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에 맞서는 러시아 인터넷 기술의 ‘예외성’

2017-07-31     케벵 리모니에 | 파리 8대학 교수

 “우리가 다른 나라들보다 뒤처진 부분을 따라잡아야 했다. 그러나 우리는 단단한 기반을 가지고 있었다.” 미국의 감시기술에 뒤통수를 친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은 이렇게 설명했다. 사실상 소련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자국만의 고유한 정보과학 시스템을 발전시켰다. 그 후 러시아는 값진 형태의 정보과학을 탐구하고 있다.


2017년 5월, 우크라이나 정부는 러시아가 제공하는 다양한 디지털 서비스에 접근하는 것을 금지했는데, 여기에는 검색엔진 얀덱스(Yandex)와 사회 관계망 서비스(SNS) 브이콘탁트(VKontakte)가 포함된다. 우크라이나 당국은 이처럼 자국에서 광범위하게 사용하는 인터넷 도구들이 크렘린의 정보국과 정보를 공유하고 있으며, 특히 동(東)우크라이나의 돈바스(Donbass) 지역 분리주의자들과 싸우고 있는 우크라이나 군인들의 정보를 가져가고 있다고 비난한다. 수백만 명의 주민들이 일상적으로 접속하는 사이트에 접근하지 못하게 한 이 조치는, 모스크바가 소련공화국 이후 거의 모든 지역에서 장악하고 있는 디지털 영향권에서 벗어나려는 우크라이나 당국의 의지를 보여준다.

러시아는 실리콘 밸리의 영향권에서 벗어나, 플랫폼과 서비스 측면에서 완벽에 가까운 생태계를 갖춘, 매우 드문 국가 중 하나다. 이런 플랫폼들과 서비스들은 러시아 사람들이 만들었고, 러시아 법이 통제한다. 전 세계 인구의 상당수가 해당 지역에 믿을만한 대체물이 없어 구글, 아마존, 페이스북, 애플(GAFA)을 사용하고 있지만, 러시아와 그 이웃들은 캘리포니아의 통신거인들 외에도 러시아어 사용자 커뮤니티인 루넷(Runet)도 선택할 수 있다. 얀덱스가 경쟁자인 구글보다 두 배 이상의 대중성을 누리고 있고, 페이스북에 해당하는 브이콘탁트(VKontakte)는 한참 뒤져있지만 러시아에서는 가장 많이 찾는 사이트다.(1)

세계에서 거의 유일하게 전개되는 이런 상황은 모스크바의 디지털 위상을 높이고 있다. 웹 관리 측면에서 모스크바의 지위는 에드워드 스노든이 미국 국가안보국(NSA)의 감청을 폭로한 이후에 훨씬 더 강화됐다. 다른 곳과 마찬가지로 사이버공간에서 러시아 외교는 주권을 국제관계의 궁극적 가치로 간주한다. 러시아는 특히 외교에서 미국의 간섭 및 스파이 활동을 제한하기 위한 모든 일에서 강대국을 자처한다. 자국 고유의 인프라 구조를 사용하는 것은 2015년부터 외국의 디지털 플랫폼들이 러시아 시민들의 정보를 러시아 영토에서만 수집해야 한다는 강력한 법 제정의 기반이 되고 있다. 그래서 페이스북이나 트위터는 차후에 공식적으로 ‘미국의 도청’을 벗어나기 위해, 모스크바 근처에 서버를 설치해야 한다. 위반자들에게는 불행이 기다리고 있다. 가장 널리 알려진 비즈니스 SNS ‘링크드인(LinkdeIn)’은 법률 비(非)준수로 차단돼 현재 러시아에서 접속할 수 없다. 사이버공간 상의 이런 최고권력의 지위는 유럽연합(EU)의 지위와 비교되는데, 프랑스 의원들은 유럽연합의 지위를 ‘미국의 지배를 받는 디지털 세계의 식민지’로 규정한다.(2)

머나먼 역사적 연원을 지닌 예외성

과거 소련의 영향권에 있던 국가에서 주로 사용하는 ‘루넷(Runet)’은, 모스크바에서 소련의 예전 공화국들이라고 부르는 ‘이웃국가’들에 러시아가 결정적인 영향력을 행사하게끔 한다. 크렘린은 권력과 가까운 소수 지배자의 주머니에 굴러들어오는 플랫폼 사용자들의 정보자료에 접근할 수 있다. 게다가 이 플랫폼들은 외국의 소수 러시아어 사용자들에게 엄청난 지지를 받고 있다. 발트해와 우크라이나에서 이런 현상은 더 두드러진다.

