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을 바꾸려 한 영국 신좌파의 교훈
[특집] 선거, 생활정치에 대한 질문
이른바 진보 재구성의 핵심 관건이 지역정치에 있다는 것에는 어느 정도의 합의가 이루어진 듯하다. ‘풀뿌리 민주주의’로 표현되든, 아니면 ‘생활정치’로 표현되든 구체적인 삶의 경험에 기초한 민주주의의 확장만이 진보정치의 위기를 극복할 수 있다는 공감대가 형성됐다. 그리고 풀뿌리 정치는 환경과 여성의 시각을 통해 재인식되고 있다. 하지만 그러한 공감대가 곧 실천으로 드러나는 것은 아니다. 이론적 수준에서는 환경·평화·여성 등 다양한 주제의 결합이 논의되고 삶·운동·정치의 융합이 거론되지만 몇몇 예외적 사례를 제외하고 실천 속에서 진행된 풀뿌리 정치를 통한 연대를 찾아보기 힘들다.
‘동원’의 시각에 갇힌 한국 진보정당
이런 상황은 진보 정당의 이념적 지향과 실천 사이의 괴리로 드러난다. 민주노동당이든 진보신당이든 지역정치의 성적은 아직 초라하다. 여전히 진보정당의 정치활동은 선거가 주를 이루고 전국적 의제에 의해 지배된다. 각각의 지역에서 발생하는 사회적 문제를 쟁점화하지 못하는 것이다. 여전히 ‘운동’은 구체적 ‘삶’과 유리되고 ‘운동’보다는 ‘정치’가 중심이 된다. 좌파가 지역에 관심을 돌리는 이유는 삶에서 시작하는 운동을 통해 정치가 구성될 때에만 낡은 제도정치의 한계를 뛰어넘을 수 있다는 믿음일 것이다. 그러할 때에만 삶의 현장의 주인인 보통 사람이 정치의 주인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정치 개념의 확장과 급진화가 요청되는 것이다.
그럼에도 진보 정당은 여전히 구체적 삶의 현장과 풀뿌리 운동을 선거정치를 위한 동원 대상으로 바라보는 경향이 강하다. 그러한 동원이 제대로 될 리 없다. 그런 정도의 동원은 풀뿌리 ‘보수’들의 영역이기 때문이다. 지역 토호들은 바르게살기운동협의회, 새마을운동본부, 자유총연맹을 통해 생활정치를 ‘훌륭하게’ 수행하고 있지 않은가? 그렇다면 보수적 지역정치를 넘어 좌파적 지역정치를 구현하려면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일까?
아래에서 간단하게 살펴볼 1981~86년의 급진적 광역런던 시의회(GLC·Greater London Council)의 사례는 풀뿌리 지역정치를 고민하는 한국 좌파에 많은 생각할 거리를 던져준다. GLC가 완벽한 답안을 제시했기 때문이 아니다. ‘정답’을 제시하기보다는 ‘정답’은 없다는 사실, 현실의 지역정치는 몇몇 이론가와 정치인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역동적이고 갈등적이라는 사실을 우리에게 보여줬기 때문에 중요한 경험이다. GLC는 문제와 갈등이 없다고 덮어두기보다는 밖으로 드러내서 생각하고 토론할 수 있는 기회를 가지려고 노력했다.
지금부터 급진적 GLC가 드러내 보인 지역 풀뿌리 정치에 기초한 좌파 정치의 성과와 한계를 짚어보기로 하겠다.
