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시아 내 미국의 역할은 누가 맡을 것인가?

2017-06-30     존 페퍼 | 미국 외교정책포커스 소장

지난 수십 년 간, 아시아는 미래의 상징이었다. 미국인들이 미래를 상상할 때면 영화 <퍼시픽 림>의 장면들이 머릿속을 가득 채운다. 1982년 영화관객들에게 <블레이드 러너>의 비에 젖은 로스앤젤레스의 모습은 도쿄를 닮았고, 2014년 스파이크 존스가 연출한 <그녀> 속 로스앤젤레스의 분위기는 상하이에 가깝다. 올 10월 개봉하는 <블레이드 러너 2049>에서는 서울과 비슷한 분위기를 보여줄 것이다. 


영화 밖 세상에서도 아시아는 타임머신이었다. 내가 막 성인이 될 무렵, 미래를 꿈꾸는 이들은 대부분 아시아를 향했다. 대학졸업 후 많은 동문들이 영어교습으로 돈을 벌기 위해 일본을 찾았다. 요즘에는 한국과 중국의 대도시, 또는 더 남쪽의 싱가포르나 말레이시아로 향하고 있다. 내가 2001년 아시아에서 3년을 보내고 귀국했듯, 오늘날 젊은이들도 초고속 기차, 비현실적인 도시 풍경, 최신 전자기기 등 미래의 이야깃거리를 들고 귀국한다. 외교정책 엘리트들이 초강대국으로서의 지위가 쇠퇴 중인 미국의 대체세력을 생각할 때 동쪽을 바라보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일 것이다. 

중국의 성장에 대한 미국의 반응

트럼프 시대를 맞아 미국 쇠퇴론이 더욱 기승을 부리고 있는데, 이제는 아시아 중에서도 일본이나 한국보다는 중국을 더 큰 위협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중국은 이미 경제총생산 측면에서 미국을 뛰어넘었고, 군사력도 점차 강화되고 있다. ‘세계 유일의 초강대국’이라는 미국의 지위를 위협할 만한 국가를 꼽으라면, 단연코 중국일 것이다. 미국의 영향력 약화에 대한 우려가 커지면서 오바마 정권에서는 주요 2개국(G2) 개념이 힘을 얻었다. 즉, 이길 수 없다면 함께 하자는 것이었다. 중국과의 공동 패권안이 얼마나 진심이었는지는 모르지만 오바마 행정부는 기후변화 및 양자간 투자 협정을 체결하는데 그쳤다. 

중국은 더 큰 야망을 가지고 독립적 패권을 추구하고 있다. 제2차 세계대전 후 폐허가 된 유럽을 되살렸던 건 미국의 마셜 플랜이었다. 중국은 최근 21세기 중국판 마셜 플랜을 공개했다. 중국은 주변국 모두를 타깃으로 하며 유라시아 대륙 전역을 영향권에 두려는 목표를 가지고 있다. 60여 개 국가에 약 1조 달러를 제공할 예정인 중국의 ‘일대일로 정책’은 자선사업과는 거리가 멀다.(1) 이를 통해 중국 건설사에 수많은 자원이 몰리고 중국공장에 광물과 에너지가 공급될 것이며, 미국 국채보다 더 높은 수익을 약속한다. 일부 인프라 프로젝트는 안보 우려를 완화시킬 것이다. 예를 들어 미얀마를 관통해 에너지 파이프라인을 건설함으로써 말라카 해협을 우회하는 공급로를 확보할 수 있다. 말라카 해협의 경우, 적대세력의 공격을 받을 경우 중국 원유 수입의 80%가 끊길 위험이 있다. 

2016년 대선에서 도널드 트럼프가 당선됨에 따라 워싱턴 정가의 정책 입안자들과 전문가들 사이에서 중국의 부상에 대한 우려는 더욱 깊어졌다. 트럼프 대통령은 선거기간에 “해외 군사 개입을 줄이겠다”는 발언으로 네오콘과 보수세력을 놀라게 했다. 당선 후에는 군비를 확대하겠다고 약속했으나, 이슬람국가조직(IS) 공격 외에는 국방부의 신무기를 어떻게 활용할지 모르는 듯 보인다.  

