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발견·변화·미래, 2017 칸의 문화사회학
2017-06-30 전찬일 | 영화 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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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칸 수상작 - <더 스퀘어> |
지난해 6월호에서 이 지면에서도 물은 바 있지만, 다시 한 번 묻자. “대체 칸은 우리에게, 세계영화계에 어떤 의미를 띠는 것일까? 세계 3대 영화제라면서, 왜 그렇게들 베를린도, 베니스도 아닌 유독 칸에 목을 매는 걸까?”
무엇보다 “베니스, 베를린과 더불어 칸은 세계 영화지형도를 그리는 데 지대한 역할을 해왔다.” 실은 그 정도가 아니다. 지난 40여 년 간, 세계 영화역사는 칸영화제와 함께 걸어왔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적어도 예술적·미학적 측면에서는 그랬다.
1976년 마틴 스콜세지 감독의 <택시 드라이버>를 필두로 1979년 <지옥의 묵시록>(프란시스 포드 코폴라)과 <양철북>(폴커 쉴뢴도르프), 1984년 <파리, 텍사스>(빔 벤더스), 1985년 <아빠는 출장 중>(에밀 쿠스트리차), 1989년 <섹스, 거짓말 그리고 비디오테이프>(스티븐 소더버그), 1990년 <광란의 사랑>(데이비드 린치), 1991년 <바톤 핑크>(조엘 & 에단 코엔 형제), 1993년 <패왕별희>(천 카이거)와 <피아노>(제인 캠피온), 1994년 <펄프 픽션>(쿠엔틴 타란티노), 2004년 <화씨 9/11>(마이클 무어), 2007년 <4개월, 3주···그리고 2일>(크리스티안 문주), 2010년 <엉클 분미>(아피찻퐁 위라세타쿤), 그리고 2016년의 <나, 다니엘 블레이크>(켄 로치)에 이르기까지 칸 최고 영예인 황금종려상 수상작들은 세계 영화사를 수놓았다. 그 문제적 수·걸작들이 없는 세계 영화사는 작성은커녕, 상상조차 불가능하다.
칸, 과거와 현재, 미래를 말한다
칸은 또한 흔히 올림픽과 월드컵에 이어 세계 3대 미디어 이벤트로 간주된다. 그렇기에 국가건 개인이건 그 영화적 존재감을 전 세계에 알리는 데 있어, 칸보다 더 효과적·인상적인 플랫폼은 존재하지 않는다. 적어도 아직은. 현실적 영향력·권위 등에서 칸을 능가할 수 있는 유일한 영화 이벤트로는 최우수외국어영화상 부문을 포함하고 있는 아카데미시상식 정도가 있긴 하나, 미국, 영국 등 주로 영어권 영화들을 위한 잔치이기에, 수천 명에 달하는 세계 각국 저널리스트들이 취재 차 찾는 칸에 비교할 수 없다. 뿐만 아니다. 칸은 세계 영화계의 도도한 흐름의 과거와 현재를 증거함과 동시에 미래를 예고한다.
지난 1997년 칸을 처음 방문한 이래 개인 통산 20회를 맞이한 올해, 2017 제70회 칸영화제(5월 17일∼28일, 현지 시간)는 그 어느 해보다 유의미했으며 칸다웠다(는 것이 폐막 한 달이 다 돼가는 이 시점에서 내리는 총평이다). 황금종려상(<더 스퀘어>, 루벤 외스틀룬드, 스웨덴)부터 심사위원대상(<120 BPM>, 로뱅 캉피요, 프랑스), 감독상(<매혹당한 사람들>, 소피아 코폴라, 미국), 남우주연상(<유 워 네버 리얼리 히어>, 호아킨 피닉스/린 램지, 영국), 여우주연상(<인 더 페이드>, 다이엔 크루거/ 파티 아킨, 독일), 심사위원상(<러브리스>, 안드레이 즈비아긴체프, 러시아), 각본상(<더 킬링 오브 어 세이크리드 디어>, 요르고스 란티모스, 그리스 & <유 워 네버 리얼리 히어>, 린 램지)에 이르는 총 7개의 경쟁 부문 본상 수상 결과부터가 최상의 수준급이다. 봉준호의 <옥자>와 홍상수의 <그 후>가 수상에는 실패했으나, 한 편의 예외도 없이 받을 만한 영화들이 받은 것.
