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르크시즘이 실종된 신·좌파 논쟁의 가벼움

2017-06-30     성일권 |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한국어판 발행인

마르크시즘적 상상력을 허하라!

 
칼 마르크스 탄생 후 두 세기, ‘자본론’ (1권, 1867년) 발간 후 한 세기 반, 그리고 레닌이 마르크스의 사상을 이어받았다고 주장한 10월 혁명 후 한 세기가 지난 오늘날, 현대 자본주의에 마르크시즘은 얼마나 어떻게 영향을 미쳤을까?  국민들의 사유세계를 강압적으로 옭아맨 역대 권위주의 정권들의 통제 탓에 마르크시즘은 우리에게 사회체제를 전복시키는 불온사상으로 치부됐다. 헌법에 보장된 사상의 자유를 논하기가 부끄러울 정도다. 서구의 경우 2차 세계 대전 이후 소련과 그 위성국가들이 마르크시즘을 왜곡시킨 공산주의 독재체제로 변질되면서 좌파 진영에서는 마르크시즘의 유효성을 재평가하는 치열한 사상 논쟁이 벌어졌다. 권위주의적인 구체제에 맞서 학생과 노동자, 지식인들이 총궐기한 68혁명을 전후해 마르크시즘은 보다 더 세분화되고, 보다 더 세련된 형태로서 경제 뿐 아니라, 정치, 사회, 문화, 정신 분석, 예술, 교육, 영상 등 다양한 영역에서 자본주의의 실체를 진단하는 핵심 코드로 자리 잡게 된다. 앙리 르페브르, 기 드보르 등 신좌파 지식인들이 대거 등장한 것도 이 무렵이다. 본지는 자본론 출간 150주년을 맞아, 마르크시즘의 이론적 유효성을 평가하고, 신좌파 지식인들이 다양하게 변주(variation)한 마르크시즘적 상상력을 살펴보고자 본다. <편집자 주>  (기획 기사 참조)
 
 
노무현 대통령 시절에 홍보수석을 지낸 조기숙 이화여대 교수가 최근 출간한 <왕따의 정치학>에서 언급한 내용이 이른바 일부 진보언론을 분노케 하는 모양이다.
“구좌파는 권위주의와 물질주의에 사로잡힌 구태의연한 집단인 반면, 신좌파는 탈권위주의와 탈물질주의로 무장한 진정한 21세기 진보세력이다”, “최초의 신좌파는 노무현 정부와 그 지지자이며, 그 뒤를 이은 신좌파가 문재인 정권이다. 그러나 구좌파-진보언론은 수구세력과 합세해 노무현을 왕따시키고 박해했으며, 이번에는 문재인 정권을 흔들고 있다.” 
이에 조 교수의 비난의 당사자가 된 한겨레와 경향신문, 오마이뉴스, 프레시안 등은 외부 필자나 평론가를 동원해 조 교수의 이분법적 좌파 논쟁을 반박하고 있다.   
 “그가 무슨 녹색주의자도 아니면서 탈물질주의 신좌파를 자처하고, '진보적 자유주의'를 내세우지만 그 진보적 자유주의의 최우선 관심사 중의 하나가 '분배 정의'라는 점은 까맣게 모르고 있는 모양이다.”(장은주 영산대 교수, <프레시안> 6월8일자)
“드라마틱한 서사를 만들어내고 그 서사에 사실이 부합하지 않으면 사실을 바꾸거나 삭제해 버린다. (…) 그렇게 만들어진 서사는 오류투성이임에도 불구하고 동조자들의 확증편향과 정치적 효능감을 강화하기에 계속해서 살아남는다.” (박권일, <한겨레> 6월21일자) 
 
우리 사회에서 단 한 차례도 좌파 이념을 둘러싼 진검 승부가 시도된 적이 없었기에 조기숙 교수의 문제제기는 대담하면서도 논쟁적이다. 그는 박근혜 전 대통령을 탄핵한 촛불시민들도 모두 신좌파라고 주장하면서, 빨간 머리띠와 빨간 조끼로 상징되는 민주노총은 시대에 뒤떨어진 구좌파라고 비판한다. 조기숙 교수의 신좌파 용어 정의는 전적으로 그의 전매특허이겠지만, 문재인 정부가 그의 주장대로 촛불 시민들의 탈권위적·문화적·탈물질적인 여망을 담았다고 해서 단순히 프랑스 68혁명의 가치를 지닌 ‘신좌파’와 흡사하다고 주장하는 대목은 쉽게 동의하기 힘들다. 68혁명은 풍요로워진 경제 환경 속에 개인주의화한 시민들이 국가 권력과 통제에 저항한 것은 사실이지만, 노동자와 노동단체를 배제한 ‘반(反)노동’ 혁명은 결코 아니다. 
 