또한 트럼프 대통령은 미국이 전통적으로 국제 지지를 이끌어내기 위해 활용해온 소프트 파워에 대해서도 관심이 없어 보인다. 예를 들어 미 정부는 오랫동안 국제금융기관 및 자유무역협정을 추진해왔지만, 트럼프 대통령은 이를 “세계주의라는 거짓된 노래(False song of globalism)”라며 비판했다. 반면 중국은 글로벌 자본주의의 새로운 지배자를 꿈꾸며 새로운 국제 금융체계를 세우려 한다. 2016년 1월 미국과 유럽연합(EU)의 지지 없이 출범한 아시아인프라투자은행(AIIB)은 중국의 해외건설 프로젝트에 자금을 제공하며 세계은행과 같은 기능을 수행할 것이다. 세계은행에서 중국의 투표권 지분은 5% 미만이지만, AIIB에서는 28%에 육박한다. 중국의 상업은행권에 비하면 아직 역할이 미미하지만, 향후 기회만 있다면 그 규모가 더욱 확대될 것이다.  

기후변화 문제에 대한 중국과 미국의 대처는 더욱 대조적이다. 트럼프 대통령이 지구온난화를 중국의 ‘거짓말(Hoax)’로 치부하는 등 그 자체를 부정함으로써, 중국의 국제적 영향력에 대한 갈망에 불을 지폈다. 지난 11월 트럼프가 당선된 후, 최고 기후변화 협상자 중 한명은 “글로벌 기후 거버넌스에서 중국의 영향력과 목소리가 커지면서 다른 부문의 거버넌스에도 영향을 미칠 것이며, 결국 중국의 국제적 지위와 세력 및 주도권이 강화될 것”이라고 밝혔다. 이런 변화는 서양에서 동양으로의 패권이동이라는 큰 흐름의 일부일 뿐이다. 2010년 기준, 북미와 서유럽은 세계국민총생산(GNP)의 40%를 차지했다. 그러나 이코노미스트 인텔리전스 유닛에 따르면, 2050년이 되면 북미와 서유럽의 비중은 21%까지 하락하고 아시아의 비중은 48.1%까지 증가할 것으로 예상된다.  

그러나 그렇다 해서, 당장 만다린 집중강좌를 신청하거나 달러를 위안화로 환전할 필요는 없다. 중국과 미국의 대결은 중국이 원하는, 내지는 미국이 두려워하는 것처럼 전개되지는 않을 것이다.  

풍요로운 아시아 시장을 장악하라

2016년 10월 로드리고 두테르테 필리핀 대통령은 베이징에서 중국 지도부와 만나 “미국은 패배했다. 나는 이제 중국의 이데올로기 흐름에 동조한다”고 선언했다. 그는 나아가 러시아, 중국, 필리핀이 새로운 축을 이루어 오만한 미국에 대항하길 희망했다. 이는 매우 충격적인 전개였다. 필리핀은 오랫동안 미군주둔 및 군함정박을 통해 우호관계를 맺어왔으며 9·11 테러 이후에는 이슬람 반란 억제를 위해 군사 전문가를 보내는 등 미국의 아시아 정책에 주춧돌 역할을 했다. 또한 남중국해 도서영유권 분쟁으로 중국과 대립각을 세우며 국제재판소에 중재를 요청하기도 했다. 그러나 2016년 5월 두테르테가 정권을 잡으면서 자신의 초법적 처형(Extrajudicial killings)을 우려했던 오바마 대통령을 “창녀의 자식(Son of a whore)”이라 욕하면서 양국의 우호관계는 막을 내렸다.   

필리핀의 변절은 미국의 쇠퇴를 막으려는 오바마 행정부의 외교정책에 치명적 일격이 됐다. 2011년 10월 ‘아랍의 봄’ 직전 힐러리 클린턴 국무장관은 외교정책관련 기사를 기고하며 ‘아시아 중심(Pacific pivot)’ 정책을 제시했다.(2) 당시 미국은 이라크 및 아프가니스탄 전쟁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노력하고 있었다. 멕시코 및 캐나다에서의 원유 수입과 셰일 프래킹(fracking), 지속가능한 에너지 투자가 증가하면서 중동 원유에 대한 의존도가 감소했다.(3) 오바마 행정부가 마침내 부시 정권의 실패를 뒤로 하고 새로운 시대로 나아가려 한 것이었다.

