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좋게’ 평양에 가다
프랑스 교민의 북한 방문기
2017-07-31 김정희 | 프랑스 거주 교민
나는 지난 5월 13일부터 20일까지 평양, 금강산, 개성을 방문했다. 이번으로 세 번째 북한방문을 한 나에게, 지인들은 묻곤 한다. 북에 친인척이 있는지 혹은 부모가 북한 출신인지, 혹은 선교활동을 하는 것인지 등등의 질문이다. 나는 해외에 거주하는 프랑스 국적자다. 아니 좀 더 부연하자면 프랑스인과 결혼을 하고 아이 둘을 키우며 내 인생의 반 이상을 외국에서 보냈다. 프랑스의 평범한 직장인으로 생활하면서, 이제는 나의 정체성을 찾아보려는 시간이 생겼다.
내가 지난 20여 년 간 사회생활을 할 때, 프랑스 기업인이나 지인들은 매년 3~4월이면 연례행사처럼 나에게 “한국에서 전쟁이 날 것 같다”면서 그에 대한 의견을 묻곤 했다. 즉 서울에서 매년 초에 실시되는 한미합동 군사훈련(팀스피리트, 을지 프리덤가디언 혹은 키 리졸브 등)동안 남북 간 긴장이 극도로 높아지면 프랑스 언론이 이를 많이 다루다보니, 이곳 지인들에겐 갑자기 남북관계가 전쟁으로 치닫는 대치관계로 보였던 것이다. 나는 어쩔 수 없이 나의 뿌리인 한반도 분단의 역사를 설명해야하는 입장에 처하게 됐다.
매년 3~4월이면 한국역사를 잘 모르는 프랑스 지인들에게 나는 한국에서는 전쟁이 일어나지 않을 것이며, 그것은 연례군사훈련의 일환으로 정치적인 행위들임을, 이런 상황이 60년 이상 지속중이라고 설명해야 했다. 나는 한국과 프랑스의 주류 미디어가 쏟아내는 일방적 정보에 의존하지 않고, 어떤 편견도 없이 북한을 좀 더 직접적으로 이해하고 싶었다.
그 방법으로 생각한 것이 북한을 직접 방문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막상 북한방문을 앞두고, 나는 지인들이 왠지 나에게 손가락질할 듯한 두려움을 느끼는, 이를테면 자기검열의 감정을 떨치려 노력했다. 어느 지인은 북한을 방문하려면 일단 페이스북 등 SNS를 통해 북에 대한 욕을 확실하게 해놓으면 ‘종북’이라는 의심을 받지 않을 것이라는 조언을 했다. 나는 한참 멀뚱하게 그를 쳐다본 후, “왜 내가 방문하는 곳을 욕까지 해야 하냐”고 대답했다.
나는 어느 지인에게서 프랑스와는 달리, 미국에서는 많은 분들이 북에 가서 지원사업 혹은 선교활동들을 한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김대중·노무현 정부 때 대북지원 활동으로 몇 차례 북한을 방문한 사람들은 있어도 박근혜 정권 치하에서 최근에 다녀왔다는 사람은 만나지 못했다. 나는 강연장에서 재미동포로, 북에 목화재배를 활성화한 ‘목화 할머니’ 김필주 박사의 조언을 듣고, 진료가방을 들고 북녘에 봉사를 다녀온 오인동 박사나 박문재 박사 등을 만나면서 북한방문의 꿈을 키웠다. 그런 와중에 미국 교포들이 대북 지원하는 ‘사이좋게’라는 민간단체를 알게 됐다. 이 단체는 2007년부터 애틀랜타의 조 목사라는 분이 시작한 비영리 인도적 지원단체로 지인들끼리 모금을 해서 북의 육아원(고아원), 장애인협회, 산림복구양묘장 등에 지원을 해왔다. 교회를 다니지 않는 나로선 이 단체의 대북지원이 선교가 목적이 아니고 인도적 지원이 목적이라는 점이 마음에 들었다.
