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경제·환경, 3중 위기의 해부

2017-07-31     라즈미그 크쉐양 | 사회학자

10년 전 1929년 이후 가장 심각한 금융위기가 발생했다. 이로 인해 금융기관들은 자신들의 방식을 반성했지만, 여전히 그 관행은 남아있다. 금융위기는 정치권에도 대중들의 불신을 불러일으켰다. 또 여기에 한 가지 위협이 추가됐다. 지구촌을 위협하는 환경문제가 바로 그것이다. 이 3가지 위기를, 대체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

 
역사학자 라인하르트 코젤렉이 말했듯, 위기라는 감정은 현대인의 삶에 늘 함께하고 있다.(1) 기술의 변화나 경제 사이클, 문화의 변천으로 우리는 늘 새로움의 연속에 살고, 그래서 유행에 뒤처져 있는 느낌이 든다. 하지만 위기는 현실이 되고, 심지어 여러 가지 위기가 동시다발적으로 닥치기도 한다. 바로 현시대가 그렇다. 정치적, 경제적 그리고 환경적으로 복잡하게 얽힌 위기의 시대인 것이다. 이 세 가지 요소는 어떻게 작용하는가? 지난 수십 년간 사상가와 운동비평가들은 이 난제를 풀기 위해 고심했다. 
 
정치적 위기를 논하기 위한 세 가지 논쟁
 
우선, 현재 당면한 정치적 위기에 대해 살펴보자. 정치적 위기를 논할 땐 주로 세 가지 논쟁에 대해 말한다. 첫 번째 논쟁은 오늘날의 위기가 탐욕과 부패로 점철된 엘리트들에 대한 긴장인지 아니면 대의민주주의 제도에 대한 보편적인 불신, 즉 선거 때마다 나타나는 높은 기권율과 극우파의 부상 같은 ‘대표성의 위기’인지 고찰해 보는 것이다. 스페인 급진좌파 정당인 ‘포데모스’의 공동 창설자인 이니고 에레혼은 첫 번째 입장을 지지한다. 그는 국민 대다수가 정의를 믿고, 의회와 행정 즉 민주국가를 신뢰한다고 본다.(2)
 
하지만 국민들은 그 유명한 상위 1% 엘리트들이 공공의 선을 추구하거나, 부를 창출하고 법을 준수한다고 믿지는 않을 것이다. 포데모스와 같은 운동비평가들이 대의민주주의를 뛰어넘으려고 하는 게 아니라, 건전한 기초 위에 대의민주주의가 새출발을 하도록 도와야 하는 이유다. 전후 정치질서인 ‘영광의 30년’에 대한 향수도 분명 작용한다. 이니고 에레혼은 민주주의의 부활을 위해서는 기본적으로 대의제도와 사회운동들 간의 상호역할이 필요하다고 강조한다.   
 
이 입장은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구현하는 우파 정서와 일맥상통한다. 도널드 트럼프도 워싱턴의 엘리트들과 주류 언론을 비판하며 민중에게 권력을 되돌려 준다고 약속한다. 트럼프는 자신을 지금의 자리까지 오르게 한 ‘운동’에 대해 종종 말하곤 한다. 그에게 있어 이 운동은 공화당원과 민주당원 간의 케케묵은 대립을 뛰어넘는 것이다. 2017년 2월 24일 있었던 한 공화당 전당대회 연설에서 트럼프 대통령은 민주당 경선 후보였던 버니 샌더스에게 칭찬을 아끼지 않았는데,그는 대선에서 버니 샌더스 후보 지지자들이 자신에게 표를 던졌다고 믿고 있기 때문이다.   
 
정치적인 위기에 대한 두 번째 논쟁은 스튜어트 홀이 70년대에 내놓은 ‘권위주의적 포퓰리즘’ 득세에 관한 것으로, 역사적으로 가장 대표적인 예는 대처리즘이 있다.(3) ‘권위주의적 포퓰리즘’은 전후 ‘사회민주주의’의 정치적인 합의를 분열시키는 불안한 경제 상황과 좌파 약세라는 이중 위기 속에서 탄생했다. 
 
