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노믹스는 ‘민생’에만 전념해선 안된다

2017-06-30     한성안 | 영산대 교수
물질 없이 인간은 존재할 수 없다. 물질은 인간존재의 기본적인 조건이다. 경제는 이런 인간 삶의 기본조건에 관한 활동이다. 그러니 정부정책 중에서도 경제가 모든 사람들의 일차적 관심사가 될 수밖에 없다. 그 때문에 문재인정부가 들어선 후 경제정책팀이 가장 먼저 꾸려졌다. 김동연 경제부총리와 장하성 정책실장을 이어 김상조 공정거래위원장까지 자리를 잡은 상태다.

모두 중요한 역할을 하겠지만 이른바 ‘J노믹스’의 방향과 실행프로그램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칠 사람은 경제부총리가 될 가능성이 크다. 그런데 그의 경력과 전력을 들여다보면 미심쩍은 부분이 발견된다. 그래서 경제팀 중 누구보다도 김동연 경제부총리가 가장 우려스럽다.

인간은 무엇인가? 흙으로 돌아가는 물질적 존재인가? 잘 먹고 잘 자는 생물학적 존재인가? 궁극적으로 흙으로 돌아가더라도 적어도 살아있는 동안만은 물질적 존재가 아니다. 이런 판단 때문에 나는 극단적 유물론자와 거리를 둔다. 인간은 그저 등 따습고 배부르기만 하면 행복해지는 돼지도 아니다. 인간은 떡은 물론 머리와 가슴에 ‘장미’를 한 아름씩 그리며 산다. 인간은 지성을 갖춘 존재, 곧 호모사피엔스이기에, 생물학적 존재로 환원될 수 없다. 내가 진화적 관점을 지지하면서도 인간을 ‘유전자’구조로 이해하며, 인간사회를 동물들의 적자생존 원리로 해석하는 극단적 진화경제학을 배격하는 이유다. 

인간에게 물질은 필수적이다. 인간은 경제활동을 통해 물질을 구한다. 하지만 그 활동은 인간의 활동이다. 따라서 경제활동은 지성적 사유와 상호작용하면서 이뤄진다. 지성적 목적으로 지도되는 물질적 활동, 이것이야말로 인간의 고유성이다. 이런 고유성 때문에 동물과 달리 인간은 생각하면서 생산하고, 생각하면서 분배하고, 생각하면서 소비한다. 따라서 인간의 경제생활을 물질의 흐름은 물론 생리학적 욕구충족과정으로 환원하면 안 된다. ‘아무 생각 없이 순수하게’ 이뤄지는 경제활동처럼 장미꽃이 꺾인 경제정책은 호모사피엔스에게 처음부터 낯설 수밖에 없다.

자본주의의 총칼, ‘보이지 않는 손’

인간들 간의 관계는 다양한 방식으로 진화해왔다. 약탈적 야만사회 이후 사적소유제도가 확립되자 지배계급이 뚜렷한 모습을 드러냈다. 근대사회에 들어 시민혁명과 산업혁명을 통해 구시대의 지배세력은 새로운 자본가계급으로 대체됐다. 시민혁명이 구 지배세력을 해체한 정치적 사건이라면 산업혁명은 자본가계급을 근대사회의 새로운 지배계급으로 확립시킨 경제적 사건이다. 산업혁명은 기술발전을 통해 가능해졌다. 기술발전으로 인해 산업자본가의 부가 급격하게 축적됐고, 이에 힘입어 강력한 지배력을 행사할 수 있게 됐다. 정치, 경제, 기술의 이런 변화로 인해 자본가계급은 근대사회의 새로운 지배계급으로 부상했다. 

이 과정에서 민주공화정은 ‘자본가의 위원회’, 곧 기업국가로 진화했다. 기업국가는 기업의 자유를 방해하는 모든 것들을 폭력으로 진압함으로써 시장을 자유로운 공간으로 만들어 줬다. 이런 권력의 비호 아래 임노동관계는 자립적이고 평등한 생산관계의 외양을 갖추게 됐다. 아담 스미스가 경탄해 마지않았던 ‘보이지 않는 손’은 실제로 자본주의국가의 총과 칼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정치, 경제, 기술의 변화만으로 시대는 바뀌지 않는다. 자본주의국가의 손은 보이게 마련이다. 특히 임노동관계의 모순이 폭발할 때 그렇다. 보이는 손을 안 보이게 하는 방법은 없을까? 동물은 육안을 통해 세상을 보지만 인간은 생각을 통해 세상을 본다. 생각은 보이지 않는 것을 볼 수 있게 해 주지만 반대로 보이는 것을 볼 수 없게도 만든다. 사고의 ‘프레임’ 효과 때문이다. 생각의 프레임은 그 시대의 문화에 의해 결정된다. 

