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슬람, 유럽을 떠도는 유령

2010-04-09     파트리크 하에니, 사미르 암가르

   지난해 11월 29일 회교 사원의 뾰족탑 미나레트(Minaret)를 세우는 것에 대한 의견을 물은 국민투표에서 반대 의견이 압도적으로 높게 나오자 스위스는 충격에 빠졌다. 유럽과 이슬람 세계에서도 경악과 분노가 일었다. 외국인 혐오증이나 극우세력의 급성장만으로는 이 결과를 설명할 수 없다. 전통적 우파 지지자를 훨씬 넘어서, 국민 57%가 미나레트 건립에 반대한 것이다. 또한 현재 프랑스 정부가 보여주는 국가 정체성에 대한 신경질적 반응이나 부르카를 둘러싼 논쟁은 더욱 이해하기 힘들다. 유럽 국가의 이같은 처사는 정복자 이슬람에 대한 비이성적 공포가 반영되어 있다.

 ‘이슬람은 원래 팽창주의적이고 정복욕이 강할까?’라는 질문이 유럽을 뒤흔들고 있다. 스위스에서 미나레트 건설에 반대해 국민투표를 주도했던 사람들은 당연히 그렇다고 말한다. 그들의 주장은 이슬람에 대한 비판적인 내용을 담은 신간 서적에 근거하고 있다.(1) 이슬람의 팽창주의에 대한 이런 의혹은 출산을 장려하고 개종을 적극 권유하며 침략적이기까지 한 ‘이슬람 이데올로기’의 본성, 혹은 ‘이슬람주의자’와 그들의 ‘계획’(2)에서 나타나는 일부 선동가들의 정치적 헤게모니 장악 의지에서 비롯됐다. 온건 수니파 지도자 중 가장 대중적인 인물인 유수프 알카라다위는 그런 선동가의 전형처럼 보인다. <알자지라> 방송이 방영하는 주요 프로그램 <샤리아와 삶>이 2009년 12월 6일 스위스 국민투표 문제를 다루었을 때, 그는 정복이 실현될 것이고 모든 사람이 신의 말씀에 따라 힘을 합칠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슬람에 대한 문제제기는 나름대로 설득력이 있다. 기독교와 마찬가지로, 이슬람 역시 인류 구원과 예언자들의 메시지를 제시한다. 그러나 종교적 팽창주의는 구체적으로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사회학적 관점에서 그것은 정치, 프로파간다, 군사 문제에서의 전투적 방식에 기반하거나, 종교로의 회귀나 개종 같은 종교성 강화, 또는 인구 구성 변화 등에 바탕을 둘 수 있다.

 이슬람 팽창주의의 비현실성


 유럽에서는 무슬림형제단과 터키 단체인 밀리 고루스(3)가 정치적 목표를 갖고 있는 대표적인 이슬람 단체다. 그들은 ‘이슬람이 모든 사람을 위한 종교다’라는 식의 보편주의뿐 아니라, 무슬림형제단을 창설한 하산 알 반나가 설정한 대로 “세상을 이끌겠다”는 야심적 목표를 갖고 있다. 그런데 그들은 1950년대부터 자신들이 북아프리카와 근동에서 벌여온 투쟁에서 유럽이 배후기지 역할을 해왔음에도 유럽에서 안식처를 구하지 않았다. 오히려 유럽 대륙에 정착한 무슬림 인구가 지속적으로 늘어나는 것을 이들은 불편해했다.
 무슬림형제단의 현재 상황이 이를 잘 보여준다. 무슬림형제단은 시간이 흐르면서 혁명적 열기를 상실했고, 팔레스타인 문제 같은 대의명분을 포기했으며, 프랑스에서 히잡 착용처럼 민감한 문제에 개입하기를 거부했다. 또 그들은 부르주아화하거나 당국과 협상에 나서면서, 젊은 강경파 무슬림에게 비판을 받았다.  2005년 타리크 라마단은 토니 블레어 총리의 영국 정부를 위해 종교적 극단주의를 저지하는 수단을 강구하는 책임을 맡은 작업그룹에 합류하면서 자신의 옛 동지 일부에게서 비난을 받아야 했다.
 신근본주의자들은 고전적 형태의 정치 참여를 거부한다. 이런 운동이 만들어내는 혼란 속에서, 사우디아라비아에서 태동한 ‘과학적’ 와하비트 살라피즘이 대세를 이루고 있다. 엄격한 분파주의와 교조적 극단주의를 특징으로 하지만, 성전(聖戰)에 대한 모든 논리를 배격하는 이러한 형태의 살라피즘은 정치적 이슬람과 타블리그히(4)처럼 유럽 대륙에서 오래전부터 활동하던 신근본주의자 그룹에 실망한 사람들을 대거 받아들이고 있다.(5) 그러나 살라피즘은 정치적 헤게모니를 겨냥한 방안을 제시하기는커녕 탈정치화한 이슬람주의, 그리고 서구사회에 회귀와 기피의 이중적 태도를 내세우는 이데올로기적 담론을 제공한다. 신앙공동체가 튀니지, 모로코 문화공동체를 대신하는 것이다. 그런 식으로 살라피즘은 분파의 논리 속에 안주하고 있다. 히잡 문제에 침묵을 지키는 살라피즘 지지자들은 자신의 종교적 지도자 이맘이 추방당했을 때 어떤 반응도 보이지 않았으며, 팔레스타인인에 대한 연대 시위도 참가하지 않았다.

