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마저도 희미한 알제리 학살 그후 20년

2017-07-31     피에르 돔 |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특파원

1991년 일어난 알제리 내전, 이후 ‘암흑의 10년’이 계속됐다. 이 시기에 일어난 많은 사건들 중에서도, 특히 1997년 여름에 일어난 민간인 대량학살사건들은, 정부군과 무장이슬람그룹의 대치로 인해 이미 황폐화된 알제리를 비탄에 빠뜨렸다. 이 참혹한 기억을 지워버리려는 정부의 의지와 사면법들은, 오늘날 모든 국민들이 상처를 치유할 수 없게끔 억압한다.

1997년 9월 22일 밤, 벤탈라. 알제의 외곽 끝자락에 위치한 이 작은 농촌마을에서 무장이슬람그룹 GIA에 의해 단 몇 시간 만에 400명이 넘는 주민이 피살됐다. 다음날, 프랑스 AFP통신 소속 사진기자 호신 자우라르는 가족이 살해당한 한 여인의 비통한 모습을 카메라에 담는다. 기독교의 상징적 성상인 피에타상을 연상시키는 이 여인의 모습은 <벤탈라의 마돈나>로 명명되고, 전 세계의 신문에 배포돼 5년 전부터 계속돼 온 알제리의 폭력에 대해 관심을 집중시켰다. 그로부터 3주전에 일어났던 비슷한 학살사건으로 인해, 벤탈라에서 불과 몇 킬로미터 떨어진 라이스라는 마을이 피로 물들었고 1천 명이 넘는 희생자가 발생했다. 

이후 멈추기는커녕 더욱 극심해지는 대량학살로 인해 알제리는 충격에 빠졌다. 그 다음 달에는 오랑시의 서쪽에 위치한 시그시에서 50명이 살해됐다. 12월에는 암미 무사(윌라야 드 를리잔의 우아르스니 산지대)에서 400명의 희생자가 나왔다. 1998년 1월에는 하드 체칼라(우르스니 산지대)에서 천 명 이상이 살해됐고, 며칠 후 시디 하마드(미티자 평원지대)에서 103명이 살해됐다. 군이나 지식인, 외국인을 대상으로 폭력이 자행됐던 알제리 내전의 참상은 1997년, 민간인 대량학살로 이어지면서 더욱 참혹한 양상을 띠며 알제리 국내는 물론, 전 세계에 충격을 안겨줬다.

 2017년 봄 벤탈라. 과거 농촌의 모습은 전혀 찾아볼 수 없다. 미티자 평원의 급속한 도시화로 인해 옛 농촌 마을의 낮은 집들 사이의 골목길들은 개량됐다. 20년 만에 집들은 붉은 벽돌이나 회색 시멘트로 올린 2층집이 됐다. 거리들은 오늘날 알제리 마을들의 특징이 된 붉은색과 회색이 뒤섞인 조잡한 모습을 드러낸다. 이 음울한 배경 속에서 유일하게 매력적인 요소는, 마을 초입에 당당히 자리 잡은 새 모스크다. 여성은 스카프로 머리카락을 완전히 덮고, 눈에 띄지 않는 색의 외투로 몸을 감싸야만 외출이 가능하다. 공공장소는 남성들이 장악하고 있다. 남성들은 대개 수염을 기르고, 무슬림이 기도할 때 입는 ‘카미’라고 불리는 젤라바(무슬림 남성들의 전통복장. 보통 발목 위까지 내려오는 긴 튜닉 형태-역주)를 입고 있다.

금지된 학살의 기억

 “그날 밤 제 삼촌 가족이 몰살당했어요. 간신히 살아남은 조카는 바로 이사했죠.” 우리와의 대화를 허락한 라쉬드라는 한 30대 남성이 말했다. 주변 시선을 의식해, 인터뷰는 우리 차 안에서 이뤄졌다. 라쉬드는 실명 공개를 꺼렸다. “정부 측에서 당신들이 쓴 기사를 본다면 문제가 생길 수 있어요.” 일정한 직업이 없는 그는 한 카페에서 불법노동을 하고 있다. 일과를 마치면 주인은 그에게 1천 디나르(10유로가 채 안 된다)를 지급한다. 삼촌의 가족을 죽인 살인자들 대부분은, 만약 사살당하지 않았다면 온 나라를, 어떤 이는 벤탈라를 자유롭게 활보하고 있을 텐데…. 라쉬드는 그들에 대해 원한을 품고 있지 않을까?

“아니요, 저는 그들을 용서했어요. 그들을 테러리스트라고도 생각하지 않아요. 그들은 단지 어리석어서 자신들의 종교를 진정으로 알지 못했던 이들입니다. 진정한 무슬림은 살인을 해서는 안 되니까요!” 밖에서는 확성기를 통해 기도하러 오라고 사람들을 부르는 승려의 우렁찬 목소리가 울려 퍼지고 있었다. 카미를 입은 남성들의 무리가 우리 차 앞을 지나 모스크를 향한다. 대화를 마무리하고 군중에 합류하기 전에 라쉬드는 우리를 향해 다음과 같이 큰소리로 신앙을 고백한다. “난 알라만으로 충분해요, 그는 나를 잘 지켜줄 겁니다.”