1776년 아담 스미스는 <국부론>을 저술했다. 이 책의 목적은 나라의 부를 증대시키는 방법을 제시하는 것이다. 곧, 경제성장에 관한 저서다. 성장하는 방법은 무엇인가? 스미스는 개인의 무한한 이기심을 첫째 요인으로 꼽았다. 이기심은 악덕이 아니라 장려해야 할 미덕이다. 이런 심리학에 그는 분업이라는 노동의 조직방식을 추가했다. 한 사람이 모든 공정을 담당하는 것보다 여러 사람이 각각의 공정을 나누어 처리하면 생산성은 수백 배로 증대한다. 이제 개별적으로 분리된 노동을 통합하는 기계장치가 필요한데 ‘시장’이 이 역할을 담당한다. 자기 이익을 도모하는 개인들의 계산적 합리성 덕분에 이 기계장치는 자율적으로 작동된다. 따라서 ‘푸줏간 주인’과 제빵업자의 이기심에 호소하는 동시에 그들의 결과물을 시장의 자동기계에 맡겨두면 경제는 성장한다.

그렇다면 국가의 부는 왜 증가해야 했던가? 첫째, 모든 게 부족하기 때문이다. 실제로 선진국으로만 국한할 때, 1750년 1인당 GNP는 182달러로 1950년 1,054달러의 17.3%에 불과했다. 20년 후와 비교하면 실상은 더 분명해진다. 1970년도 1인당 GNP 2,229달러의 8.2% 수준이었으니(1960년 US 달러), 스미스 시대에 결핍은 일반적 현상이었다. 스미스의 후예들이 ‘희소성’을 원칙이라고 부를 만했다. 

그러나 희소하기 때문에 꼭 성장할 필요는 없다. 아무리 희소하더라도 원하는 사람이 없으면 더 많이 만들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성장해야 하는 두 번째 이유는 인간의 욕망 때문이다. 욕망은 소유함으로써 충족된다. 소유하자면 누군가 생산해야 한다. 생산하면 성장한다. 그런데 욕망이 끝없이 커지면 성장도 무한해야 한다. 희소성과 ‘무한한 욕망’은 모두 법칙이며, 이 법칙이 야기하는 간극을 메우는 방법은 성장밖에 없다. 따라서 경제문제는 성장을 통해 해결된다. 나아가 더 많이 성장할수록 좋다! ‘다다익선’은 <국부론>을 교과서로 선택한 사람들에게는 미덕이다.

이기심은 과연 경제성장의 원동력인가

이기심에 대한 찬양, 시장의 자동메커니즘에 대한 신봉, 자원의 희소성과 인간의 무한한 욕망에 대한 법칙적 사고, 다다익선의 미덕, 경제문제에 대한 성장적 처방! 이런 사유프레임을 ‘신고전학파경제학(Neo-classical economics)’이라고 부른다. 주류적 프레임으로서 <국부론>과 신고전학파경제학은 일종의 자본주의적 ‘문화’다. 그것은 시장을 자동기계로 만들어 주는 진정한 의미의 ‘보이지 않는 손’이다. 신고전학파경제학의 문화 없이 기업국가의 폭력만으로 자본주의경제는 작동할 수 없다. 나아가 이 부류의 학자들에게 이 문화는 종교적 신념과 같다. 그래서 해밀턴(David Hamilton)과 같은 제도경제학자는 이를 가리켜 ‘경제신학’이라고 불렀던 것이다.

그렇다면 <국부론>과 신고전학파경제학의 문화는 어느 정도 과학적으로 뒷받침되는지 검토해보자. 첫째, 이기심은 찬양할만한가? 이기심이 야기하는 도덕적 폐해는 여기서 굳이 열거할 필요가 없을 정도로 널려있다. 이기심의 경제적 폐단은 ‘죄수의 딜레마’를 통해 내시(John Nash)에 의해 논증됐다. 그에 의하면 극단적 이기주의자들의 게임은 필연코 두 사람 모두의 패배로 끝나고 만다. 케인스가 발견한 ‘저축의 역설’도 이기심이 초래한 재난이다. 호황기에 기업은 사내유보금으로 자본을 축적한다. 사내유보금은 기업의 저축이다. 하지만 예상수익이 낮으면 기업은 투자하지 않고 저축을 늘린다. 경제적 합리성으로 표현되고 있지만 사실은 자기만 살고자 하는 이기심의 발로다.