노조와 지역, 그리고 좌파 정당
첫째, 급진적 GLC는 소수의 정치인과 활동가 그룹이 아니라 사회운동과 노동운동, 그리고 이것들의 결집된 형태로서 출현한 좌경화된 노동당의 지역 거점에 기초했다. GLC를 비롯한 좌경화된 지방정부는 노동당 정치인의 ‘결심’에 의해서 어느 날 갑자기 생겨난 것이 아니었다. 1960년대 이후 활발하게 전개된 현장 단위 노조운동·평화운동·여성해방운동 등이 지역별 노동운동의 연합조직인 노조위원회(Trades Council)와 지역 노동당을 중심으로 광범위한 네트워크를 형성했고, 이것이 급진적 지방정부를 가능하게 했다. 특히 현장 단위 노동운동은 노조의 이해관계가 아니라 사업장이 위치한 지역사회 전체의 이해를 내세우는 새로운 노동운동의 모습을 보여주었다. 공장 폐쇄와 구조조정에 맞서 싸울 때 노조는 대안적 생산계획을 제시하고, 이윤만을 추구하는 생산이 아닌 ‘사회적으로 유용한 생산’을 기치로 내세웠다. 언제나 존재할 수밖에 없는 풀뿌리 운동이 정치적 힘으로 전화하는 데는 오랜 시간과 인내가 필요했다.
둘째, 앞에서 언급한 사회적 토대는 더 넓게 확장돼야 했다. 관료사회의 벽, 중앙정부의 압박, 거대한 시장의 힘에 맞서 사회주의적 정책을 추진하는 데에서 관건이 되는 것은 제도정치에서의 민주적 절차를 넘어선 급진적 민주주의였다. 보통의 런던 시민이 스스로 조직화하고 자신의 요구를 정식화할 수 있을 때에만 기득권 세력의 저항에 맞설 수 있었다. 민주주의는 시의회 또는 의회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공장과 지역 공동체에서 실현돼야만 했다.
이러한 시도의 대표적 사례가 정부의 도크랜즈(Docklands) 개발계획에 맞선 ‘민중계획’(Popular Planning)이었다. 상업적 기준에 따르면 개발자와 투기자는 도시지역의 재개발을 원하며, 특히 지역 주민의 필요나 선호에 대한 적절한 고려 없이 지역공동체를 사무지역, 고급주택, 호텔, 사적 레저시설 등으로 전환하기를 원한다. 그곳에는 지역 주민의 경제적·사회적 협력의 토대가 되는 끈끈한 공동체적 네트워크가 존재한다. 이러한 공동체적 유대는 상업적 재개발 계획에 의해 파괴되고 있었다. 주민들은 자신의 필요와 상업적 재개발 계획의 모순을 충분히 인식하고 있었다. 동시에 자신들의 사회적·경제적 필요에 부합하려면 일치된 행동에 나서야 한다는 것, 그들의 필요와 충돌하는 특정한 개발계획에 저항해야 한다는 것을 깨닫고 있었다. 하지만 그들의 저항은 정책 결정 내용과 절차에 대한 제한된 경험과 지식으로 인해 방어적 투쟁을 넘어서지 못했다. GLC는 바로 이 지점에 개입했다. GLC가 가지고 있던 권한을 통해 캠페인과 지방단체를 지원할 수 있었다. 이것은 매우 제한된 권한이었지만 지역 주민의 실천적·암묵적 지식이 대안계획으로 발전할 수 있는 전체적인 전략에 대한 방향과 자원·정보를 제공했다. 비록 대처 정부의 일방적 묵살로 실현되지는 못했지만 도크랜즈의 민중계획은 좌파적 지역정치가 어떤 방향으로 나아가야 하는지를 보여주었다. 그것은 평범한 시민에게 정보와 자원을 급진적으로 재분배함으로써 관료적 국가와 독점적 시장에 맞설 수 있게 도와주었다. 같은 이유에서 지역 주민이 스스로 정치화 는 과정이 없었다면 포르투알레그레의 참여예산제는 보수파가 지배하는 지방의회에 막혀 실현될 수 없었을 것이다.
셋째, 급진적 GLC는 참여적 민주주의 실현이 장기적 계획, 특히 산업정책과 노동정책 없이는 불가능하다는 점을 강조했다. 민주주의는 계획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어야 했다. 계획은 참여적 민주주의와 결합돼야 했다.