오히려 학생들과 노동자 계급이 연대해, 당시 소련의 공산주의와 미국의 자본주의 등 동·서 진영으로 대립한 억압구조의 횡포에 맞서는 등 자신의 삶에 대한 국가권력의 간섭과 통제를 거부하며 노동해방과 자유를 주장했다. 군출신의 드골정권 아래 프랑스 정부는 끊임없이 외부의 적에 맞서야 한다고 소리를 높였지만, 노동자와 학생들은 자신을 감시하고 억압하는 국가가 바로 자신들의 적이라고 생각했다. 68혁명의 진원지는 3월 22일, 학생들이 대학행정건물을 점거한 파리 낭테르 대학이었지만, 곧바로 소르본, 스트라스부르대학 등으로 시위가 번지면서 노동자, 농민, 사무직원, 작가, 교수, 연예인, 버스 및 택시 기사, 언론인 등 수백만 명의 파업으로 확산됐다. 
 
이들은 미국식 자본주의를 비판하면서도, 공산주의에도 반대했다. 권위주의를 거부한 이들은 평범한 사람들이 지닌 삶의 태도나 방식을 존중하고, 동시에 절대적인 자유와 평등을 지향했다. 탈권위적인 아나키즘과 평등 지향의 마르크시즘이 결합한 네오 마르크시즘이 68혁명에 영향을 끼쳤고, 스탈린식 공산주의 독재에 맞선 트로츠키즘, 아시아 사회주의인 마오주의, 자본주의적 물신주의를 비판한 상황주의가 각광을 받았다.
 
68세대는 인간의 가치와 이상을 무시하고 물질적인 풍요만을 추구하는 기성세대와 사회 풍조에도 저항했다. 이들은 자유로운 개인의 공동체를 꿈꾸며, 자신들을 억누르는 모든 권위와 권력, 체제, 조직에 반대했다.
 
이들은 록 음악을 통해 열정을 발산하기도 하고, 책이나 유인물을 펴내 자신들의 주장을 알리기도 했다. 방랑이나 마약 흡입, 프리 섹스 같은 도발적인 행위로 기성 세대의 가치관에 도전하는 경우도 있었다. 이런 행위는 청년들뿐만 아니라 장애인이나 빈민 같은 사회·경제적 약자들이 자기 의사를 표현하고 뭉칠 수 있는 기회가 되기도 했다. 68혁명은 세계 각지로 퍼져 나가 전 세계 젊은이들의 체제 저항 운동으로 이어졌고, 동·서양 양 진영에서 어느 정도 민주화를 이끌어 내는 성과를 거두기도 했다. 이후 68혁명의 이념은 노동운동, 여성해방운동, 언론운동, 반핵평화운동, ‘녹색당’과 ‘그린피스’ 등 환경운동, ‘국경 없는 의사회’ 등 인권 운동 등이 성장하는 데 밑거름이 됐다.
 
우리나라는 이와 같은 과정을 압축적으로 겪었다. 1987년 이전까지는 독재정권을 상대로 민주적 참정권을 위해 싸웠고, 이후 김대중 대통령이 집권하기 전까지는 노동권을 위해 싸웠다. 조 교수는 2002년 노무현 대통령 당선 이후를 서구의 68세대와 동일시하고 있다. 즉, 진보언론은 20세기 경제적 평등이라는 구좌파 이념을 추구했고, 노 전 대통령은 21세기의 진보라 할 수 있는 탈물질주의 이념을 처음으로 추구한 신좌파이며, 그 뒤를 문재인 대통령이 잇고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조 교수가 신좌파라는 용어를 전혀 다른 방식으로 쓰면서 지금의 문재인 정권과 여당 지지자들을 시대정신이 충만한 신좌파로 평가하는 반면, 나머지는 시대에 뒤떨어진 구좌파로 규정짓는 것은 지나친 비약이다, 문제는 그의 도발적 용어선택이 역사적인 맥락을 전혀 고려치 않았고, 학술적인 논쟁을 거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적지 않은 사람들이 그것에 공감하며 사실로 받아들이는 위험성이다. 무엇보다도 조 교수가 구좌파의 대표적 상징으로 규정한 빨간 조끼차림의 노동자가 새 시대의 걸림돌로서 치부되고, 배제되지 않을까 하는 걱정이 앞선다. 빨간 조끼와 빨간 머리띠는 파업과 같은 집단행동을 할 때의 노동자 옷차림으로서, 이제는 파업현장 뿐 아니라, TV나 영화 등 대중매체에서 자주 보게 되는 일상적인 문화코드가 되지 않았는가? 오히려 문 정권의 상당수 관료들에게서 발견된 탈법적인 재산증식과 이기적인 자녀교육관, 비뚤어진 성 의식이 전혀 신좌파적이지 않다는 생각이 든다. 
 