아시아 중심 정책은 ‘윌리 서턴(Willie Sutton)’ 정책으로 칭할 수도 있을 것이다. 희대의 은행털이범인 서턴은 왜 은행만 골라 털었냐는 질문에 “거기 돈이 있기 때문”이라고 답했다. 아시아의 경우에도 마찬가지다. 아시아에는 세계 11대 경제대국 중 4개국(중국, 일본, 인도, 한국)이 위치해 있다. 미국이 이라크, 아프가니스탄, 시리아 및 예멘에서 승산 없는 싸움에 매달리는 동안 중국은 풍요로운 아시아 시장을 장악했다. 중국은 이제 한국, 일본, 호주 및 동남아시아 전체 국가의 최대 교역국으로 올라섰다. 

아시아에서의 영향력을 되찾기 위해 오바마 행정부는 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TPP)으로 알려진 자유무역협정을 추진했다. 미국 협상가들은 이해관계가 다른 12개국의 합의를 형성하는 거의 불가능한 일에 성공했고, 중국은 이 과정에서 배제됐다. 그러나 의회가 미온적인 태도를 취했다. 미국 여론이 냉담해지자 이 정책의 주요 입안자인 힐러리 클린턴마저, 대선에 영향을 받을까 우려한 끝에 2016년 반대 입장을 밝혔다. 트럼프 당선 후 TPP 탈퇴는 취임 후 첫 조치로 예상됐다.  

미국에게 아시아는 어떤 존재인가

미국에게 아시아는 경제 이상의 중요한 의미가 있다. 미국은 오랫동안 태평양을 자신의 독점적 세력권(American Lake)으로 생각했다. 현재 37만 5천 명의 군사 및 민간인이 태평양 사령부(Pacific Command) 영역에 주둔해 있으며 해군 군함의 거의 절반이 태평양에 배치돼 있다. 미국은 일본, 한국 및 필리핀과 조약동맹을 맺고 있으며 역내에 수십 곳의 군사기지를 보유하고 있다. 그러나 중국은 10년 이상 두 자릿수의 군비 증강을 통해 태평양의 유일한 강대국이라는 미국의 주장에 반박하기 시작했다. 미국의 군사적 접근을 막기 위해 신무기를 개발하고 사이버전에 두각을 나타내며 미 정부기관 해킹을 통해 엄청난 양의 기밀 정보를 빼내기도 했다. 또한 스파이전에서 많은 미 첩보국 요원들을 수감 내지는 살해함으로써 정보유출을 막았다. 

미 국방부의 아시아 세력 확장 노력은 트럼프 시대가 도래하기 전 이미 실패한 것이다. 미국은 압도적 군사 우위에도 불구하고 ‘위대한 중동’에서 무력으로 성과를 내기는 불가능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라크와 시리아의 이슬람국가, 아프가니스탄의 탈레반 부활, 예멘 및 리비아의 혼란 등이 미군을 계속 괴롭혀왔다. 오바마 행정부는 태평양 지역 내 형식적인 재배치를 실시하고 역내 동맹국에 첨단무기를 판매하는 한편, 중국에 위협적 조치를 취하기도 했다. 그러나 결국 오바마 행정부의 다른 정책과 마찬가지로 ‘아시아 중심’ 정책도 야망으로 그쳤다. 미국은 사실상 대중동을 벗어나지 못했다. 

트럼프는 대선운동 기간, 일본과 한국으로부터 핵우산을 철수하겠다고 위협하면서도 중국의 위협에 대해서는 엄포를 놓았다. 동맹국들에게 미국의 원조와 보호의 대가를 더 지급하라고 요구하면서도 태평양 역내 미국세력을 확장할 방법을 구상하지는 않았다. 트럼프는 대통령 당선 후에는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과의 관계를 개선하는 한편, 국방예산을 대폭 증액하는 상반된 움직임을 보였다. 그렇다면, 수백억 달러의 추가 예산은 어느 국가를 겨냥한 것일까? IS 척결을 위해 해군 군함 350척이 필요한 것은 아닐 테다. 트럼프는 한국의 문재인 대통령 당선을 반기는 한편, 한국과의 잘못된 무역 및 안보조약을 재협상해야한다고 주장한다. 또한 북한을 위협하는 한편, “꽤 영리한 녀석(Pretty smart cookie)”이라 칭한 김정은과의 대면 가능성을 언급하기도 했다.    

