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인과 무슬림이 공존하는 BAU

2017-06-30     마리 코스트 | 기자

지중해를 마주보고 있는 벼랑 위에 줄지어 있는 깃발이 바닷바람에 나부끼고 있다. 깃발에는 각각 베이루트 아메리칸 대학(AUB)의 이름을 알리는 데 공헌한 인물들의 얼굴이 그려져 있다. 레바논에서 가장 유서 깊은 대학이자 극동지역에서 가장 오래된 대학 중 하나인 베이루트 아메리칸 대학은 2016년, 개교 150주년을 맞이했다.


베이루트 아메리칸 대학은 원래 미국인 개신교 선교사들이 포교를 위해 설립한 것이지만, 포교 효과는 크지 않았다. 선교단은 1820년 극동지역에 도착해 40년 이상 포교를 했지만, 많은 지역주민들을 개종시키지는 못했다. 이 대학의 마리아 아분나슬 교수는 그 이유에 대해, “이미 일신교의 모든 종교가 존재하고 있었고, 신도들은 그들의 종교를 바꿀 생각이 없었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아분나슬 교수는 베이루트 아메리칸 대학 주변지역 환경개선에 힘쓰는 비정부기구(NGO) ‘네이버후드 이니셔티브’의 일원이기도 하다.

포교를 위해 설립한 대학, 교육에서 큰 성과

선교사들은 포교에 있어서는 초라한 성과를 거뒀으나, 교육에 있어서는 강점을 지니고 있었다. 그들은 레바논 산 부근의 여러 마을에 학교를 세웠고 큰 성공을 거뒀다. 1862년, 2명의 선교사가 좋은 평판에 힘입어 대학교를 설립하기로 했다. 4년 후인 1866년, 학생 16명의 시리아 개신교 대학(베이루트 아메리칸 대학의 전신)이 설립됐다. 이어 1871년 미국 대학의 건축양식에 따른 베이루트 아메리칸 대학 캠퍼스가 문을 열었다. 정문 앞 표지석에 새겨진 “사람들이 풍족하게 살 수 있게 하라”는 표어는 ‘번성하는 지역 엘리트의 양성’이라는 이 학교의 목적을 오늘날까지 상기시켜준다. 

베이루트 아메리칸 대학이 문을 열자, 이 대학이 위치한 라스 베이루트(‘베이루트의 머리’라는 뜻) 지역의 모습이 변화하기 시작했다. 클레망소와 로쉐, 함라와 아인 알 므레세를 아우르고 해안선을 따라 길게 이어진 이 곳은 인구 밀집도가 높고 활기찬 곳이다. 19세기만 해도 이 곳에는 밭과 과수원밖에 없었고, 땅값이 저렴한 덕택에 선교사들이 캠퍼스를 넓힐 수 있었다. 개교 당시에는 의학부밖에 없었지만 이후 약학부와 치과대학, 간호대학, 그리고 현재에도 레바논 최고의 병원으로 손꼽히는 의료시설이 들어섰다. 날로 높아지는 베이루트 아메리칸 대학의 명성은 세계 각지에 흩어진 이 지역 출신 사람들을 고향으로 불러 모았다. 1936년, 베이루트 아메리칸 대학 부설 초등학교와 중학교가 문을 열었다. 올해 80세인 나빌 나자르는 말했다.

“우리 가족은 산 속 베이트메리(베이루트의 남동부)에서 살았어요. 부모님은 저를 베이루트 아메리칸 대학에 보내기 위해 라스 베이루트(베이루트의 남서부)로 이사하셨습니다.”

‘선인장의 땅’이었던 이 지역은 학생들을 맞이하면서 점차 변화돼 갔다. 필립 사파르는 아버지가 1930년 대학 앞에 연 이발소를 물려받아, 50년째 운영 중이다. 패스트푸드점과 휴대폰 대리점이 들어서는 가운데 옛 모습을 지켜온 이발소에서 만난 사파르는 “그 때 학생들을 대상으로 한 가게와 음식점이 많이 있었다”고 회상했다. 베이루트 아메리칸 대학은 이 지역의 중심부이자 도로 이정표가 됐다. 대학 앞 도로에는 설립자이자 초대 총장인 다니엘 블리스의 이름이 붙여졌다. 