조 목사가 방북비자 준비 수속을 해 주신 관계로 중국 심양의 북한영사관에서 비자를 받아 평양행 고려항공에 탑승을 하게 됐다. 2014년 5월 10일의 첫 북한방문은 초행이라 많이 긴장이 됐다. 비교적 자유로우면서도 사회 저변의 보호망이 잘 돼있는 프랑스에서 살아온 나로서는, 나의 말과 행동방식이 북한 사람들과 많이 다를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방문이 잦아지면서 그들 역시 같은 말을 쓰고 같은 문화 속에서 살아온 동포이며, 그래서 만나면 반가운 마음이 생기는 것을 느꼈다. 지난 5월 평양방문에 대한 인상을 피력하고자 한다.
5월 13일, 미래과학자거리에 이은 ‘려명거리’에서
우리는 베이징에 모여 고려항공을 타고 평양 순안공항에 내렸다. 순안공항은 2015년에 준공해 매우 깨끗하면서도 아담한 현대식 공항이다. 우리를 맞이하는 평양의 공기는 미세먼지로 곧 질식할 것만 같았던 베이징의 공기와는 전혀 달랐다. 싱그러운 봄의 향기와 적당한 습도를 머금은 상쾌한 평양의 공기가 볼에 닿는 순간, 기분이 절로 좋아졌다. 우리 일행의 안내를 맡은 해외동포위원회의 젊은 친구는 조금 전까지 비가 내렸는데 우리가 도착하자 그쳤다고 전해준다. 우리를 환영하는 덕담이겠거니 생각하면서, 유쾌한 기분으로 그와 인사를 나눴다. 우리 일행 6명의 안내와 관광일정을 맡은 젊은 안내원이 준비해온 미니버스를 타고 공항을 빠져나왔다.
‘사이좋게’라는 이름으로 2007년부터 북한에 인도적 지원을 해온 조 목사님은 우리 일행의 단장격이다. 목사님을 포함한 5명은 미국 국적을, 나는 프랑스 국적을 가지고 있는 덕분(?)에 이명박·박근혜 정권이 만든 살얼음 같은 남북관계 속에서도 북한을 방문할 수가 있었다. 앞서 말했듯, 나에게는 이번이 세 번째 북한방문이다. 순안공항에서 평양으로 들어오는 도로 양옆의 논에는 모내기 시기에 맞춰 물이 가득 차 있었다. 3년 전 5월에 왔을 때는 지금처럼 물이 찬 것을 보지 못했다는 사실을 떠올리면서 올해는 풍년이 들기를 빌었다.
평양 시내로 들어오는 길에는 개선문, 천리마동상 등 이제는 눈에 익은 풍경이 스치며 지나간다. 차 안에서 인사를 나눈 안내원은 오늘 저녁 려명거리의 야경구경이 우리 일행의 첫 일정이라고 알려줬다. 려명거리는 올해 4월 13일에 준공된 현대식 건축 단지다. 우리는 창천거리를 지나면서 려명거리도 먼 모습으로 보았다. 우리가 묵은 평양호텔은 1년 사이에 내부 보수를 했는지 1953년에 지어진 건물임에도, 바닥재인 남포의 회색 대리석과 흰색 계통의 기둥이 한층 빛나 보였다. 호텔 입구의 찻집과 호텔 접수코너 양옆에 있는 상점들과 식당들도 새단장을 한 듯 했고, 배정 받은 방도 이전보다 깨끗했다.
북한에서는 일을 결정하면 속전속결로 추진하는 면이 많다. 몇 년 전의 ‘천리마속도’가 이제는 ‘만리마속도’로 바뀌어, 려명거리가 1년이라는 짧은 기간에 이뤄졌다. TV에서는 려명거리 건설에 대한 프로그램이 자긍심이 가득 찬 설명과 함께 방영되고 있었다. 려명거리는 2016년 3월에 김정은의 지도로 건설 계획을 발표하고, 10개월 안에 공사를 마칠 예정이었다. 그러나 중국과 접경지역인 함북 북부지구의 홍수로 건설일꾼들이 수해복구에 투입되면서 완공 일정이 늦어졌다. 건설일꾼들은 수해복구사업에 3개월간 투입돼 주택 1만5천 가구를 건설하고 려명거리 건설현장으로 돌아와서는 만리마속도로 일해 2017년 4월 13일에 준공했다고 한다.