심사위원들의 높은 식견에 경의
그 간의 칸 체험에서 올해처럼 칸 심사위원단의 최종선정이 설득력 있게 다가선 적이 없었기에 내리는 진단이다. 립 서비스가 아니라 올 칸의 9인 심사위원들의 높은 식견에 경의를 표하지 않을 수가 없을 성 싶다. 페드로 알모도바르(감독, 스페인)를 수장으로 윌 스미스(배우, 미국), 제시카 차스테인(배우, 미국), 파올로 소렌티노(감독, 이탈리아), 박찬욱(감독, 한국), 아녜스 자우이(감독, 프랑스), 마렌 아데(감독, 독일), 판빙빙(배우, 중국), 가브리엘 야레(영화음악가, 프랑스)가 그 주인공들이었다.
상기 진단은 내 주관적 판단에서 내린 것만은 아니다. 칸 현지에서 가장 널리 참고·인용되는 스크린 인터내셔널에 평점을 부여한 11개 매체의 종합평가에서도 그 점은 확연히 드러난다. 4점 만점에 3.2점으로 공동 1위를 차지한 2편의 영화 <러브리스>와 <유 워 네버 리얼리 히어>부터가 공히 수상의 영예를 안았다. 지난해 무려 3.7점으로 ‘스크린’ 사상 역대 최고의 평점을 받으며 일찌감치 최유력 황금종려상 후보로 점쳐진, 독일 마렌 아데의 <토니 에르트만>과, 여전한 ‘건재’를 과시한 미국 독립영화계의 거물 짐 자무쉬의 <패터슨>(3.5점), 노익장의 성공적 귀환을 알린 폴 버호벤의 <엘르>(3.0점), 그리고 브라질 영화의 어떤 저력을 웅변한 클레버 멘도사 필료의 <아쿠아리우스>(2.9점) 등 상당한 호평을 받은 영화들이 무관의 수모를 당한 것과는 대조적이다.
<더 스퀘어>도 2.7점으로 미국 토드 헤인즈의 <원더스트럭>과 함께 공동 2위였다. <120 BPM>은 2.5점으로 <그 후>, <굿 타임>(베니 & 조쉬 사프디, 미국)과 나란히 공동 3위에 머물렀다. 개인적으로는 올 칸의 진정한 위너이자 발견이라 평하고픈, 아니 그 동안 칸에서 본 5∼600편을 통틀어서도 베스트 3―재미삼아 말하면 다른 2편은 <나, 다니엘 블레이크>와 <4개월, 3주···그리고 2일>이다―안에 위치시키고픈 걸작 중 걸작이다. 다른 주요 두 칸 현지 데일리 평가도 마찬가지. 스크린에 비해 인색한 르 필름 프랑세 15인 평자들로부터도 최고 평점인 2.93점을 득했다. 2.2점의 2위작들 <러브리스>, <리다우터블>(미셸 아자나비시우스)과 무려 0.7점 이상의 큰 격차가 난다. 놀라지 마시라, 스크린처럼 11인의 다국적 평자들이 참여하는 갈라 크루아제트에서는, 작년 <토니 에르트만>이 스크린에서 받았던 3.7점을 얻었다.
3등상 격인 감독상 수상작인 <매혹당한 사람들>은 2.3점으로 <옥자>, <라망 두블>(프랑수아 오종, 프랑스)과 공동 5위권이었다. 본상 수상작 중 각본상의 <더 킬링 오브 어 세이크리드 디어>와 여우주연상의 <인 더 페이드> 2편이 1.9점과 1.5점으로 평균 2점 이하의 상대적으로 저조한 평점을 받았으나, 수상감으로는 자격 충분하다. 콜린 파렐과 니콜 키드먼 주연의 <더 킬링 오브 어 세이크리드 디어>는 카리스마 넘치는 한 외과 전문의를 중심으로 그의 가족과 미스터리한 한 10대 소년을 둘러싸고 펼쳐지는 스릴러 드라마다. 요르고스 란티모스 감독은 2015년 칸 경쟁 심사위원상작인 <더 랍스터>나 2009년 주목할 만한 시선 대상작인 <송곳니> 등 전작들 못잖은 충격적이며 파격적인 드라마로, 기대 이상의 강렬한 임팩트를 안겨준다. 한편 독일 출신이면서도 주로 할리우드에서 맹활약을 해온 다이앤 크루거는 명장 파티 아킨(<미치고 싶을 때, 2004>, <천국의 가장자리>(2007), <소울 키친, 2009>, <굿바이 베를린, 2016>)과 더불어, 네오나치주의자들에 의한 폭탄 테러로 남편과 아들을 한꺼번에 잃은 뒤 법적 부정의에 맞서 사적 복수에 나서는 여인으로 분해, ‘칸의 여왕’으로 손색없는 “재발견”의 열연을 펼친다.