 ‘박근혜정권 퇴진 비상국민행동’이 주도한 촛불집회에 대해서 국내의 언론매체들은 ‘자발적으로 모인 시민들이 노래와 춤을 곁들이며 축제 같은 평화집회를 성공적으로 이끌었다’고 자의적으로 평가했다. 뿐만 아니라, 촛불집회 과정에서 이석기 전 통합진보당 의원과 한상균 민주노총 위원장의 석방을 외치는 정치 구호는 철저히 외면 받았다고 집회의 시민성에 애써 의미를 부여했다. 물론, 빨간 머리띠를 두르고, 빨간 조끼를 입은 채 일사불란한 구호를 외치는 노동자들의 이미지는 언론매체가 높은 시민정신의 발로라고 평가한 촛불집회에 어울려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이런 이유로 촛불집회의 운영에 재정적으로나 참가자 동원 등에서 절대적 기여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민주노총의 역할이 시대에 뒤떨어진 구좌파로 폄하되는 것은 온당치 못하다.  
 
커밍아웃 하지않는 진보(?) 언론들
 
 ‘문재인 정권을 전격 수용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조기숙 교수에 의해 졸지에 시대착오적인 구좌파의 ‘누명’을 쓴 일부 진보언론은 억울할 수밖에 없다. 이들 언론이 스스로 ‘진보매체’를 자칭한 적이 있으나, ‘좌파매체’라고 자신들의 정체성을 분명히 드러낸 적은 없었기 때문이다. ‘보수=우파’, ‘진보=좌파’로 흔히 인식되는 한국의 이분법적 정치환경 속에서 이들 매체는 일부 비판론자들의 ‘좌빨신문’이라는 음해성 비난에 “그래, 우리는 좌파다! 어쩔래?”라고 밝힌 적이 없다. 조교수의 책이 나오자마자, 이들 언론은 약속이나 한 듯 자신들의 입맛에 맞는 평론가들을 동원해 조교수의 논리를 조목조목 비판하면서도 정작 자신들이 구좌파인지, 신좌파인지, 아니면 좌파인지, 중도 좌파인지, 그것도 아니면 ‘조중동’과 별 차이 없는 우파인지를 드러내지 않았다. 
 
 객관적 입장을 중시하는 한국 언론의 속성을 감안해본다면, ‘커밍아웃’이 쉽지 않은 이들 언론의 어정쩡한 자세가 어느 정도 이해된다.  
 
 정작 ‘구좌파’의 정체가 불분명한 신·구좌파 논쟁에서 중요한 것은 노동의 가치를 중시한 마르크시즘이 정작 빠져있다는 점이다. 구좌파이건 신좌파이건, 좌파 진보진영 쪽 사람들은 ‘좌파’ 정치에 대해 말할 때 마르크스를 찬양하는지 어떤지 잘 모르겠으나, 실제로는 라틴어 성경처럼 이해하기 어려운 마르크시즘을 추방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는 듯싶다. 마르크시즘이 부재한 좌파 정치를 감히 상상할 수 있을까? 어쩌면 한국적 정치상황에서는 좌파와 마르크시즘은 전혀 무관할지 모를 일이다. 그렇다 보니, 좌파를 자칭하는 조교수 같은 이들은 축제 현장 같은 시위 분위기를 들어 촛불집회의 의미를 탈물질주의나 탈권위주의라는 모호하기 짝이 없는 68혁명의 문화적 코드에만 억지로 끼워 맞출 뿐이다. 하지만 촛불집회의 실체적 본질은 이명박-박근혜 정권의 10년 집권기 동안, 무한 질주한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 체제가 자행한 노동 착취와 약탈, 인간성 강탈, 환경파괴, 배제와 소외 등에 대한 시민들의 총체적 분노다. 학자나 평론가가 이렇듯 본질을 외면하고 현상만 취할 경우, 머지않아 촛불집회는 물질만 추구하는 기성세대의 ‘꼰대’ 문화에 대한 젊은 세대의 유쾌한 문화적 반란 정도로 기록될 것이다.  
 
