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치 담배를 끊지 못하는 애연가처럼
2017-06-30 이택광 | 경희대 교수
최근 슬로베니아의 철학자 알렌카 주판치치는 자신의 짧은 에세이에서 이탈로 스베보의 소설 <제노의 양심>에 등장하는 애연가의 이야기를 소개하고 있다. 이 애연가는 언제든지 담배를 끊을 수 있다는 말을 입에 달고 계속 담배를 피운다. 애연가의 ‘양심’에 비추어본다면, “담배를 끊는다”는 그의 진술은 담배를 끊지 못하고 계속 피우는 행동에 반하는 것이다. 그럼에도 이 애연가는 왜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않고 모순적인 진술과 행동을 지속하는 것일까.
달리 묻자면 이 애연가는 왜 서로 충돌할 것이 뻔한 자신의 진술과 행동을 멈추지 못하는 것일까. 주판치치에게 이렇게 서로 반대되는 진술과 행동은 애연가의 기만성을 보여준다기보다 오히려 “이번 담배야말로 마지막 담배”라는 애연가 자신의 결심에 대한 진정한 믿음을 드러내는 것에 가깝다. 말하자면, 이 애연가는 매번 담배를 피울 때마다 ‘마지막 담배’를 피우는 것이기 때문에 ‘양심’에 거스르는 행동을 한다고 생각하지 않는 것이다.
청문회에 등장한 유행어, ‘내로남불’
새 정부가 들어서자, 국회인사 청문회가 열렸다. ‘적폐청산’을 외쳤던 새 정부였지만 자신들이 내세웠던 “인사 5대 원칙”에 맞지 않는 후보자들을 줄줄이 인선 물망에 올렸다. 이런 후보자들을 ‘검증’하겠다고 나선 야당 의원들이 “인사 5대 원칙”을 거론하면서 공세를 펼쳤지만, 과거 행태들을 반추해보면 이들 야당의원들 역시 자격을 갖췄다고 보기 어려웠다. 그럼에도 청문회는 ‘국민의 알 권리’라는 명분으로 후보자들의 ‘비리’를 낱낱이 폭로했다. 청문회 기간 가장 유행한 말은 ‘내로남불’이었다. “내가 하면 로맨스고 남이 하면 불륜”이라는 이 주장은 이해관계에 따라 조변석개하는 태도에 대한 조롱이기도 했다. 그러나 정작 ‘내로남불’을 읊조리는 이들조차 한때 자신들의 집권시기에 비슷한 태도를 보여줬다는 점에서 진술과 행동은 일치하지 않았다. 이 과정에서 올바른 전문 엘리트를 선별해서 통치를 맡긴다는 ‘대의민주주의’ 또는 ‘숙의민주주의’의 교의는 종적을 감췄다.
청문회에서 드러난 민주주의의 문제는 앞서 소개한 애연가의 담배 같은 것인지도 모른다. 청문회의 국회의원들이나 정부 지지자들이 ‘내로남불’에 무감각할 수 있었던 까닭은 다른 무엇이 아니라, 민주주의라는 교의를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지 곧바로 실행할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일 것이다. 지금은 민주주의의 원칙을 조금 위배하더라도 때가 되면 그 원칙을 금방이라도 복원할 수 있을 것이라고 진심으로 믿기에 이런 외면이 가능하다.
‘양심’에 대한 양심적인 외면이라는 역설은 이렇게 발생한다. 지금은 권력을 위해 민주주의 원칙을 보류해야만 하고, 그래서 후일 민주주의를 ‘제대로’ 실행할 수 있어야 한다고 진심으로 믿기에 지금 당장 목표를 위해 저지르는 사소한 위반이 가능한 것이다. 청문회라는 장치는 이런 믿음을 강화해준다. 청문회는 ‘국민의 알 권리’를 위해서 사실관계를 따지는 자리다. 말 그대로 ‘사실을 듣는 모임’이다. 그러나 이 장치는 사실을 수집해서 들려주는 것이 목적이지 진위 여부를 판단해주지 않는다. 사실은 경험적인 것이고, 이런 의미에서 경중을 논할 수 없다. ‘국민의 알 권리’ 하에서 모든 사실은 평등하다.