기독교인과 무슬림이 공존하는 대학

나자르와 사파르에게, 베이루트 아메리칸 대학이 베이루트에 공헌한 바는 상당하다. 사파르는 “베이루트 아메리칸 대학이 없었다면 이 마을은 지금과 달랐을 것”이라고 평가했다. 레바논이 1975년부터 1991년까지 내전의 상처를 겪을 때에도, 이 대학은 무슬림과 기독교인의 공존지대였다. 베이루트 아메리칸 대학은 서로 다른 지역과 공동체에 속하는 가족과 학생들을 끌어들이며, 다양성에 자양분을 공급해왔다. 여기에는 이 대학교수들의 태도가 큰 역할을 했다. 나자르는 “아무도 우리에게 종교를 묻지 않았다”고 회상했다. 대학 설립 초기에 강했던 종교색이 점차 옅어졌고, 1902년에는 선교사들로부터 독립적인 교육기관으로 자리 잡았다. 베이루트 아메리칸 대학은 레바논 내 공동체들 간의 갈등이 두드러졌던 1941년, 비판적 사고와 소통능력을 고양시키기 위해, 모든 학생들에게 ‘문명학 과목 수업’을 듣게 했다.

당시 많은 학생들은 베이루트 아메리칸 대학이, 분열로 죽어가는 레바논에 예외적인 모범사례가 된다고 생각했다. 성 요셉 대학과 카슬릭 성령 대학은 주로 기독교인 학생들을, 아랍 대학은 주로 무슬림 학생들을 수용한 반면, 베이루트 아메리칸 대학은 각기 다른 종교를 가진 학생들을 모두 수용함으로써 차별화를 시도했다.

레바논 북부 트리폴리 인근에는 보수성이 매우 강한 수니파의 영향을 받는 작은 마을이 있다. 이 마을 출신의 아메르(익명)는 말했다. “베이루트 아메리칸 대학에서의 첫 날은 문화적 충격 그 자체였어요! 이 대학에서 만난 친구들과 대학 동호회 덕택에 레바논 전역을 여행했어요. 그 전에는 드루즈족, 시아파나 외국인에 대해서 몰랐어요. TV에서 보기는 했지만 제대로 알 수 없었던 거지요. 북부에는 수니파나 기독교인이 거의 없으니까요.” 아메르는 이 대학에 와서 선입견을 버렸다. “수업과 캠퍼스 생활을 통해, 기존에 배웠던 모든 것들을 재검토할 수 있었어요.”

민족주의적 사상가들과 혁명가들의 산실

이런 점 덕분에, 베이루트 아메리칸 대학은 점차 레바논과 외국인 엘리트 양성의 중심지가 됐다. 1945년 6월, 유엔헌장 서명을 위해 샌프란시스코를 방문한 시리아-레바논 대표 50인 중 19명이 베이루트 아메리칸 대학 출신이다. 세계인권선언문의 공동작성자 중 한 명인 찰스 말렉은 이 대학에서 철학을 강의했다. 1960년대 말 이 대학을 다녔던 조지 바쉬르는 “내전이 일어나기 전까지 학생 중 절반 이상이 외국인이었다”고 회상했다. 학생들 중에는 터키, 수단, 그리고 아프가니스탄에서 온 학생들도 있었다. 그 중 한 명인 아슈라프 가니는 현재 아프가니스탄 대통령이다. 

베이루트 아메리칸 대학에서 비판적 사고를 배운 학생들은, 일찍이 대학에 반기를 드는 것에 주저하지 않았다. 1882년 찰스 다윈의 진화설에 반대하는 대학 당국이, 진화설을 지지한다는 이유로 에드윈 르위스 화학과 교수를 해고했다. 그러자, 르위스 교수를 지지하기 위해 아랍세계 최초로 대학생 운동이 촉발됐다. 이후 제1차 세계대전과 오스만 제국의 붕괴, 프랑스 통치 등으로 인해 베이루트 아메리칸 대학에서 정치운동이 일어났다. 많은 학생과 교수들이 프랑스 통치에 적대적인 입장을 취했다. 이 대학 출신이자 45년 째 커뮤니케이션 교수로 재직 중인 나빌 다자니는 “베이루트 아메리칸 대학은 의학계 리더와 함께 혁명계 리더도 양성했습니다!”라며 웃었다.

아랍의 위대한 민족주의적 사상가들은 이 대학에서 자신들의 사상을 발전시켰다. 1932년, 안툰 사아데 교수는 프랑스 점령에 반대하고 레반트 지역의 통일을 위해 투쟁하는 시리아 사회주의 국민당(SSNP)을 창당했다.(1) 그로부터 3년 후, 콘스탄틴 즈레이크는 은밀하게 전 아랍세계 출신의 민족주의자 대학생들로 구성된 중요한 단체를 조직했다. 즈레이크는 조지 하바쉬의 멘토 중 한 명이다. 팔레스타인 출신의 학생이었던 하바쉬는 나세르주의의 영향을 받아 1951년 아랍 민족주의 운동을 탄생시켰고, 1967년 팔레스타인해방인민전선(PFLP)를 결성했다. 실제로 베이루트 아메리칸 대학은 이스라엘 건국 이후 레바논에서 펼쳐진 친팔레스타인 운동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1948년 수많은 난민들이 난민캠프로 몰려들었지만, 부유한 팔레스타인인들은 라스 베이루트에 정착했고, 자녀들을 베이루트 아메리칸 대학에 보냈다. 데이르 야신의 대학살 이후 팔레스타인을 떠났던 다자니는 “가족들은 내가 영어권 교육을 받기를 원했다”고 말했다. 