<120 BPM>, 2017 칸의 발견
1등상과 2등상인 <더 스퀘어>와 <120 BPM>에 대해 좀 더 소개해보자. <더 스퀘어>는 무엇이든 해도 되는 광장(Squre)에 ‘더 스퀘어’라는 설치품을 전시하는 과정에서, 유명 미술관 큐레이터 크리스티안(클라에스 방 분)을 축으로 펼쳐지는 휴먼 드라마다. 예술 세계의 유머 가득한 극화, 사람 냄새 물씬 풍기는 유려한 플롯, 엘리자베스 모스(<트루스, 2015>) 등이 가세한 출연진의 호연 등이 심사위원들을 감동시켰을 듯. <120 BPM>은 단언컨대 ‘2017 칸의 발견’으로 손색없다. AIDS 양성반응자들의 권익을 보호하기 위해 1992년 결성된 액티비스트 그룹 ‘액트 업 파리’ 회원들의 실제 활동과, 두 ‘게이’ 간의 절절한 사랑을 오가며 펼쳐지는 실화성 휴먼 드라마. 영화는 지켜보기 부담스러울 수도 있다. <120 BPM>의 영화적 수준은 압도적이다. 영화는 세간의 믿음과 달리, 공적 영역(Public Sphere)과 사적 영역(Private Sphere)은 분리될 수 없다는 사실을 설득력 있게 역설한다. 그 두 영역을 매개해주는 장치가 다음 아닌 ‘분당 120 비트’의 음악을 곁들인 춤이다. “액션=삶, 침묵=죽음”이라는 주제의식은 물론 내러티브 구조를 완벽히 승화시키는 결정적 장치다. 개인적으로는 의당 <120 BPM>이 황금종려상 감이라고 여겼으면서도, 끝내 수상하진 못하리라 예상했던 건, 두 주인공의 사랑을 묘사하는 수위가 워낙 세서였다. 적나라한 성기 노출 등은 없어도 정서적·심리적 강도가 그만큼 강렬한 것.
칸, 보수 아닌 변화, 과거 아닌 미래 선택
영화제나 영화상의 정치학 상 어느 정도는 으레 그렇긴 하나, 안배 측면에서도 2017 칸의 선택은 단연 눈길을 끈다. 수상자의 국적이건 감독·영화의 국적이건 7개의 본상을 7개국 8명에게 안겼다. 이런 결과가 심사위원들의 의도일 리 만무하나, 우연치곤 흥미롭기 짝이 없다. 신의 묘수랄까. 영화제 내내, 올 칸의 경쟁 섹션 초청작들이 평준화됐다는 등의 평가가 적잖았는바 수상 결과도 그렇게 귀결된 것이다. 올 칸이 한층 더 유의미하게 다가선 연유는 그러나, 다른 데서 찾아야 한다. 보수나 현상 유지가 아닌 다양한 변화들을 꾀했고, 과거가 아닌 미래지향적 방향으로 나아갔다는 것!