이 형식적 평등주의는 후보자들의 ‘비리 사실들’을 계량화해서 제시한다. 질적인 차이는 존재하지 않는다. ‘위장전입’은 모두가 범하는 ‘미필적 고의’로 왜곡된다. 음주운전 역시 누구나 한번쯤 저지를 수 있는 실수라고 강변한다. 이 ‘미필적 고의’에 동참하지 않는 이들은 법망을 피해 자신의 이익을 실현할 만한 능력을 겸비하지 못한 순진한 자들이고 국가를 통치할 자격을 갖추지 못한 무지한 자들로 분칠돼 버린다. ‘사실들’은 결코 자기들끼리 경쟁하지 않는다. 이렇게 평등하게 펼쳐진 ‘사실들’을 평가할 몫은 ‘평범한 시민들’에게 맡겨진다. 이 ‘시민들’은 누구인가. 지금까지 등장한 논리에 따르면 ‘전문 시위꾼’과 달리 ‘순수한 마음’으로 촛불을 들고 광화문에 모인 ‘시민들’이다. 이들이 원했던 것은 바로 ‘정권교체’였다. 청문회가 보여주는 광경은 진보와 보수의 대립이라기보다 이 이념적 차별성을 무화시키는 권력의 작동방식이다.
‘미필적 고의’로 위장된 위장전입
정치가 서로 교환될 수 없는 가치들의 충돌이라고 한다면, 청문회는 효과적으로 이 충돌을 제어하는 장치처럼 보인다. 이 청문회라는 장치는 ‘국민의 알 권리’라는 정언명령을 통해 직접 동력을 얻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상 정반대다. 이 지점에서 호명되는 ‘국민’은 실체를 가지지 않기 때문이다. ‘국민’은 필요와 편의에 따라 무대에 등장할 뿐이다. 청문회가 전제하는 ‘국민’은 ‘사실들’을 자신들의 이해관계에 맞게 평가해주는 이들이다. 이 ‘국민’은 따라서 자신의 판단력을 가지지 못한 ‘백지’로 간주된다. 누구든 마음대로 자신의 생각을 쓸 수 있는 ‘백지’로서 ‘국민’은 사실상 ‘백치’라고 할 수 있다. 그렇지 않은 ‘국민’은 포퓰리즘에 휘말린 ‘무지한 인민’이거나 합리적으로 대화할 능력을 상실한 ‘야만적인 짐승’으로 그려진다.
토머스 홉스가 데마고그의 선동에 쉽게 휘말리는 ‘무지한 인민’을 보호하기 위해 언론과 표현의 자유를 제한해야한다고 말했을 때, 그가 염두에 둔 ‘참주’는 인민의 지지를 등에 업은 ‘착한 권력’이기도 하다. 청문회는 이런 홉스적인 기계로서 민주주의의 한 가운데에 위치한 것처럼 보인다. 기계로서 민주주의는 선악의 판단력이 없다. 이 기계는 효율성을 목적으로 삼기 때문이다. 목표가 아닌 목적이라는 점에서 효율성은 민주주의의 존재이유처럼 비치기도 한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결과적으로 얼마나 경험적으로, 달리 말해 얼마나 계량적으로 권력의 작동을 유도할 것인지, 이 문제가 중요하게 받아들여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프레임에 따른 관점은 항상 ‘인민’을 대상화할 뿐이지 정치의 주체로 인정하지 않는다. 민주주의는 궁극적으로 인민의 통치라는 불가능한 기획을 달성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 기획이 불가능한 이유는 모두 통치자라면 누가 피치자인가라는 민주주의 내부의 논리모순 때문이다. 이런 불가능한 기획을 현실화하기 위해 자유주의는 대의민주주의라는 통치성의 이론을 제출했다. 그래서 자유주의적인 대의민주주의는 능력을 갖춘 엘리트의 통치를 인정하는 것이다.