 칼 마르크스의 <자본론>이 출간된 지 150주년을 맞는 오늘날, 어쩌면 한국 자본주의는 과거에 그랬던 것처럼 앞으로도 마르크시즘의 가치를 외면해도 계속 발전할지 모른다. 자본주의가 통제되지 않을 경우 그 탐욕적 욕망은 지칠 줄 모른다. 권력과 자본이 야합한 이명박 정권의 4대강 사업이 기업 간 불법적인 입찰 카르텔로 천문학적 세금이 낭비되고, 박근혜 정권의 권력-재벌 커넥션이 국민 대다수에게 고통을 전가한 것은 고삐 풀린 자본주의의 가까운 예일 뿐이다.  
 
사실, 자본주의의 방향성과 지향점은 전방위적이며, 대단히 은닉적이고 편재적이다. 마치, 예수님의 은혜나 부처님의 은덕처럼 무한하고 절대적이다. 68혁명 이후 화려하게 등장한 프랑스 신좌파 지식인들이 자본주의의 본질에 대한 다양한 방식의 분석과 진단을 시도하면서, 마르크시즘을 이론적 근거로 삼은 것은 자본주의의 실체를 파악하는데 마르크시즘이 그만큼 유효하기 때문이었다. 프랑스 신좌파 지식인들이 진단한 자본주의는 단순히 경제학 영역의 문제가 아니다. 예컨대, 국가의 학문으로 평가받아온 주류 경제학은 처방적인 효력을 갖고 있다고 판단되지만, 지나치게 교조적이어서 복잡다단한 사회현상을 반영하지 못하는 까닭에 다양한 시각의 접근을 반영한 미래지향적 경제학이 요구된다는 지적이다. 이는 경제만능주의에 대한 지난한 사회과학적, 심리학적, 정신분석학적, 문화적 비판을 통해서 가능하다. 문재인 정권이 출범 초기에 가장 역점을 두는 부동산 정책을 예를 들어보자. 정책의 세부적 내용이 주류 경제학에서 말하는 수요공급의 교조주의적 처방에 그쳐 그 효과가 미지수다.      
 
 마르크시즘의 세례를 받은 신좌파 지식인 중 한 명인 피에르 부르디외는 그의 저서 <경제의 사회적 구조들(Les structures sociales des l'économie)>에서 주택 구입자와 매도자 간의 관계는 다양한 결정 요인들, 예컨대 국가의 정책, 금융기관의 대출프로그램, 중개업소의 판매기술, 지역의 조건, 구입자의 열망 등에 의해 좌우되는 것이지 금전적인 조건 하의 단순한 수요와 공급의 대칭관계로만 파악될 수는 없다“고 강조한다. 
 
사회현상에의 분석은 다각도에서 이뤄져야
 
문재인 정권의 경제팀은 전매제한기간 강화, 대출조건 강화, 재건축 규제 강화 등 인위적인 수요공급 규제에 치우쳐 있지만, 매수자들의 특정지역·특정아파트 선호는 심리적이고 정신적이며 문화적인 요인이 더 크게 작용할 수 있다. 교육, 의료, 여가, 네트워크, 자부심, 교통 등 다양한 측면에서 선호지역과 비선호지역이 있을 것이나, 이에 대한 진지한 정책적 고민을 거치지 않고 단순히 수요공급 규제정책을 내놓은 것은 주류경제학의 교조주의적 단기처방이라 볼 수 있다. 경제외적 요인까지도 살펴보는 신좌파적 지식인이라면 이처럼 경제논리로 쉽게 진단하기 힘든 경제현실에 대해 경제외적인 결정요인들을 따지고 들춰내는 역할도 할 수 있어야 한다.  
 