학생들이 재앙을 피해 몰려든 베이루트 아메리칸 대학은 팔레스타인 대의를 위한 결집의 장이 됐다. 벽을 넘어 연대의 중심부가 된 것이다. 1969년에 이스라엘이 베이루트 공항을 폭격했다. 이에 대한 레바논군의 대응이 약하자, 베이루트 아메리칸 대학에서는 시위가 벌어졌다. 베이루트의 다른 지역으로 번진 시위는 당시 정권이 물러나면서 끝났다. 그 외에도 여러 가지로 베이루트 아메리칸 대학은 팔레스타인 운동의 레이더 안에 있었다. 내전 기간 이 대학의 역사책을 저술했던 마크람 라바 논설위원은 “팔레스타인 해방 기구(PLO)가 베이루트 아메리칸 대학에서 활동을 펼쳤던 것은 전략적 선택이었다. 이 대학에는 외국인 학생들이 많았고, 그들은 집으로 돌아가면 대의를 전달할 수 있었기 때문”이라고 분석했다.(2) 팔레스타인 운동들은 막강한 권력을 가졌었다. 1969년과 1970년, 팔레스타인 학생위원회 회장이었던 파와드 바와르쉬는 “팔레스타인 운동이 지지하는 후보는 반드시 학생위원회에 진출했습니다. 파타(Fatah: 팔레스타인 해방 기구(PLO) 중 최대조직. ‘팔레스타인 민족해방운동’이라고도 함-역주)는 가장 지지 받던 조직은 아니었습니다.”

바와르쉬는 학생들이 움직였던 또 다른 이유를 들었다. “우리는 프랑스 68혁명과 모든 좌파 운동으로부터 큰 영향을 받았어요.” 1969년, 베이루트 아메리칸 대학은 학생들이 자유롭게 발언할 수 있는 ‘스피커스 코너’를 허용했다. 스피커스 코너는 정치적 토론회로 자리 잡았고, 이곳의 연설은 대학을 넘어 멀리 전파됐다. 바와르쉬는 회상했다. “모든 대학들 중에서 베이루트 아메리칸 대학만이 이런 표현의 자유를 허락했습니다. 레바논 신문들은 항상 이곳으로 기자를 보냈어요.”

1971년과 1974년 등록금 인상이 발표되자 대규모 파업이 일어났다. 1971년 파업에 참가했던 레바논 은행의 사드 안다리 현 부행장은 말했다. “순전히 경제적인 이유로 파업이 일어났던 건 아닙니다. 정치적인 이유도 있었습니다. 극동지역에서의 미국의 존재와 그 정책의 비판이 그것입니다.”

그러나 그 끝은 좋지 않았다. 학생들 몇 명이 제명을 당했고, 제명당했던 학생들 중 한 명이 1974년, 이 대학 학장 두 명을 죽였기 때문이다. 당시 베이루트 아메리칸 대학도 레바논에서 벌어지는 전쟁의 악순환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캠퍼스에서 친팔레스타인파와 레바논 우파였던 라비타(Rabita)의 일원들이 격렬하게 대립했다. 1975년에는 내전이 발발했고, 베이루트는 둘로 갈렸다. 베이루트 아메리칸 대학은 친팔레스타인 민병대의 지배를 받던 서쪽에 위치하고 있었다. 기독교인이 대부분이던 동쪽은 카테브 민병대(팔랑헤)의 지배하에 있었다. 포격이 자주 일어나자, 그 지역 학생들은 등교가 어려워졌다. 현재 입학처장으로 일하는 살림 카난은 당시 상황에 대해 설명했다.

“학교 가는 길에 팔레스타인 측에서 검문을 하면, 학생증을 보여줬다. 학생증에는 종교색이 전혀 없었고, 그 덕택에 무사했던 것 같다.”

