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 철학의 개념-뿌리들: 세계 2 현실성, 잠재성, 가능성

철학자 이정우의 특별연재 (2)

2017-06-30     이정우 | 철학자

세계를 바라보는 관점에는 여러 가지가 있다. ‘개체들’의 관점에서 볼 수도(철수, 영희, 저 나무, 이 건물 등등), ‘집합체들’의 관점에서 볼 수도(저 가족, 이 마을, 그 국가 등등), ‘물질들’의 관점에서 볼 수도(세포들, 분자들, 원자들 등등) 있다. 그 외에도 숱한 관점들이 존재하며, 이 관점들을 총체적으로 명료화하는 것이 존재론의 과제들 중 하나다.


이 관점들 중 하나가 ‘사건’의 관점이다. 사건의 맥락에서 세계를 논한다는 것은 즉 시간의 지평에서 논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사건의 시간은 사물의 시간과 다르다. 사물의 시간은 ‘지속’하지만, 사건의 시간은 ‘반복’한다. 하나의 건물은 시간 속에서 지속되지만, 그 건물에서의 파티는 생겨났다가 사라지고 다시 생겨난다. 즉 반복한다. 사건이란 이렇게 시간의 지평과 나타남이라는 계기, 그리고 나타남의 존재론적 지평으로서의 ‘세계’라는 계기, 시간의 연속‧불연속으로 이뤄지는 ‘반복’이라는 계기를 필수적으로 함축한다. 그래서 세계론은 사건론, 시간론과 복잡하게 얽혀 있다.

사건론, 시간론과 복잡하게 얽힌 세계론

흔히 세계는 시간에 따라 “흘러간다”고 말한다. 사실 이 “흘러간다”라는 말이 정확히 무엇을 뜻하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흐름’이라는 말은 얼핏 아무런 차이가 발생하지 않으면서 무엇인가가 공간을 움직이는 이미지로서 느껴진다. 하지만 어떤 차이도 발생하지 않는 곳에서는 그런 흐름을 지각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우리가 흐름을 지각한다는 것은 어떤 차이들이 계속 발생한다는 것을 뜻한다. 어떤 질적인 차이생성도 없는 경우에도 우리는 공간적 위치에서의 변화들을 지각할 때에만 ‘흐름’을 느낄 수 있다. 그래서 흐름이라는 개념은 일차적으로 ‘차이생성(Differentiation)’을 가리킨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여기에서 차이생성과 사건을 구별해 보자. 차이생성이라는 말은 매우 미세한 차이들의 발생에도 쓸 수 있다. 그러나 ‘사건’이라는 말은 시간이 일정한 수준으로 분절됐을 때 쓴다. 이 점에서 ‘사건’이라는 개념에는 이미 의미‧문화의 뉘앙스가 깃들어 있다. 실제 ‘사건’이라는 개념과 가장 밀접한 관련성이 있는 담론은 ‘역사’다. 결국 사건이란 차이생성의 흐름에서 도드라져 나오는 차이생성이라고 할 수 있다. 차이생성이 매우 미세하게 연속적으로 일어날 때가 바로 우리가 ‘흐름’이라고 부를 때다. 그래서 하나의 사건이란 항상 자체보다 더 작은 사건들에 대해 상대적으로 사건이라고 할 수 있다. 예컨대 물리학적 맥락에서 본다면, 우리에게 어떤 사건도 벌어지지 않고 있는 곳에서도 무수한 사건들이 벌어지고 있다. 하나의 단단한 책상 속에서도 숱한 사건들이 벌어지고 있다. 때문에 사건이란 맥락에 따라 무수한 층차(層差)에서 논할 수 있다.  

“있다”라는 일차적 표상의 현실성 
 
이 사건의 개념을 명료화하기 위해서는 양상론적 사유가 필요하다. 이는 곧 현실성, 잠재성, 가능성에 대한 논의다. 우리가 ‘세계’라는 것을 이해하고자 할 때, 그리고 세계라는 것을 단지 사물들의 집합으로 이해하는 데 그치기보다는 사건들의 장으로 이해하고자 할 때, 필수적으로 양상론적 논의가 요청된다.