트럼프의 변덕스러운 발언으로 인해 아직 취임 초기임에도 아시아 내 미국의 영향력은 국내 지지율과 함께 급락하고 있다. 게다가 큰 승리만 바라며 아시아에 기대감이 없는 대통령을 생각하면 영향력 감소는 분명해 보인다. 최근 몇 년 간, 여러 가능성을 놓고 아시아에서의 영향력 쇠퇴 정도를 추정해왔다. 즉, 북한 미사일이 미국 서안에 닿고, 중국의 군비가 미국 수준에 근접하고, 일본과 한국이 필리핀과 같이 동맹관계를 재고할 경우 등이 논의됐다. 이제는 트럼프 시대를 맞아 미국의 무능하고 부패한 자멸을 향해가는 행정부를 어떻게 생각할지를 고려해야 한다.  

아시아 최강국인 중국으로서는 그 공백을 메우려 하겠지만, 아무리 정교하다 해도 계획이라는 것은 종종 빗나가기 마련이다. 

인구 위기를 비롯한 아시아의 문제들

태평양 지역에서 미국의 가장 견고한 동맹국이라 할 수 있는 일본에서는 인구 고령화가 매우 빠르게 진행되고 있다. 일본 인구는 2010년에서 2015년까지 1백만 명 감소해 1억 2,700만을 간신히 넘기고 있다. 출산율이 매우 낮고 이민 인구도 적어 공식 추정에 의하면, 2050년 무렵에는 인구가 8,500만~9,500만 명으로 감소할 것이다. 2135년 경이면 화석화된 사회에서 마지막 일본인이 118세를 끝으로 숨을 거둘 것이다. 전 무역 협상가인 클라이드 프레스토위츠가 최근 저서 <일본부흥(Japan Restored)>에서 기술한 이와 같은 최악의 시나리오는 가능성이 낮아 보이지만, 일본이 국가적 자살(세푸쿠)로의 길을 걸어가고 있는 것은 분명해 보인다. 이를 일본에 국한된 이야기로 여길지도 모른다. 물론, 일본은 1990년 버블 붕괴 이후 재정 위기를 겪어왔다. 그러나 일본의 경제 호황, 침체 및 수축의 역사는 국가 주도의 수출중심 성장을 추구해온 다른 국가에도 경종을 울리고 있다. 

한국 또한 경기기대지수 악화, 빈약한 성장률, 불평등 확대, 만연한 기업 부패의 시대를 살고 있다. 청년층은 높은 실업률 및 비정규직 차별에 직면해 한국을 ‘헬조선’으로 칭하고 있다. 1392~1897년의 조선왕조를 빗대 표현한 것이다. 대만은 아시아의 놀라운 경제성장에 기여한 ‘산업화의 기러기 편대’에 속하지만 유사한 문제를 겪고 있다. 경제학자 프랭크 샤오에 의하면 “정체된 저임금, 소득 불평등 심화, 국내 산업 공동화, 수출 급감” 등의 문제에 직면해있다. 

중국의 경제기적도 그 빛이 다소 약해지고 있다. 두 자릿수의 GNP 성장도 옛말이 됐다. 관계자들은 이제 성장률이 7%만 돼도 기뻐하고 있으며 이조차 부풀린 수치로 간주된다. 노동력 또한 2012년 이후 감소해왔다. 2016년에는 파업과 시위가 급증했으며, 최서단의 신장 및 티베트 지역에서는 불안이 계속되고 있다. 중국 정부의 공식부패 척결 캠페인은 비록 고위 공직자 몇 명을 처벌하긴 했지만 다른 형태의 부정으로 옮겨가는 결과만 낳았다.  

일본만 인구위기에 처해있는 것은 아니다. 대만과 한국의 출산율은 각각 1.12명, 1.25명으로 일본의 1.41명보다도 낮다. 중국도 1.6명에 그쳐 4개 국가 모두 대체 출산율 2.1명에도 미치지 못하고 있다. 2050년 무렵이면 4개국 모두 현재 세계최고의 생산력을 보이는 노동자들에게 은퇴연금과 의료비를 지급해야 할 것이다. 과거 투자자들이 일본을 건너뛰고 역내 다른 국가에서 더 나은 투자기회를 찾던 현상을 두고 ‘재팬 패싱(Japan passing)’이라 불렀는데 이제는 ‘차이나 패싱’이 나타나고 있다. 또한 금융의 흐름은 앞으로 기후변화의 영향을 받게 될 것이다. 21세기 후반에는 도쿄, 상하이, 홍콩, 싱가포르 등 주요 도시들이 기후변화의 위협을 받을 것이다. 

