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착한 여자’를 바라거든 낙태여성을 모욕하라?

2010-04-09     사빈 랑베르

 지난 1월 21일, 프랑스 공영 TV 채널 <프랑스 5>는 ‘보육’ 프로그램에서 무마취 소파수술을 받았다는 한 여성의 흥분된 진술을 방영했다. 파리 외곽에 거주하는 25살이 채 안 된 이 여성이 언급한 것은 40년 전에 있었을 법한 낙태수술 얘기가 아니다. 그녀는 눈물을 글썽이며, 낙태수술을 받기 위해 어렵게 수술 약속을 잡은 것부터 병원 관계자들이 끊임없이 오가는 통로 한복판에 설치된 수술대 위에 오르기까지, 자신이 겪은 전 과정을 상세히 털어놨다. 그녀는 맨정신으로, 즉 마취 없이 소파수술을 받았다. 그녀가 말하는 동안 놀라움을 금치 못해 연방 “믿을 수 없네요!”를 난발하던 앵커가 패널로 나온 산부인과 의사에게 “어떻게 이런 상황이 아직까지 프랑스에서 발생할 수 있느냐”고 묻자, 의사는 “낙태를 결심한 여성에게 고통과 모욕을 주려는 일부 의사들이 있다”며 개탄했다. 

 무마취 소파수술 “여기가 프랑스?
 물론 무마취 소파수술이 성행하진 않는다. 적어도 사람들은 그러길 바란다. 바늘로 뜨개질하던 시대와 패혈증에 시달리던 시대를 벗어난 프랑스에서, 의사가 초음파로 태아를 보여주며 얼굴을 찡그린 채 경멸조로 “잘 처신하지 않고 어쩌다가 임신까지 하게 되었느냐”고 묻는다면 어떻게 생각해야 할까? 또 낙태수술 방법에 대해 어떻게 생각해야 할까?  우리가 간혹 듣는 말이지만, 의사들이 수술 대신 진일보한 방법이라며 여성에게 제안하는 약물시술은 병상이 부족한 요즘 같은 시기에는 “병상 회전율을 가로막는 장애물을 제거”하는 수단이 될 수 있다. 여컨대 약물시술은 성스러운 장소(병원)에서 낙태 여성을 내쫓고, 순결한 사원(병원)의 병상을 마비시키는 몰지각한 여성을 청소하는 수단이다. 즉, 유명 산부인과 전문의들이 좀더 조용한 상태에서 종양수술이나 불임수술을 원하는 용기 있는 여성에게 난자 이식수술을 할 수 있게 하는 수단인 것이다. 여하튼, 이런 수술이 단순한 흡입 낙태시술보다는 수익이 낫고 보람도 더 있기 때문이다. 

