직업 전기기사 출신의 알렉산드르 자하르첸코 DNR 대통령도 포함된다. 초등학교 교사 출신인 마야 페라고바는 취미로 언론에 기사를 썼었지만, ‘우크라이나 혁명’에서 탄생한 정부가 2014년 5월 개시한 친러폭도 소탕 ‘테러작전’ 이후 인생이 급변했다. 이제는 정보부처의 국장이 된 마야는, 언론 분야를 포함해 분쟁 첫 두 해 동안 있었던 기관들의 임시수습 상황을 잘 요약해줬다. “지역 TV 방송국 K61(이제 공화국 제1채널임) 경영진이 달아났을 때, 촬영 기사들이 장비를 회수했다. 신문도 마찬가지다. 편집장들은 떠나버렸고 어떤 보수도 없이 기자들이 출간을 재개했다. 당시 우체국 업무가 중단돼서 초반에는 기자들이 주민들에게 직접 신문을 나눠줬다.”

우크라이나 사회정치부에 따르면, 160만 명의 크림반도 또는 돈바스 거주민들이 전투를 피해 떠났다. 자칭 공화국들에 남아있는 국민들의 수를 가늠하기는 어렵다. 이들 공화국은 이 지역에서 가장 도시화된 구역들을 포함하고 있는데, 전쟁 전에는 650만 명의 주민이 살았고, UN에 따르면 현재 인도주의적 지원이 필요한 사람의 수가 230만 명에 이른다.

어려움을 헤쳐 나가기 위해 수많은 사람들이 전선의 양쪽에 한 발씩 걸쳐놓고 사는 법을 터득했다. 2014년 11월, 크림반도와 우크라이나 비통제 지역 거주민들에 대한 퇴직연금 지급 중단 이후 우크라이나 정부는 이주민들을 위한 특별절차를 수립했다.(1)

“일부 퇴직자들은 우크라이나 쪽에 살고 있는 친척들 집에 등록해서 우크라이나와 DNR 양측의 연금을 받는 방법을 생각해냈다. 하지만 우크라이나 당국이 감독을 강화하는 바람에 이제 이런 일은 매우 드물다. 이제는 3개월마다 본인이 직접 창구에 가야만 연금을 받을 수 있다”라고 한 건축회사의 젊은 직원인 안드레이 K가 설명했다. 공식적으로 이주한 80~100만 명의 사람들이 정기적으로, 늘 붐비는 5개 통행 지점을 건너가는데, 하루 2만~2만 5천 명이 이동하는 셈이다. 3월 말에는 퇴직자 및 사회복지 수급자들의 거주지 확인 작업 때문에 이 수치가 4만 2천 명 정도로 늘었었다. 

“내게는 이것이 있다!” 스페인 국적의 미구엘 푸에르타스가 매우 흡족한 목소리로, DNR 영내에서만 사용가능한 ‘공화국 중앙은행’카드를 내보이며 말했다. 2014년 2월 친러 성향의 빅토르 야누코비치 우크라이나 대통령을 전복시킨 ‘우크라이나 혁명’에 적대적인 블로거 푸에르타스는 2016년 여름 리투아니아를 떠나 도네츠크에 왔다. “이제는 이 카드로 루블화를 인출하거나, 주점에서 맥주를 한잔할 수도 있게 됐다!”
2014년 5월부터 불안정한 상황을 이유로 도네츠크에 진출해있던 우크라이나 은행들이 지점을 폐쇄하기 시작했고 모든 분리주의 지역에서 영업을 완전히 종료했다. 우크라이나 영토에 들어갈 수 있는 출입증이 없는 주민들은 거래금액의 10%를 공제하는 임시 ‘불법은행’으로 발길을 돌릴 수밖에 없었다.(2) “현금을 얻기 위해서는 사설 사무소를 거칠 수밖에 없었다. 인터넷으로 송금한 건에 대해 그들은 자신들의 커미션을 제하고, 우크라이나 영토에서 돈을 인출한 다음 현금을 내줬다”고 안드레이 K가 회상했다.