서구에서는 아시아 패권론이 오랫동안 거론돼왔으며, 지금도 중국의 일대일로 정책이 트럼프의 독불장군식 리더십과 대조를 이루면서 힘을 얻고 있다. 그러나 미래는 중국이나 그 지지자들의 바람과 달리 복잡하게 펼쳐질 것이다. 중국은 인구위기, 부정부패, 경제성장 둔화, 환경파괴, 공산당 이데올로기 쇠퇴 등 수많은 문제에 직면해있다.   

신민족주의와 ‘투키디데스의 덫’

미국은 과거 아시아 민족주의의 해독제 역할을 자처하고 나섰다. 제2차 세계대전 후 미군의 영구 주둔을 통해 일본 군국주의의 부활을 막으려했다. 영토적 야심이 없는 중립국임을 내세우며 1972년 오키나와에 대한 영유권을 일본에 반환했다. 역내 도서 영유권 분쟁에 대해서도 중립적 입장을 취했다. 이와 같이 자유국제주의로 중국, 북한, 베트남, 캄보디아 및 라오스의 비자유주의적 공산주의를 물리치려 한 것이었다.   
냉전시대 동안 아시아에 팽배했던 초국가적 이데올로기는 21세기를 맞아 소멸을 앞두고 있다. 공산주의는 사실상 사라졌으며, 대신 그 정도는 다르지만 민족주의가 그 자리를 대체하고 있다. 시진핑의 중국과 김정은의 북한 외 많은 국가에서 민족주의가 뿌리를 내리고 있다. 예를 들어, 일본의 아베 신조 총리는 미국이 혐오한 군국주의를 부활시키고 있다. 일련의 미 행정부가 일본의 우파가 전후 ‘평화헌법’을 개정하려는 움직임을 지지 및 선동했으며 자위대에 선제공격권을 부여하도록 했다. 

한편, 동남아시아도 민족주의 지도자들이 득세하고 있다. 무차별 살인을 이어가고 있는 필리핀의 두테르테 대통령, 전 군사령관인 프라윳 찬오차 태국 총리, 부패 스캔들에 휩싸인 나지브 라자크 말레이시아 총리 등이 그 예다. 남아시아, 특히 인도 또한 민족주의에 물들어가고 있다. 인도는 최근 영국을 밀어내고 세계 6대 경제대국으로 발돋움 했으나 나렌드라 모디 인도 총리는 힌두 예외주의를 여당의 핵심 이념으로 삼고 있다.  

민족주의가 부상하면서 역내 무기수입이 급증하고 있다. 스톡홀름 국제평화연구소에 따르면, 인도는 2012~2016년 세계최대의 무기 수입국으로 부상했다. 그 기간 동남아시아의 무기수입은 6% 이상 증가했으며, 베트남은 세계 10위로 올라섰다. 2012년에는 아시아의 전체 군비 지출이 처음으로 유럽을 넘어섰다. 이와 같은 민족주의와 무기수입은 분명 권력의 흥망성쇠와 연관돼 있다. 중국이 공격적 태도를 취하고 미국이 산만한 모습을 보임에 따라 남중국해 및 기타 지역에서의 영토권 주장을 강화하기 위해 군비증강에 몰두하는 것이다. 현재 양국이 협력하는 부문은, 언젠가 파멸로 몰아갈 수 있는 무기를 만드는 것이다. 외교정책 전문가들은 이를 두고 ‘투키디데스의 덫’을 언급하고 있다. 투키디데스의 덫은 신흥 강자로 막 부상한 아테네(현재의 중국)와 기존 강국 스파르타(현재의 미국)의 길고 소모적이었던 펠로폰네소스 전쟁(제3차 세계대전)을 일컫는 말이다.(4) 