이처럼 투자가 감소하는 대신 기업의 저축이 증가하면 고용이 감소한다. 이제 노동자의 소득이 감소하니 기업도 물건을 팔 수 없게 된다. 그 결과 경제는 불황에 빠지고 만다. 여기서도 이기심은 모두를 패자로 만든다. 푸줏간 주인의 이기심이 경제성장에 기여한다는 스미스의 생각은 논리적으로 이미 설득력을 잃는다.

둘째, 시장은 자동기계인가? 1930년대 세계대공황은 시장이 자동기계가 아니라는 사실을 가장 뚜렷하게 보여준 사건이다. 국가의 폭력이 없었더라면 영국에서 산업혁명은 일어날 수 없었다. 20세기 대한민국의 경제성장에서 노동탄압과 같은 국가의 폭력적 개입은 물론 국가의 ‘경제개발5개년계획’이 결정적 역할을 수행했다는 사실에 대해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모르는 사람이 없다. 시장은 인간의 의식적 행위에 의해 조종 및 관리되는 ‘사회체제’일 뿐이다.

셋째, 자원은 희소한가? 1930년대에 이미 케인스는 희소성의 시대는 종결되고 ‘풍요의 시대’로 접어들었다고 선언했다. 자원의 희소성이 문제가 아니라, 풍요로운 자원의 과소사용이 문제였던 것이다.

1929~1933년 미국에서 50%의 설비가 놀고 있었고, 그 중 특히 내구재설비의 75%가 녹슨 채 가동되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이 자원을 희소하게 여기는 이유가 있다. 케인스 이전에 베블런은 그 이유를 ‘영리계급’의 ‘의식적 태업’에서 찾았다. 독과점기업들이 독점가격을 유지하기 위해 생산량을 의식적으로 줄였기 때문이다. 그 결과 우리는 풍요한 자원 속에서 역설적으로 희소성에 시달리는 것이다. 경제학자들의 이런 혜안을 1963년 케네디 대통령(John. F. Kennedy)은 ‘풍요 속의 빈곤’으로 표현했다. 자원은 더 이상 희소하지 않다. 단지 소수에게 독점돼 있을 뿐이다.

넷째, 인간의 욕망은 무한한가? 1974년 이스털린(Richard Easterlin)은 1946년부터 30개 빈곤국과 부유국의 행복의 규모를 연구했다. 그 결과, 그는 흥미로운 사실을 알아냈다. 먼저, 모든 국가에서 소득이 증가하면 사람들은 행복감을 느낀다는 것이다. 물질이 뒷받침돼야 인간은 행복하며 빈곤하면 불행하다. 당연한 이야기다. 그러나 이스털린의 발견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소득이 높아지면 행복감은 증가하지만, 일정수준을 넘어서면 소득이 더 증가하더라도 대다수 사람은 더 큰 행복을 느끼지 않더라는 사실이다. 이것을 ‘이스털린의 역설(Easterlin’s paradox)’이라고 부른다. 이런 사실은 이후 다양한 연구에 의해 실증됐다. 행복을 얻기 위해 실로 물질은 필요하다. 가난하면 불행해지고, 소득이 뒷받침되면 행복해질 수 있다. 하지만 행복을 얻기 위해 대다수 인간은 물질을 무한하게 욕망하지 않는다. 물질에 대한 사람들의 욕망은 무한하지 않다는 것이다. 대다수 인간들은 ‘과유불급’을 미덕으로 삼는다. 물론 다다익선을 미덕으로 삼는 소수 ‘욕망의 전사’들을 제외하고 말이다.  

헬조선 탈출, ‘사람 사는 경제’를 원한다면

그렇다면 인간은 무엇으로 행복해질 수 있는가? 일정 수준의 물질을 확보한 다음부터 대다수 인간은 교우관계, 문화적 삶, 건강, 정치적 자유와 정의를 열망한다. 나아가, 그들은 보다 평등한 사회를 요구한다. 불평등은 차별과 모멸감, 그리고 박탈감을 유발해 불쾌한 상태로 몰아넣기 때문이다. 평균소득이 비슷한 유럽국가들 중에서도 높은 복지수준으로 인해 불평등이 완화된 북유럽국가들에서 행복감은 더 높았다. 

