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민주권? 민주주의의 병리학

2017-06-30     에블린 피에예 |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기자

‘국민의, 국민에 의한, 국민을 위한 정부’의 기능이 오늘날 비난 혹은 의심을 점점 더 촉발시키고 있다. 민주주의의 한계와 그 일탈은 주요 정치인들의 독단 또는 국민 스스로의 무능에서 기인하는 것으로 분석된다. 그렇다면 과두정치와 포퓰리즘 중 더욱 비난받아야 하는 것은 어느 쪽인가?


오랫동안 민주주의는 이상향이나 진보, 또는 쟁취물로 인식돼 왔다. 그러나 현재 우리는 민주주의가 정도를 벗어났거나 최악의 경우 민주주의가 본질적으로 불가능한 것이 아닌지 의심에 빠져있다. 여하튼 현재 민주주의는 구원의 약속을 지키지 못한 것으로 보이며, 결국 단순한 시늉이나 거짓으로 치부될 우려가 있어 보인다. 최근 진행된 설문조사는 이런 위험을 잘 보여준다.(1) 프랑스인의 57%는 “민주주의가 잘못 운영되고 있다”고 답했으며, 77%는 “민주주의가 점점 잘못 운영될 것”이라고 전망했다. 특히 주목할 만한 내용은 프랑스인의 32%가 “다른 정치체제도 좋을 듯하다”고 평가했다는 사실이다. 어쩌면 이런 결과는 계몽주의의 소멸을 우려하는 여러 평론가, 에세이 작가, 정치인들에게 공감을 줄 수 있을지 모르겠다. 국민전선(Front National)의 위협이 한층 불거진 상황임에도, ‘민주주의의 분발’을 격렬하게 외치는 목소리는 점점 줄어들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자본주의에의 종속이 민주주의의 운명?

민주주의가 시민들로부터 신뢰를 잃게 된 이유를 분석한 수많은 저작들은 국가와 국민의 개념 등 주권관련 문제에 대한 숙고를 주로 담고 있다. 그러나 저작들이 강조하고 제시하는 주장들과 해결책은 여러 전통적 규범과 충돌하는 양상을 보여준다. ‘좌파적’ 해석과 ‘우파적’ 해석이 서로 어긋나기도 한다. 또한 많은 분석가들 중 어느 누구도 최근에 국민주권에 생기는 파열음을 의심하지 않는다. 국민주권은 유럽연합과 같은 초국가적 권력에 종속돼 있으며, 글로벌 자본주의는 볼프강 스트렉이 지적하듯이 각국의 민주주의를 무력화시키고 있다.(2) 그리스 시리자당이 승리하자, 장 클로드 융커 유럽연합 집행위원장은 “이미 비준된 유럽연합협정에 반(反)하는 민주적 선택은 있을 수 없다”고 해, 시대적 흐름을 거스른 적이 있다(<르 피가로>, 2015년 1월 29일). 주권 행사에 대한 자유주의의 영향과 관련, 알랭 바디우는 “민주주의는 항상 자본주의에 종속돼 있다”며, 의회-자본주의의 쇠퇴 속에 있는 민주주의의 운명을 예고했다. 

대표적인 민주주의 옹호자인 마르셀 고셰는 대담집을 통해 알랭 바디우와 의견을 나눈 적이 있으나, 신자유주의를 정당화했다는 이유로 종종 비난받곤 한다. 그런데, 그조차 “우리 사회에서 ‘경제-재정 복합체’의 ‘실질적이며 과도한’ 힘을 숨기는 민주주의는 단순한 단어가 아니며 꼭두각시 같은 개념도 더 이상 아니다”라고 말했다.(3)

그러나 여전히 또 다른 한계들이 있는데, 특히 인권이 확대됨에 따라 그 한계가 발생한다. 마르셀 고셰는 “공공 권력기관의 영역을 제한하면서 개인의 권리와 그들을 묶는 자유로운 관계에 대한 표현 영역을 확대함에 따라 민주주의의 발전이 이뤄진다. (…) 하지만 민주주의 개념은 상부가 돌출된 수직형태에 대한 반감 탓에 시장(市場)의 수직적 정치사회 개념과 충돌하게 된다”(4)고 주장했다. 그런데, 이처럼 다양한 ‘소수집단’ 권리에 대한 인정욕구가 높아지면, 국민주권이 일반의지처럼 약해질 수 있으며 국민은 개별적 존재로 바뀔 수 있다. 따라서 이런 욕구의 증가는 개개 인격의 구체성이라는 명목아래, 시민을 개성이 없는 추상적 존재로 변질시킨다는 것이다. 시민들 간 개별적 요구는 자본주의 이념과 자원 이윤 및 욕망 실현의 요구와 분리할 수 없다. 