이런 ‘간접’ 민주주의는 ‘직접’ 민주주의에 대한 배제를 전제한다. 능력을 갖추지 못한, 다른 말로 하자면 통치할 자격을 얻지 못한 이들은 통치할 수 없도록 만들어야 한다는 명분이 거부할 수 없는 원칙으로 들어서게 된다. 이 원칙을 거부했을 경우, ‘체제전복세력’으로 불리기 십상이다. 청문회는 바로 이런 통치의 능력 또는 자격을 점검한다는 대의를 가지지만, 그렇다고 강제력을 가진 것은 아니다. 청문회에서 중요시되는 것은 ‘여론’이지 제시된 사실의 진위 문제가 아니다. 그렇기에 선출된 권력인 대통령은 청문회 보고서의 채택 여부와 상관없이 지명한 후보를 임명할 수 있다. ‘협치’를 내세웠지만, 청문회는 ‘협치’의 행위라고 보기 어렵다.
공공연한 사이버 불링
흥미롭게도 이번 청문회에 등장한 새로운 현상은 정부 지지자들의 ‘행동’이었다. 휴대폰 문자를 통해 지명된 후보를 검증하는 야권 국회의원들에 대한 ‘사이버 불링’이 공공연하게 행해졌다는 점에서 이번 인사청문회의 광경은 분명 과거와 달랐다. 물론 과거에도 인사검증에서 문제가 있는 국회의원들을 낙선시키자는 시민운동이 없지 않았지만, 이번처럼 익명의 무작위성으로 이뤄진 적은 없었다. 이 상황을 어떻게 보아야할까. 지금 눈앞에 펼쳐지는 상황은 ‘무엇을 위해’라는 대의가 사라진 아노미 상태에 지나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알랭 바디우가 말하듯, 일반적 의미에서 민주주의는 하나의 국가형식일 따름이다. 이런 맥락에서 민주주의는 정치적인 것의 정점으로 지시될 때, 그 반대편에 있는 것으로 여겨지는 전체주의와 쌍을 이루게 됨으로써 의미를 획득한다. 이처럼 민주주의는 전체주의와 대립적 관계에서 정립되는 것이다. 그러나 전체주의는 민주주의의 반대라기보다 그것의 위기를 드러내는 증상에 가깝다. 전체주의는 민주주의라는 상대가 없으면 의미를 가지지 못한다.
민주주의가 하나의 국가형식으로 붙잡혀 있을 때, 전체주의는 항상 불려나와 유령처럼 그 주변을 배회하게 된다. 민주주의가 공동체의 연결에 고착돼버린다면, 정치는 폐색의 운명을 맞이할 수밖에 없다. 정치는 항상 비재현적이므로, 항상 제도로서 얼어붙은 민주주의를 빠져나간다. 민주주의라고 불리는 어떤 형식은 그러므로 정치적인 실천을 통해 남겨진 화석 같은 것이다. 전체주의는 이 화석으로 정치를 완전하게 현시하게끔 하려는 시도라고 할 수 있다. 루소가 말한 ‘일반의지’를 낱낱이 국가로 재현하고자 할 때 전체주의가 도래하는 것이다. 이념으로서 작동하는 민주주의와 국가 식으로 실현되는 민주주의를 착각해서 후자를 민주주의의 목적으로 삼는다면 그 결과는 나치즘 아니면 스탈린주의일 것이다.