저녁식사는 창전거리에 있는 청류정식당에서 하기로 했다. 창전거리는 식당들이 음식 맛 경쟁을 하면서 식당 전문거리로 발전하고 있다. 가는 길에 식당 뒤의 살림집과 빌딩 사이에 있는 경성유치원을 지나가게 됐다. 경성유치원은 북한의 영재들이 교육받는 곳으로 각 지역의 지도원들이 재능과 용모가 뛰어난 어린이를 선발해 교육시키는 곳인데, 용모보다 재능을 우선적으로 본다고 한다.
려명거리는 미래과학자거리를 완성하고 채 1년도 되지 않은 짧은 시간에 새롭게 건설된 거리다. 안내원의 설명에 의하면 녹색건축기술을 이용하고 표준화된 건설공법으로 70층의 골조를 74일 만에 마치는 기록을 세웠으며 내부 타일도 13일 만에 완성하는 기록을 세웠다고 한다. 이 거리는 4천여 세대의 입주가 이뤄지는 중이며, 아직 입주가 끝난 것이 아니라고 한다. 이 거리를 자강의 힘, ‘일심단결의 힘’으로 건설했다는 신기록에 자부심이 대단히 높아 보였다. 려명거리의 건축물들은 직선보다는 곡선과 원의 부드럽고 둥근 모양과 연꽃잎 모양의 아름다움을 복합적으로 이용해 세워졌으며 상점, 백화점 등과 살림집이 공존하는 복합상가를 조성 중이었다. 김일성대학 옆에 있는 교수들과 외국인 유학생들의 기숙사도 원통 모양의 구조물이었다.
5월 14일, 대동강변에서 조깅을 하다
아침 조깅을 즐기는 나는 평양에서도 버드나무가 즐비하게 늘어서 있는 대동강변과 평양호텔서 대동문 구역까지의 달리기를 수차례 했다. 안내원에게 아침 6시에 대동강변을 달리고 싶다고 하니 지금 그곳은 보수공사 중이라서 폐쇄됐으며 반대방향도 강변은 공사 중이고 뚝방길은 아침 출근 자전거로 복잡해 위험하다고 한다. 나는 대동강변 달리기는 어디에서도 할 수 없는 경험이므로 꼭 해보고 싶다고 하니, 조깅을 하고 싶은 사람들을 파악해 함께 하는 것으로 결정했다. 나는 달리기를 하고 조 목사는 걷기로 했다. 옆으로는 버드나무가 줄지어 서있는 대동강변에서 유유히 흐르는 물을 보며 상큼한 아침 공기를 마시는 것은, 운동의 또 다른 행복이었다. 작년과 다르게 호텔 양쪽의 강변은 보수공사로 복잡하고, 뚝방 양방향으로는 분주하게 오가는 출근 자전거 행렬로 여유롭지는 않았다. 자전거를 이용하는 부산스런 아침 출근길의 평양사람들 중에는 전기자전거를 이용하는 이들도 있었고 자전거 경주를 하듯 빠르게 달리는 평양 시민들의 모습도 보였다. 여기도 남한처럼 빨리빨리 문화가 있는 것 같았다.
안내원은 청춘거리와 광복거리를 지나면서 이곳에 3칸짜리 살림집을 무상으로 받았다며 싱글벙글 자랑이다. 김 안내원은 37세로 네 살짜리 딸이 있다고 했다. 1899년 김일성의 외할아버지가 세운 칠골교회(반석교회)에서 예배를 보고 옥류관에서 ‘랭면’을 먹었다. 보통강을 끼고 있는 칠골교회는 평양에서 제일 오래된 교회다. 담임목사는 설교시간에 5월은 가정의 달이며, 두 번째 주는 ‘어머니 주’라는 것을 강조했다. 언뜻 듣기에는 전통적인(또는 봉건적인) 가정을 이상적으로 말하는 듯했지만, 잘 들어보면 가정 내에서는 모두가 존중받아야 한다는 이야기였다. 나는 무종교인이지만 재미있게 느꼈다. 옥류관 뒤편에 있는 대리석으로 된 테라스에서 발밑으로 흐르는 대동강과 건너편 강변에 있는 주체탑, 그리고 현대식 경기장들을 보면서 강변의 멋들어진 스카이라인들이 얼마나 세심한 공을 들여 만들어진 것인지 느낄 수 있었다.