당장 7개 본상들이 그 결정적 증거다. 개막 전까지만 해도 올 칸의 으뜸 화제는 미하엘 하네케의 세 번째 황금종려상 수상 여부였다. 팜므 도르든 그랑 프리 뒤 페스티발이든 칸 최고상을 2회 차지한 감독들은 총 8인. 스웨덴의 알프 셰베리를 비롯해 미국 프랜시스 포드 코폴라, 덴마크 빌레 아우구스트, 유고슬라비아 에미르 쿠스트리차, 일본 이마무라 쇼헤이, 벨기에 장 피에르 & 뤼크 다르덴 형제, 영국 켄 로치, 그리고 오스트리아 출신의 하네케가 그들이다. 아직 황금종려상 3회 수상자는 나오지 않았기에, 만약 하네케가 그 주인공이 된다면 칸의 새 역사가 써질 참이었다. 총 19편의 경쟁작 중 거장의 신작 <해피 엔드>가 가장 큰 기대를 모았으리라는 건 자명했다. 하지만 영화는, 범작에 지나지 않았다. 거장의 명성을 감안하면 실망스러운 졸작이라 해도 무방했다. 유럽의 한 일그러진 가족의 평범한 초상화. 함께 지내건만 무관심하기 짝이 없는 가족 3대 이야기를 스마트폰 이미지 등을 동원해 감각적으로 그리려고 애썼으나, 백방이 무효로 돌아가 버린 허망한 태작. 결정적 한방을 의도했을 결말도 그다지 인상적이지 않다. 외려 기시감 어린 도식적 감상을 안겨준다. 심지어는 프랑스의 국민 여배우라 할 이자벨 위페르마저도 별 다른 감흥을 전하지 못한다. 크디 큰 내 실망은 심사위원들에게도 마찬가지였던 듯. 오죽하면 그들 중 상당수가 존경해왔을 법한 거장을 빈손으로 돌려보내는 용단(?)을 내렸겠는가.
동의 여부를 떠나, 칸 현지 분위기상 최유력 황금종려상 후보는 안드레이 즈비아긴체프의 <러브리스>였다. 칸 데일리들인 스크린, 르 필름 프랑세, 갈라 등으로부터 가장 고른 지지를 받은 것. 두 중년 이혼 커플의 외동아들이 실종되면서 벌어지는 사건을 중심으로 펼쳐지는 관계의 드라마이자, ‘푸틴의 나라’에 대한 암울한, 너무나도 암울한 초상화다. 플롯이 지나치게 단선적인데다 도식적이어 칸의 최고상을 가져가는 건 무리라는 게 내 판단이었던 바, 결국 심사위원상으로 귀결됐다. 사실 <러브리스>가 황금종려상으로 낙착됐더라면 예상에 어긋나지 않는, 지극히 무난한 결론이었을 터. 변화나 미래가 아닌 보수적이며 복고지향적 선택이었을 테고. 목하 러시아 영화를 대표하는 50대 중반의 감독은, 장편 데뷔작 <리턴>으로 2003년 베니스 황금사자상 및 최우수신인감독상 등을 거머쥐며 일대 파란을 일으켰던 주인공. <추방>으로 2007년 칸 남우주연상(콘스탄틴 라브로넨코)을, <리바이어던>으로 2014년 각본상을 안은 바 있어, 영화제의 정치학적으로 칸 경쟁에 첫 입성한 루벤 외스틀룬드(<더 스퀘어>)나 로뱅 캉피요(<120 BPM>)에 비해 여러모로 유리했으나 최상위 영예를 차지하는 데는 실패했다.
여성 감독·배우들의 성취 눈부셔
여성 감독·배우들이 거둔 성취에 눈길을 주면 올 칸의 변화성과 미래성 등은 더욱 도드라진다. 올 칸 경쟁에는 무관으로 돌아간 일본 가와세 나오미 감독의 <히카리>(빛)까지 총 3편이 여성 감독의 영화들이었다. 그 중 소피아 코폴라, 린 램지 두 감독이 3개의 본상을 가져갔다. 더욱이 70회 기념상을 니콜 키드먼이 거머쥐었다. 대단한 쾌거라 하지 않을 수 없다. 가히 “여성 만세!”라 할 만하다. 돌이켜보면 그 기념상을 안을 만한 후보자들은 수두룩했다. 2007년 60회 기념상을 다른 본상을 받지 못한 <파라노이드 파크>의 구스 반 산트에게 수여했듯이 미하엘 하네케나, 전 부인인 제인 버킨 주연의 <여해적>(La pirate, 1984) 이후 33년 만에 <로댕>으로 칸 경쟁에 초대된 프랑스의 자크 드와이용 등 무관에 그친 노장들 중 한 명에게 안길 수도 있었다. 칸 클래식에서 선보인 연출 대표작이자 걸작인 <용서받지 못한 자>(1992)와 더불어 칸을 방문해 성황리에 마스터 클래스를 펼친 살아 있는 세계 영화계의 전설 클린트 이스트우드나, 인기 TV 시리즈 <트윈 픽스>와 <탑 오브 더 레이크: 차이나 걸>로 칸을 찾은 데이비드 린치나 제인 캠피온, 또는 카트린 드뇌브, 이자벨 위페르, 엠마뉘엘 베아르, 줄리에트 비노쉬 등 프랑스 영화를 화려하게 빛낸 디바들과 함께 <골든 이어즈>를 상영하며 70회를 기념하는 ‘오마주’(경의) 이벤트를 맞이했던, 또 한 명의 프랑스 노장 앙드레 테시네의 품에 안길 수도 있었다. 헌데 수상의 최종 영광은 니콜 키드먼의 차지였다. <매혹당한 사람들>, <더 킬링 오브 어 세이크리드 디어> 두 경쟁작 외에도, <하우 투 토크 투 걸스 앳 파티스>(존 캐머런 미첼)와 <탑 오브 더 레이크: 차이나 걸>(제인 캠피언 & 아리엘 클라이만) 두 비경쟁작으로도 초대받으며 2017 칸을 빛낸 디바 중의 디바.