공동의 인류애와 그 판단력을 통해 정치적 공동체가 가능할지 모르지만, 이런 요구로 인해 대의민주주의에서 중요하게 여겨지는 보편주의는 그대로 존재하거나 아니면 거부되거나 소외될지도 모른다. 다시 말하면, 국가는 더 이상 일반의지를 가지고 있지 않으며 개인욕망의 집합체에 불과하다. 구체적 권리 요구에 관한 논쟁은 사회계층이 존재한다는 전제 하에 진행되는데, 이 논쟁은 급진적 좌파가 내놓은 주장과 대립된다. 장 클로스 미셰아는 자유주의적 현대성에 긍정적 입장을 보이는 철학자로서, ‘권리와 이성의 이상주의적이면서 비물질적인 개념’을 비난하고 ‘보편성을 공동행동과 공유된 상황의 결과’로 이해할 것을 주장한다. 그래서 ‘우리 시대의 마지막 마르크스’라 불리는 미셰아의 말을 빌자면, 우리는 과거 사회 모습을 훌륭하게 부흥시키기 위한 투쟁을 벌이고 있는 것이다.(5)

프랑스 타르낙(Tarnac)지역 단체, 그리고 줄리앙 쿠파와 관련 있는 것으로 추정되는 익명의 작가그룹 ‘보이지 않는 위원회(Comité invisible, 코미테 앙비지블르)’의 경우, 말하자면 우리 세계를 모든 분야로 세분화하면서 ‘포섭과 추상을 가로막는, 모든 특성에의 회복’에 대한 초창기 열망에 경의를 표한다. “나와 세상은 존재하지 않으며 나와 다른 사람들도 존재하지 않는다. 내가 사랑하는 이 작은 세상의 조각 안에 내가 내 친구들과 함께 존재한다는 것은 분명하다.” ‘먼 옛날 이미 겪은 본질적 경험’은 공동체의 경험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6) 그렇다면 민주주의, 국가, 인류, 아니면 계층분류에 내재한 치명적 속임수는 무엇인가.

민주주의의 위기, 아웃사이더의 시대

이런 다양한 접근을 통해, 민주주의가 위기를 맞이한 주요요인으로 두 가지를 생각할 수 있다. 하나는 국민주권에 부가된 한계와 그로 인한 정치인의 무력이고, 다른 하나는 민주주의를 구성하는 일부 가치의 쇠퇴와 그로 인한 민주주의에 대한 의구심이다. 여기에 국민주권의 효율성과 민주주의의 정당성에 대한 문제제기가 수반된다. 지식인들의 대부분이 효력범위에 대해 언급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포퓰리즘이나 심지어 파시즘의 효력범위까지 다룬다. 그렇다면 이런 요인들은 민주주의에 내재된 해악일까? 아니면 우리가 바로잡을 수 있는 민주주의의 역기능으로 인한 것일까? 

이미 다음 상황이 전개됐다. 친절하고 타협도 잘 하지만 ‘극좌와 극우’의 적대적인 양당제가 수십 년 이어졌다. 이후, 양당제로 단순화된 정치체제를 거부하는 ‘극좌·극우’만큼, 그리고 특권층과 국민, ‘그들’과 ‘우리’, 상위계층과 하위계층, 과두적 정치권력과 거짓이 된 민주주의 등 대조하는 미사여구만큼이나 기권표가 증가한다. 상당수 국민은 온건파인 전통적 대표자들에게서 자신들과 닮은 모습이 발견되지 않자 스스로 아웃사이더가 되는 길을 선택했으며 이들 중 일부는 위험하게도 ‘반(反)민주주의자’가 된다.