오후에는 모란봉음악당에서 열리는 국립관현악단의 공연을 들었다. 회색 대리석의 모란봉음악당은 1946년에 지어졌지만, 보수공사를 했고 지금은 하얀 대리석 계통의 건물로 다소 차가운 느낌을 선사했다. 국립교향악단의 연주에서는 관현악의 대표적인 브람스의 헝가리안 댄스와 북에서 작곡한 나라찬가 ‘김일성장군 축지법을 쓰다’의 경쾌함과 웅장함이 인상적이었다. 작년까지 우리의 안내를 맡았던 신 선생이 은퇴한 후라 그의 얼굴도 볼 겸, 우리는 저녁을 함께하기로 했다. 여전히 입담이 좋은 신 선생과 고기요리가 맛있다는 진달래식당에서 붉은 양념을 한 쇠고기, 오리고기, 낙지를 구워먹으며 덕담을 주고받았다.
5월 15일, 신림복구작업에 참여하다
‘사이좋게’의 여러 인도적 지원사업 중 양묘장 지원은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북의 산림복구투쟁에 참여하는 황해북도 상원군과 중화군에 작년에 양수기 9대를 지원했다. 이곳은 평양에서 남쪽으로 40~50km 떨어진 곳으로 개성 가는 길에 위치하고 있다. 상원군에 있는 양묘장에는 몇 동의 비닐하우스와 해가림발이 쳐있는데, 절반 이상의 비닐하우스가 비닐이 낡고 상한 상태라, 일부에만 묘목을 키울 수밖에 없는 환경이었다. 더 많은 묘목을 생산하고 싶어도 햇살에 새싹이 타서 죽는 경우가 많고 병충해의 피해가 크다고 한다.
상원군에서 약 20km 떨어진 중화군에는 산림관리책임자 아저씨들이 사람 좋아 보이는 웃음으로 우리를 반겨줬다. 이 묘목장의 비닐하우스 상황도 비닐이 없기는 마찬가지다. 해가림발도 손으로 비닐봉투를 잘라서 만든 듯한 임시 해가림막을 사용하고 있었다. 우리 일행은 두 양묘장에 주로 해가림막이용 비닐을 지원했고, 개인적으로 나는 소형 경운기 한대 구입비를 추가지원하기로 약속했다. 이곳의 사람 좋게 생긴 아저씨들의 산림녹화 성과를 올리기 힘든 환경 이야기를 듣다 보면, 뭐든 지원해 주고 싶은 마음이 절로 솟는다. 매년 2천만 그루 생산의무를 달성하려면 포토판, 양수기, 경운기, 해가림발, 수로관개 배관 등 설비지원이 필요하다고 한다. 산림총국의 담당자들과 지원을 주제로 간단한 회의를 가졌다.
5월 16일, 쓸쓸한 금강산 만남의 장소
우리가 그토록 고대하던 금강산에 오르는 날이다. 평양에서 대동강을 따라 새과학자거리를 지나 통일거리의 삼대헌장기념탑을 지나면서 남쪽으로 향하는 고속도로를 탔다. 금강산은 비무장지대 안에 있고 산세가 험하기 때문에 남·북·미국의 정치적관계가 험하거나 날씨가 좋지 않으면 방문하기 어려운 곳이다. 1박 2일 탐방하는 일정으로 금강산을 향해가면서 우리는 매번 봐도 아름다운 신평휴양지의 신평휴게소에서 잠시 휴식을 취했다. 마식령스키장을 가기 전에 있는 신평휴양지 앞의 신평수력발전소 저수지는 산세가 아름답다.