“있다”라는 말을 좁게 이해할 경우 ‘현존(現存)’이라는 말을 쓸 수 있다. 어제 돌아가신 어머니는 이 세상에 없지만 자식들에게는 여전히 ‘현실성’으로서 존재한다. 그러나 그는 더 이상 현존하지는 않는다. 이보다 더 좁은 “있다”는 현전(現前)이다. 현전이란 무엇인가가 바로 지금 여기 나(인식주체)의 앞에 엄연히 존재함을 말한다. 현전은 ‘지금 여기’를 함축하지만, 현존은 ‘여기’라는 조건이 빠진다. 그리고 현실성에는 ‘지금’이라는 조건도 빠진다. 우리의 경험세계에 나타나 있는 모든 것들을 추상화해서 말할 때 ‘현실’ 또는 ‘현실성(Actuality)’이라는 말을 쓴다. 사실 ‘현전’이나 ‘현존’같은 좀 더 좁은 의미에서의 “있다”에 비해 현실성이라는 개념은 모호하다. 어디까지가 “현실적”인지는 사람마다 다른 감각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모호성을 일단 인정하고 현실성을 우리에게 직‧간접적으로 힘을 가하고 있는 모든 것(청년 실업을 비롯한 경제현실, 이명박 정부의 난맥상을 비롯한 정치현실, 대중문화의 득세를 비롯한 문화현실 등)으로 이해하자. 우리가 “있다”라는 말을 할 때 모호하나마 우리에게 일차적 표상으로 떠오르는 것은 이 현실성이다. 

그러나 “있다”라는 것 즉 세계-전체가 현실성만으로 소진되는 것은 아니다. 이런 생각을 해 보자. 내가 지금 이렇게 검은 머리를 하고 강의를 하고 있지만, “머리가 하얗게 센 이정우”를 생각할 수 있다. 그렇다면 머리가 하얗게 센 이정우는 도대체 “있는” 것일까? 반대로 생각해서, 국민학교(초등학교) 1학년인 어린이 이정우는 어떤가? 가슴에 손수건을 달고서 학교에 가던 그 이정우는 지금 “있는” 것일까? 미래의 이정우도 과거의 이정우도 그 때는 분명 있을 것이고 있었다. 그런데 지금 어린이 이정우와 노인 이정우는 존재하는 것일까? 더 나아가 소크라테스나 공자는 지금 존재하는가? 100년 후의 우리의 자손들은 지금 존재하는가? 존재하지 않는다면 우리가 그들에 대해 생각하고 이야기하는 것은 정확히 어떤 의미에서일까? 앞에서 세계-전체란 열린 개념임을 지적했지만, 이런 ‘있음’들도 모두 감안해서 사유해야 세계-전체에 대해 조금 더 풍부하게 사유할 수 있다고 할 수 있다.

이것은 ‘존재’라는 것을 시간과 양상(樣相)을 가미해서 생각하는 것이다. 생각해 보면 “어제의 나”도 간단한 문제가 아니다. 어제의 나는 있는가 없는가? 있다고 하기에는 이미 지나가버렸고 없다고 하기에는 너무나 현실적이 아닌가. “내일의 나”도 마찬가지이다. 있다고 하기도 어렵고 없다고 하기도 어렵다. 

이번에는 공간적인 예를 들어 보자. 바둑이 좋은 예를 제공해 준다. 이창호와 이세돌이 바둑을 두고 있다. 50수까지 뒀다(‘手’라는 말도 철학적으로 흥미로운 말이다. 잘 음미해 보자). 반면의 검은 돌 25개와 하얀 돌 25개는 현실적으로 존재한다. 그런데 이창호와 이세돌은 지금 현전하는 25수씩만을 보고 있는 것은 아니다. 그들은 우리의 감각적 눈에는 보이지 않지만 마음에는 보이는 그 어떤 수들을 부지런히 읽고 있다. 그 수는 객관적으로 엄존(儼存)한다. 그렇지 않다면 두 사람은 환영을 보고 있다 해야 하리라. 또 그 수들이 엄존하지 않는다면 바둑을 잘 두는 사람과 못 두는 사람의 차이가 어떻게 가능하겠는가? 한 사람이 읽는 수보다 다른 사람이 읽는 수가 (앞의 사람의 것을 포괄하면서) 더 많기 때문에, 그 사람이 더 뛰어난 기사라고 하는 것이다. 더구나 지금 두 사람은 “수 싸움”을 하고 있지 않은가? 개인적으로만 읽는 것이 아니라(그렇다면 주관적인 것일 수도 있으리라), 어디까지나 두 사람이 공통으로 수들을 읽고 있고 상대방이 수 읽는 것 자체도 읽고 있는 것이다. 잠재성이 두 사람 사이에 분명 객관적으로 존재하기에 이런 수 싸움이 가능한 것이다. 이렇게 세계는 현전, 나아가 현존‧현실성만이 아니라 잠재성 또한 포괄하고 있다. 