 우리의 좌파성향 지식인들이 마르크스주의자를 자처하고, 마르크시즘의 가치를 인정하면서도 단순히 문화적 관점에서만 사회현상을 바라보려 하는 것은 그들이 마르크스의 저서들, 특히 마르크스가 1844년부터 1883년까지 죽을 때까지 연구에 매달렸던 ‘정치·경제의 비판’에 대한 의미와 중요성을 발견하지 못한 이유에서일 것이다. 마르크스에게 있어 자본의 가치 실현은 근본적으로 착취, 즉 잉여가치의 생산에 의존한다. 자본은 행여 수익성이 저하할라치면 자본축적의 새 모델이나 시스템을 새로 고안한다.
 
따라서 자본 재생산의 모든 방식들이 수정된다. 자본의 지나친 이윤추구는 기업들에게 단기간의 수익에 매달리도록 하는 강한 속박으로 작용한다. 그 결과, 기업들은 직무평가와 보수체계의 변형을 통해 쉽게 노동자들을 해고시키는 등 노동시장의 유연성을 강화시킨다. 이에 따라 노동관계는 개별화되고 파편화됐으며, 노동자들에게는 능력과 성취도가 중요한 평가기준이 됐다. 노동자들은 해고의 위험에 쫓기며 평가기준에 벗어나지 않으려 발버둥 친다. 임금 노동자들의 대부분은 일터에서 불리한 상황에 처할 위험이 상시 노출된다.        
 
 사회관계가 점점 혼란 속에 빠져들고, 상품화의 세계로 치달으면서 개인들은 자본을 숭배하기 위해 자신들의 노동력이나 능력을 조금이라도 더 비싸게 판매하는 흥행업자가 돼야 한다. 노동자가 받게 되는 노동 등급과 물질적·상징적 보수는 점점 더 개인 간의 경쟁력 차이와 자본주의의 변형에 대한 순치 여부에 따라 좌우된다. 이는 마르크스가 지적한 ‘자본의 착취법’처럼, 즉 자본을 통해 개인의 삶과 사회적 활동을 착취하는 방식이 보편화되고 있음을 의미한다. 자본은 또한 사회보장 시스템의 민영화를 추진하면서 공공기금에 손을 댈 뿐만 아니라 삶의 생물학적 재생산에 없어서는 안 될 인간의 본질까지도 강탈하려 한다. 이 모든 것들은 삶의 가치를 일시적인 소모품, 다시 말하면 상황에 따라 용도 폐기해야 할 대상으로 전락시킨 자본의 속성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자본의 수탈과정, 즉 인간성에 대한 강탈의 과정은 자본의 사회성 수탈에서 그 정점을 이룬다. 그러나 자본은 방해물을 맞닥뜨리는 것을 원치 않는다. 자본은 끊임없이 새로운 한계들을 뛰어넘는다. 자본은 착취와 강탈에 따른 사회적 비용이 얼마나 드는지 개의치 않는다. 자본은 자신이 유발시키는 것들의 결과물에 대해 고민하지도 않고, 그런 고민을 원치도 않는다. 왜냐하면, 인간은 자본의 매개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자본의 이런 극단성에 대해 유럽의 신좌파 지식인들은 경제 뿐 아니라, 권력, 정치, 사회, 문화, 예술, 심리, 정신분석, 욕망 등 다양한 관점에서 마르크시즘의 다양한 코드로 해석하고 진단하고자 했다.
 
 자본주의가 드러내는 현상(現象)이 약탈적이고 반인간적인 모습이라고 해서 우리가 사는 자본주의 체제를 부정할 수는 없다. 자본주의의 본질을 제대로 이해해야 우리의 공동체를 권력과 자본의 탐욕과 야합으로부터 지켜낼 수 있다. 지금까지 ‘좌파 커밍아웃’이 쉽지 않았던 국내 정치환경에서 스스로 ‘신좌파’임을 천명하고, 신좌파 진영의 존재를 당당히 밝힌 조기숙 교수의 용기는 비록 신·구좌파에 대한 작위적 해석이 역습의 빌미를 제공했지만, 어떤 면에선 좌파 논쟁의 작은 불씨를 댕겼다는 점에서 칭찬받아 마땅하다. 비록 마르크시즘이 실종된 논쟁의 가벼움이 아쉬움을 남겼지만 말이다.  
 
글·성일권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한국어판 발행인. 파리 8대학에서 정치사상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고, 주요 저서로 『비판 인문학 100년사』, 『소사이어티없는 카페』,『오리엔탈리즘의 새로운 신화들』, 『20세기 사상지도』(공저) 등이 있으며, 옮긴 책으로  『자본주의의 새로운 신화들』, 『도전받는 오리엔탈리즘』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