 신근본주의의 탈정치화
 이러한 자폐적인 반응은 ‘재이슬람화’한 젊은이에게서 더욱 두드러진다. 가족에 비판적이고 전통을 강조하는 이맘들에 이의를 제기하는 살라피즘은 실제 무슬림 세계에 반대하는 태도를 취하고 있으며, 청소년을 포함해 좌절을 겪는 일부 개인 사이에서 성공을 거두고 있다. 따라서 코모로 군도 사람이나 터키인처럼 공동체적 연대감이 강한 곳에서는 살라피즘이 거의 눈길을 끌지 못한다. 
 살라피즘의 이상은 서구의 정복도, 이슬람화한 게토의 건설도 아니다. 이상은 바로 ‘히즈라’(Hijra)다. 이 말은 이슬람 땅, 좀더 엄격히 말하면 영국이나 캐나다처럼 이스람에 상대적으로 호의적이라고 소문난 국가로 탈출하는 것을 뜻한다. 또 이들 가운데서도 소수인 청소년들은 낮은 의식 속에서 기회주의적 태도를 보여주는데, 부모 세대에 비해 서구사회에 참여할 여지를 거의 갖고 있지 못하다. 부모 세대가 ‘떠나온 지역으로 귀환’이라는 신화 속에서 살았다면, 자식 세대는 자신이 태어난 땅을 떠나겠다는 욕구에 익숙하다. 
 알카에다나 메틴 카플란 운동(6) 같은 무장 그룹은 살라피즘을 신봉하는 비전투원과 동일한 분파적 사고를 공유하고 있다. 지하드주의는 불신에 대한 비난을 뜻하는 ‘탁피르’(Takfir)를 통해 자신이 맞서 싸우려는 모든 적의 명예를 실추시킨다. 유대인, 기독교인, 자신의 마음에 들지 않는 무슬림형제단이 바로 그들이다. 지하드주의는 서구에서 게토 방식의 반문화를 만들어내려고 애쓰지 않는다. 또 지하드주의의 급진성은 종교 공동체(7), 이슬람 사원인 모스크와 관계를 끊게 만든다. 흔히 정보 관련 기관이 쉽게 통제할 수 있는 모스크는 주변 사회와 필연적으로 협상할 수밖에 없는 공간이기 때문이다. 지하드주의자의 대원 모집은 사이버 카페, 감옥, 스포츠클럽 등 다른 장소에서 하게 된다.
 그러나 그들이 이단 배척을 극단까지 밀어붙였기에 새 지하드주의자에게는 더 이상 해방시킬 민족이 없다. 그들은 대상 영토나 국가, 정치세력 관계의 수정, 체제 전복 등 구체적 목표를 겨냥하는 대신 무장 격돌, 매스미디어를 이용한 충격요법, 정치적 제국주의의 상징, 다시 말해 미국 세력이나 그 동맹국의 파괴를 도모한다.
 사람들은 흔히 서구에서 무슬림 공동체가 신앙으로 대거 회귀하는 것으로 착각한다. 그러나 프랑스에서는 20여 년 전부터 종교 활동이 지지부진하거나 약간 후퇴하는 추세다.(8) 이슬람의 재등장은 개인을 통해 이루어지지, 집단계획을 통해 이루어지지 않는다. 공동체의 연대감에 대한 욕구에서 유래된 것이라 할지라도 말이다. 또 그것은 무엇보다 자신의 ‘정체성’의 뿌리를 다시 찾아내려는 욕구에 부합한다.

