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과 억압에 맞선 혁명가, 리프크네히트

2008-10-29     베르나르 움브레히트 | 전 <위마니테> 베를린 특파원

 

냉전 동안 이 광장을 가로 지르던 베를린 장벽에는 현재 관광객들이 사진을 찍을 수 있는 잔해 약간이 남아 있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한쪽 모퉁이에 위치한 돌로 된 평행 육면체를 눈여겨 보지 않고 그냥 지나친다. 그 위에 씌어진 '카를 리프크네히트 기념비 받침대'라는 문구를 읽으려면 교차로를 지나야 한다. 이 받침대는 바이마르 공화국 초대 대통령인 프리드리히 에베르트의 아들이자, 전후 동베를린 시장이었던 프리드리히 에베르트가 1951년 8월 13일, 리프크네히트 탄생 80주년을 기념해 세운 것이다. 그러나 기념비 건립은 무산되었고, 28년 동안 이 받침대는 미국, 영국, 소련의 공동 구역에 위치한 베를린 장벽에 둘러싸여 있었다. 이는 1995년 현재의 포츠담 광장 건설 공사 때 철거되었다가 2003년에 재설치되었다.   

 받침대만 있는 리프크네히트 기념비
 리프크네히트에 관한 이런 에피소드는 마치 "유령이 들어온다, 유령, 나간다, 유령, 다시 들어온다"라는 <햄릿>의 연출 지문을 보는 것 같다. 과연 그는 유령일까? 세바스티엥 하프너는 리프크네히트를 "독일 역사상 가장 용감한 인물1)"로 평가한다. 카를 리프크네히트는 로자 룩셈부르크와 더불어 독일 좌파 진영 위에서 환하게 빛나고 있다.
 리프크네히트는 변호사이자 독일사회민주당(SPD)소속 독일제국 의회 의원이었다. 그의 아버지는 독일사민당 창립자 중의 한명이다. 그는 1914년 12월, 전쟁 군사 예산안 승인을 단호하게 거부했다. 그 보다 앞선 몇 달 전에는 당의 결정을 따랐지만, 독일 전체가 광란의 도가니에 빠져있던 그 시기에 사회당원들의 다수결 투표에서 혼자 반대표를 던진 것이다.
 1916년 5월 1일 저녁, 리프크네히트와 로자 룩셈부르크가 함께 이끌던 사회당 내 소수 좌파 스파르타쿠스 단원들은 포츠담 광장에서 시위를 벌이며 동참을 호소했다. 저녁 7시부터 경찰이 광장과 주변 도로들을 봉쇄했다. 8시에 시위대가 도착했다. 5월 15일자 <스파르타쿠스 브리펜>(스파르타쿠스단 기관지)에 의하면 "이 순간 시위대 선두에 있던 카를 리프크네히트의 힘차고도 낭랑한 목소리가 포츠담 광장에 울려 퍼졌다. '전쟁 타도!' '정부 타도!' 곧 경찰들이 그를 체포해 포츠담 역 쪽으로 데리고 갔다"고 되어 있다. 
 이 시위는 당시 전쟁 중이던 독일과 프랑스에 상당한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이 외침과 더불어 비스마르크가 세운 독일 제국의 종말은 시작되었다. 1916년, 강력한 대국민 선전에도 불구하고 1차 대전의 참상은 점점 더 확실히 드러나고 있었다. 베르덩 전투가 시작되었고 전사자들의 시체가 쌓여갔다.
 그는 의원직을 가지고 있던 43세 때 전선으로 다시 나아가 삽과 곡괭이를 들고 진지 구축부대에 편입됐다. 1915년 9월, 전선에서 그가 아내에게 보낸 편지에는 "부대 분위기는 폭동을 일으킬 정도로 매우 흥분돼 있소. ...(중략)... 영광을 가장한 이 모든 잘못을 백일하에 드러낼 태세가 되어 있소."라는 문구가 적혀있다.  
 그는 체포되어 의원면책권을 상실하고 '반역죄'로 4년 형을 언도받았다. 단식과 저항을 거듭하던 그는 밖에서보다 안에서 더 위험한 인물이 되어 1918년 10월 석방되었다. 그리고 11월 8일, 열광하는 베를린 시민들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11월 9일, 독일 공화국이 선포되면서 호엔촐레른 왕가의 독일 제국은 마침내 종지부를 찍었다.
 