그러나 이렇게 국가형식을 통해 완전한 민주주의를 달성하는 것은 실현 불가능한 야망이다. 정치는 미리 던져진 가설이고, 합법적으로 실행되는 것이 아니라 언제나 결과로서 출현하기 때문이다. 게다가, 이 결과는 정치적 사건의 성격상 검증할 수 없다. 검증할 수 없는 증거를 통해 우리는 정치의 결과를 규정할 수밖에 없다. 러시아혁명이나 광주민중항쟁이나, 남겨진 결과는 연속이 아니며, 오히려 단절에 가깝다. 동일한 방법으로 같은 사건을 되풀이할 수 없기에, 정치는 불안이자 결정불가능성이다. 이 불안과 결정불가능한 상황의 유동성에서 도약의 용기를 발휘하는 것이 바로 정치적 결단이다.
마지막 담배를 끊지 못하는 이유
정치적 주체는 결단을 전제한다는 점에서 자유의지를 가진 존재인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 정반대다. 앞서 이야기한 애연가처럼, 정치적 주체는 자유의지보다도 ‘타자의 욕망’에 자신을 기탁하는 히스테리적 주체다. 정치는 자유의지로 통제할 수 없는 미지의 영역이다. 그렇기에 정치적 주체는 끊임없이 ‘타자’에게 무엇을 원하는지 질문할 수밖에 없다. 애연가가 담배를 끊지 못하는 이유는 언제나 ‘마지막 담배’만을 자신이 결정할 수 있기 때문이다.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지 담배를 끊을 수 있다는 가설은 스스로 실현할 수 없다. 심한 흡연으로 건강을 망쳐서 죽음의 공포라는 절대적 부정성이 닥치지 않는 한 애연가는 담배를 끊지 못한다. 자크 데리다의 말처럼 잉크가 다 떨어져야 비로소 의사소통이 멈추는 것이다.
정치가 힘을 잃을 때, 그 개념들은 군사적 용어로 전락한다. 북한을 비롯한 ‘역사적 공산주의 국가’의 선군정치가 이 사실을 잘 보여준다. 정치적 힘을 ‘동원’하는 문제는 민주주의에 대립하는 것이다. 폭력의 문제는 필수불가결하거나 필요악이라기보다, 바디우의 말처럼 “폭력의 형상으로 구상된 정치”에 불과하다. 이 정치를 폐기하는 것이 바로 마르크스를 비롯한 좌파들이 주장했던 혁명의 의미였다. 오해와 달리, 좌파혁명은 폭력혁명이라기보다, 그 폭력을 종식하기 위한 ‘정치적 중의성’의 강조에 가까웠다. 폭력혁명만이 피지배자를 해방시키는 것이 아니라, 다른 정치를 꿈꾸는 사유의 실천만이 해방을 가져올 수 있다는 것이 요지다.
바디우가 밝히듯, 국가는 민주주의의 무한을 제한하기 위한 정치함수의 결과물이다. 민주주의를 요구하는 부분집합을 모두 합친 메타재현, 다시 말해서 멱집합으로 실현된 국가는 이런 의미에서 모두가 민주주의를 외치는 실제적인 상황보다 크다. 이 균열로 인해 국가는 언제나 재구성의 가능성을 내재하는 것이다. 이 국가는 자유나 평등만으로 이뤄지지 않는다. 자유와 평등은 거멀못처럼 꿰어져서 근대국가를 지탱한다. 자유의 문제를 국가로부터 개인이 얼마나 떨어져 있는지 그 ‘간격’으로 가늠해볼 수 있다면, 평등은 이렇게 만들어진 간격 내에서 개인이 작은 하나가 공평하게 존재할 수 있는 조건이다. 국가라는 거대한 하나가 아니라, 수많은 하나‘들’로 쪼개져 있는 간격을 역동적으로 재구성해나가는 것이 정치의 본질이다.