 무슬림 거주지의 세속화
 이슬람의 부활 속에는 현재 두 개의 큰 흐름이 존재한다. 한쪽에는 ‘시장 이슬람’(9)이 있다. 이 흐름은 정치에 대한 이슬람주의의 강박증에서 해방된 종교성이자 이슬람 정체성의 문화적 ‘정상화’를 추구하는 종교성을 의미한다. 이슬람 ‘스트리트웨어’(Streetwear)(10), 패셔너블한 베일, 팝 할랄(Pop Hallal·할랄은 이슬람 계율에 따라 도축된 고기를 파는 식육점-역자), 무슬림 업(Muslim Up·콜라를 기본으로 한 프랑스 음료수 상표) 등은 대중문화를 수용한 이슬람 쪽의 주장을 담고 있다. 이제 이슬람은 총체적 해결책을 의미하는 대신 전반적으로 수용된 서구 문화 속의 윤리적 근심을 의미하는 것이다. 다른 한쪽에는 우리가 이미 살펴본 바처럼 서구 질서와 단절되기를 원하는 신근본주의가 있다. 하지만 이 흐름의 본질은 탈출에 대한 욕망일 뿐이다.
 개종이 존재하지만 제한적이며, 비록 균형추가 이슬람에 유리한 쪽으로 기운다 할지라도 양 방향으로 작동하는 중이다. 프랑스 내무부에 따르면, 매년 무슬림 약 800명이 기독교도로 개종하면서 주로 복음주의 교회를 택하고 있다고 한다. 반면 이슬람으로 개종하는 사람은 매년 4천 명에 달한다.(11)
 종교적인 것으로 회귀하는 모습은 신앙을 재발견한 자들과 개종한 자들의 신체적 외관과 의상에서 주로 목격된다. 남자는 수염을 기르고 카미즈(Qamis)를 입으며, 여성은 온몸을 베일로 덮는다. 그러나 신앙의 선택은 조직적 참여가 아니라 개인의 선택에 따른 것이어서 일관된 모습은 띠지 않는다.
 주로 중산층의 호응을 얻고 있는 무슬림형제단은 교외 지역에서 잘 먹히지 않는다. 2005년 소요사태 기간에, (무슬림형제단의 분파인) 프랑스 이슬람조직연합(UOIF)이 평화를 호소했으나 전혀 효력이 없었다는 점이 그런 현실을 입증해주었다. 살라피즘을 신봉하는 사람들이 교외 지역에 있다 할지라도 통제는 불가능하다. 그들의 영향력이 제한적이고, 그런 역할을 떠맡을 만한 강력한 사회운동 조직 경험이 전무했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는 우리가 이미 살펴본 것처럼 그들의 목표가 이슬람화하거나 반란을 일으키는 도시공간의 구축에 있는 것이 아니라 ‘다르 알이슬람’(Dar al-Islam), 다시 말해 ‘이슬람의 땅’으로 귀환에 있다는 점을 들 수 있다.
 오늘날 무슬림이 거주하는 지역에서는 소비지향적·개인주의적 가치가 대중적 방식으로 생겨나고 있다. 이민 여성을 포함한 국제결혼의 증가,(12) 종교단체가 겪는 어려움, 종교학교가 극도로 줄어든 사실이 그걸 입증한다.
 