이런 ‘디지털상의 예외’를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중국에는 정보통제 전략으로 국영 플랫폼들이 존재하지만, 루넷은 외국 서비스를 차단한 대체물로 생긴 것이 아니다. 러시아어 사용 인터넷은 1991년 소련해체보다 훨씬 이른 ‘알려지지 않은 역사’에서 시작한다. 소련은 사실상 기술구조·사회적 실천·경제모델의 모체였다. 이 특징들이 동시대 ‘루넷’의 특수성을 형성하며, 해킹과 사이버범죄에 대한 러시아의 본능적 욕망을 부추기고 있다.

공식적으로 알려진 것과 달리, 소비에트 권력이 그들 정보력의 일부를 네트워크화하는 것을 늘 거부한 것만은 아니다. 1970년대부터 서구에서 발전한 개방·분권화되고 자유로운 인프라 구조는 ‘지하출판물’이 범람하는 국가에서 꽃피울 수 없었다. 수많은 교수, 엔지니어 혹은 건축가들이 연구에 한해 자신들의 서구 동료들을 만나러 출국하는 것이 허락됐음에도, ‘철의 장막’이라 불리는 국가의 특성 때문인지 정보과학처럼 민감한 몇몇 영역에서는 정보가 새어나가지 않았다. 러시아는 곧바로 야심찬 정보과학 프로젝트를 수행해 기술적 쾌거를 연이어 이뤘다. 1968년 역사상 최초로 소련의 컴퓨터로 디지털 애니메이션이 개발됐다. 7년 후, 아폴로-소유즈(Apollo-Soyouz) 우주탐사선의 궤도 경로를 결정하는 데 소련의 계산기는 단 몇 분이 필요했지만, 미국항공우주국(NASA)의 컴퓨터는 30분이 필요했다. 1980년대 말 소련은 심지어 자신들만의 네트워크 영역을 확보했다. 수백 명의 소련 사람들만 동시대 웹의 조상인 유닉스 네트워크(Unix)에 접근하는 특권을 가졌다.

정보과학은 행정조직인 ‘특별한 체제들’의 비호 아래 배타적으로 발전했다. 이 행정조직들은 자신들만의 전략으로 다양한 특권을 부여받았다. 스탈린 시절에 이미 소련 언론은 서구에서 생성 중인 정보과학을 ‘부르주아의 의사과학(擬似科學)’이라며 조롱했고, 모든 연구소는 국가주도로 아주 비밀스럽게 최고품질의 계산기 제작에 몰입했다. 교도소 같은 연구소의 철조망 뒤에서 대부분 정치범이었던 엔지니어팀들은, 알렉산드르 솔제니친의 <제1원>이 오랫동안 상기한(3) 국가전화망을 자동으로 감시하는 장치와 비슷한 기계들을 개발하느라 분주했다.

스탈린 사망 이후, 정보과학의 황금시대

1953년 3월 스탈린이 사망하고, 3년 후 소련공산당 제20차 전당대회에서 스탈린 격하 운동이 벌어지면서 정보과학은 황금시대를 맞았다. 과학아카데미의 늙은 간부들을 점점 더 젊고 ‘자유로운’ 인물들로 교체함으로써 정보과학은 ‘부르주아의 환상’이라는 인식에서 벗어나, 서구와의 기술경쟁에서 중요한 으뜸패로서 주목받기 시작했다. 1950년대 말 시리즈로 제작한 소련의 최초 컴퓨터들은 정확한 계산이 필요한 우주항공 산업이나 원자력 연구의 높아지는 기대에 부응했다. 정보과학의 개척자인 세르게이 레베데프가 고안한 ‘신속전산처리장치’(BESM)는 큰 성공을 거둔다.