상업적 개발 맞선 참여형 대안 수립
따라서 급진적 GLC의 전략은 중장기적 전략 수립을 참여민주주의와 결합하는 것이었다. 보통 사람들의 일상에서 생겨나는 실천적 지식이 모이고 정책에 반영되는 개입이 필요했다는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GLC는 각종 정보 네트워크와 지역 정보센터 등을 재정적으로 지원했다. GLC는 6개 기술네트워크(Technology Networks)를 만들었다. 기술네트워크는 지역에 있는 작업장과 공동체를 기술전문대학과 연결했다. 보통 시민의 아이디어가 전문적 기술자의 지식과 결합돼 인간을 위한 실용적 기술을 토론하고 개발하는 장을 마련하려 했다.
급진적 GLC가 공공정책을 수립하는 데 역점을 두었던 것은 제도화된 차별의 벽을 허무는 것이었다. 노동에 대한 협소한 노동자주의적 시각(남성중심주의적 시각)을 극복하기 위해 육아와 가사노동에 대한 대안적 정책을 제시하고, 여성의 고용상 불이익을 줄일 수 있는 정책, 탁아시설 확대, 가사 서비스를 여성의 창업과 연결하거나 지방자치단체 수준의 서비스를 제공하는 등 혁신적 사회정책을 도입하려 했다. 가사노동의 불평등한 분업 구조를 극복하기 위해 남성성과 여성성의 고정된 이미지를 비판했으며, 장기적으로 노동시간 단축, 일자리 나누기를 통한 가사·육아 분담의 전망을 제시했다. 또한 제도화된 인종주의, 이성애주의에 맞선 투쟁을 조직적으로 지원했다.
나아가 노동자와 지역 주민의 참여를 높이고 제도화된 차별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사적 경제에 개입할 수밖에 없었다. 한편으로 GLC는 거대한 국가기구로서의 구매력을 통해 사적 경제 영역에 개입하려 했다(7억 파운드 규모로 2만 개의 기업과 계약). ‘원칙적으로’ GLC와 계약을 맺기 위해서 해당 기업은 인종적·성적 차별 금지, 건강과 안전, 장애인 고용 의무 등을 준수해야만 했다. 다른 한편으로 GLC는 투자은행 성격의 광역 런던시 기업위원회(Greater London Enterprise Board)를 설립하고 사적 대기업에 대한 개입을 시도했다.
시장 안에서 시장에 대항하여
넷째, 또 하나 GLC의 독특한 경험이 주는 교훈은 대중이 현존 질서 내에 살고 있으므로 사회주의적 계획이 그 외부에서 시작될 수 없다는 사실에 대한 인식이었다. 이는 ‘시장 안에서 시장에 대항하여’, ‘국가 안에서 국가에 대항하여’로 표현됐다. ‘내부에서 싸운다’는 전략은 언제나 긴장을 피할 수 없었다. 항상 제도적 장애와 관습적 편견에 직면했고 현실론에 빠질 위험에 노출됐기 때문이다. 또, ‘싸운다’는 전략은 ‘내부로부터 저항하는’ 전략의 어려움 때문에 현존 질서 내 맹아적 대항 헤게모니를 구성하려는 구체적인 실천보다는 이상화된 사회 조건에 대한 추상적 상을 제시하는 것으로 축소되는 경향이 있었다. 의도와 현실 사이, 또는 사회주의적 미래와 자본주의적 현실 사이에 격차가 감지될 때 가장 손쉬운 선택은 규범과 당위의 세계로 도피하는 것이다. 사회주의적 원칙은 옳았으나 현실이 문제였다는 상투적이고 간편한 핑곗거리는 언제나 준비돼 있다. 급진적 GLC의 미덕은 규범적 당위에 머물지 않고 ‘현실’로 뛰어들었다는 데 있었다. 원칙적 좌파에게는 탐탁지 않은 선택이었을 것이다. 그들은 자본의 힘을 과소평가하고 처음부터 불가능한 시도를 한다고 비판했다. 그렇다면 그들의 선택은? 자본주의의 착취적 성격을 과학적으로 논증하는 것 또는 도덕적으로 비판하는 것에 만족해야 할까?