따라서 청문회가 전제하는 무한한 표현의 자유는 ‘만인의 평등’이라는 또 다른 근대적 전제와 충돌하면서 궁극적으로 방종을 초래하게 된다. 이 방종을 규제하기 위해 국가적 장치가 도입되는 것인데, 이 장치의 목적은 방종에 이를 수 있는 자유를 다시 한 번 국가라는 정치함수로 고정시키는 것이다. 이렇게 두 번째 규제된 함수를 첫 번째 규제된 함수에서 감산하는 것이 바로 민주주의의 공식이라고 할 수 있다. 민주주의라는 것은 이처럼 개인의 방종을 규제하는 정치함수를 뺀 작은 ‘1(One)'(1)들이다. 민주주의라는 대의를 위해 거대한 하나로 재현되는 것이 아니라 국가와 거리두기를 통해 만들어진 간격에 무수한 ‘1'들로 존재하게 되는 상황의 상태다. 이 ‘1'들은 무한하게 자유로운 것이 아니라 규제 내에서 자유로운 것이다. 청문회라는 명분으로 벌어지는 일련의 사태들은 ‘자유민주주의’라는 이름으로 무한하게 허용될 수 없는 개인의 자유를 증명하는 사례이기도 하다.
규제를 내면화한 존재의 가벼움
이 문제를 다시 풀어보면, 마치 담배를 끊지 못하는 애연가처럼 근대적 개인들은 어떤 규제로부터 벗어난 존재라기보다 규제를 내면화한 존재라고 볼 수 있다. 애연가가 지금 피우는 담배야말로 ‘마지막 담배’라고 믿을 수 있는 이유는 자신의 욕망이 자유의지에 따른 것이라기보다 타자의 욕망에 준거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자신의 흡연은 ‘마지막 담배’라는 결심을 정당화하는 한에서 타자로부터 허락 받는다. 청문회 역시 마찬가지다. 눈 앞에서 벌어지고 있는 무책임한 행위가 ‘국민의 알 권리’라는 타자의 욕망에 부합하는 한, 면죄부를 받는 것이다. 이때 ‘국민’은 개인의 자유의지를 규제하는 아버지의 이름이다. 국회의원이 ‘국민의 알 권리’를 위해 검증 대상자의 사생활을 폭로하는 것은 이런 논리를 통해 정당성을 획득한다.
이런 청문회의 외설성은 그 ‘국민’으로부터 국회의원들에게 가해지는 ‘문자폭탄’을 통해 적나라하게 재확인된다. ‘문자폭탄’은 온라인에서 특정 개인에게 집단적으로 행해지는 사이버 불링의 일종이다. 십대들에게 만연해 있던 문화가 이제 정치문화로 진입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공론과 숙의를 전제하는 자유민주주의의 관점에서 봐도 결코 바람직하다고 말할 수는 없다. 따라서 ‘문자폭탄’이 아니라 ‘문자행동’이라는 주장이 잘 보여주듯, ‘문자폭탄’을 보내는 당사자들 역시 자신들의 행동이 떳떳하지 않다는 사실을 인지하고 있는 셈이다. 그래서 ‘문자폭탄’이라는 부정적 표현 대신에 ‘문자행동’이라는 긍정적 표현을 사용하자고 주장하는 것이다. 그렇게 계속 구실을 발명해, ‘문자폭탄’을 보내려 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이런 사태는 ‘문자폭탄’ 역시 ‘국민의 알 권리’를 전제로 ‘사실들’만을 나열하는 청문회와 다를 것이 없다는 진실을 드러낸다. 이들에게 ‘문자폭탄’은 자신의 자유의지가 아니라, ‘예외상태’ 때문이라는 명분으로 정당하다. 다소 잘못된 행동이라고 할지라도 이 모든 것은 개인을 위한 것이 아니라 ‘국민’을 위한 것이라는 점에서 필요악이라는 논리다. 담배를 끊지 못하는 애연가에게 지금 피우는 담배가 언제나 ‘마지막 담배’인 것처럼, ‘문자폭탄’을 보내는 이들에게 지금 실행하는 사이버 불링은 언제나 ‘비상상황’에 대한 대책인 것이다. 이 허구적인 ‘마지막 담배’와 ‘예외상태’를 진심으로 믿는다는 점에서 이들의 행동은 ‘진성성’을 획득한다.