1964년 브레즈네프가 권좌에 오르고 정보과학에 대한 ‘스탈린식’ 담론이 다시 등장하자, 디지털 연구는 새롭게 조처한다. 소비에트 당국은 정보과학뿐만 아니라 경제까지 중대한 영향을 미치는 결정을 내린다. 소련은 자국의 연구소에서 컴퓨터를 개발하기보다 서구의 기술을 훔쳐오는 데 주력한다.(4)

BESM은 점차 IBM360의 설계도를 따라 발전된 새 모델로 대체됐다. 미국 컴퓨터 복제판들은 소련 정보처리기술자들에게 좋은 평판을 듣지 못했지만, 서로 완벽히 호환될 수 있는 장점을 갖고 있었다. 복제 컴퓨터들은 네트워크화하기 상당히 쉬웠고, 이런 네트워크화 작업은 1970년대에 소련 기업들과 연구소에서 흔하게 이뤄졌다.

이런 네트워크들은 같은 시기 미국인들이 개발한 프로젝트, 즉 인터넷의 조상으로 여겨지는 아르파넷(Arpanet)과 아무 관련이 없었다. 이런 네트워크들은 생산라인을 통제하고, 연구소 기구들의 자료를 수집하는 자동화된 자료 교환 인프라구조로 여겨졌다. 1960년대 아르파넷과 유사한 정보교환 과학 네트워크를 만들고자 했던 ‘국가 정보전달 자동시스템’ 프로젝트가 무산돼버린 것을 제외하면, 1983년에야 소련 국민들이 처음으로 (의도했던 것은 아니지만) 아직 인터넷이라 불리지는 않았던 전 세계 네트워크에 접속한다.

이 개척자는 당시 35세였던 생물학자 아나톨리 클리오소프다. 1983년 유럽 중거리 핵미사일로 동서 간에 긴장이 커지고 있을 때, 소련의 과학아카데미 고위층은 컴퓨터를 통한 원격회의에 참석할 수 있는 연구원을 찾으라고 명령했다. 몇몇 서구 과학계에서는 이미 흔했던 원격회의가 소련에서는 한 번도 시행된 적이 없었다. 얼마 전까지 미국에 머문 덕에 컴퓨터 자료 처리에 익숙했던 클리오소프가 지명됐다. 클리오소프는 최고수준의 보안이 유지되는 소련의 정보과학연구소(VNIIPAS) 사무실로 인도된다. 

사무실에는 소련과 바깥세상을 모뎀으로 연결한 유일한 컴퓨터가 있었다. 그 기계를 다룰 줄 아는 인물을 휘하에 두는 것이 이익이라고 판단한 VNIIPAS 소장은 클리오소프에게 기계에 접근할 권리를 무한정 허용한다. 원격회의로 만남을 지속하면서 이 생물학자는 서구의 ‘인터넷 사용자들’을 알게 되고, 인터넷 사용자들은 네트워크상에 소련 국민이 있다는 사실에 깜짝 놀란다. 수많은 특수부대 요원들이 매순간 그를 감시하는 중에도, 클리오소프는 아주 자유롭게 서구 사람들과 대화했다. 소련 언론들이 침묵하는 사건들을 알게 된 클리오소프는, 모든 연구자가 의무적으로 거쳐야 하는 검열기구인 글라브리트(Glavlit)를 거치지 않은 채 전자메시지를 주고받으면서 미국 잡지에 기사들을 게재했다.

물리학자이면서 자유의 투사인 안드레이 사하로프가 추방당해 고르키에 살고 있고, 몇몇 사람들이 그곳에서 위험을 무릅쓰고 반체제 인사의 글을 서구로 빼내려는 순간에, 클리오소프가 자신의 의도와 상관없이 철의 장막 밑에서 디지털 터널을 뚫고 있었다는 사실은 역사의 아이러니다. 정보국은 그의 ‘흉계’를 전혀 눈치 채지 못했다. 루넷의 전신이라 할 수 있는 소련의 개방적이고 자유로운 최초의 네트워크가 태동했던 때는 1987년 말, 페레스트로이카(재건)와 글라스노스트(개방)가 시작된 지 2년 후였다.