 새 천년의 아득한 공간 속으로


 역설적으로 20년 전 ‘무슬림 구역’이 존재하지 않았을 때 종교로의 귀환은 자발적이고 규격화한 방식으로 이루어졌다. 반면 오늘날 라마단과 같은 사회적 규범과 의식, 서점, 예배장소, 문화원, 할랄 가게를 가진 이슬람의 환경이 조성되면서 초창기 이민자를 포함한 모든 무슬림의 재이슬람화는 개인적 차원에서 이뤄지고 있다.
 유럽 상황, 좀더 정확히 표현하자면 유럽 이슬람주의의 소수파적 상황은 자신이 벗어날 수 없는 국민국가와 민주주의가 기본인 현대성 테두리 안에서 종교적인 것과 정치적인 것의 조율을 실용적으로 생각해야 하는 어려움을 광범위하게 드러내고 있다. 그 때문에 정치게임에 참여할 수 있게 허용받은 이슬람주의 단체 내부에서 ‘다와’(Daawa·설교)를 정치에서 분리하기 원하는 경향이 나타나고 , 일관된 계획을 만들어내는 것이 불가능한 현실에서 신근본주의의 또 다른 형태가 생겨나고 있다. 올리비에 루아가 묘사한 ‘종교의 순수함’을 찾는 살라피즘(사우디아라비아에서 신봉되는 와하비즘에서 파생됐으며, 와하비즘 못지않게 극단적인 주장을 펼치는 이슬람 사상. 알제리와 모로코 등에서 빠른 성장세를 보이고 있음-역자)처럼, 신근본주의는 정치적인 것을 새 천년의 아득한 꿈속으로 밀어내고 있다.
 공적(公的) 인정을 전략으로 채택하는 사람들은 그와 반대로 ‘정치의 순수함’ 속에서 자신의 미래를 찾는다. ‘정치의 순수함’이라는 표현은 청년무슬림연합을 이끌던 야민 마크리가 구사한 용어이다. 일부 ‘형제’들은 좌파·우파를 가리지 않고 고전적인 정당 속에서 투쟁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민자를 위한 권리의 요구는 세속된 문화적 정체성을 토대로 다시 전개되고 있다. 1990년대의 ‘무슬림형제단’에 뒤이어 2000년대 등장한 ‘공화국의 토착민’이 바로 그들이다.
 어쨌거나 종교적인 것과 정치적인 것 사이에서 발견되는 다양한 단절은 정복에 대한 사고가 부질없다는 사실을 암묵적으로 드러내준다. 팽창주의적 호전성이 존재하는가라는 사실은 그다지 중요치 않다. 중요한 것은 사회학적 변모를 통해 그들의 무장해제가 가능한지 따져보는 일이다.

<각주>
(1) 이 주제에 대해서는 파트리크 하에니와 스테판 라티옹이 주도적으로 편찬한 <불화의 미나레트. 스위스와 유럽에서의 토론 조명> 속에 삽입된 올리비에 무스(Olivier Moos)의 글 ‘미나레트부터 무슬림 문제까지: 이슬람에 대한 새로운 비판’(Du minaret à la question musulmane: la nouvelle critique de l‘islam)을 읽어볼 것.
(2) 특히 실뱅 베송(Sylvain Besson)의 저서 <서구의 정복: 이슬람주의자들의 비밀계획>(La Conquête de l’Occident. Le projet secret des islamistes)(Paris·Seuil·2005)을 읽어볼 것.
(3) 터키 총리를 지낸 네지메틴 에르바칸(Necmettin Erbakan)이 1970년대부터 시작한 이 운동은 유럽 전역으로 퍼져나간 터키인 사이에서 활발하다.
(4) 19세기에 정착된 개혁주의 운동인 살라피즘은 예언자 무함마드와 무슬림 제1세대의 가르침을 따른다. 아랍어로 ‘조상’을 의미하는 ‘살라프’(Salaf)를 차용하는 이유가 그 때문이다.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프랑스판 2008년 2월호에 수록된 웬디 크리스티아나센(Wendy Kristianasen)의 글 ‘살라피즘이란 무엇인가?’(Qu‘est-ce que le salafisme?)를 읽어볼 것. 타블리그히(Tablighi)는 1920년대 인도에서 태동한 조직이다. 전세계로 퍼져 이슬람 메시지를 전파하는 것을 주요 목표로 삼고 있다.
(5) 올리비에 루아(Olivier Roy)가 쓴 <세계화된 이슬람>(L’Islam mondialisé)(Paris·Seuil·2004)을 참조할 것.
(6) 1984년 독일에서 생겨난 극우단체로서 여러 테러 활동에 개입했다.
(7) 올리비에 루아, 앞의 책.
(8) ‘해독: 숫자로 본 프랑스의 이슬람, 1989~2009’(Décryptage: l‘islam en France et en chiffres, 1989~2009), http://religion.info
(9) 파트리크 하에니가 쓴 <시장 이슬람, 또 다른 보수주의 혁명>(L’Islam de marché, l‘autre révolution conservatrice)(Paris. Seuil. 2005).
(10) 거리에서 유래된 복장으로서 진과 바스켓, 베일 같은 종교적 표식을 뒤섞고 있다.
(11) 린다 카이유(Linda Caille)와 마리 칼레브(Marie Caleb)가 쓴 <프랑스: 누가 기독교로 개종한 무슬림들인가?>(France: qui sont les musulmans convertis au christianisme?·http://religion.info)를 참조할 것.
(12) <이민자들의 운명>(Le Destin des immigrés) 속에서 에마뉘엘 토드(Emmanuel Todd)는 알제리 출신 여성의 국제결혼 비율이 1975~90년 6.2%에서 27.5%로 증가했다는 사실을 지적한다. 모로코 출신 여성의 국제결혼 비율은 4%에서 13%로 늘어났다.