대한민국 국민은 ‘헬조선’에서 살고 있다. 실업과 불평등이 만연하니 분명히 지옥이다. 하지만 불합리와 불의로 가득 차 있으니, ‘전근대적’ 지옥이다. 헬조선은 왜 발생했는가? 상위 10%와 대기업의 금고에는 유휴자원이 가득히 쌓여 있다. 자원은 절대 희소하지 않다. 저성장 때문이 아니라 무한한 욕망의 전사들이 유휴자원을 독점하고 있기 때문이다. 돈이 놀고 있으니, 사람도 논다. 사람이 놀고 있으니 벌이가 없어 물건도 창고에 쌓여 놀고 있다. 헬조선은 자원이 희소하기 때문에 발생하지 않았다. 오히려 풍요한 자원이 활용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따라서 헬조선의 문제는 성장으로 해결되지 않는다. 풍요 속의 결핍! 그것은 무한한 이기심 때문이다. 따라서 탐욕의 전사들의 이기심도 통제돼야 한다. 헬조선과 불행은 성장이 아니라 분배로써 해결된다.

신고전학파경제학이 국민들의 의식을 결정하는 문화라는 점은 부인할 수 없는 현실이다. 그러니 정치인이 성장에 대한 욕망을 완전히 비켜날 수는 없다. 하지만 분배로 인해 경제가 성장한다는 수학적 법칙은 없다. 그럼에도 그로 인해 성장이 이뤄지면 금상첨화다. 이를 위해서는 제도적 장치가 필요한데, 이때 혁신이 필요하다. 물론 이런 노력에도 불구하고 획기적 성장이 이뤄지지 않을 수도 있다. 하지만 지금처럼 성장도 정체되고 대다수가 불행해지는 것보다는 낫다.    

<국부론>과 신고전학파의 경제학적 사고는 경제학자들의 전유물이 아니다. 그것은 경제를 포함하는 전 영역에 녹아들어 있다. 그것은 21세기 대한민국 사회의 ‘문화’다. 예컨대, 한국대학의 경제학과는 신고전학파경제학 일색이다. 경제학교수의 90% 이상이 신고전학파경제학자들이다. 경제학과에서만 경제학을 가르치지 않는다. 여타 사회과학 분야에서 기초과목으로 강의되는 경제학도 모두 신고전학파경제학이다. 교양과목도 예외가 아니다. 이처럼 대학 졸업자 중 적지 않은 사람들이 신고전학파의 사고프레임으로 무장된다. 다양한 수준의 국가고시에도 경제학이 출제된다. 이 모든 시험의 교본은 신고전학파경제학이다. 공무원이 되려는 자, 모두 신고전학파경제학으로 철저히 훈련돼야 한다. 김동연 경제부총리도 이 과정을 철저히 거쳤을 것이다. 

우리는 문재인 대통령의 철학을 잘 알고 있다. 그는 사람 사는 경제를 꿈꾼다. 따라서 문재인정부의 경제학, 곧 ‘J노믹스’를 구현하는 경제부총리라면 ‘아무 생각 없이 순수하게 민생에만 전념’할 것이 아니라 적어도 우리의 경제학적 전제를 흔들림 없이 고수해야 한다. “이기심은 모두를 패자로 만든다. 시장은 관리돼야 할 사회체제다. 자원은 희소하지 않다. 인간의 욕망은 무한하지 않다. 과유불급이 미덕이다. 성장만이 대안이 아니다.”

이것이 문재인을 지지한 유권자들이 생각하는 J노믹스의 경제학적 전제다.  


글·한성안 
영산대 경제학과 교수, 독일 브레멘대학교 경제학 박사. 2006년 BMW 코리아 학술상(우수상)을 수상했으며 부산경실련 정책위원장과 부산광역시 교육청 논술교육자문교수를 역임했다. 저서로 <사회적 자본과 인적 자본개발>(공저), <상식이 그리운 시대, 인문학으로 풀어본 블로그 경제학>, <인문학으로 풀어보는 통계학> 등이 있다. 현재 베블런과 슘페터, 케인스의 영향을 받아 진화적 제도 경제학적 방법론으로 지식(기술)과 제도의 문제를 연구하면서 진보적 경제학의 새로운 패러다임을 고민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