정보과학의 여느 모험담처럼, 소련의 웹 모험담은 국가기밀과 특수체제의 그늘에서 시작했다. 소련과 바깥세계를 연결한 최초의 네트워크 ‘데모스(Demos)’는 1988년 모스크바의 쿠르차토프(Kourtchatov) 핵연구소(KIAE)에서 빛을 본다. 이 연구소는 경비가 엄청나게 삼엄한 요새로 상당량의 원자 연구 자료를 소장했다. 원래 연구소의 내부 전산망으로 고안된 데모스는, 세 곳의 핵 및 사이버네틱스 연구 중심지인 노보시비르스크(Novossibirsk, 시베리아에 위치), 두브나(Doubna), 세르프호프(Serpoukhov)와 연결해 KIAE의 철저한 감시 벽 너머로 확장됐다. 데모스는 페레스트로이카와 소규모 민영기업의 창설을 허용하는 1987년 법을 활용했다. 그때 데모스의 팀 일부는 소련 최초의 인터넷 공급사(FAI)를 만들기 위해 KIAE를 떠나기로 했다. 렐콤(Relkom, ‘reliable communication’이란 의미)으로 이름을 바꾼 이 서비스 기업은 상당한 성공을 거뒀다. 렐콤은 1990년 9월 소련의 도메인 명칭 확장자 관리업무를 맡고, 1991년 말에 소련 전체에서 이미 800명 이상의 고객을 확보한다.

 
 
그 당시 프랑스 미니텔(Minitel) 사용자가 6백만 명이었던 사실과 비교하면, 이 수치는 극히 하찮게 여겨질 수 있다. 소련의 경제상황까지 말할 필요도 없이, 당시 소련의 정보과학을 짓누르고 있는 기술적 제약들을 고려할 때 이 수치는 이미 대단한 것이다. 렐콤은 주로 수공업 방식으로 작동했다. 가입자 전체는 단 하나의 모뎀에 접속된 단 한 대의 컴퓨터에 연결돼야만 소련 외부에 있는 자료에 접근할 수 있었다. ‘크렘박스(Kremvax)’(5)로 명칭을 바꾼 이 기계는 데모스의 창시자인 알렉세이 솔다토프(Alexeï Soldatov)의 개인 전화선으로 헬싱키 대학의 서버에 연결돼 있었다. 사실상 알렉세이는 쿠르차토프연구소 집행부로부터 특권을 인정받았다. 그는 자동으로 연결되는 국제선을(다시 말해 교환원이 연결하는 전화국을 통하지 않고) 이용했다. 그는 이 국제선에 자신의 시스템을 접속할 수 있었다. 알렉세이의 시스템은 아이러니하게도 몇몇 사람들에 의해 ‘유럽으로 열린 창’이라고 불렸는데, 이것은 표트르 대제가 상트페테르부르크를 빗댄 표현과 비슷하다.

이 장치는 오늘날에 비하면 속도가 엄청나게 느렸다. 렐콤의 사용자들은 모두 다 초당 9,600바이트(9.6k) 용량인 모뎀 하나에 접속한 단 한 대의 컴퓨터로 외부세계와 연결됐다. 이 용량은 그 시절 가장 기초적인 ADSL(512k)보다 56배 덜 빨랐다. 그러나 렐콤은, 매우 수공업적인 특성에도(혹은 그런 특성 때문에), 소련에서 최초로 인터넷 사용자 공동체를 출현할 수 있게 했다.

그 시절 개인 컴퓨터는 평균 월 급여의 12배에 달했다.(6) 그리고, 러시아어 사용 웹 공동체는 젊은 엔지니어 중심으로 구성됐다. 이들은 주로 연구소나 실험실에서 네트워크에 접속했다. 연구소나 실험실은 대부분, 연결된 터미널을 설치하는 것이 전략적 이익에 부합한다고 보는 곳이기 때문이다. 역설적이지만 얼마 되지 않은 정보처리기술자들이 ‘talk.soviet.politics’, ‘talk.soviet.culture’ 등과 같은 인터넷 주소의 토론방에서 아주 자유롭게 대화하는 곳은,  결과적으로 보안기구들이 통제하는 고립된 공간 내부였다. 렐콤 사용자들은 소련의 해체에 대해 실시간으로, 열정적으로 대화했다. 이들의 정보교환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유즈넷(Usenet)’의 외진 곳에서 이뤄지고 있다. ‘유즈넷’은 ‘딥웹(Deep Web)’의 일부가 됐다.