글•파트리크 하에니 Patrick Haenni, 사미르 암가르 Samir Amghar
파트릭 하에니는 를리지오스코프 재단(Foundation Religioscope) 연구원으로서 스테판 라티옹(Stéphane Lathion)과 함께 <불화의 미나레트. 스위스와 유럽에서의 토론 조명>(Infolio·Paris·2009)을 공동 저술했고, 사미르 암가르는 파리 소재 고등사회연구원(EHESS)에서 사회학 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번역•이상빈 malraux21@ilemonde.com
파리8대학 불문학 박사. 역·저서로 <현대 프랑스 문화사전>과 <나폴레옹의 학자들> 등이 있다.


 

[박스기사] 무슬림의 출산율 저하 이유는 

  팽창주의를 이야기한다는 것은 질주하는 인구 수를 의미한다. 무슬림은 이슬람교의 정복적 성격에서 기인하는 강한 출산율을 보여준다. 그러한 신앙이 불러일으키는 공포는 때때로 일부 이슬람 종교인의 출산 장려 발언 때문에 증폭되기도 하지만, 실제로 입증되고 있다.
 먼저 출산율 하락은 무슬림 국가 전체에서 목격된다.(1) 1975년 여성 1명당 6.8명이던 평균 출산율이 2005년 3.7명으로 떨어졌다. 최근 30년 동안 일부 사례를 거론해보자. 모로코에서는 출산율이 7.3명에서 2.4명으로, 알제리에서는 8.4명에서 2.6명으로, 사우디아라비아에서는 8.5명에서 3.6명으로 떨어졌다. 튀니지는 이란과 마찬가지로 7.3명에서 인구를 유지하지 못하는 수준인 2명으로 떨어졌다. 이 수치는 프랑스나 미국과 비슷하다. 오직 부족사회에서만 상대적으로 높은 출산율이 유지되고 있다. 리비아에서는 출산율이 7.6명에서 2.8명으로 줄어들었으며, 요르단에서는 8명에서 3.5명으로, 오만에서는 8.6명에서 3.6명으로 줄어들었다.
 이러한 하락은 재이슬람화 과정이 진행 중인 국가, 이슬람 국가가 탄생한 국가에서 예외 없이 관찰된다. 어떤 국가도 현대화에 바탕을 둔 무슬림 인구의 조정을 막을 수 없었다. 이슬람 혁명이 한창이던 이란에서는 1985년경 출산율이 급락했다. 1985년 여성 1명당 6.8명이던 수치는 현재 2.1명으로 낮아졌다. 레바논에서는 시아파를 독려하는 저항정신에도 불구하고, 출산율 하락이 그치지 않았다. 이 지역 출산율 하락은 마론교(레바논의 가톨릭교) 교도보다 훨씬 빠르게 진행되고 있다.
 기독교 국가에서 탈기독교화가 현대화와 문맹퇴치의 관계 속에서 출산율 저하의 중심 역할을 했다면, 이슬람 세계에서는 탈이슬람화가 출산율 저하의 직접적 원인이 아니다. 무슬림의 새로운 종교성이 개인주의적 가치의 영향을 받은 것이지, 공동체적 가치의 영향을 받은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각주>
(1) 유세프 쿠르바주(Youssef Courbage)와 에마뉘엘 토드, <문명들의 만남>(Le Rendez-vous des civilisations), Paris, Seuil, 20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