낙태는 피임과 마찬가지로 ‘평범한 여성들의 일’로 인식되고 있다. 여성이 화장실 문 뒤에서 실시한 자가 임신 테스트에서 양성반응을 보일 때, 그곳에서 일어나는 일들은 전적으로 그녀의 몫이다. 물론 여성의 책임이 가장 크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하나같이 그들이 선택한 일이고 그들의 몸이니 그게 당연하다고 여길 것이다. 요컨대 그들이 원해서 저지른 일이니, 뒤처리도 알아서 하라는 식이다. 이들의 ‘사적인’ 관심사는 오직 이국적이고 전복적인 모호한 성(性)에 있는 것 같다. 이들은 여성이 최신 유행하는 섹스토이를 가지고 장난치기보다는 화장실 청소와 육아에 시간을 더 많이 할애하고 박봉에 힘들게 일하지만 별로 개의치 않는다.
여성의 삶은 글래머이지 않고 매력적이지 않으면 세간의 관심을 끌지 못한다. 낙태는 그런 여성의 주요 특징 중 하나가 아니기 때문에, 대부분 낙태반대운동가의 손에 맡긴 채 방치되어 있다. 낙태반대운동가는 낙태 문제를 쥐락펴락할 수 있어 신이 나 있다. 프랑스에서 낙태반대운동가는 그리 많지 않지만(스페인과 미국, 라틴아메리카에서는 종교적인 이유로 그 수가 훨씬 많다), 이들의 담론은 영역을 넓혀가고 있다. 낙태반대운동가를 곱게 보는 언론은 매일같이 이들에게 도움을 주고 있다. 이런 언론의 도움을 받은 낙태반대운동가는 나약한 여성의 정신을 어두침침한 구석으로 밀어넣어 여성을 격리시킬 현대적 도구 개발에 나서고 있다. 이런 호의적인 분위기를 틈타, 방문자 수가 증가하는 자신들의 웹사이트를 통해 낙태시술 절차에 대해 ‘SOS’ 신호를 보내는 여성에게 정교한 반대 답변을 해준다. 우리가 이 단체들을 단순히 낙태반대 계몽가 집단으로 인식할 수 없는 대목이다. 낙태반대운동가들은 뻔뻔스러운 거짓말과 충격적인 슬로건 혹은 불법적인 선동을 조금씩 그만뒀다. 그래서 이들의 웹사이트는 갈수록 진짜 보건복지부 산하 사이트로 착각할 만큼 닮아갔다. 대규모로 ‘전국 전화상담 센터’, ‘녹색전화번호’ 같은 콜센터와 영어권 대학 연구자료로 사이트를 보강해, 실질적인 관록을 쌓고 있다.
낙태반대운동가들은 손쉽게 ‘심리적 장애’ 영역에 진입했다. 특히 낙태시술을 받은 모든 여성이 걸린다는 ‘낙태후 증후군’을 한껏 이용했다. 이들은 낙태시술을 선택한 여성을 온갖 위험에 노출된 생생한 폐허의 벌판처럼 묘사했다. 예를 들어 낙태시술이 알코올중독과 자살, 가난, 고독, 실직을 부추긴다고 했다. 이런 참담한 묘사는 일반적으로 ‘모성 욕망’에 대한 위대한 서정성을 고취하고, 여성이 낙태 수술대에서 뛰쳐나오는 데 영향을 주기도 한다. 이런 낙태반대운동가들의 담론은 ’모성’을 여성의 선택처럼 묘사하는 것이 아니라, 선택의 여지가 없는 힘처럼 묘사한다.
특히 낙태반대 이론가들은 여성의 숭고한 출산율을 다룬 기사까지 정기적으로 들이대면서, 낙태를 여성의 본성에 남기는 씻을 수 없는 수치스러운 상처, 실패한 여성의 삶처럼 묘사한다.  감히 여성의 본성과 ‘여성의 본능’을 거스르고 낙태를 선택한 여성은 자신의 처벌을 완벽하게 내면화한 것처럼 보인다. 그래서 이 여성은 상상 속의 아기가 무럭무럭 자라 생일을 맞는 악몽을 꾸고, 무거운 죄책감, 불안, 고독, 수치에 시달리게 된다. 한편 이런 고통이나 회한을 느끼지 못하는 여성은 비정상적인 여성, 냉혹한 여성 혹은 정신병자 취급을 받고 싶지 않으면 숨죽이고 살아야 한다.
낙태에 대한 물리적 접근이 중요한 문제인 것은 맞지만, 그렇다고 낙태에 대한 위협이 낙태 대기 기한이나 최근 문 닫은 낙태 클리닉 리스트를 설명해주진 못한다. 직접적이기보다는 간접적인 방식으로 확산되는 낙태에 대한 위협은 다양한 요인을 배양하는 둥지가 되고, 이런 요인은 사적·정치적 혹은 ‘공공의’ 요인들로 갈려 마치 갈리아 마을의 대담한 주민들처럼 서로 싸운다. 예를 들어 프랑스 난민 및 무국적자 보호국(OFPRA)은 “여성 강간 및 폭력은 ‘그녀들의 사적인 삶’(1)의 문제이기 때문에 난민 신청에 타당한 사유가 될 수 없다”고 주장한다.

사랑은 사회적 관계이자 권력관계
요컨대 이런 이분법이 언제나 여성을 본성과 가족의 영역 안에 굳게 가둠으로써, 여성을 남성보다 ‘사회성이 뒤떨어진’ 존재로 만들어 역사의 장에서 몰아내고, 구체적이고 암시적인 법으로 여성을 복종시켰다. 이런 구분 때문에 사람들은 폭행당한 모든 여성에게 그 책임을 전가하거나 저조한 가사분담률 앞에서 시큰둥한 반응을 보인다.
종종 빗자루를 거의 잡지 않는 사람들의 조롱거리가 되는 가사분담은 지엽적인 문제라기보다는 오히려 남녀 관계에 관한 문제다. 연인들은 “사랑이란 사회적 관계가 전혀 아니다”라고 말하겠지만, 설령 남녀가 따로따로 조화로운 존재가 될 수 있다 해도, 남녀 관계도 사회적 관계이자 남녀 간 권력관계의 산물이기 때문이다. 프랑스 여성학자 콜레트 기요맹은 우스갯소리로, 만약 남녀 관계가 슬그머니 정신 상태를 바꿔서 될 일이면 “사장과 매니저한테 공장 업무나 타이핑 치는 법을 교육해, 이들의 정신 상태를 뜯어고치겠다는 생각”이라고 말했다. 그래야 “기분 좋은 사회”가 된다는 것이다.(2) 의사가 제멋대로, 그날 기분에 따라 수술대 위에 있는 여성 환자를 마취 없이 수술하겠다고 결정해도 어떤 처벌을 받지 않는 것은 바로 이런 이분법(의사가 환자의 정신 상태를 뜯어고치겠다는-역자) 때문이다.

글•사빈 랑베르 Sabin Lambert
사회학 박사과정

번역•조은섭 chosub@ilemonde.com

<각주>
(1) Bugbrother.net에 소개된 장마크 마나크의 기사 ‘난민 여성의 강간 문제는 사적인 삶의 문제다’ 참조, 2009년 12월 11일.
(2) 콜레트 기요맹, <섹스, 인종과 권력의 관행, 본성에 대한 생각>, Ed. Indigo et Côté femmes, 파리, 1992, p.2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