이에 대응해 DNR은 2014년 10월 7일 공화국 중앙은행(BCR)을 세웠다. 이 은행에서는 건물 관리비를 비롯해 루블화로 지급되는 퇴직 연금도 취급한다. 2015년 봄에는 경제 거래의 90% 가까이가 러시아 통화로 이뤄졌다. 2015년 5월, BCR은 루간스크 중앙은행처럼, 2008년 이후 러시아로부터 인정받고 있는 조지아의 분리 독립 공화국인 오세티야의 한 은행에 국제계좌를 개설했는데 이 채널을 통해 자국의 재정지원금을 이동시키는 것으로 보인다.

러시아 정부는 이들 두 분리주의 공화국 중 어느 한 곳도 인정하고 있지 않지만,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은 이들 영토의 정상화를 위해 추가적인 행보를 보이며 지난 2월 18일, 이들 당국에서 발행한 여권, 자동차 번호판, 출생증명서나 결혼 증명서 그리고 기타 서류들의 ‘일시적’ 승인을 공식화하는 법령에 서명했다. 민스크 협정이 적용되지는 않는 한 이는 계속될 것이다. 

사소한 부분에서 이뤄지는 
영토의 러시아화

통화에서 표준 시간대까지, 이제는 러시아를 따르고 있는 이 영토의 러시아화는 일상생활의 사소한 부분에서도 나타나고 있다. 러시아어가 지금처럼 압도적으로 쓰인 적이 없던 학교도 마찬가지다. “2014년 9월 새로운 학기가 시작되자마자 우크라이나 정부는 우리에게 새로운 교과서를 보내주지 않겠다고 했다. 그래서 우리는 러시아 교과서로 공부를 했다. 러시아어 수업시간을 늘렸고 중등교육 졸업시험에 러시아어 시험이 필수가 됐다. 우크라이나어 시험은 더 이상 포함되지 않는다. 문학수업에서도 러시아 작가들의 비중을 늘렸지만 그렇다고 우크라이나 작가들을 없애지는 않았다. 지리 수업에서는 돈바스 지도를 추가했다”고 우도비옌코 교장이 이야기했다. 

DNR에서는 러시아어와 우크라이나어 두 언어를 인정하고 있다. 비록 우크라이나어가 2015년 공용어에서 삭제될 뻔했지만 말이다.(3) 아이가 어떤 언어로 공부하게 할지는 부모의 선택에 달렸다. “이미 2014년 10월부터, 예전에는 15%에 달했던 우크라이나어 교과과정의 수가 4%로 급락했다. 2016년 새 학기에는 1학년 학생(7세) 80명 가운데 단 한 명만이 우크라이나어 수업을 희망했다. 우리는 그 학생에게 적합한 수업을 개설한, 여기서 멀지 않은 다른 학교로 갈 것을 제안했다”라고 교장은 덧붙였다. 우도비옌코 교장에게 우크라이나로의 재통합이 가능하다고 생각하는지 묻자 그는 이렇게 답했다. “정권을 잡고 있는 현 우크라이나 정부와는 아니다.”

“이곳에서 지도자는 바로 국민이다.” 시내 중심가의 커다란 광고판에서 읽을 수 있는 문구다. 중심대로에는 ‘기비’라는 이름으로 더 잘 알려진 미하일 톨스티흐의 사진 수백 장이 펼쳐져 있다. 2014년 가을 도네츠크 공항전투로 유명해진 이 지휘관은 지난 2월 8일에 발생한 테러로 인해 사망했다. 이 신생 ‘국가’는 자신들의 영웅을 예찬하며 주권이라는 특징을 과시하고 있다. 경찰차는 경찰제복의 휘장처럼 DNR 국기의 색깔들을 흠잡을 데 없는 차체에 당당히 드러내고 있다. 상점에서는 비스킷이나 소시지 등의 일부 제품에 “DNR 제조”라는 문구가 국기 색깔로 쓰여 있다.