우리의 삶이란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 좀 더 추상적으로 말해 현실성과 잠재성의 관련성 속에서 이루어진다. 형사들은 나타난 증거들로부터 나타나지 않은 사건들을 추적해 간다. 과학자들은 경험으로 파악되는 것을 매개로 경험을 넘어서는 차원들을 탐구한다. 각종 형태의 경기들(도박 등까지도 포함해서)은 ‘수’를 읽는 것을 핵심으로 한다. 음악가는 이미 발표된 선율들 너머에서 온갖 가능한 형태의 선율들을 만들어 본다. 현실성을 근거로 해서 잠재성을 찾아가고 잠재성을 토대로 현실성을 바꾸어 나가는 것이 우리 삶의 기본 구도이며, 그래서 현실성과 잠재성은 핵심적인 존재론적 원리들 중 하나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여기에는 시간과 공간, 결정론과 자유, 진리와 오류 등등 숱한 다른 원리들이 복잡하게 얽혀 있다.  

 
 
잠재성과 가능성의 차이

그러나 잠재성과 가능성도 구분해야 한다. 일상적 용법에서 이 두 개념은 그다지 명확히 구분되지 않는다. “저 아이는 큰 잠재성이 있어”와 “저 아이는 큰 가능성이 있어”가 말하는 것은 거의 같다. 그러나 철학적 맥락에서는 두 개념이 분명하게 구분된다. ‘가능성’은 ‘상상할 수 있는 것’이라는 매우 넓은 의미를 담고 있다. 물이 아래에서 위로 흐르는 상황도 상상 가능하다는 점에서 ‘가능’하다. 그러니까 “~수도 있다”고 말하게 되는 모든 것이다. 그러나 잠재성은 현실적인(Actual) 것은 아니며 그렇다고 상상적인 것도 아닌 것, 달리 말해 어디까지나 실재적인(Real) 것이지만 현실적인 것은 아닌 무엇을 가리킨다. 한 아이의 어른이 된 상태는 아직 현실성이 아니지만, 결코 비실재적인(Non-real) 것 또한 아니다. 그것은 ‘잠재태’(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한 ‘뒤나미스’)로서 어디까지나 그 아이에게 들어 있다. 그래서 가능한 것은 단지 상상적인 것이지만, 잠재적인 것은 어디까지나 실재적인 것이다. 

앞에서 든 바둑의 예를 보자. 수라는 것은 분명 잠재한다는 것, 고수와 하수의 구분이 그래서 가능하고, 또 수 싸움도 그래서 가능하다는 것을 이야기했다. 이것은 ‘잠재성’의 문제다. 그러나 이런 상황을 생각해 보자. 큰 바둑대회의 결승전, 그것도 마지막 대국에서 A가 B에게 지고 있다. 바둑판도 대강 채워져 가고 A가 아무리 수를 읽어도 역전시킬 가능성 ― 정확히 말해 잠재성 ― 은 보이지 않는다. 그 때 A는 저 바둑판과 바둑알이 흐물흐물 액체로 변해서 바닥에 펴져버렸으면 하고 상상할 수 있다. 수를 읽는 것이 잠재성의 문제라면, 이것은 오히려 가능성의 문제다.