도로상태가 좋지 않아서 원산으로 향하는 도중 바퀴에 펑크가 났다. 차를 세운 도로 옆으로 끝이 안보일 정도로 길게 서있는 호두나무들은 이미 작은 열매를 맺기 시작하고 있었다. 우리는 타이어를 갈아 끼우는데 시간을 많이 소비해 점심시간이 지나서 원산에 도착했다. 원산 앞바다 송림이 가득한 곳의 끝자락에 있는 식당에서 마합, 전복, 해삼, 대합, 문어, 광어 등 싱싱한 생선들을 회로 포식했다.
금강산의 여름 이름은 봉래산이다. 여름에는 푸릇푸릇한 나무들로 절경을 이룬다고 한다. 금강군은 군사와우도가 보이는 삼일포 전경분계선이 있는 군사지역으로, 현대그룹 정주영회장이 씨를 뿌리고 북한 주민들이 물을 주면서 가꾼 관광지이라 해도 군사지역임을 기억해야 한다고 한다. 금강산 입구에 도착하니 이미 오후 4시가 임박해 해금강은 입산통제 시간이었다. 그래서 맑은 자연, 바다와 호수로 이뤄진 삼일포로 갔다. 삼일포는 왕이 하루 일정으로 놀러왔다가 아름다움에 취해 3일을 놀았다고 해 삼일포라고 한단다. 원래는 구룡연에서 내려오는 계곡 물과 바다물이 섞이는 반호수였는데 지금은 막아서 호수로만 사용하고 옆에는 논과 밭이 이어져 있었다. 삼일포 저녁의 정적과 멀리 떠있는 와우도의 조화로운 풍경은 매우 아름다웠다. 7~8월 여름철에는 배를 띄우고 물놀이를 즐기며, 1m 두께로 얼음이 어는 겨울에는 빙상장으로 이 아름다운 호수에서 스케이트를 즐긴다니 이 두 계절에 다시 오고 싶었다. 내가 원하는 계절에 언제쯤 와 볼 수 있을까!
금강산 관광은 1998년 11월 19일에 시작해 10년간 운영되다가 이명박 정권이 들어선 2008년 7월부터 단절돼 2018년이면 10년이 된다고 한다. 금강산 안내원의 말을 듣고 있자니 이곳 사람들이 즐거웠던 그 시절을 생각하면서 금강산관광 개통을 손을 꼽아가며 새로 올 그 시간을 얼마나 기다리는지 느낄 수 있었다. 금강산의 작은 일부인 삼일포만 보아도 우리나라가 금수강산이라는 이름이 아깝지가 않다.
금강산으로 들어가는 길목에 있는 온정리는 온실과 밭이 이어지는데 군사지역이라서 사진을 찍을 수는 없었지만 금강산 관광이 자유로웠던 남북의 화해무드 시절에 지어진 호텔과 관광시설물들이 그 당시의 활기와 풍요로움을 상상할 수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쓸쓸한 그림자만 남아있는 만남의 장소들이 아직도 사람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5월17일, 남북이 함께했던 모심기와 벼베기의 추억
금강산은 1,639m 비로봉을 정점으로 하고 21개 지구로 구성돼 있으니, 한두 지구를 돌고나서 금강산을 다 본 듯 말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고 안내원 강사는 말했다. 구룡연으로 오르는 길에 있는 ‘삼록수(산삼과 ‘록용’이 흐르는 약수)’는 한 번 마실 때마다 10년씩 젊어진다는 전설로 유명하다. 물맛이 어찌나 단지, 나도 모르게 꿀꺽꿀꺽 들이마신 게 몇 모금을 마셨는지 모르겠다. 내가 무척 젊어질 것을 은근히 믿고 싶었다. 수정같이 맑은 물이 힘찬 물소리로 흐르는 구룡연으로 올라가는 길은 그리 힘들지 않았지만 우리 일행 중 단장인 조목사가 앞장을 서서 상팔담까지 올라갔다. 산타기를 좋아하는 나는 두 번째로, 앞에 펼쳐지는 아름다운 풍경 때문에 힘든 줄 모르고 산길 4㎞를 후딱 올라갔다. 내려오면서 구룡폭포에 맨발을 담그고 휴식을 취하는 기회도 가졌다.