 자유 독일사회주의공화국 선포하다
 사실 독일 공화국은 2번에 걸쳐 선포되었다. 어리석게도 독일 제국을 구할 것을 고집하는 프리드리히 에베르트 사민당 총재를 대신해 사회주의자 필립 샤이데만이 오후 2시에 제국의회 의사당 창문에서 1차로 공화국을 선포했다. 두 시간 후, 리프크네히트가 호엔촐레른 왕가 저택 발코니에 나타나 '자유 독일사회주의공화국'을 선포했다.
 당시 독일에는 두 정권이 존재하는 상황이었다. 11월 11일 프랑스?영국이 독일의 항복을 받아 들이면서 "르통드까지 호송되는 적군 인사들이 독일이라는 국가를 실제로 대표할 수 있는 사람들인가"라고 물어볼 정도였다. 패전 관리와 독일군 귀환 임무는 사실상 사회민주당에게 맡겨졌다. 독일 군부는 이 동안 리프크네히트의 '등 뒤에 칼 꽂기'를 꾀하고 있었다.
 1918년 11월 초, 킬에서 수병들이 해군 수뇌부의 결사 항전 결의에 반대, 정부를 지지하고 출항을 거부하는 사태가 발생했다. 이런 반란 움직임은 당시 점령지이던 알자스 지방을 포함한 독일 전국으로 확산됐다. 각지에 노동자 및 군사 소비에트(평의회)가 결성됐다. 전쟁은 혁명으로 바뀌었다.
 이 혁명은 매우 특이했다. 처음에는 독일 제국을 지배하던 군부 독재에 반대하는 혁명이었고, 나중에는 사회민주주의 혁명이 되었다. 하지만 그것은 사회민주당 지도층에 의해 무산된 "실패한 혁명2)"이었다. 이 혁명이 대담하지 못했다는 것은 에베르트 정부가 완전히 승리하고, 로자 룩셈부르크나 카를 리프크네히트가 1918년 12월에 열린 노동자평의회 총회에서 인정받지 못했다는 사실에서 드러났다.11월에 벌어졌던 상황이 1919년 1월에 재연됐다. 1월 4일, 스파르타쿠스 단원들과 가까웠던 에밀 아이히호른 경시청장이 해임되자 폭동이 일어났고, 이는 결국 6일부터 15일까지의 '피의 주간'으로 끝났다. 질서 회복을 위해 에베르트는 킬의 해군 반란을 진압해 '잔인한 개'라는 별명을 얻은 사회주의자 구스타프 노스케를 베를린으로 불러들였다. 이 동안 스파르타쿠스 단원들은 독일공산당을 창립했고, 이들에 대한 살해 선동이 벌어졌다. 로자 룩셈부르크는 독일공산당이라는 호칭 대신, 자신의 동료들이 자신을 배신할 때조차 그들과 함께 남은 스파르타쿠스라는 호칭을 더 선호했다.
 

1차 대전 반대, 군부 독재·제국주의에 저항… 비참한 최후 맞아
로자 룩셈부르크와 독일 공산당 창립 '기념비 없는 받침대만…'


 룩셈부르크와 함께 피살
 1919년 1월 포츠담 플라츠. 구스타프 노스케를 앞세운 3천 명의 시위대가 시가행진을 벌였다. 시위대의 북과 피리 소리는 최소한 그 음악적 위용으로만 보자면 패전의 수치를 가리고도 남았다. 새로 조직된 기마 근위대는 위풍당당하게 귀족풍의 에덴 호텔에 사령부를 설치했다. 바로 그날 그들은 카를 리프크네히트와 로자 룩셈부르크를 살해하기로 했다.3)
 독일 군부가 내부의 적에게 보복을 가할 가능성은 로자 룩셈부르크가 마지막으로 집필한 <명령이 베를린을 지배한다>는 글에서도 찾아 볼 수 있다. 그녀는 "플랑드르와 아르곤에서 초라하게 패배한 그들이 스파르타쿠스 단원 300명에게 확실한 승리를 거두며 그들의 명성을 되찾았다."고 기록했다.
 1월 15일 9시 경, 리프크네히트와 룩셈부르크는 에덴 호텔로 잡혀 왔다. 그들은 룩셈부르크를 땅바닥에 질질 끌고 다녔고, 그녀의 코와 입에서는 피가 흘러내렸다. 그들은 리프크네히트를 개머리판으로 때리고, 차에 태운 후 6명의 장교가 동승해 티에르가르텐 방향으로 데려갔다.
 노이어 시에 도착하자 장교들은 차가 고장 났다며 리프크네히트를 내리게 했다. 그리고는 호스트 폰 플루크-하르퉁이 그의 머리에 총을 발사했다. 리프크네히트의 시신은 주유소 근처 다른 시체 더미 위에 내던져졌다.
 로자 룩셈부르크는 보겔 중위가 데려갔다. 또 다른 군인 룽게가 그녀를 사살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그는 개머리판으로 그녀의 머리를 두 번 내려쳤다. 그런 다음 차에 태웠다. 차 안에서 그녀는 다시 얻어맞았다.
 마지막으로 보겔이 그녀 머리에 대고 확인 사살을 했다. 그녀의 시체는 란트베어 운하에 던져졌고 1919년 5월이 되어서야 심하게 부패된 채 강변에서 발견됐다. 그 사이 사람들은 카를 리프크네히트의 관과 함께 그녀의 빈 관을 매장했다.
 룽게는 2년 형을 언도받았으나, 보겔은 무죄 석방됐다. 처형 명령을 내린 파브스트 장군은 1970년까지 뒤셀도르프에서 평온한 노년을 보냈다.