스튜어트 홀에 의하면, 이런 포퓰리즘은 주로 좌파의 가치에 기반을 두는데, 그 가치에 선동적 유발을 꾀하고자 본연의 의미를 왜곡한다. 예를 들면, 사회의 민주화는 국민에게 평등에의 열망을 뿌리 깊게 심어줬다. 대처리즘은, 근면성실한 사람들에게 피해를 주면서까지 얻은 혜택을 야금야금 갉아먹는 이들을 ‘편승자’라고 비난하기 위해 바로 이 열망에 의지했다. 물론 이 ‘편승자’는 - 늘 그렇지는 않지만 - 대개 외국인들, 그리고 토착민들 중 ‘선한 백성들’ 이다. 빅토르 오르반 헝가리 총리, 테레사 메이 영국 총리, 마린 르 펜 프랑스 국민전선 당 대표들에 의해 구현된 이 권위주의적 포퓰리즘은 앞으로도 승승장구할 듯하다. 
 
세 번째 논쟁은 ‘대표성의 위기’의 기원에 관한 것이다. 토니 네그리와 데이비드 그레이버는 ‘비물질 노동’의 급부상과 함께, 사회관계망 서비스나 노동의 변화를 통해서 가능해진 ‘공유’ 사회성이 활성화 된다(4)고 주장한다. 그런데 이런 형태의 사회성은 19~20세기의 전형적인 사회관계로 만들어진 대의민주주의와 모순된다. ‘대표성’과 ‘참여성’은 서로 모순관계다. 결과적으로, 두 사람은 ‘대표성의 위기’의 기원을 사회적 관계형태의 변화에서 찾는다.
 
자본주의와 민주주의를 갈라놓는 경제적 위기
 
반면, 사회학자 볼프강 슈트렉은 ‘대표성의 위기’를 자본주의 체제의 경제적인 모순으로 설명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영광의 30년’이 막을 내리면서 자본주의를 부르는 최고의 ‘찬사’였던 자본주의와 민주주의의 조화로운 향연도 끝이 났다. 자본주의가 성장률 회복이 불가능할 정도로 경제적 악조건에 처하면 국민들에게 더 이상 물질적 안락함을 제공할 수 없다. 다시 말해, 앞으로의 자본주의는 민주주의 체제와는 점점 더 거리가 먼 정치형태를 유지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당대 혼란에 대한 논란은 경제적인 차원에서도 이뤄진다. 이를테면 ‘실물’경제에 타격을 준 재정위기에 관한 것인가? 아니면 ‘실물’경제가 자본주의의 진원지인 축적위기를 단번에 맞은 것인가? 와 같은 의문이 제기된다. 후자의 경우, 재정이 문제의 원인이 아니라 단지 생산의 세계에 존재하는 ‘객관적인’ 모순들의 표현이나 모습의 문제일 것이다. 공황의 진원지에 대한 논쟁은 자본주의가 ‘영광의 30년’ 후 70년대에 찾아온 경제적 위기를 회복한 것인지, 아니면 우리는 여전히 장기적인 위기 속에 살고 있는지에 대한 질문과 밀접한 연관이 있다.
 
정치학자 리오 패니취와 노조활동가 샘 긴딘은 80년대 후반과 90년대에 수익률이 회복됐고,(5) 이는 자본주의가 70년대의 경제위기를 극복했다는 걸로 본다. 같은 맥락으로, 2007년에 일어난 여러 사건들은, 1873~1896년의 장기불황, 30년대의 대공황 그리고 70년대의 경제위기 이후, 자본주의 역사상 새로운 대위기의 도래를 의미한다. 반면, 역사학자 로버트 브레너는 작금의 문제는 그저 새로운 표시일 뿐, 70년대 장기침체의 충격 속에서 여전히 빠져나오지 못하고 있다고 주장한다.(6) 로버트 브레너는 재정적 이윤과 ‘가상’자본의 이동 덕택에 표면적으로만 수익률이 회복된 것으로 보이는 것이라고 말한다.
 
‘위기’라는 단어는 늘 역사적 주기점의 쟁점을 반영하며 사용된다. 또 다른 경제적인 논란은 30년 전부터 계속된 일본과 유럽의 제로성장 또는 저성장에 관한 것이다. 이 상황은 장기적으로 확고하게 굳어지는 상황인가? 아니면 (장기간 지속되는 심각한 불황이긴 하지만) 자본주의 경제주기에서 쉽게 볼 수 있는 상황인가? 바꿔 말하면, 지금 우리는 ‘장기침체’ 혹은 ‘정체상태’에 살고 있는가?(7) 이는 경제주기가 정지되고 경제구조가 장기적인 침체상태에 이르는 역사적인 상황을 일컫고자 존 스튜어트 밀이 발견한 개념이다. 존 스튜어트 밀이 말하는 정체 상태는 긍정적 의미를 가진다. 늘 많은 부를 생산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에 사로잡힌 인간이 마침내 좀 더 흥미로운 활동, 가령 창작과 같은 활동에 더 시간을 쏟을 수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정체 자본주의’라는 개념은 용어 자체에 모순이 있다. 자본주의라는 것은 본질적으로 동적인 개념이기 때문이고, 또 그런 이유로 19세기부터 논쟁거리의 대상이 돼왔다.  
 