물론 시장의 힘을 무시할 수 없었다. 종종 상업적 기준의 지배 때문에 사회적 기준은 뒤로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처음 의도와는 상관없이 광역 런던시 기업위원회는 상업적 투자 조건을 제시할 수밖에 없었는데, 그것은 ‘2년 내에 상업적 생존 능력을 회복’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기업위원회 활동 자체가 혼란스럽고 그 자체로 모순적이었다는 비판이 제기됐다.
하지만 GLC는 지방정부가 가지는 이러한 한계를 수세적으로 바라보지 않았다. 전국 정치에서 사회주의적 지방정부가 어떤 역할을 할 수 있을지 공세적으로 생각하기 시작했다. 자본과 국가의 힘이 거대하지만, 그것에 도전하는 작은 시도를 통해 미래의 사회주의 정부가 무엇을 할 수 있고,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예시적으로 보여줄 수 있다고 생각했다. 이러한 예시적 실천을 통해 권력을 장악한 신우파를 비판할 수 있는 근거를 마련할 수 있었다. 한발 더 나아가 지방정부는 사회적 관계가 형성·유지되는 대중 참여 정치가 작동할 수 있는 핵심 장소여야만 했다. 전국적인 수준에서 변화가 없다면 사회 변혁은 불가능할지도 모르지만, 지방 수준에서 정치제도의 민주화와 시장의 사회화가 진전되지 않는다면 사회주의적 변혁은 요원한 것이었다. 지방정부의 실험은 실현 가능한 사회주의 정책의 훌륭한 사례를 증명하는 것과 평범한 대중의 상상력과 에너지를 평등한 사회를 향해 발전시키는 것이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지방 수준의 실험은 상대적으로 대중의 상상력과 에너지에 열려 있다는 것이다. GLC 활동가들에게 사회주의적 지방정부는 새로운 사회주의 모델의 ‘실험실’이었다.
GLC의 사회주의 프로젝트에서 뚜렷이 구분되는 요인은 평범한 대중의 실천적 지식과 열정적 에너지에 대한 인식이었다. 그렇지만 자발적 행동이나 사회운동은 고정된 정체성이 있지 않았기 때문에 대중 권력의 토대 자체는 사회주의 정치를 설명할 수 있는 독립변수로서 ‘전제’될 수 없었다. 그런 행동이나 운동은 시장과 국가를 변혁하는 다양한 투쟁 과정을 통해서 형성·변형될 수밖에 없었다. 다시 말하면 대중의 실천적 지식과 에너지는 지속적인 실천 속에서 발전돼야만 했다.
투쟁과 실천이 언제나 아름다운 모습을 띠는 것은 아니었다. 노동자운동 내부에 이해관계의 충돌이 있었다. 예를 들어 평등기회 정책에 대해 남성과 여성 노동자 사이에 이해가 엇갈렸다. 생산자(노동자)와 소비자의 이익 사이에는 더 깊은 긴장이 있었다. 이러한 이해의 충돌과 긴장은 공동의 실천을 통해 토론·조정되어야 했다. 그리고 토론과 조정의 과정은 실천에 참여하는 개개 행위자를 교육할 수 있었다.
여기서 GLC의 경험이 우리에게 보여준 것은 서로 다른 이해와 목소리가 존재한다는 것은 극복해야 할 우려의 요인이 아니라는 점이다. 오히려 이런 다양성을 단 하나의 목소리로 번역하려는 시도는 권위주의적 정치로 귀결될 수 있기 때문에 위험했다. 문제는 동질성의 환상이다. 사회주의는 동질적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 단일한 목표를 향해 전진하는 따위의 정치 전략이 아니다. 사회주의는 이해관계의 상충이 존재한다는 사실에서 출발해야 한다. ‘다름’은 부정되거나 극복되어야 할 것이 아니라 ‘조정되어야’ 할 뿐이다. 그러나 ‘다름’이 인식되고 토론되고 조정되려면 공통 지반을 찾는 것이 중요했다. 그 공통의 지반은 현실의 개입과 실천에서만 만들어질 수 있는 것이었다. 차이와 다름은 사회주의적 정치의 실현을 어렵게 하는 곤란이지만, 바로 그 곤란에서 민주적 사회주의로 향할 수 있는 에너지가 발생한다. ‘곤란’을 ‘에너지’로 전환할 수 있는 공통의 실천 기회를 제도적으로 지원하고 그것을 통해 운동의 네트워크를 형성하는 것이 GLC의 역할이었다.