그렇다면 왜 이들은 투표를 하지 않거나 잘못된 투표를 하는 것인가? 이런 현상에 대한 다양한 설명이 있다. 이반 크라스테프는 “개인의 자유와 인권이 확대됨에 따라 투표를 통해 정부뿐만 아니라 정치적 방향을 바꿀 수 있는 시민의 힘이 오히려 약해졌다”고 말한다.(7) 좌파와 우파 간 주요 대립관계의 붕괴로 인해 ‘사교계’를 제외하고 더 이상 이 둘을 구분하지 않게 된다. 그러면 왜 좌파와 우파 중에서 선택하는 것인가? 낸시 프레이저의 말에 의하면 결정적 요인이 있다. “자유주의와 파시즘이 세계 자본주의 시스템에서 긴밀하게 상호연결 된 두 가지 측면을 이루고 있다”는 것이다. 여기서 자유주의는 항상 중도를 완강하게 고집하지만 사회 및 경제 계획에 있어 준엄하고 도덕적 가치에 있어서 ‘진보’적이다. 

헝가리 총리 빅토르 오르반이 말한 ‘비자유민주주의’를 선호하지 않으면서, 또한 우리의 자유주의 체제와 실질적 대리인을 거부하지 않은 채 국민 스스로가 대표자라고 인식하게 할 방법은 없을까? 어떻게 하면 국민에게 주권을 돌려줄 수 있을까? 이 질문에 대한 지식인들의 생각은 가끔 놀랍다. 샹탈 무페는 자유민주주의에서 정치윤리 원칙을 진정으로 실행하기 위해서는, “투쟁을 이끄는 방식으로 ‘우리’와 ‘그들’이라는 대립 관계를 만들 필요가 있다”고 주장한다.(8) 샹탈 무페는 스페인 좌파정당 ‘포데모스’와 ‘라 프랑스 앙수미즈(프랑스 불복종)’ 대표자들에게 큰 영향을 준 인물로, 브누아 아몽처럼 일부 프랑스 사회주의자들에게 종종 언급되는 저명한 철학자다. 또한 안토니오 그람시의 이론과 카를 슈미트의 이론에서 자신의 견해를 키운 인물이기도 하다. 샹탈 무페는 포데모스 공동 설립자이자 전략가인 이니고 에레혼에게, 앞서 밝힌 자신의 주장에 대해 다음과 같이 부연설명을 했다.

“오늘날 평등과 국민주권으로 이해되는 민주주의와 관계된 모든 요소들은 자유주의의 헤게모니로 인해 배제됐다.”(9) 따라서 권력관계를 뒤엎고 시민들의 방향 잃은 불만을 해결할 진정한 대표자를 찾으려면, 민주주의 다원화와 양립 가능한 틀 안에서 분쟁과 대립, 불화를 표출할 ‘공공투쟁의 장’을 만들어야 한다. 좌우대립을 넘어 여러 종속관계에 맞선 투쟁과 불만을 효율적으로 모으려면, 때로는 카리스마 있는 리더를 중심으로 현안을 구체화하면서 관련 사회단체의 동의를 끌어낼 ‘상징적 무기’를 구상해야 한다. 따라서 대의민주주의에 그치지 않고, 현재의 민주주의를 급진화시켜야 한다.

시민은 종종 감정에 종속된다

 샹탈 무페는 에르네스토 라클라우와의 연구를 통해 한 가지 제안을 한다. 바로, 문화적 투쟁에서 형성된 ‘좌파 포퓰리즘’에서 입증된 전략과 함께 민주주의의 대표성을 활성화하는 것이다. 여기서 가장 주목할 것은 ‘감정’에 중점을 둔다는 점이다.  