또 앞에서 들었던 머리가 하얗게 센 이정우와 국민학교에 다니던 이정우를 생각해 보자. 지금 내가 머리가 하얗게 세게 되는 것은 잠재성의 문제이지만 국민학교 학생으로 돌아가는 것은 가능성의 문제다. 전자는 특별한 일이 없다면 미래에 벌어질 일이지만, 후자는 실재적인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중요한 하나의 사실을 알 수 있는데, 시간이란 비대칭적이라는 것, ‘不可逆的=Irreversible’이라는 사실이다. 그래서 잠재성은 현재에서 미래로 가는 시간의 문제지만, 가능성은 현재에서 과거로 가는 문제가 된다. 기억과 상상이 통하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그러나 설사 위에서 말한 것처럼 잠재성과 가능성을 날카롭게 구분한다 해도 그 경계선이 꼭 명확한 것은 아니다. 상상적인 것으로서의 가능적인 것은 주관적인 것이다. 그러나 그 주관 자체도 결국에는 이 우주 안에 존재한다. 그런 점에서 그것은 또 다른 의미, 확장된 의미에서 객관적인 것이다. 한 인간의 기억과 상상도 이 우주에서 벌어지는 어떤 사건인 것이다. 말하자면 가능한‧상상적인 것은 인간 주관의 잠재성이다. 나아가 중요한 것은 이렇게 볼 때 인간의 인위적인 노력에 따라 주관으로서의 잠재성이 객관화될 수 있다는 점이다. 비행기의 발명 이전에 인간이 하늘을 난다는 것은 가능적‧상상적인 것이었다. 그것은 우주의 법칙에 위배되는 순전한 공상에 불과했다. 그러나 인간은 그의 주관에 존재하던 비행기를 현실화함으로써 과거에는 가능적‧상상적인 것으로 알고 있었던 것이 사실은 잠재적‧실재적인 것이었다고 말할 수 있게 됐다. 앞으로 ‘타임머신’이 발명된다면, 과거로 가는 것도 실재적인 것으로 화할 것이며 시간은 가역적인 것이 될 것이다. 이렇게 인간은 가능성과 잠재성의 경계를 허무는 존재다.

이런 맥락에서 현대 건축을 한번 생각해 보자. 건축은 기술이자 예술이며 또 상상적인 것이기도 하지만 현실적인 것이기도 하기 때문에 좋은 예가 될 것 같다. 

모더니즘 건축은 가능성의 건축

모더니즘 건축은 극히 기하학적이다. 우리가 지금 서울에서 보는 많은 건축물들이 직육면체 방식의 모더니즘 건축물들이다(건물의 모양은 어떤 단면‧맥락에서 보느냐에 따라 매우 많은 것을 뜻할 수 있다. 지금은 일단 겉모양에 초점을 맞추자). 그런데 자연 자체로 볼 때는 이런 기하학적 모양새는 쉽게 발견할 수 없다. 산도 강도 동물들의 신체도, 꽃도, 다른 그 무엇도 기하학적이지 않다. 벌집이나 거북이 등의 무늬가 그런대로 기하학적이지만 그것도 사실 비뚤비뚤하다. 자연과학의 발달은 세계의 심층에서 많은 기하학적 구조들을 발견해냈지만, 현상학적 세계에서 이런 기하학적 존재들은 거의 상상적 존재에 가깝다. 모더니즘 건축은 오늘날 우리에게 가장 친숙한 건축이지만, 사실 현실성의 건축이 아니라 가능성의 건축이라 해야 할 것이다.

모더니즘 건축은 서구의 과학과 기술이 추구해 온 기하학주의의 맥락에 정향돼 있다. 그렇기 때문에 기하학, 그것도 극히 간단한 기하학을 추구한다. 플라톤 우주론의 경우 가장 간단한 도형은 삼각형이지만 건축의 경우에는 자연스럽게 직육면체가 된다.(다른 후보로는 피라미드 같은 정사면체, 원뿔형, 원통형 등을 들 수 있다) 여기에 기계, 철골, 유리를 비롯한 다양한 현대적 장치들이 결합된다. 그러나 건축이란 미시물리학적 세계도 아니고 우주도 아닌 중간 차원(Middle dimension)에 지어진다. 중간 차원은 방금도 말했듯이 전혀 기하학적이지 않다. 그래서 산과 강을 비롯한 중간 차원의 형태들과 기하학에 입각해 지어진 모더니즘 건축물들은 심각한 충돌을 빚어낸다. 즉 현실성이 보여주는 비기하학적 형태들과 모더니즘 건축의 상상적‧가능적 형태들 사이에서 불화가 빚어지고 있는 것이다. 이는 곧 현실성과 (그것과 불연속적인) 가능성의 충돌이다.