내부의 차이, 조정을 위한 다양성
이 문제에 대해 GLC가 정답을 제시한 것은 아니다. 민주적 사회주의를 지향했던 GLC조차 종종 공동체 내부의 풀뿌리 운동에는 다양한 요구에 미리 정해진 정답을 강요하는 관료적 권위로 비쳤다. 도크랜즈 ‘민중계획’ 수립 과정에서 몇몇 지역 활동가는 GLC의 노선에도 불구하고 지역 주민보다 전문가들이 우위에 있었음을 지적했다. GLC의 경험은 이런 위험을 회피할 수는 없으며, 긍정적 긴장으로 발전돼야 한다는 사실을 보여주었다. GLC는 상충되는 이해관계를 미리 결정된 방향으로 몰아가려 하지 않았다. 미리 만들어진 틀 안에 끼워 맞춤으로써 상실될 수 있는 토론과 자발성의 에너지를 최대한 보존하려 했다. 대중의 창조성은 필연적인 ‘잡음과 혼란’을 동반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 GLC의 인식이었다. 혼란과 잡음은 대중이 의견을 교환하고 토론하고 서로 경청하는 ‘학습 과정’을 구성한다.
학습 과정의 잡음과 혼란이 곧바로 서로 다른 이해의 조정을 위한 정교한 계획 같은 것이 불필요하다는 의미를 내포하는 것은 아니다. GLC는 ‘런던 개발계획’, ‘런던 산업전략’, ‘런던 노동계획’을 제시했다. 그러나 GLC는 그 계획이 완벽한 청사진이 되어서는 안 되고, 항상 토론과 해석의 여지를 남겨두어야 한다는 것을 알았다. 서로 다른 해석은 민주적으로 토론되어야 하고 이러한 토론 자체가 창조적 변혁을 위한 에너지가 만들어지는 장소인 것이다. 이런 창조적 과정은 대중이 경제 환경에 대해 더 많은 것을 알게 되고, 미래의 투쟁을 위해 필요한 지식을 갖추게 한다.
다시 처음의 문제로 돌아가보자. 2010년 한국의 좌파에 풀뿌리 지역정치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진보의 재구성에서 풀뿌리 지역정치는 어떤 의미를 갖는가? 런던의 경험을 통해 우리 현실을 되돌아보기 전에 한국 좌파의 상태를 진단하는 것이 필요하다. 우선 확인해야 할 것은 한국의 좌파가 단기적 시야에서 대항 헤게모니 전략을 실현하고 의미 있는 정치 세력으로 등장할 가능성은 낮다는 사실이다. 현재 조직화된 정치 세력인 진보 정당(민주노동당과 진보신당)은 보수파가 주도하는(그리고 자유주의자들이 조연 역할을 하는) 정치적 무대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보수파가 주도하는, 그래서 그들이 월등한 힘의 우위를 점한 정치적 장에서 그들의 논리만을 따라 경쟁한다. 상대적으로 왜소한 몸집의 정치 세력(사노련·사노준·사회당)은 보수적 정치질서의 게임 룰 자체를 탓하며 스스로 현실정치에서 고립되는 길을 가고 있다. 진보 정당과 직접적 관계를 가지지 않는 시민운동도 정치권에 압력을 행사하는 로비 집단의 성격이 강하고 그에 따라 진보좌파 담론을 주도할 역량을 가지고 있지 못하다. 대개의 경우 자유주의 정당과 진보 정당 사이에서 모호한 입장을 취하고 있다. 그리고 지금까지 진보 정당의 사회적 토대였던 노동조합운동은 약화돼 정치적 성격을 급속히 상실하고 있다. 이런 조건에서 풀뿌리 사회운동과 공동체 운동은 정당과 거대 시민운동단체 모두로부터 거리를 두려 한다. 한편으로 운동의 자율성을 주장하지만 바로 그 자율성에 의해 고통받는다. 자율적 운동이 발전하고 성장할 수 있는 사회적 조건을 형성하려면 정치적 개입이 필요하지만, 풀뿌리 운동은 고립적·분산적이어서 정치적 행동을 취하기 어렵다. 그들이 가진 에너지는 많은 경우 자족적 공동체를 넘어서 발현되지 못하고, 제도정치의 장에서는 자신의 가치와 부합되지 않는 자유주의 정당 지지로 귀결된다.