공공연한 비밀인 러시아의 경제적 지원이 기관들의 기능 수행에 있어 필수불가결한 상태지만 새로운 당국은 재빨리 영토 내의 몇몇 재원을 선취하려 노력했다. 30년 전 도네츠크에 진출한 콜롬비아커피 수입사의 사장인 루이스 헤르난도 무노즈는 안락의자에 파묻힌 채, 2014년과 2015년 전쟁의 첫 단계 동안 여러 상점들이 동원돼, 이제는 저렴한 가격 덕분에 매우 유명해진 ‘공화국 슈퍼마켓’ 체인으로 탈바꿈했다며 이렇게 말했다. “이들 상점의 수입이 연금을 포함한 각종 지출을 위한 기금으로 보내졌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상황을 안정시키기 위한 하나의 방법이었다.”

그러면서도 그는 이 기초 세금의 직접적인 수혜자나 기타 사용처에 대해서는 입을 다물었다. 그 다음으로 당국은 중소기업을 목표로 삼았다. 2016년 12월까지 도네츠크에 설치됐던 UN 개발 프로그램의 한 책임자는, 익명을 요구한 채 “2016년 여름 이후, 중소기업들은 당국에 재등록을 하고 공화국에 세금을 내라는 아주 강력한 압박을 받았다”고 말했다.  

우크라이나가 통제권을 상실하기 전까지 대부분의 광산이나 기업들은 공식적으로 우크라이나에 등록됐었고, 지속적인 내수시장 진입을 위해 우크라이나에 세금을 지불해왔다. 제철업계에는 상당히 중요한 문제로, 철광석에서 석탄을 비롯해 강철 등의 제품은 최근까지도 두 지역의 경계를 넘나들며 유통돼왔다. 민족주의 활동가들의 제한조치 해제에 관해 무능력했던 우크라이나 정부 때문에 자하르첸코 DNR 대통령은 3월 1일, 리나 아흐메토프 소유의 제철업계 주식과 대부분이 광산인 43개 기업들의 징발을 발표했다. 돈바스 출신의 과두 정치가 아흐메토프는, 분리주의 진영을 한동안 지지했으나 이내 우크라이나 편을 택했다.(4) 시스템 캐피털 매니지먼트(SCM) 홀딩사의 소유주 역시, 정기적으로 인도주의적 지원을 베풀었던, 도네츠크 주민들에 대한 영향력의 증거이기도 한, 돈바스 아레나 경기장을 잃었다. 한 국회의원이 조세기관을 상대로 수집한 정보에 따르면, 징발 목록에 있는 8개의 기업에서만 매해 13억 흐리우냐(4천5백만 유로)의 세금이 거둬지고 있었다.

도네츠크의 입장에서는, 자칭 공화국들과의 단절을 심화시키기 위한 우크라이나의 조치들보다는 민족주의자들의 급증으로 인한 러시아와의 친목이 동기부여에 있어 자극이 덜 되는 듯하다. “(대기업들의)국유화는 좋지도 나쁘지도 않다. 일자리와 경제활동을 살리기 위해 필수적인 것이다”라고 도네츠크 국립기술대학교 국제경제과 이아나 호멘코 교수가 주장했다. 상관 루드밀라 샤발리나가 동의의 시선을 보내는 가운데, 호멘코 교수는 “봉쇄조치 때문에 생산품을 러시아로 유통시켜야 한다”고도 설명했다. 호멘코의 상관은 “우크라이나가 우리로 하여금 봉쇄조치에 대응할 수밖에 없게 만들었다”고 결론을 지었다. 분쟁이 시작되던 2014년, 무노즈는 민족주의 민병대들의 국경검문소를 통과하기 위해 트럭 한 대당 1만 달러를 지불했다. 2015년 감시가 강화되면서는 “뭔가를 들여보내는 것이 불가능해졌다”고 말했다. 이제 그의 제품들은 “러시아를 통해 합법적으로 들어간다.” 