위기에 관한 마지막 경제적 논쟁은 ‘영광의 30년’ 자체에 대한 것이다. ‘영광의 30년’은 자본주의 역사에서 예외적으로 일어난 것인가? 아니면 축적 합리성 구조의 전형적인 모습인가? 서구권 국가 국민들의 삶의 질 향상과 불평등 감소의 일등공신이었던 1945년~1973년의 전례 없던 고성장은 아마 지극히 예외적인 경우라서 앞으로 다시는 볼 수 없을 것이다. 그래도 일각에서는 앞으로 경제 디지털화나 생물 공학 혁신, 신재생 에너지, 또는 이 세 가지 조합으로 자본주의가 예전에 버금가는 성장을 다시 한번 만들어내기를 바라고 있다.    
 
자본주의 또한 위협하는 환경적 위기
 
정치적, 경제적, 환경적 위기 중 마지막으로 환경적 위기를 살펴보자. 환경적 위기는 그 전에는 존재하지 않았던 위기다. 자본주의는 과연 환경적 위험을 잘 극복할 수 있을 것인가? 제이슨 무어와 다니엘 타뉘로로 대표되는 몇몇 사상가는 3세기 전부터 자본주의는 무료로, 혹은 저렴한 비용으로 얻은 천연자원에 전적으로 의존해 발전할 수 있었다고 주장한다.(8) 자본주의에서는 이 귀한 자원이 무한정 있기라도 하듯 낭비했다. 원자재 형태로 채취한 후 상품을 만들어내는 ‘입구’로 사용할 뿐 아니라, 경제활동 후 나오는 폐기물과 부산물, 즉 자본의 축적이 초래하는 ‘부정적 외부효과’를 배설하는 ‘출구’인 ‘쓰레기통’처럼 사용했다.  
 
하지만 환경 훼손이 심각한 오늘날, 자연은 이제 더 이상 자본주의를 위한 값싼 출입구 기능을 할 수가 없다. 물, 석유, 무공해 공기 등 현대사회 운영을 위한 필수자원은 부족하고, 자연의 관리 및 정화활동비용은 점점 더 높아지고 있는 실정이다. 예를 들어 다양한 오염으로 인해 건강을 위한 의료비는 높아지고 결국 수익률은 낮아진다. 사회학자 이매뉴얼 월러스틴은 “값싼 자원 없이는 존재할 수 없는 자본주의는 결국 오래가지 못할 것이다”라고 단정 지었다.
 
다른 비평가들은 자본주의의 회복력에 대해 걱정하지 않는다고 답한다. 자본주의는 이제껏 그랬듯, 이 위기도 잘 극복할 것이 라는 것. 1974년 철학자 앙드레 고르는 “자본주의가 위기 앞에 무릎을 꿇는다는 건 모르는 소리다. 자본주의는 지금까지 그랬듯이 위기를 극복할 것이다. 유리한 위치에 있는 금융지주회사들은 경쟁사의 악조건을 이용해 싼값에 합병시키고, 경제구조에서 세력을 확장하려 할 것이다. 중앙권력은 사회지배력을 강화하고, 테크노크라트들은 환경오염 방지와 생산 ‘최적화’에 적절한 규정을 만들기 위해 계산기를 두드릴 것”(9)이라고 이미 적은 바 있다.
 
마찬가지로, 경제학자 미셸 아글리에타는 재생 에너지를 기반으로 한 오랫동안 지속되는 새로운 형태의 성장주기, ‘녹색’ 자본주의의 탄생이 가능하다고 본다. 미셸 아글리에타에 의하면 중국이 이 새로운 성장주기의 선두에 서야 한다. 미국이 20세기 초반에 ‘포디스트(Fordist)’ 성장 사이클의 중심에 있었던 것처럼 말이다. 2015년 유럽노동조합연맹이 시작한 ‘One Million Climate Jobs’ 캠페인은 ‘친환경 일자리’를 기반으로 한 새로운 사회모델을 지지한다.(10) 재생 에너지를 필두로 재정비하면, 자본주의가 무료로 자원을 활용하는 것, 그리고 화석 에너지를 사용하는 것을 막을 수 있을지 모른다. 그래도 자본주의라는 사실은 변함이 없다.
 