그러나 아시아의 갈등은 다른 양상을 보이고 있다. 민족 자결주의가 강해지면서 기존 강국과 신흥 강국의 힘을 모두 약화시키고 있다. 미얀마와 한국의 예를 통해 이를 확인할 수 있다. 중국은 미얀마의 최대 투자국으로 한때 친밀한 관계를 자랑했으나 지금은 긴장이 고조되고 있다. 2011년 미얀마에 새로운 민간정부가 들어서면서 중국이 투자한 대형 프로젝트의 일환인 밋송댐(Myitsone dam) 건설을 중단했다. 저널리스트 톰 밀러는 자신의 저서 <중국의 아시안 드림>에서 “많은 미얀마인들은 중국이  군사정권을 지원했다고 비판했다”고 기술했다. 선거권을 부여받은 미얀마 국민들은 생산전력의 90%를 중국에 전송하는 밋송댐 등의 프로젝트에 비난의 화살을 겨냥했다. 아웅산 수지가 이끄는 새로운 정부는 이제 댐 사업을 영구 보류하든(이 경우, 중국 출자자에게 8억 달러 반환) 과거 반대했던 사업을 계속하든 결정을 내려야 할 것이다.     

미얀마뿐만 아니라 스리랑카도 중국의 영향력에서 벗어나 인도로 노선을 변경했다. 두테르테 필리핀 대통령은 최근 인권침해에도 불구하고 필리핀의 마약전쟁을 칭찬한 트럼프 대통령의 미국에 다시 호감을 보이고 있다. 베트남은 항상 중국의 지정학적 의도에 의심을 품어왔으며 라오스, 인도네시아 및 말레이시아에도 반중국 정서가 확산되고 있다. 중국의 일대일로 정책은 규모 면에서 마셜 플랜을 능가하지만, 마셜 플랜을 성공시켰던 강한 정치적 연대가 없다.

그러나 중국만 반발을 사고 있는 것은 아니다. 한국의 경우, 박근혜 전 대통령이 부패 혐의로 탄핵됨에 따라 약 10년의 극우정치가 종식되고 중도진보 성향의 문재인이 당선됐다. 문재인 신임 대통령은 선동가 유형은 아니기 때문에 미국과 극적으로 결별하는 일은 없을 것이다. 한국은 오랫동안 미국의 영향력 하에 있었기 때문에 바로 이를 벗어나는 모험을 하진 않을 것이다. 그러나 문재인 대통령은 미국이 취임 전 성사시킨 사드(THAAD·고고도미사일방어) 배치를 재검토하겠다고 약속했다. 또한 한국의 최대 교역국인 중국과의 관계를 회복하고 북한과도 보다 협력적인 관계를 맺을 계획이다. 한편 일본과 미국은 오키나와 섬 후텐마시의 오래된 미군 기지를 오키나와 내 다른 지역으로 이전하는 계획을 세웠으나 오키나와 정치인, 시민단체, 주민 등의 반대로 난관에 봉착했다. 미국은 오키나와에 화력의 상당부분을 보관해왔다. 오키나와 주민의 신규 기지 건설 반대는 오바마 대통령과 클린턴 국무장관의 태평양 계획을 복잡하게 했을 뿐만 아니라 일본과 한국의 주둔군을 2차 저지선의 괌 등에 재배치하는 안에 힘을 실어줬다.  
 
아시아 국가들이 소위 후견인의 품을 떠나 자국 이익을 추구함에 따라 합의점을 찾는 것이 더욱 어려워졌다. 카네기 국제평화재단의 제시카 매튜스는 “아시아는 화합과는 거리가 멀다”고 지적하며 “동양을 서양에 반대하는 개념으로 하나로 묶을 수는 없다. 아시아가 경제적으로는 통합되고 있지만 다양한 분쟁과 역사적 갈등, 문화적 차이로 분열돼 있다”고 기술했다.      

결국, 아시아의 미래는 어찌 될 것인가

자유국제주의가 아시아의 미국 동맹국과 미국의 신정부에 외면 받는다면, 과거를 거울삼아 미래를 예측할 수 있다. 과거 천 년 이상 아시아를 지배했던 중화주의로의 회귀가 그것이다. 각 지역 태수들이 공물을 싣고 북경의 황제를 방문하는 대신 캄보디아, 라오스, 미얀마, 필리핀 지도자들이 중국자본으로 댐과 항구, 파이프라인 등을 건설하고 그 수익의 상당부분을 중국에 바치게 될 것이다.   