상팔담에서 다시 금강산 입구로 내려오는 왕복 8㎞의 거리가 아주 가벼운 산행으로 느껴지는 것은 내가 금강산 산세로 흥분해서인지 삼록수를 마셔서인지 피곤함을 모르고 마쳤기 때문이다. 그 다음에 해금강으로 가는 길 양옆은 논이 펼쳐지는 데 이곳은 통일농사를 지었던 곳으로 2005~2008년에는 남북이 함께 모를 심고 벼베기 행사를 하던 곳이라고 한다. 젊은 강사는 10년 가까이 지난 지금도 마치 그 당시의 즐거움을 연상하는 듯 향수에 젖은 아주 맑은 목소리로 설명했다. 그는 언제 다시 함께 모심기와 벼베기를 할 수 있겠냐고 안타까운 목소리로 우리에게 물었다. 그들은 남북관계를 발전시킬 수 있는 정부를 기다리고 있었다.
해금강은 금강산이 바다 속에서 솟아오르듯 바위들이 물속에 떠있는 것처럼 보였다. “빼어난 절경의 금수강산”이 괜한 소리가 아님을 다시 실감했다. 금강산의 21개 구역을 다 보려면 아마도 며칠은 묵어야 할 듯한데, 금강산을 보고 싶은 갈증마저 온전히 해소하지 못한 채 우리는 평양으로 달렸다.
5월 18일, 빠르게 변하는 평양의 풍광
오늘은 평양에서 활동하는 날이다. 주로 외국인을 치료하는 친선병원을 방문해 워싱턴에서 소화기과 의사를 하시는 김 선생은, 작년에 요청 받고 준비해온 의료 소모품을 전달했다. 그리고 북에서 필요한 의료장비들에 대한 상담을 했다. 많은 의료장비가 필요해도 외국에서 수입할 수 없는 상황을 들으니 가슴이 먹먹해 온다. 그 다음에 방문한 옥류아동병원은 평양산원 맞은편에 있는 어린이 전문병원으로 2013년 3월에 건설을 시작해 준공을 막 끝낸 2014년 5월에 비해 어린이환자와 가족들로 매우 붐볐다. 내부에는 어린이들에게 친근감이 가는 다양한 동화속의 동물들을 벽에 그려놓아, 눈길 닿는 곳마다 어린이들에게 들려줄 재미있는 이야깃거리가 샘솟았다. 병원 방문을 마치고 우리는 개선문을 보러 갔다. 평양의 개선문은 나폴레옹이 세운 파리 개선문보다 5m가 높다고 자랑한다.
65m나 되는 개선문의 꼭대기까지 올라가는 엘리베이터를 타고 우리는 평양의 스카이라인을 볼 수 있었다. 모란봉 앞에 있는 전쟁 후에 지었다는 김일성 경기장과 그 반대쪽으로는 멀리보이는 여명거리의 모습은 평양이 얼마나 빨리 변하고 있는지를 보여주는 것 같았다. 저녁에는 해외동포위원회의 담당책임자들과 담소를 나누며 식사를 했다.
5월 19일, 여학생과 함께 깔깔 웃다
아침 일찍 북쪽의 판문각을 방문하기 위해 2016년에 준공한 최고로 현대적인 과학의 전당과 부속과학의 전당호텔을 옆으로 3대헌장기념탑을 통과하면서 황해북도 중화군 신계군 금천군, 사리원을 지나 500년 간 고려의 수도였던 개성직할시를 향해 남쪽으로 내려갔다. 3년 전에 비해 크게 달라 보이지 않는 남쪽으로 가는 고속도로를 지나면서 잠깐 휴게실을 지나게 됐는데 주차장에는 3년 전에는 없던 배, 사과 등 과일과 기념품을 파는 노상들이 있었다. 변화가 서서히, 그러나 눈에 띄게 나타나 보인다. 1달러에 과일 3개씩 팔고 있었다.