현재 당면한 세 가지 위기 중 환경적 위기는 즉시 피부로 감지하기 가장 어려운 동시에 사회에 확실한 변화를 줄 수 있는 가장 중요한 위기이기도 하다. 환경적 위기는 엄밀히 말하면 위기를 논할 때 일반적으로 거론되는 위기 ‘전’, ‘후’, ‘과정’ 그리고 ‘극복’의 모습을 한 것도 아니다. 아직 미미한 수준에 있지만, 선진국들이 온실가스 배출 감축을 위한 강력한 방안을 도입했다고 가정해 본다고 해도, 기후변화는 이미 돌이킬 수 없는 결과를 초래하고 있다. ‘국제사회’가 할 수 있는 것은 이 결과를 완전히 뒤집는 것보다는 위험을 최소화하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정치·경제적 위기에 대응하는 과감한 방안을 모색해야만 한다. 기후변화는 민주주의를 재건할 좋은 기회다. 각 사회가 적응할 수 있으려면 국민의 일상을 속속들이 들여다보는 것부터 시작해야 한다. 이런 변화는 국민들의 참여 없이는, 국민들의 지식과 노하우 없이는 불가능하다. 새로운 민주주의적 제도가 기본적으로 필요할 것이다.  
 
경제적 측면에서, 특히 공공부채의 일부 또는 전액 탕감은 친환경적인 방안이 될 수 있다. 정부가 에너지 전환에 대거투자할 수 없다는 것은, 정치적인 의지가 부족한 데다 채권자의 노예가 된다는 뜻이다. 정치적·경제적·환경적 위기는 서로 얽혀있는 하나의 사안임을 알 수 있다.   
 
 
글·라즈미그 크쉐양 Razmig Keucheyan
사회학자, 보르도 대학교 사회학과 교수. 저서로 <La Nature est un champ de bataille(환경 전쟁터)>, Zones, 파리, 2014가 있다.
 
 
번역·권진희 
한국외국어대 통번역대학원 졸업.
 
(1) 라인하르트 코젤렉, <Le Futur passé. Contribution à la sémantique des temps historiques>(지나간 미래), Éditions de l’EHESS, 파리, 1990 참조
(2) 일례로, 프랑스어로 작성된 정기간행물 Ballast 인터뷰, <Podemos à mi-chemin(진행형 포데모스)>, 2016년 5월 4일 자, www.revue-ballast.fr 참조
(3) 마가렛 대처는 1979년부터 1990년까지 영국의 총리를 지냈다. 스튜어트 홀, <Le Populisme autoritaire. Puissance de la droite et impuissance de la gauche au temps du thatchérisme et du blairisme(권위주의적 포퓰리즘. 대처리즘과 블레어리즘 시대의 우파 득세와 좌파 약세)>, Amsterdam, 파리, 2008 참조
(4) 일례로, 마이클 하트와 토니 네그리, <Empire(제국)>, Exils, 파리, 2000 참조
(5) 리오 패니취와 샘 긴딘, <The Making of Global Capitalism. The Political Economy of American Empire>, Verso, 런던, 2013 참조
(6) 로버트 브레너, <The Economics of Global Turbulence : The Advanced Capitalist Economies from Long Boom to Long Downturn, 1945~2005>, Verso, 2006 참조
(7) 아르노 디메와 실비 도졸메, <Les Enseignements de la crise des subprimes(서브프라임 위기가 주는 교훈)>, Clément Juglar, 파리, 2011의 지도 하에 집필된 세드릭 뒤랑과 필립 레제, <Vers un retour de la question de l’état stationnaire? Les analyses marxistes, postkeynésiennes et régulationnistes face à l’après-crise>(정체 상태 문제로의 회귀? 위기 후 직면한 마르크스주의적, 포스트 케인스주의적, 조절학적 분석)> 참조
(8) 일례로, 제이슨 무어, <Capitalism in the Web of Life. Ecology and the Accumulation of Capital>, Verso, 2015 참조
(9) 앙드레 고르, <Leur écologie et la nôtre(생태학에 대한 동상이몽)>, Le Monde diplomatique, 2010년 4월호 
(10) www.climate-change-jobs.org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