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주의의 속임수
2017-06-30 세르주 알리미 |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프랑스어판
2016년 미 대선 당시 상대 후보였던 힐러리 클린턴보다 무려 300만 표나 적게 받고도 당선된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은, 사우디아라비아에서 이란의 민주주의 부재를 비판했다. 그리고 플로리다주 마이애미에서는, 1961년 미국이 피델 카스트로 정권을 전복시키기 위해 CIA의 주도로 조직됐던 용병연합군 부대의 생존자들이 참석한 자리에서 “쿠바 국민들의 자유를 위해 대 쿠바 제재를 강화한다”고 밝혔다.
민주주의를 애매하게 표방한다는 측면에서 보면, 지난 5월 치러진 프랑스 대선이 위의 미국 사례들만큼 터무니없지는 않다. 그러나 상당히 유사한 것은 사실이다. 프랑스의 경우 1차 투표에서 가장 많은 표를 얻은 두 후보자를 대상으로 결선투표를 진행한다. 겉만 번지르르한 공약들, 좋은 이미지, 미디어의 전폭적인 지원을 등에 업은 에마뉘엘 마크롱이 예상을 뛰어넘는 돌풍을 일으키면서, 쟁쟁한 후보들은 모두 1차 투표에서 탈락했다. 마크롱과 함께 결선에 오른 마린 르 펜은 프랑스 국민의 2/3가 혐오하는 극우 성향의 후보자였으므로, 마크롱의 당선은 거의 확실시됐다.
이에 절반 이상이 상류층 출신의 정치신인들로 구성(노동자 0명, CEO 46명)된 전진당은 ‘마크롱이 프랑스를 통치’할 수 있도록 마크롱을 보필하는 역할을 맡게 됐다. 사실 1차 투표 결과로만 보면, 전진당이 추진하는 신자유주의 정책은 프랑스 국민의 44.2%만이 찬성하는 셈이다.(1) 그러나 프랑스 대선 투표방식의 마법 덕분에 이 정책은 국회에서 90%에 가까운 찬성을 이끌어낼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2)
프랑스에서 보통선거가 시행된 이래 결선 투표율이 이렇게 낮았던 적은 없었다(기권율 56% 이상, 1978년에는 기권율이 16%에 불과했다). 미국에 버금가는 이 초라한 투표율의 결과로, 사람들의 관심은 선거공약보다는 각종 ‘스캔들’ 쪽으로 쏠리고 있다. 새로운 대통령의 탄생에 일조했다는 오명에서 벗어나겠다는 듯, 미디어는 마크롱 측근의 사소한 부패와 비리들을 폭로하는데 열을 올린다. 그러나 정치적 사안들 대신 어떤 의원이 과거에 어떤 잘못을 저질렀는지에만 초점이 맞춰질수록, 현 시스템의 문제를 거침없이 지적하고 개선해야 할 정치 신인들이 의회에 그렇게 많음에도 불구하고, 정작 정부의 전략적인 경제적 선택에 이의를 제기할 만한 인물이 누구인지 우리는 잘 알 수 없게 된다. (3) 결국 이러한 중요한 문제들은 행정부나 EU 집행위로 넘어간다.
6세 소녀를 납치해 살해한 혐의를 받은 호주의 70대 피고인 그레고리가 사건 발생 33년 만에 범행을 시인한 사건과 함께, 전진당과 연정을 구성한 민주운동당 출신의 여성 국방장관 실비 굴라르가 유럽의회 세비 횡령사건으로 사임하는 사건이 최근 3일 동안 프랑스 미디어를 점령하다시피 했다. 반면 유럽 정책, 그리스 부채 위기, 긴급사태, 프랑스군의 아프리카와 중동지역 파병 등에 대해 궁금해하는 이들은 거의 없어 보인다. 피에르 부르디외가 주장한 “정치적 무관심 및 정치적 의식 약화를 위한 정책”이 이번에는 성공을 거뒀다. 그러나 경기는 이제 막 시작됐을 뿐이다.
글·세르주 알리미 Serge Halimi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프랑스어판 발행인
번역·김소연 dec2323@gmail.com
한국외국어대 통번역대학원 졸업.
(1) 마크롱과 프랑수아 피용의 득표수를 합한 결과. 다른 후보자들은 신자유주의 정책에 반대했었다.
(2) 사회당 의원들의 일부도 이에 ‘동조’할 것으로 예상된다.
(3) 라즈미그 크쉐양 & 피에르 랭베르, ‘탐사저널리즘과 정파투쟁’,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한국어판 2013년 5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