렐콤의 작은 공동체는 사건들에 대해 토론하는 것에 만족하지 않았다. 이 공동체는 1991년 8월에 실패한 쿠데타가 발생했을 때도 능동적으로 참여했다. 그때 민간과 군부의 정통 공산주의자들은 권력을 탈취해 미하일 고르바초프의 개혁에 종말을 고하려 했다. 쿠데타 가담자들에 의해 “건강이 좋지 않아 크림반도에서 요양 중”이라고 알려졌던 공산당 서기장은, 실은 가택연금 상태였다. 당시 러시아 소비에트 연방 사회주의 공화국(RSFSR) 대통령이었던 옐친은 RSFSR의 상원이 있는 모스크바 백악관에 머물고 있었다.

쿠데타 가담자들은 KGB 직원 일부의 도움을 받아 서구 언론과 소련 국민들의 반응을 막기 위해 정보를 차단했다. 쿠데타 가담자들은 국제 전화선을 끊고 라디오와 텔레비전 방송을, 반복 실행되는 오페라로 대체했다. 라디오와 텔레비전 방송은 쿠데타 세력이 가담한 간단한 뉴스 속보를 내보낸 뒤 바로 끊겼다. 그런데 KGB 요원들이 솔다토프의 자동라인을 끊는 것을 잊어버렸다. 핵연구소로부터 접근할 수 있는 하나의 라인이 쿠데타 뉴스를 전달할 수 있을 것이라고는 아마 요원들이 상상하지 못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때부터 렐콤은 관련 상황에 대해 토론과 정보를 실시간 제공하는 유일한 통로가 됐다. 렐콤의 토론방에 모스크바 상황을 걱정하는 서구의 대학교수들과 기자들이 모여들었다. 렐콤 사용자들은 서구의 기자들과 대학교수들에게 자신들이 창문으로 본 것을 이야기하고, 심지어 옐친이 작성한 성명서를 외국과 지방에 전파했다. 그때 옐친은 언제든지 공격준비가 돼 있는 특수부대에 포위돼 있었다. 쿠데타가 지속된 3일 동안, 사용자가 들끓어 포화상태가 된 렐콤 네트워크는 역사상 최초로 디지털 반란의 현장이 됐다. 소련의 렐콤 사용자들은 자신들이 무릅쓰고 있는 위험을 인식하고 있었다. 사용자 중 한 명은 서구의 한 기자에게 “우리는 남은 삶 동안 감옥에 갈 정도로 충분히 많은 정보를 전달하고 있다”라고 썼다.(7) 

렐콤의 경험은 미래의 수많은 변화를 예고했는데, 특히 루넷의 인프라 구조를 결정했다. 모스크바 교외의 M9이라는 이름으로 알려진 핵연구소 건물에 설치한 크렘박스라는 기계장치는 자신의 사용자들을 외부 서버로 접속시켰다. 원래 크렘박스는 이미 알려진 것처럼 컴퓨터 한 대와 모뎀 하나로 구성됐다. 그 컴퓨터와 모뎀은 건물의 외진 곳에 놓였다. 소련이 해체된 후에도 사용자 수가 증가하면서 이 기계장치는 점점 커졌다. 서버는 얼마 지나지 않아 크렘박스가 위치한 방 전체를, 그리고 층 전체를, 마지막으로 건물 전체를 채웠다. 오늘날 M9은 러시아어 사용 웹의 신경센터가 됐다. 러시아 혹은 중앙아시아에서 발송하는 거의 모든 정보는 극도로 보안이 철저한 이 건물을 경유해 전달된다.

렐콤은 또한 아주 초보적인 1세대 웹 기업을 출현시켰다. 얀덱스(Yandex)의 창업자이자 경영자인 아르카디 볼로이는 친척들의 소식을 듣기 위해, 정보차단을 우회해서 뚫으려던 1991년 8월에 이 망(네트워크)을 발견했다. 그는 당시 처음으로 컴퓨터를 통한 커뮤니케이션 시스템을 창조했고, 이 시스템 위에 자신의 제국을 건설했다.