문자테러의 함의는 테러일 뿐
청문회와 ‘문자테러’는 지난 촛불의 의미를 되새겨보게 만든다. ‘시민혁명’이라는 수식어도 있지만, 당시에 벌어졌던 상황은 법의 테두리 내에서 이뤄진 ‘평화시위’였다. 시위가 평화적이어서 문제였다기보다, 그 시위가 왜 촛불로 표현되면서 평화적으로 진행됐는지 그 사실이 중요하다. 분명 경찰로 대표되는 국가 폭력은 항상 그랬듯이 청와대 앞을 지켰다. 그럼에도 경찰은 법원의 명령을 거스르지 않았다. ‘참주’로 받아들여지던 대통령의 명령보다, 법의 지시를 따른 것이다. 이 변화는 작지만 내포된 함의를 과소평가할 수 없다. 칼 슈미트의 구분법에 따르면, 독재는 위임적 독재와 주권적 독재로 나뉠 수 있다.
위임적 독재는 헌법을 수호하기 위해 일시적으로 헌법의 효력을 정지시키는 것이다. 헌법을 수호하기 위해 헌법을 위반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 이런 위임적 독재다. 한편, 주권적 독재는 헌법의 효력을 정지시키는 것을 넘어서서 새로운 헌법을 제정할 수 있게 하는 ‘비상상황’을 조성하는 것이다. 이때 새로운 헌법이란 더 많은 ‘국민’의 의지를 실현한 ‘참된 헌법’이다. 기존의 법질서를 총체적으로 뒤흔들어서 새로운 법질서를 만드는 혁명적 상황은 이런 주권적 독재를 통해 가능하다는 논리다. 물론 슈미트는 이런 헌법의 효력 정지라는 ‘예외적인 상태’를 일시적인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조르지오 아감벤이 적절하게 지적했듯이, 한국의 사례만 놓고 보더라도 이런 상태는 항상성을 가진다고 할 수 있다. 지금이야말로 헌법을 넘어선 독재가 필요한 ‘예외상태’라는 주장은 언제나 ‘국민’을 앞세우고 이뤄진다. 그러나 아감벤이 갈파하듯이, 이렇게 ‘예외상태’를 강조하면서 헌법의 원칙을 무효화하는 주장은 효과적인 지배를 위한 정치적 허구일 뿐이다.
청문회가 법 없는 아노미 상태를 드러내는 것이라면, ‘문자폭탄’은 이 아노미 상태를 ‘예외상태’로 규정하면서 헌법의 효력을 정지시키려는 기동이다. 그러나 이런 기동이 과연 ‘참된 헌법’을 제정하려는 ‘국민의 의지’를 표현하고 있는 것인지 의문이 들지 않을 수 없다. 국회의원들이든, 이에 항의하는 문재인 정부 지지자들이든, 결과적으로 기존의 헌법보다 우위에 있는 어떤 가치를 이야기하고 있지만, 정작 체제의 논리 자체를 넘어설 의지는 보여주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이들에게 ‘국민’은 편의적인 것이고 임의적인 것일 뿐이다. ‘예외상태’이기 때문에 이들은 노동자들에게, 여성들에게, 성소수자들에게 “가만있으라”고 말한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그렇게 말할 ‘예외적인 권리’는 없다는 것을 지난 촛불이 잘 보여줬다.
글·이택광
영국 셰필드대학 영문학 박사. 계간 <미래와 희망> 편집위원. 저서로 <마녀 프레임> <임박한 파국> <당신들의 대통령> 등이 있다.
(1) 철학에서 말하는 하나(one)를 뜻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