 여러 분석가들은 다양한 형태로 ‘열정’을 강조하고 있다. ‘국민’, 즉 시민들은 종종 감정에 종속되는 것으로 보인다. 특히, 그들이 받아들일 만한 선택의 여지가 없는 투표에 임할 때 그렇다. 따라서 국민주권의 틀을 설정하는 게 바람직할 것이다. 기자이자 작가인 다비드 판 레이브라우크(10)는 “실제로 이해하는 사람이 매우 적은 세부적 문제에 대한 투표는 대부분 절망적인 결과를 초래할 수밖에 없다. 따라서 무작위로 소수의 인물을 지명한 후, 그들이 직면할 문제를 잘 다루고 정책을 제대로 펼칠 수 있다는 것을 입증하는 편이 차라리 나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 경우 일을 맡길 만한 사람을 분명히 알 수 있기 때문이다. 피에르 로장발롱도 국민의 능력에 회의적인 입장이다. 그는 “시민들은 기분에 취한 의견과 지식을 바탕으로 한 의견 또는 심지어 선택적 행동도 정당하다고 보는 경향이 있다”고 주장한다.(11) 경제역사학자 조지프 슘페터가 자신의 저서 <자본주의, 사회주의, 민주주의>에서 말했듯, 엘리트 계층의 대표자들은 전형적 시민이 정치세계에 발을 들여놓은 순간부터 정신수준이 낮아진다고 생각한다. 

  현재 우리가 알고 있는 민주주의의 타락은 시민들의 무지와 감정에서 비롯됐다기보다는, 신자유주의로 인한 결과라고 생각할 수 있다. 더군다나, 상당히 창의적인 신자유주의는 자신이 처한 현실을 부정하면서까지 도덕이 정치와 사회보다 결국 더 중요하다고 믿도록 사람들을 선동하지만, 자신이 유리한 부분에 있어 신자유주의의 가치와 해결안을 바람직한 것으로 오랜 기간 만들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민주주의의 타락 속도가 너무 빨라서 수많은 작가들이 언급한 국민의 ‘원한’이 민주주의의 약속과 그 약속의 배신을 향해 표출될 것을 예상하지 못한 게 아닐까?  



글·에블린 피에예 Evelyne Pieiller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기자

번역·윤여연
한국외국어대 통번역대학원 졸업

(1) <Les Français, la démocratie et ses alternatives(프랑스인이 생각하는 민주주의와 그 대안체제)>, <르몽드>의뢰 Ipsos-Sopra Steria 조사. 2016년 11월 6일.
(2) 볼프강 스트렉, <Le retour des évincés(제거의 귀환)>, <L’Âge de la régression. Pourquoi nous vivons un tournant historique(collectif) (후퇴의 시대, 왜 우리는 역사적 전환점을 보내고 있는가)(모음집)>, Premier parrallèle. Paris, 2017.
(3) 알래 바디우, 마르셀 고셰 대담집, <Que faire? Dialogue sur le communisme, le capitalisme et l’avenir de la démocratie(어떻게 할까? 공산주의, 자본주의 그리고 민주주의의 미래에 관한 대화)>, Gallimard, coll. <Folio le Forum>, Paris, 2016.
(4) 마르셀 고셰, <Le Nouveau Monde. L’avènement de la démocratie (새로운 세상. 민주주의 출현)>, IV, Gallimard, coll. <Bibliothèque des sciences humaines(인문과학 총서)>, 2017.
(5) 장 클로드 미셰아, <Notre ennemi, le capital(우리의 적, 자본)>, Climats, Paris, 2017.
(6) 보이지 않는 위원회(Comité invisible), <Maintenant(지금)>, La Fabrique, Paris, 2017.
(7) 이반 크라스테프, <Le retour des régimes majoritaires(다수체제의 귀환)>, <L’Âge de la régression(후퇴의 시대)>, Heinrich Geiselberger(대표저자)>
(8) 샹탈 무페, <L’Illusion du consensus(합의의 환상)>, Albin Michel, Paris, 2016.
(9) 샹탈 무페, 이니고 에레혼 공동집필, <Construire un peuple. Pour une radicalisation de la démocratie(국민을 만들다. 민주주의의 급진화를 위해)>, Éditions du Cerf, Paris, 2017.
(10) 다비드 판 레이브라우크, <Cher président Juncker(융커 위원장님께) >, <L’Âge de la régression(후퇴의 시대)>, Heinrich Geiselberger(대표저자)>
(11) 피에르 로장발롱, <Nous vivons une rupture historique de la démocratie(우리는 민주주의의 역사적 변화를 겪고 있다)>, <롭스>, Paris, 2017년 4월 6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