베이루트에서는 교전이 계속 일어났지만 베이루트 아메리칸 대학은 온전했다. 카난은 회상했다. “캠퍼스 내에서는 전투가 벌어진 적이 없었습니다. 공격이나 점령을 당한 적도 없고요. 어떤 무장단체도 베이루트 아메리칸 대학이 문을 닫는 것을 원치 않았습니다.” 실제로 왈리드 줌블라트(3)나 사미르 게아게아(4) 등 많은 군 지도자들이 이 대학 출신이다. 하지만 1991년에는 베이루트 아메리칸 대학도 공격을 피할 수 없게 됐다. 당시 총장이었던 프레데릭 허터는 이를 미국에 대한 공격이라고 생각했고, 이란의 지원을 받은 시아파 무장단체들이 의심 받았다.

내전이 끝나던 해, 베이루트 아메리칸 대학은 새로운 도약을 위해 노력했다. 베이루트 아메리칸 대학은 여전히 레바논에서 훌륭한 중심지였지만, 그 영향력은 감소했다. 베이루트 아메리칸 대학은 2006년에 공공정책과 국제관계를 위한 이삼 파르 연구소를 설립하고, 연구계 및 공공정책 의사결정자들에게 다가가기 위해 노력했다. 과거 장관을 역임했던 타렉 미트리 이삼 파르 연구소장은 이런 시도가 필수적이었다고 지적했다.

“대학은 정치에 무관심해졌고, 지역적 차원에서 이념의 실험실로서의 기능을 잃었다. 레바논에서 불안한 상황이 계속되자, 외국인 학생과 교수들이 대거 빠져나갔다. 레바논인들은 그들의 공동체 속으로 되돌아갔다.”

“학생들이 한층 나은 삶을 누리게 하라”

미트리 연구소장은 베이루트 아메리칸 대학의 다양성이 예전에 비해 감소했다고 평가한다. 등록금이 인상되면서 많은 이들이 이 대학에 진학하기 어려워졌다. 2016년 기준 레바논 대학의 평균 등록금이 500달러인데 비해, 베이루트 아메리칸 대학의 등록금은 2만 2천 달러에 달했다. 원래 베이루트 아메리칸 대학의 문턱은 높았지만, 그래도 과거에는 다양한 장학금 제도 덕택에 여러 계층에게 문이 열려있는 편이었다. 그러나 사리 하나피 사회학 교수에 의하면, 현재는 학생들 중 90%가 상위 계층 출신이다. 2009년에 또 다시 등록금이 인상되자 학생들은 반발했다. 그러나 소용없었다. 레바논 내에 많은 사립대학이 세워졌지만, 베이루트 아메리칸 대학은 여전히 명망을 떨치고 있으며, 양질의 수업을 제공하는 것으로 유명하다. 

현재 베이루트 아메리칸 대학은 정치운동의 인큐베이터를 넘어서서, 외국에서 학업이나 일을 계속할 기회를 제공하고 있다. 베이루트 아메리칸 대학의 학생들은 정치에 무관심하다. 그들도 레바논의 다른 청년들처럼 수십 년간 지속된 국내 분쟁에 환멸을 느끼기 때문이다. 그런 한편, 정치권 부패에 반대하는 시민단체 ‘베이루트 마디나티(Beirut Madinati)’에서 활발하게 활동하는 학생들도 있다. 베이루트 마디나티는 2016년 5월 지방선거에서 부적격 인사들의 리스트를 발표한 바 있다.

정치적 무관심에도 불구하고, 레바논 내 다른 지역에 비해 베이루트 아메리칸 대학 내에서는 표현의 자유가 아주 잘 보호되고 있다. 비록 베이루트는 쓰레기 더미 밑에서 무너지고 있지만, 적어도 베이루트 아메리칸 대학은 깨끗하고 평화로운 안식처로 보인다. 이 대학을 졸업한 후 현재 프랑스에서 France24 채널 기자로 일하는 반 메규어딧치안은 “2008년에 헤즈볼라가 함라 지역을 공격했을 때도, 베이루트 아메리칸 대학에서는 토론이 가능했다”고 회상했다. 베이루트 아메리칸 대학의 “학생들이 한층 나은 삶을 누리게 하라”는 표어는, 메규어딧치안에게 여전히 유효하다.  


글·마리 코스트 Marie Kostrz
기자, 전 레바논 특파원.

번역·이연주
한국외국어대 통번역대학원 졸업

(1) 당시 레반트 지역에는 레바논, 시리아, 트란스요르단 및 이라크가 포함된다. 
(2) Makram Rabah, <A Campus at War: Student Politics at the American University of Beirut, 1967-1975>, Dar Nelson, Beyrouth, 2009.
(3) 드루즈족 출신으로 진보사회주의당 당수.
(4) 마론파 기독교 세력으로 이루어진 레바논군당(Lebanese Forces Party)의 당수. 레바논군당은 내전기간 동안 민병대를 지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