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르크시즘과 일리히 사상은 소비자운동의 상호보완재

2017-06-30     미셸 비비오르카 | 파리 고등사회과학원 교수

지역단체 수백 개, 전국단체 및 연합 12개 등 공공단체 중에는 꽤 많은 ‘소비자 대표’ 조직이 존재한다. 소비자운동은 상당히 제도화돼 있지만, 이처럼 강력한 조직화 현상에도 불구하고 “소비자도 사회운동에 편입될 수 있다”는 가정을 증명할 만한 투쟁행위는 상당히 찾기 어려운 실정이다.


여기서 사회운동이란, 사회가 정한 거대한 방침을 문제 삼는 대립적 행동을 말한다. 그나마 소비자운동세력 중에 사회운동을 한다고 판단할만한 곳은 두 곳밖에 없다. 한 곳은 소비자를 위해 생산자로부터 강제로 취득한 혜택을 유지하고, 구매력 저하를 막는 것을 중시한다. 다른 한 곳은 방어적이기보다는 오히려 공격적이며, 단호한 근대주의자의 모습을 하고 있다. 

두 곳 모두 소비자운동 조직의 와해된 이미지를 보여준다. 한 곳은 반자본주의 계급투쟁에 개입함으로써 자신의 정체성을 규정하려 했지만, 그 안에서도 중심적인 역할은 하지 못했다. 무엇보다 자본주의 착취 반대운동은 정치조직이나 노조가 주도하는 분야이고, 노동자들의 싸움에서 소비자운동가들이 주동적 역할을 할 수 있겠냐는 선입관이 있기 때문이다. 다른 한 곳은 어떤 계층에도 확실히 속하지 못하고 있다. 자신의 특권을 유지 및 확대하려는 중산층을 주도하는 이미지를 관리하는 데 매우 고전하고 있다. 

전자는 산업사회라는 범주 안에서 자신의 행동을 결정한다. 후자는 후기산업사회와 관련된 주제에 더 민감하게 행동한다. 전자가 중요시하는 것은 불평등, 착취, 노동자·서민가정의 경제적 어려움 등이다. 후자는 경제성장의 불합리성, 건강 침해, 오염, 낭비 등을 반대한다. 전자는 마르크스의 사상을 따르고, 후자는 일리히의 사상에 더 가깝다. 

이론적으로 이 둘은 상호보완적이고 각각 전문성을 띠고 있는 것처럼 보일 수 있다. 전자는 경제 분야의 방어전을 담당하고, 후자는 사회정책을 정립하며 보다 문화적인 주제를 다루고, 소비사회가 나아갈 새로운 방향을 설정하는 것처럼 보인다. 사실 현장에서 이 둘이 실질적으로 융합될 가능성을 보여주는 사례들이 없지는 않았다. 그러나 이 둘은 확연히 서로 다른 사회적 사상을 지니며, 공통점이라면 방어적인 태도밖에 없다. ‘소비자운동가들’은 인격의 발전과 번영에 대한 비전을 제시하는데, 여기서 인격은 욕구의 방향을 재조정하고 스스로 통제하는 것이다. 분명 사회적 욕구 및 생산력 발전의 가능성은 무한하다는 마르크스적 견해에는 반대하는 것이다. 

소비자운동이 동원력을 가지지 못하는 이유

보통 소비자운동이라고 하면, 상당히 통일된 이미지가 지배적이다. 지난 15~20년간 국가가 무수한 개입을 통해 소비자운동을 이끌어왔으니 그럴 만도 하다. 국가는 ‘소비자 보호’라는 통일된 이미지를 구축하고, 더 나아가 소비자단체 활동을 권장하고 발전시키면서도 이에 대한 통제권을 놓지 않았다. 다양한 조직에 자리를 마련해주고, ‘소비자 대표들’에게 텔레비전 방송의 기회를 주고, 지원 및 보조금을 제공했다. 국가는 이런 식으로 경쟁과 시민정신을 중시하는, 자신만의 경제‧사회정책과 일치하는 이데올로기와 관습을 구축하는데 공을 들였다.  

그러나 이 거짓 통일성은 가장 활발한 두 세력에만 국한된 것일 테고, 다음과 같은 분석 앞에서는 버티지 못하고 무너진다. 즉, 국가와 소수의 기업 및 광고계의 근대주의자들이 소비자운동을 마음대로 좌우하는 정부참여주의적인 수렁을 거부하는 움직임이 어느 정도는 존재하고, 또 그럴 가능성이 있다는 분석이다. 그 가능성이 표출되는 순간 비로소 강렬한 ‘분열’의 이미지가 생겨날 것이다. 이 ‘분열’ 안에서 소비자운동의 운명이 좌지우지된다. 소비자운동은 노동운동에 개입해 부차적 역할에 그칠지, 사회학적으로 중산층들 사이에 위치한 사회계층들이 벌이는 특정한 분쟁에 가담할지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있다. 