1993년 인터넷을 경유하는 정보량이 증가하자, 볼로이는 얀덱스(Yandex, ‘Yet Another Index’라는 의미)를 창설했다. 이 콘텐츠 분류 서비스회사는 국내시장에서 인정받지 못한 서구의 솔루션들을 희생양 삼아 명성을 얻었다. 이 시기에 서구는 ‘최초의 인터넷 혁명’을 맞이했다. 라이코스(Lycos)나 야후!(Yahoo!) 같은 검색엔진이 인터넷을 침범했지만, 러시아 정착에는 애를 먹었다.

여기에는 여러 이유가 있었다. 소련 해체로 독립한 국가들은 특히 러시아를 비롯해 수십 년간 정보 분할과 통제의 흔적을 보존하고 있었다. 이 독립국가들을 유럽과 미국에 연결하는 케이블들은 수가 많지 않았고 질도 낮았다. 그래서 서구에 자리 잡은 서비스들은 발전하는 데에 한계가 있었다. 러시아는 결과적으로 많은 영역에서 자체 서비스를 발전시켜야 했다. 이런 상황에서 얀덱스가 탄생했고, 덜 알려진 다른 수많은 사이트가 생겨났다.

그 외에도 1990년대에 외부 투자자들이 러시아에 정착하는 것을 망설였기 때문에 디지털 인프라가 취약했다. 러시아의 사법 시스템은 확실하지 않았고, 경제가 불안정했기 때문이다. 실리콘 밸리의 거인들은 러시아에 신경 쓰지 않고, 그 넓은 공터를 현지의 자발적 행동에 맡겨버렸다. 인터넷 접근시장도, 처음에는 전국 단위의 몇몇 거대 통신회사들과 수많은 지역과 시의 조직들이 나눠 활용했다. 오늘날에도 여전히 1만3천 개 이상의 인터넷 공급회사가 존재하는데, 프랑스에는 단지 10여 개의 회사만 존재한다. 수많은 도시가 자회사뿐만 아니라, 자기 도시에서만 배타적으로 열람할 수 있는 내용물들과 사이트들을 갖춘 일종의 내부 전산망들을 갖추고 있다.

경제위기와 시설물의 노후화에도 러시아는 1990년대 말의 인터넷 붐을 피하지 못했다. 그러나 러시아의 인터넷 붐은 세계화된 망의 밖에서 발생했다. 이런 이유로 러시아는 망의 문화적, 기술적 실천에 대한 몇 가지 특수성이 있다. 온라인 게임에서 러시아의 악명은 이 시기로 거슬러 올라간다. 밴드패스필터(band pass filter, 특정 주파수 사이의 신호만 통과시키는 필터)의 제약 때문에 자체 서버에서만 게임을 했던 러시아 게이머들은 특별한 행동규칙과 표현규칙을 발전시켰는데, 이 때문에 오늘날에도 다른 게이머들과 구별된다.

과학문화도 이 사건에서 한몫을 한다. 냉전 기간 내내 수많은 직원, 엔지니어, 간부를 거느린 소련 군산복합체의 영향력과 기술교육 중시 경향 때문에 주민의 상당수가 정보과학에 빨리 적응했다. 소련 시절에는 단기 교육을 실시하는 지방의 ‘기술연구소’가 엄청난 인기를 누렸다. 수많은 시민들이 당시에 복잡한 시스템 운용체계 기술을 습득했다.

1990년대 말, 러시아 사회는 서구 주민들에 비해 전반적으로 정보과학에 대한 교육수준이 높았음에도 실업난을 겪었다. 이때 사이버범죄라는 또 다른 국가적 디지털 특수성을 가진 토양을 일궜다. 더 나은 수입을 원하면서도, 유럽이나 미국으로의 이민은 거부하는 수많은 컴퓨터 기술자들에게 신용카드 해킹은 저항할 수 없는 유혹이다. 마피아들이 조직되고, 이런 활동들을 중심으로 번성한다. 그리고 2000년대 초 전(全)세계 사이버범죄의 60%가 ‘러시안 비즈니스 네트워크(Russian Business Network)’에 의해 저질러졌다.(8) 미국과(특히 2016년 민주당전국위원회 사이버 공격) 유럽에서 발생한 사이버 공격에 연루된 수많은 해킹은 ‘러시안 비즈니스 네트워크’에 의해 이뤄졌을 것이다.