‘넷플릭스 어페어’도 칸의 미래 예시
TV 시리즈의 공식 초청 또한 칸의 어떤 변화·미래를 예고한다. 그것은 칸이 더 이상 스크린용 영화와 TV(용) 영화 간의 분리를 고수하지 않고, 영화의 외연 확장을 꾀하겠다는 것을 함축한다. 세계 굴지의 스트리밍 서비스 다국적 엔터테인먼트 기업인 넷플릭스가 투자·서비스하는 두 편의 영화 <옥자>와 <더 마이어로위츠 스토리즈>(노아 바움백)를 논란의 가능성을 감수하면서까지 경쟁 부문에 포함시킨 결정도 칸의 어떤 다짐으로 읽힌다. 시큐어리티 이슈와 더불어 70회 칸을 지배했던 ‘넷플릭스 어페어’도 어느 모로는 칸의 미래를 예시하는 유의미한 사건이었던 셈이다.
비록 직접 주관하진 않았어도 7분짜리 VR(Virtual Reality) ‘설치’(Installation) 체험 <육체와 모래>(Carne Y Arena)를 영화제 공식 프로그램으로 메인 카탈로그에 소개한 것도, 영화 신기술 보급에 뒤떨어지지 않겠다는 칸의 다짐이자 미래 선언으로 읽힌다. 멕시코와 미국 국경 지대를 넘나드는 난민들이 사막에서 경찰에 의해 체포되는 과정을 가상현실로 체험케 하는 설치 영화. 개인적으로 더 주목하고 싶은 건 VR 그 자체가 아니라 그 VR 프로젝트를, <버드맨>으로 2015년 아카데미 작품상, 감독상, 각본상 등을, <레버넌트: 죽음에서 돌아온 자>로 2016년 오스카 감독상, 남우주연상(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 등 3관왕에 오른 알레한드로 곤잘레스 이냐리투가 연출했다는 사실이다. 그는 오스카를 정복하기 이전에 이미, 장편 데뷔작 <아모레스 페로스>(2000)부터 <21 그램>(2003) <바벨>(2006) <비우티풀>(2010) 등을 통해 감독으로서 존재감을 굳힌, 멕시코 출신의 현존 최고 명장이다. 이냐리투라는 이름은 ‘VR의 미래’도 단순 VR 체험이 아니라, 명성과 재능 등을 두루 겸비한 아티스타가 창조해내는 콘텐츠에 좌우되리라는 명제를 함축한다.
결국 ‘여성’과 ‘발견’, ‘변화’, 그리고 ‘미래’ 등이 2017 칸의 핵심적 화두들이었던 셈이다. 이쯤 되면 2017 칸이 그 어느 때보다 더 유의미했으며 칸 다웠다는 필자의 총평이 과장은 아니지 않을까.
글·전찬일
영화 평론가. 2009년부터 2016년 12월까지 8년 동안 부산국제영화제(BIFF) 프로그래머( ∼2012년), BIFF 아시아필름마켓 부위원장(2013∼2014년), BIFF 연구소장(2014∼2016년) 등을 두루 거쳤다. 현재 조선대학교 대학원 문화학과 초빙교수로 경희사이버대 등에 강의를 병행 중이다. 저서로 평론집 <영화의 매혹, 잔혹한 비평>(2008)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