그러나 현대 마르크스주의자들의 이야기를 참고하지 않고서 ‘중산층’을 언급하기에는 무리가 있다. 현대 마르크스주의자들의 유일한 관심사는 정치‧선거판에서 중산층이 부르주아와 노동자 진영 중 어디로, 얼마나 넘어갈 것인지에 있다. ‘소비자운동가들’의 집단행동이 전통적인 계급투쟁의 도식에서 차지하는 부분은 극히 일부에 불과하다. 이 점에서도 이들의 무능함이 발견된다. 역사적인 운동권자들을 조직해 근대화운동으로 발전시키지 못하는 무능함 말이다. 

이들의 동원력(프랑스에서는 한 번도 소비자가 대중운동이나 대규모시위를 한 적이 없다)이 부족한 이유는 분쟁에 참여한 당사자로서의 자신의 생각보다는 압력단체, 여론, 정치성향 등을 더 많이 참고하기 때문이다. 이들의 영향력 대부분이 미디어로부터 나온다는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그러나 마침내 정체성을 찾은 사회운동이 출현했고, 이 운동이 ‘소비자운동가들’을 산업사회에서 후기산업사회 또는 계획사회로 넘어가는 과정에서 발생한 분쟁의 개척자 또는 정찰병으로 만들어줄 것이라는 가설을 무시할 수는 없을 것이다. 

이 가설은 앞에서 언급한 ‘분석’을 심화한다. ‘소비자들’이 중산층에 대한 분석의 늪에 고착되지 않게 해주고, 부르주아도 노동자도 아니라며 기존의 범주를 벗어나 자신의 경험 속에서 행동방침을 찾게끔 인도한다. 낭비와 건강침해 고발, 발전과 성장에 대한 신개념의 정립, 욕구의 조작 반대, 환경과 비핵화운동의 참여 확대, 산업사회의 쇠락 등 이 모든 것들이 새로운 사회운동으로의 편입을 나타내는 표현일 수 있다. 산업사회에서 노동운동이 그러했고 지금도 그러하듯, 이 새로운 운동 역시 미래의 사회에 중요한 역할을 할 것이다. 

소비자운동의 본질과 표적은 무엇인가

이에 관해 수많은 질문이 제기된다. 소비에 관한 대중시위의 본질은 무엇인가? 노동운동을 비롯한 다른 운동과의 관계는 무엇인가? 막연한 반감(소비자운동 문학은 ‘소비자는 낙담했고, 속았고, 조종당했다’고 주장한다), 자연과 진정한 욕구에 대한 요구 등은 피지배 상태를 자각한 현실을 보여준다. 그러나 지배세력을 지목하는데 있어서는 모호하고 너무 관대한 표현만이 사용된다. 

그렇다면 사회적으로 맞서야 하는 상대는 누구인가? 바로 상업과 ‘생산자(기업)’다. 때로는 국가일 수도 있다. 그런데 대부분의 경우, 분쟁이 상대방을 물러서게(행동을 바꾸게) 만들면서도 사회체제 전반에 미치는 영향은 미미한 것처럼 흘러간다. ‘소비자들’이 행사한 압력이 일부 생산자와 유통업자의 활동을 수정하게 만들기도 한다. 그러나 소비자가 의도했던 경제적 협력이 이뤄지지 않을 경우, 대부분 행동의 건전화, 생산·유통의 근대화 등으로 그 방향이 흘러간다. 여기에 포괄적인 계획이란 것이 있을까? 이 계획을 정의할만한 요소들이 있지만, 이 요소들은 유토피아와 한 사회의 비전 사이에서 망설이고 있다. 이때 이 사회는 명확하게 긍정적인 전망보다는 비판적인 측면이 더 많은 곳이다. 

소비자운동가들은 ‘발전이 제공하는 이점보다 단점이 더 많아졌다’는 확신을 가지고 ‘생산사회’의 모순에 대항하기 시작했고, ‘더 적은 것으로 더 많이, 더 좋은 것을 생산’하기 위해 투쟁했다. 세계상품코드(UPC)가 표명한 ‘욕구로부터의 시작’이라는 목표는 소비기준을 규정하고 이것을 하나의 생산기준으로 도입하려는 의지를 나타낸다. ‘우리의 것인 세상에서 더 잘 살고, 오늘날 누리지 못하는 기술‧산업적 가능성을 더 잘 누리기 위해서’이다. 비난하려는 것은 아니지만, 이 모든 것은 불분명하다. 이미 굳어져버린 견해는 미래의 사회운동 발전에 해로울 것이다. 이 모든 것은, 특히 일반적인 유토피아를 벗어난 것들은 사회가 설정한 거대한 방침을 전반적으로 부인하기보다는 기존의 사회구조를 재정비할 것을 요구하고 있다.