 스탈린주의자들로부터도 홀대
 전쟁과 혁명이 뒤얽힌 이 사건들은 독일 정계가 난폭해지기 시작했음을 보여준다. 나치의 선배들에게 살해된 리프크네히트와 로자 룩셈부르크를 '스탈린주의자들' 역시 제대로 대접하지 않았다. 기념비가 완성되지 못한 것이 그 사실을 증명한다. 혁명의 전통을 이어 받았다고 자부하는 독일민주공화국(독일 통합 전 동독의 정식 명칭)의 정통성에 이 두 사람이 사용되기는 했지만, 카를도, 로자도 모스크바에서 소위 성인의 반열에 오르지 못했다. 사실, 독일민주공화국은 혁명이 아니라, 점령을 통해 탄생한 것이다.
 하이네 뮐러는 독일공산당 지도자들을 살해함으로써 독일공산당을 참수시킨 것이 '유럽의 불행'을 가져온 원인 중 하나라고 본다. 그는 두 번째 남편이 스파르타쿠스 단원이었던 한나 아렌트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로 분석한다. 레닌의 후계자들은 독일공산당의 정체성을 '과격화'시키기로 결정했고, 그러한 목적달성을 위해 로자 룩셈부르크가 남긴 모든 것을 비난하도록 지시하였다.4) 이에 따라, 룩셈부르크주의'는 '노동자 운동의 매독'으로 규정됐다. 한편 동독공산당 중앙위원회 소속 마르크스레닌주의 연구소에서 일했던 아넬리스 라스히트차가 최근 펴낸 <리프크네히트 전기>에는 스탈린 독재체제가 리프크네히트의 부인 소피를 탄압한 사실이 암시되어 있다. 소피의 남동생은 독일 간첩으로 기소되어 감옥에서 사망했다. 홀미라는 별명으로 알려진 리프크네히트의 아들은 독일공산당에서 제명되었다. 소피는 1954년이 되어서야 베를린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영원히 기억되는'자유로운 유령'인가
 포츠담 플라츠의 리프크네히트. 혹자는 "여러 기념비들이 자랑하는 특징 가운데 가장 놀라운 점은 사람들이 그것들을 별로 주목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마치 빗물이 비옷 위를 흘러내리듯, 사람들은 무심하다."고 말한다. 레지스 드브레는 "프로이트의 말처럼, 사회 구성원은 집요한 기억을 떨쳐버리기 위해 자신들의 유령을 돌로 된 받침대 위에 고정시켜 둔다"5)고 지적한다. 이런 의미로 본다면, 기념비 없이 받침대만 있는 카를 리프크네히트는 자유롭게 돌아다니는 유령인 셈이다.  
 리프크네히트가 공화국을 선포했던 광장에 베를린 유토피아와 '프로이센의 영광'을 되찾으려는 생각을 반영하는 또 다른 기념비 받침대가 다시 등장했다. 빌헬름 1세의 기마상 받침대가 2차 세계대전 동안 심하게 훼손돼 동독이 철거했던 것이다.
 이는 다시 1989년에 되찾은 독일의 통일성을 상징하는 새로운 조각물의 받침대로 사용되고 있다. 그것 역시 11월 9일이었다.
 번역 | 김계영 canari62@ilemonde.com

 


 

1) 세바스티엥 하프너, '독일 1918, 배신당한 혁명', 콤플렉스, 브뤼셀, 2001년
2) 알프레드 되블린, '여행과 운명', 에디시옹 뒤 로셰, 파리, 2002년.
1) 세바스티엥 하프너, '독일 1918, 배신당한 혁명', 콤플렉스, 브뤼셀, 2001년
2) 알프레드 되블린, '여행과 운명', 에디시옹 뒤 로셰, 파리, 2002년.
3) 앞의 책.
4) 한나 아렌트, '로자 룩셈부르크', '정치생활', 갈리마르, 파리, 1974년.
5) 레지스 드브레, '박물관의 드골', <르몽드>, 2008년 3월 20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