2000년대 초, 루넷(Runet)은 새로운 양상을 맞았다. 에너지 수익이 투자에 유리한 환경을 조성하고, 장기 성장의 길을 열었다. 러시아는 곧바로 제2차 인터넷 혁명(웹 2.0)에 들어섰다. 제2차 인터넷 혁명은 소셜 네트워크의 폭발적인 증가와 구글 등 검색엔진의 출현이 특징이다. 러시아와 나머지 세계를 연결하는 케이블 부족 문제는 루넷의 발전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던 광섬유케이블의 개통으로 2005년 완전히 해결됐다. TEA(‘유럽과 아시아 횡단’이라는 뜻)라고 명명된 이 케이블은 시베리아횡단철도 및 만주횡단철도를 따라 런던과 홍콩을 연결한다. 유럽과 아시아 간의 자료교환 장치에서 러시아는 비로소 디지털 주변부를 벗어나 중심부에 도달했다.

그렇다고 서구의 경쟁자들이 1990년대와 2000년대 초 러시아에 생겨난 서비스들을 망하게 한 것도 아니었다. 페이스북의 전(全)세계적 발전은 브이콘탁트(VKontakte)의 발전과 나란히 이뤄지고 있다. 그리고 얀덱스는 러시아에서 구글보다 훨씬 더 앞서 나가고 있다. 볼로이(Voloj)는 검색엔진의 연산방식을 처음부터 러시아어 대상으로 만들어졌고, 반면 미국 거대 회사들의 연산방식은 오랫동안 러시아어의 다양한 어미 변화를 구분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러시아는 드미트리 메드베데프(Dmitri Medvedev) 대통령 정권 하에서(2008~2012) 개방을 하고 서구기업들과 긴밀한 협조관계를 유지했으나, 그 뒤로는 서구와 긴장관계를 유지해 왔다. 루넷의 특수성들은 이제 크렘린의 국제정치를 위한 하나의 도구가 됐다. 크렘린은 디지털 공간을 자국의 강력한 야망을 투영하는 장소로 만들었다. 이 영토에서 러시아는 여전히 으뜸 패를 쥐고 있다.   


글·케벵 리모니에Kevin Limonier
파리 8대학 프랑스 지정학 연구소 조교수.

번역·고광식
파리 8대학 언어학박사로 대학에서 프랑스어를 가르치고 있다. <르몽드 세계사 3> 등의 역서가 있다.

(1) 알렉사(Alexa, 미국의 인터넷 트래픽 집계회사)의 자료.
(2) Catherine Morin-Desailly, <L’Union européenne, colonie du monde numérique?>(유럽연합은 디지털 세계의 식민지인가?), rapport d’information(정보보고서) n° 443, Sénat, Paris, 20 mars 2013.
(3) 물리학자이기도 한 솔제니친은 특별감방 16호에서 거의 1년을 근엄하게 보냈다. 이 감방에는 현재 중요한 연방 사이버 보안 기업이 입주해 있다.
(4) 1980년대 군산복합체 위원회의 기능에 대한 블라디미르 베트로프(Vladimir Vetrov)의 폭로, 이 폭로는 일명 ‘프랑스 영토 감시국 요원들이여 안녕’이라고 명명됨.
(5) 크렘박스라는 명칭에는 에피소드가 있다. 농담을 좋아하는 어떤 네덜란드 사람이 당시의 인터넷사용자들로 하여금, 공산당 서기장 콘스탄틴 체르넨코(Konstantin Tchernenko)가 직접 크렘박스(Kremvax)라 불리는 신비한 컴퓨터를 통해 네트워크를 서핑하고 있다고 믿게 만들었다. [‘박스(vax)’는 당시에 서버를 지칭하기 위해 흔히 사용된 접미사였고, ‘크렘(krem)’은 크렘린을 지칭한다.]
(6) 러시아연방통계국의 통계에 따른 것이다. 터무니없이 비싼 컴퓨터 가격은 부분적으로, 소련의 아프가니스탄 침공 이후(1979년) 미국이 시행한 전자제품 통상금지령으로 설명될 수 있다.
(7) ‘Talk.soviet.politics’의 데이터베이스, 1991년 8월 20일.
(8)  Peter Warren, <Hunt for Russia’s Web criminals>, The Guardian, Londres, 15 novembre 20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