사회운동들이 각자의 영역(종교, 여성, 소비자, 생산 등)만 담당하는 병렬적 형태의 미래를 상상했다면, 너무 단순하게 생각한 것이다. 마찬가지로, 사회영역을 과거의 사회운동(노동운동)이 퇴장하고 새로운 운동이 등장하는 연극의 한 장면으로 생각했다면, 논리에 벗어난 생각을 한 것이다. 이제는 인정하자. 소비자운동이 국가의 영향력을 벗어날 수 있고, 자신의 특수성(정체성, 반대자, 목적)을 분명하게 규정할 수 있다는 것을 말이다. 이미 이에 대한 제법 낙관적인 의견들이 나오고 있다. 또한, ‘소비’라는 문제에 국한되지 않으려 하고, 보편적인 사회운동의 범주에 속하기를 원한다는 것도 인정하자. 

소비자운동이 노동운동 등에 미치는 영향

그렇다면, 노동운동과의 관계는 어떻게 될까? 여러 신생운동들 중 이와 가장 가까운 반핵운동과 환경운동과의 관계는 어떻게 될까? ‘소비자들’이 노조와 관련된 보이콧 활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것은 위험한 제품을 고발하기 위한 노조와의 공동투쟁이다. 석면‧살충제 등을 다루는 노동자, 이를 사용하는 소비자 모두를 위험에 빠뜨리는 제품들을 고발하기 위한 투쟁인 것이다. 또한 제품성분, 제조방법, 가격 형성요인에 관한 미공개 정보를 밝히고 이를 알리기 위해 노조와 협력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도 여론에 막강한 영향력을 미치는 단체들과 중앙세력 간의 갈등관계가 형성되는 부분에만 한해서다. 현재 상황에서 이 둘의 공조는 ‘소비자들’이 노동환경과 일자리를 우선시하는 노조계획에 동참하는 식으로만 진행될 것 같다. 

한편, 소비자운동가들의 단기적으로 노조의 이해관계에 반하는 요구사항을 할 때가 있다. 소비자들이 공격적으로 요구할 때 말이다. 예를 들어서 대형마트의 영업시간을 늘리거나, 계산대 대기시간을 줄여달라는 등의 요구를 사업장에 할 경우, 근로자의 노동환경을 악화시키는 결과를 초래한다. 또한, 제품이나 브랜드에 관한 불평은 기업을 어렵게 하고, 심한 경우 일자리 축소로 이어진다. 또 다른 명목 하에 현재의 성장‧소비 모델에 대한 거부가 노조와 기업에 속한 이들에게 피해를 주는 것이다. 

이런 긴장관계를 감추지 않고 해결한다는 것은 단순한 임시방편에 그치지 않는다. 이를 위해서는 노조나 정당 같은 기존 세력의 계획을 따르는 것이 아닌, 새로 구상한 포괄적인 계획이 필요하다(여기서 노조는 당연히 프랑스민주노동동맹(CFDT)을 의미함). 또한, ‘소비자들’이 광범위한 사회운동에 단계적으로 흡수돼 여론과 정치성향을 내세우기보다는 자신만의 독창적인 비전을 제시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만약 소비자들의 집단행동이 가지는 다양한 의미들 가운데 문화‧경제 모델과 사회변동의 설정방향이 존재하는 수준을 찾는다면, 이 마지막 가설이 가장 신빙성 있어 보인다. 현재 소비자운동과 다른 운동(환경운동, 반핵운동)과의 격렬한 갈등관계를 고려했을 때 말이다. 

이 모든 것들은 매우 자주 발생하는 일들이다. 마치 소비자운동이 활동주의의 첫 단계이고, 활동주의가 수그러들지 않으면 반핵운동이나 친환경운동, 드물게는 페미니스트운동으로 이어지는 것처럼 말이다. 또한 소비자운동이 자신의 동원력을 초과하는 운동의 첫 단계만 설정하고, 논쟁거리를 사회의 보편적 방침과 같은 수준으로 끌어올리려는 것처럼 말이다. 

1960년대 말과 1970년대 초에 주어졌던 경제적 만족감에 취한 소비자운동은 희망을 주는 존재였다. 그 희망은 아직 사라지지 않았다. 그러나 친환경, 반핵과 같은 보편적 주제에 고착된 경우가 많아, 오늘날 ‘소비자’ 조직이 주요한 사회운동에서 중심적 역할을 할 가능성은 점점 희박해지고 있다.  


글·미셸 비비오르카 Michel Wieviorka
사회학자. 테러리즘·인종 갈등 문제 연구의 권위자. 

*이 글은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1978년 11월호에 게재된 것으로 지금 읽어도 그 의미는 여전히 유효하다.

번역·이보미
한국외국어대 통번역대학원 졸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