이런 조건에서 진보좌파의 헤게모니 구성 전략은 중·장기적이어야 한다. 단기적 전략에 치중한다는 것은 곧 아무런 준비도 없이 적의 영역으로 들어가는 것과 다름없다. 곧 선거 공학적 정치, 미디어 중심의 정치, 인물 중심의 정치에 치중할 수밖에 없다. 결국 진보 정치의 의미를 상실할 것이다. 이러한 자기부정, 자기파괴의 길을 가지 않으려면 중·장기적 전략이 필요하다. 구체적 내용을 제시하기보다는 중·장기적 전략을 찾아가는 과정에서 견지해야 할 두 가지 원칙에 대해 얘기해보겠다.
계급정치 중심 패러다임 벗어나야
첫째, 계급정치 중심의 패러다임을 벗어나야 한다. 하지만 계급정치 패러다임을 벗어나는 것이 계급정치의 중요성을 포기하는 것도, 자본주의에 대한 급진적 비판을 포기하는 것이어서도 안 된다. 다양한 사회계급과 사회세력의 필요(Needs)를 충족하지 못하는 자본주의적 시장경제와 그것과 결합된 관료적 국가에 대한 급진적 비판을 제기해야 한다. 런던이 보여주었던 것처럼 지역정치의 중요한 쟁점은 주택, 대중교통, 교육, 보건의료, 에너지, 상하수도 등 ‘집합적 소비’를 둘러싸고 형성된다. 이러한 영역은 중립적 지대가 아니라 정치투쟁의 공간이며 다양한 풀뿌리 사회운동이 발생하는 공간이다.
둘째, 자본주의적 시장경제와 관료적 국가에 대한 급진적 비판을 수행하려면 한편으로 제도정치의 게임 규칙을 따르면서도 그것을 넘어서는 힘을 제도 바깥의 운동정치에서 끌어와야 한다. 런던에서는 조직화된 정치 개입 이전에 이미 수많은 행동그룹과 정보 네트워크가 다양한 쟁점을 둘러싸고 출현하고 움직이고 있었다. 신도시좌파(New Urban Left)라고 부르는 활동가 그룹이 지역정치에 적극 참여했고, 이들에 의해 정당정치(특히 노동당) 또한 좌경화됐다. 우리 현실에서 좌파와 우파의 고정된 기준을 걷어낸다면 지역에 존재하는 수많은 대안적 삶을 시도하는 운동들은 급진 정치의 풀뿌리가 될 수 있다. 런던의 경험에서 확인된 것처럼 좌파 정당은 당원 수의 확장과 직접적 영향력 확대가 아니라 대중에게 자원과 정보를 제공함으로써 그들 스스로 정치화하는 것을 가능하게 할 때 튼튼한 뿌리를 갖게 된다는 사실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현장서 검증받고 길게 보라
우리가 지역정치에 관심을 가지는 이유는 ‘집합적 소비’를 둘러싼 사회적 투쟁이 전개되는 곳, 제도정치를 넘어선 풀뿌리 참여정치가 출발하고 실현되는 곳이 지역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투쟁에서 축적된 정치적 힘이 전국적 정치에서 시장을 사회적으로 통제하고 국가를 급진적으로 민주화하는 장기적 전략의 기초를 형성한다. 물론 그것만으로 모든 것이 해결되지 않는다는 것을 안다. 그래서 출발점일 뿐이다. 이런 의미에서 진보 정당의 지역 기초조직은 다양한 풀뿌리 운동이 소통하고 교류하는 지역 거점, 네트워크의 중심 역할을 해야 한다. 이 과정에서 풀뿌리 운동은 반드시 당적 질서에 편입될 필요가 없으며, 당 조직과 운동 조직 사이에는 항상 상호 비판적 긴장관계를 유지해야 한다. 이것은 배타적 긴장이 아닌 ‘생산적’ 긴장이어야 한다. 