군사분계선 지역이라서 판문각과 정전담판 회의장을 가기위해서는 안내원도 남측과 같이 군인이 맡고 2명의 군인 호위를 받는 것은 남이나 북이나 같은 듯하다. 우리는 한 맘씨 좋은 중령의 안내를 맡았다. 사진을 같이 찍는 것에 흔쾌히 승낙해서, 우리는 돌아가면서 안내원 중령과 사진을 찍었다. 정전담판 회의장에는 6·25를 종식시키기 위한 정전협정서를 작성하는 여러 자료, 그리고 담판을 위해 700번 이상 회의를 진행한 장소를 볼 수 있었다.
한민족으로 우리가 일본의 식민지배에 맞서 독립투쟁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분단이 된 지 70년이 넘었다. 진정 우리는 우리 민족끼리의 전쟁을 원하는가? 평화를 만들어내기는 어렵다. 그렇다고 전쟁이라는 비싼 값을 지불하면서 살아야 할 이유는 없다. 어렵다 못해 불가능해 보이기도 하는 평화. 그러나 우리가 촛불로 독재정권을 몰아냈듯 촛불을 비춰 평화를 이루길 소망해본다. 개성에 들어오면서 유명한 한옥집이 줄줄이 보관된 개성여관에 점심을 하려 왔으나 개성여관이 휴일이라 맞은편에 있는 9첩·12첩 반상을 먹으러 개성국수집을 들렀다. 우리민족의 문화가 고스란히 담겨있는 9첩 반상의 맛깔스런 반찬에 우리는 놀랐다.
판문각 방문을 마치고 개성으로 관광을 갔다. 개성에서 1차 방문시 고려의 태조인 왕건왕릉을 방문한 적이 있어서 이번에는 선죽교와 공민왕릉을 방문하기로 했다. 정몽주의 피가 묻어있다는 선죽교를 설명하는 안내원은, “그건 전설일 뿐이다. 돌이 붉은 색이 도는 부분이 있어서 비에 젖으면 붉게 보이는 것”이라고 설명한다. 감정에 호소하는 전설적인 설명에 비해 건조하지만, 사실에 입각한 솔직한 설명도 나름 좋았다. 이어 공민왕릉에 가기 위해 굽이굽이 산허리를 지나고 한참 올랐다. 공민왕릉을 설명하는 안내원은 역사연구학자라고 한다. 넓은 잔디의 한쪽에 중학생정도의 여학생들이 앉기도 하고 서있기도 하면서 깔깔대고 웃는 모습이 보였다. 우리는 옆으로 지나가면서 서먹서먹한 눈길을 주면서 손짓으로 혹은 고개로 끄떡이면서 약간은 부끄러운 듯한 인사를 주고받았다.
공민왕릉은 산 중턱에 있어 우리는 한참 나무사이를 지나면서 올라갔다. 공민왕은 결혼 후 14년간 후손이 없다가 임신한 왕비가 출산하면서 죽은 후 명당자리를 찾기 위해 신하들을 보내 9년이나 걸려 왕비의 능을 만들면서 자신이 들어갈 능도 옆자리에 만들어뒀다고 한다. 현재 보고 있는 능이 700년 전에 만들어진 것이다. 공민왕릉을 보고 우리는 왔던 길로 다시 내려가면서 여학생들을 다시 만났다. 그들은 이제 춤추고 신나게 놀고 있었다. 옆에서는 선생이 신나게 장단을 맞춰주면서 우리보고 같이 춤을 추자고 한다. 우리 일행들은 학생들과 같이 전통춤으로 잠시 신나게 놀아 보았다.
애절한 사랑이 담긴 고려 공민왕의 능에서 즐거운 소풍을 하고 있는 여학생들과 기념사진을 찍었다. 우리는 ‘사이좋게’가 남과 북의 평화통일의 오작교가 될 것을 꿈꾸며, 평양방문을 마무리했다.
글·김정희
파리 경영학교(ISG)를 나와, 대한무역투자진흥공사(KOTRA)와 외환은행 등에서 근무한 뒤 최근엔 시민운동에 매진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