이 상황을 극복하기 위한 몇 가지 시도들을 보자. 우선 현실성과 맞지 않는 가능성을 현실성에 강요하기보다는 현실성을 존중하는 건축이 있다. 우리의 고전 건축이라든가 요즈음의 생태건축 등이 이런 입장에 서 있다. 정지용의 건축은 그 한 예이다. 이런 건축들은 일종의 현상학적 건축들로서, 현상세계에 대한 직접적 체험의 차원을 중시한다. 건축은 어디까지나 중간차원의 문제요, 우리가 주어진 그대로의 신체를 가지고서 영위하는 영역이기 때문에 이런 흐름은 매우 중요하다. 모더니즘은 기하학적 형태들을 현상학적 세계에 강요한 것이고 이 점에서 생태건축 등은 모더니즘 건축에 대한 ‘치유’의 지향한다고 할 수 있다.

라빌레트 공원, 잠재성을 담은 최소설계

그러나 이런 치유를 지향하면서도 반드시 현실성에 초점을 맞추기보다는 잠재성에 초점을 맞추는 경우도 있다. 추미와 데리다가 설계한 라빌레트 공원이 그 한 예가 된다. 이 경우는 ‘최소 설계(Minimal design)’의 좋은 예로서, 설계자들은 최소한의 구성만 제시하고 공원의 미래를 그 자체의 잠재성이 펼쳐지도록 기다리는 방식을 썼다. 즉 공원을 어떤 것이게 하기 보다는 어떤 것으로 생성해 가게 한 것이며(“존재에서 생성으로”), 이것은 곧 그 장소가 내포하고 있는 잠재성을 존중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이와 유사하면서도 다른 경우로는 안도 다다오의 건축을 들 수 있다. 안도의 건축은 표면적으로는 전적으로 기하학적이다. 특히 곡면의 사용은 가히 천재적이다. 그럼에도 보다 심층에 있어, 즉 그 내적인 미학과 건축의 맥락에 있어 그의 작업은 동양적이고 생태적이다. 그의 작업이 ‘비판적 지역주의’의 성격을 띠고 있는 것은 이 때문일 것이다. 이 경우에는 형태학적으로는 현실성과 가능성이 충돌하지만, 좀 더 비가시적인 맥락과 미학에서는 합일하는 매우 특이한 경우라고 할 수 있다. 더구나 안도는 한국 건축의 ‘파격(破格)’의 미에 높은 평가를 보내는데, 표면적으로 본다면 그의 건축들의 ‘정제(精製)’ 미와 파격의 미가 대립적일 수도 있다는 점에서 시사적이다.

피터 아이젠만의 건축은 또 다른 양상을 보여준다. 아이젠만은 사물들 속에 숨어 있는 잠재적 형태들을 바깥으로 끌어내는데 능하다. 프랭크 게리도 유사한 작업을 한다고 볼 수 있다. 즉 사물들 속에 점선으로 그려져 있으며 유동적인 형태들을 현실성으로 이끌어내는 것이다. 예컨대 액체수정 등을 이용한 형태학적 탐구를 들 수 있다. 잠재성에서 현실성으로의 이행은 특히 리베스킨트의 시도들에서 잘 나타난다. 오늘날에는 디지털 기술이 이런 식의 탐구를 뒷받침하고 있다. 이 경우는 사물 속의 잠재적 형태들을 끌어낸다는 점에서는 객관성에 문의하는 방식이지만, 현실세계의 형태들과는 판이한 형태들을 낳게 된다. 

어떤 방식이든 이런 시도들에서 볼 수 있는 것은 현실성, 잠재성, 가능성의 복잡한 놀이들이다. 그리고 이는 건축만이 아니라 인간이 행하는 모든 영역들에서 확인된다는 점에서, 이 개념들은 가장 핵심적인 존재론적 개념들에 속한다고 할 수 있으며 또 일상어들이기도 하다는 점에서 핵심적인 개념-뿌리들이라고도 할 수 있다.   


글·이정우
1959년에 영동에서 태어나 서울대에서 공학, 미학, 철학을 공부했다. 아리스토텔레스 연구로 석사학위를, 미셸 푸코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서강대 철학과 교수를 역임했으며, 최초의 대안철학학교인 철학아카데미를 창설해 시민들을 위한 철학, 인문학 강좌를 열었다. 소운서원을 열어 연구와 후학 양성을 해오고 있으며, 최근에는 경희사이버대학교 교양학부장으로도 활동하고 있다. 최초의 대학 내 대안공간인 파이데이아 홍릉을 창설해 대학의 시민교육운동에도 앞장서고 있다. 저서로는 <소운 이정우 저작집(전5권)>, <천 하나의 고원>, <진보의 새로운 조건들>, <세계철학사 1>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