런던의 노동조합위원회에서 그러했던 것처럼 이미 조직화된 노동조합의 지역조직은 이러한 소통과 연대에 일조함으로써 작업장 중심의 정치를 넘어 지역정치에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해야 한다. 진보 정당은 선거공학에 초점을 맞추는 상층 중심의 협상이 아닌 풀뿌리 지역정치의 구체적 경험을 토대로 한 상호 이해와 소통의 장을 통해 연대를 이루려 노력해야 한다. 지역이라는 ‘현장’을 갖지 않을 때 좌파는 이념만을 좇는 소수 집단의 낙인을 벗지 못할 것이다. 지역에서의 ‘실천’을 통해 소통하지 않는 한 좌파는 그 내부의 이념적 차이를 한 치도 줄일 수 없을 것이다. 검증받을 기회가 없기 때문이다. 결국 연대는 선거 때 지역 나눠먹기에 그치고 말 것이다. 이제 몇몇 스타 정치인에 의지하는 진보 정당은 존재 의미가 없다는 것을 깨달아야 할 때다. 그건 이미 진보 정당이 아니다. 아직 늦지 않았다. 그리고 늦었다고 생각할 때가 가장 빠른 때이다.
글•서영표
성공회대 민주주의연구소 연구교수. 지역정치와 생태사회주의에 관심을 가지고 있다. 최근에는 일상생활의 상품화·금융화가 불러온 주체성의 변화에 대해 비판적 연구를 하고 있다.
[박스기사] 영국 GLC의 약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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런던의 지방정부는 1888년 ‘지방정부법’에 의거해 설립된 런던카운티의회(London County Council)에서 시작된다. 이후 1963년 옛 런던 외곽까지 포괄하는 지방정부인 광역런던시의회(Greater London Council)가 설립된다. 이것은 1986년 대처의 신우파 정부가 지방정부를 근거로 한 노동당 좌파의 저항을 무력화하기 위해 대도시 의회를 폐지할 때까지 존속한다. 토니 블레어의 신노동당 정부는 2000년부터 런던에 시장(Mayor) 제도를 도입했지만 권한은 시의회 때보다 대폭 축소됐다.
대처가 당내에서조차 반발이 심했던 무리한 조치로 대도시 의회를 폐지한 것은 그만큼 지방정부 수준의 신좌파적 사회주의의 잠재력이 컸다는 것을 방증한다. 사회복지의 직접적 전달자 성격이 강한 영국의 지방정부는 주택·교통·의료·교육·전기 등 ‘집합적 소비’, 그리고 도시개발 계획에 개입할 수 있었다. 신좌파가 장악한 지방정부들(런던만이 아니었다)은 이러한 쟁점에서 사회민주주의적 구좌파의 관료적 복지를 비판하는 동시에 신우파 정부의 시장자유주의에 저항했다. 더 많은 민주주의를 통한 공공성의 재정의를 시도했다. 참여민주주의적 계획을 통해 시장만능주의에 맞섰던 것이다.
런던에 사회주의적 지방정부가 존재한 기간은 1981~86년이다. 당시 런던노동당을 이끌던 사람은 ‘붉은 켄’이란 별명이 붙은 켄 리빙스턴이었다. 그를 중심으로 결집한 신좌파 지방의회 의원들과 활동가들은 대중교통 요금 인하, 임대주택 강화, 성적 차별과 인종주의 반대, 노동자 협동조합 기업에 대한 지원, 사적 기업에 대한 개입 등 다양한 영역에서 민주적 사회주의 정책을 추진한다. 이러한 시도는 포르투알레그레의 참여예산제 등 다양한 실험에 영감을 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