그러나 아시아에서 민족주의가 심화됨에 따라 미래 전망이 불투명해지고 있다. 두테르테 등 아시아 지도자들은 중국과 미국 간 갈등을 일으켜 이를 이용하거나 완전한 독립을 추구할 수 있다. 또는 인도나 무슬림이 대다수인 인도네시아 및 말레이시아에서 영향력을 확대하려는 사우디아라비아의 도움을 구할 수도 있다. 중국의 부상이 서구세력에 우려를 유발했다면, 아시아에서 미국 패권의 쇠퇴 후 분명한 강대국 없이 혼돈이 야기될 가능성 또한 우려를 낳고 있다. <파이낸셜 타임스> 칼럼니스트 기드온 래치먼은 최근 저서 <동양화(Easternization)>에서 다음과 같이 지적했다.

“패권국가 없이 법치로 지탱되는 다극체제는 이론적으로는 매력적이다. 그러나, 다극체제가 이미 나타나고 있으며 불안정하고 위험한 양상을 보이고 있다. 지배력 없이는 ‘법치’를 실현한다는 것은 현실적으로 어렵다.”

아시아는 수년 동안 중국과 미국의 헤게모니를 대체할 방안을 구상해왔다. 정치인들과 학자들은 EU와 같은  경제적, 정치적 통합을 구상했다. 그러나 동남아시아국가연합(ASEAN)과 상하이협력기구 등의 시도는 EU에까지는 미치지 못했다. 최근에는 EU 또한 불안정하고 분열된 모습을 보이고 있다. 결국, 아시아는 그 눈부신 미래에 대한 수많은 상상과는 달리, 유럽과 같이 평화적 번영을 누릴 가능성이 높지 않다. 또한 미국의 헤게모니가 계속되거나 수세기 전 중화주의가 부활하는 일도 없을 것이다. 아시아의 미래에 대해 분명한 것은 인구감소, 경기침체, 민족주의 부상, 해수면 상승 등 온갖 문제와 위험으로 가득 차있을 것이라는 점이다.

미국은 아시아에 상당한 영향력을 유지하고 있지만 트럼프답게 뒤로 물러나 질서가 붕괴되는 것을 관찰할 수도 있다. 또는 중국과 함께 새로운 안보 및 경제협력기관에 투자할 수도 있다. 이를 통해 미국과 중국이 동등한 파트너가 되고 아시아가 한 목소리를 내며 신민족주의가 존재 이유를 상실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이와 같은 초국가적 비전으로 기후변화와 경제 불평등이라는 양대 위협에 함께 맞서지 못한다면 그 종착점은 단 하나다. 다가올 아시아의 미래는 할리우드 영화 속 모습처럼 빛나기는커녕, 갈등과 대재앙의 문턱에 섰던 1913년 경의 유럽과 비슷해질 수도 있다.  


글·존 페퍼 
미국 외교정책포커스 소장. 저서로 디스토피아 소설 <Splinterlands>가 있다.  

번역·권혜숙
한국외국어대 통번역대학원 졸업

(1) 일대일로(一帶一路) 정책: 2014년 11월 개최된 아시아 태평양 경제 협력체 정상 회의에서 시진핑 최고 지도자가 제창한 경제권 구상을 말한다. 중국과 유라시아 국가들을 연결하는 것을 목표로 육지기반의 실크로드 경제벨트 계획과 해상기반의 21세기 해상실크로드 계획으로 나눌 수 있다. 
(2) 아랍의 봄: 전례가 없는 시위 및 혁명의 물결로 2010년 12월부터 중동과 북아프리카에서 일어난 반정부 시위를 말한다. 
(3) 프래킹: 셰일가스는 혈암(Shale rock)에 함유된 메탄가스로 일종의 천연가스를 말하는데 프래킹(fracking)이라는 수압파쇄기법이 활용되고 있다. 
(4) 투키디데스의 덫: 그리스 역사가 투키디데스가 아테네와 스파르타 사이에 벌어졌던 펠로폰네소스전쟁을 분석해서 내린 결론으로 기존 강대국과 신흥 강대국과의 전쟁은 필연적이라는 것이  핵심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