도네츠크 - 크리보이 - 로그 임시 공화국

2017년 3월 14일, DNR 당국은 러시아행 첫 번째 석탄열차의 수송을 발표했고, 같은 시기 우크라이나 정부는 남아프리카 무연탄 수입 사실을 알렸다. 세계 6위 석탄 생산국인 이웃국가 러시아는 이 연료를 수입할 필요가 전혀 없다. “순전히 정치적인 결정이다. 여기에서 모든 게 무너지지 않게 하고, 러시아도 자국 국경에서 혼란의 상황을 맞지 않으려는 것이 목표다”라고 무노즈는 추측했다. 돈바스의 석탄 중 일부는 러시아를 우회해 우크라이나로 가는 길을 되찾을 수도 있다. ‘라디오 스보보다’ 인터넷 사이트의 한 조사에 따르면, 마리우폴(우크라이나가 통제하는 영토) 근처에 위치한 아조브스탈 제철 공업공동체에서 사용하는 석탄이 이제는 러시아에서 출발하는 바지선을 통해 경유되고 있는데, 현지 정보에 따르면, 분리주의 영토내의 광산에서 나온 것이라고 한다.(5)

우크라이나의 정책은 DNR의 자립에 제동을 걸기는커녕 DNR을 오히려 동쪽으로 밀어주고 있다. 엄청난 규모의 슬라브족 이웃들이 안정을 되찾기 위한 합리적인 대안을 주려는 상황에서 우크라이나는 매일 돈바스의 사람들에게서 조금씩 더 멀어지고 있다. 예전에는 지방정부의 본부로 쓰였던 거대한 DNR 정부청사 전면에는, 뜯겨나가긴 했지만 여전히 우크라이나의 상징적인 문장인 삼지창의 형태가 뚜렷이 드러나 있다. 강당에서 강의를 마치고 나오던 푸에르타스는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이 조각상들을 보면 한 민족에 대해 많은 것을 배울 수 있다. 여기 이 우크라이나 시인 (타라스) 셰프첸코는 더 큰 레닌의 조각상과 가까이하고 있다. 하지만 아르툠의 조각상이 여전히 더 중요하다.”

본명은 표도르 안드레예비치 세르게예프인 이 볼셰비키 혁명가는, 페트로그라드 10월 혁명의물결 속에 1918년 2월 탄생한 도네츠크-크리보이-로그 임시 공화국의 창설자로 불린다. 우크라이나를 붉은 군대, 시몬 페틀류라의 우크라이나 민족주의 세력, 안톤 데니킨의 백군, 아나키스트 혁명가 네스토르 마흐노의 농민반란군으로 분열시킨 내전에서 비롯된 이 자치 공화국은 결국 1919년 2월 우크라이나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에 합병되고, 후자 역시 1922년 소비에트 연방에 편입된다. “이곳의 일들은 아주 멀리서부터 온다”며 푸에르타스가 장난스럽게 결론을 내렸다.  


글·로익 라미레즈 Loï̈c RAMIREZ
기자, <암살된 장미>(가브리엘페리재단 문서, Pantin, 2015)의 저자.

번역·김자연 jayoni.k@gmail.com
한국외국어대 통번역대학원 졸업

(1) <Humanitarian response plan 2017-Ukraine>, 유엔인도지원조정국 보고서(UNOCHA), www.humanitarianresponse.info.novembre2016.
(2) Stéphane Jourdain, A Donetsk, les habitants condamnés au système D face aux banques fermées(도네츠크, 은행폐쇄에 맞서 편법을 동원할 수밖에 없는 주민들), <Agence France-Presse>, 2015.3.1.
(3) Les législateurs de la DNR pour le retrait du statut de seconde langue officielle à l'ukrainien(DNR의 입법자들, 우크라이나어의 제2 공용어 지위 박탈을 위해) (러시아어),  <Dan-news.info>, 2015.11.6.
(4) Jean-Arnault Dérens et Laurent Geslin의 다음 기사 참조. Ukraine, d'une oligarchie à l'autre(모든 반란이 혁명은 아니다),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2014년 4월.
(5) Les entreprises d'Akhmetov reçoivent du charbon des Républiques populaires de Donetsk et de Lougansk, en transitant par la Russie (아흐메토프의 기업들이 러시아를 경유해 도네츠크와 루간스크 인민공화국의 석탄을 받고 있다), 2017.3.23., <Radiosvoboda.or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