 1992년부터 2000년대 초반까지 알제리를 피로 물들인 ‘암흑의 10년’ 중에서도, 1997년은 가장 참혹한 해로 기록된다. 정부는 무장이슬람집단들의 활동을 ‘잔류 테러행위’로 규정했고 그 때부터 그들은 주로 산악지대와 알제리 남쪽 지방에서 활동을 이어가게 된다. 1997년의 대량학살들은 공통점이 있다. 그것은, 정부에서 아무런 조사도 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게다가 언론의 접근도 금지됐고, 발표된 희생자의 수, 심지어는 살해자들의 신원에 대해서도 논란과 의구심을 일으켰다. 벤탈라의 학살에 관한 확실한 증거는 없다. 하지만 수많은 알제리인들은 “군이 대량학살을 자행했다”고 확신하고 있다. 

  부가라도 수난을 당한 도시들 중 하나다. 이 큰 농업도시는 벤탈라에서 20여 킬로미터 떨어진 곳에 위치한 미티자 평원의 중심에 자리 잡고 있다. 아주 서민적인 주택단지 달라스의 1층에 35년 전부터 살고 있는 압달라 악군 박사는 지역 가정의다. “제 환자들이 테러리스트가 되는 걸 수도 없이 봐왔습니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테러리스트들에게 죽임을 당하고 부상을 입었어요.” 우리와 테러리스트들을 만나게 해줄 수 없을까? “절대 안돼요. 당신들이 그들에게 질문을 시작하는 순간, 바로 당신들은 경찰에 체포될 겁니다!” 우리가 아주 조심해도? “농담하는 겁니까? 여기는 밀고자 천지라고요!” 그렇다면, 희생자들의 가족은 만날 수 없을까? “그것도 불가능해요. 20년 전 일이지만 사람들은 너무나 고통스러워하고 있어요. 그 일에 대해 떠올리기도 싫어합니다.”

 결국, 우리끼리만 부가라의 변두리 지역, 하우슈 부리라프 케미스티로 갔다. 1997년 4월 22일 밤, 1백 명 넘게 살해된 곳이다. 당시 24세였던 누리아의 눈앞에서 두 자매와 질녀가 살해당했다. “겉으로는 어떨지 몰라도, 제 내면은 완전히 파괴됐어요.” 누리아는 무장그룹의 과거 조직원들에 대한 대사면과 군에 사살당한 이들의 가족에 대한 재정지원을 내용으로 하며 2005년 투표에 부쳐진 ‘국민화해헌장’에 동의할까? “2005년부터 많은 것이 제자리를 잡고 있어요. 정부가 취한 조치는 옳아요. 이제 우리에게는 식수와 가스도 있어요. 엘 함둘리야(신이시여 찬양을 받으시옵소서)!”

 누리아의 조카 칼레드가 다가왔다. 그의 어머니가 죽었을 때, 칼레드는 11살이었다. “저는 그 법에 반대해요. 살인자들이 자유를 얻는다고요? 말도 안 돼요!” 아직 독신인 그는 참극이 벌어졌던 집에서 이모와 함께 살고 있다. “저는 가끔 도심에서 테러리스트였던 이들을 마주쳐요. 그러면 저는 다른 길로 돌아서 갑니다.” 그는 직업도, 땅도 없다. “저는 사람들이 불러줄 때 남의 땅에서 일을 합니다. 일당은 1,200디나르(10유로)예요.” 청년취업지원을 위한 정부대출을 활용하는 것은 어떨까? “그런 건 절대 안 해요. 그런 지원은 하람(종교적으로 부정한 것)입니다! 이자를 상환해야 하기 때문이죠.”

 결국 이슬람이 대화의 핵심주제가 됐다. “저는 신실한 신자예요. 매일 다섯 번 기도를 하죠. 대부분은 모스크에 가서 합니다. 당신은 무슬림인가요?" 무슬림도, 신자도 아니라고 대답하자, 칼레드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그렇다면 당장 나가요! 당신에게 할 말 없소!”

전쟁에 졌지만 민심을 장악한 이슬람교

 칼레드나 라쉬드의 극단적 종교성은 특별한 것이 아니다. 이런 현상은 학교에서, 거리에서, 건물 아래서, 즉 전국 각지에서 나타나고 있다. “2000년대 초반 테러가 끝나갈 무렵, 이슬람주의자들은 압박을 늦췄고 우리는 몇 년간 자유를 맛봤죠. 하지만 이후 그들은 세력을 회복하고 자신들의 법을 강요했어요”라며 의사 악군이 그 당시를 회상한다. 오늘날 사우디아라비아의 메카와 메디나에 있는 모스크 다음으로 ‘세계에서 가장 웅장한 모스크’를 알제에 건립하는 것을 선도계획으로 삼은 정부의 가호로 1만 개를 밑돌던 모스크의 수는 20년 만에 2만 개를 넘어섰다.(1)

12만 신자를 수용할 수 있고 ‘부테플리카 모스크’라 불리는 이 모스크는 연말 전에 준공될 것이다. 악군 박사 같은 많은 세속주의자들은 “이슬람주의자들이 전쟁에는 패했지만 사람들의 마음을 얻었다”고 생각한다. 오늘날 수도의 지식인들이나 예술가들의 세계 외에는, 자신이 무신론자라고 밝히거나 적어도 보란 듯이 종교적 규율을 무시하는 일은 불가능하다.

“저는 우리 동네에서 머리카락을 드러내 놓고 거리를 활보하는 유일한 여성입니다. 저는 매일 이웃 여자들의 따가운 눈초리를 견뎌내요. 그들은 자신들의 잣대로 저를 정숙하지 못하다고 판단합니다. 그들이 만약 제가 신을 믿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면 어떻게 되는지 아세요? 틀림없이 저는 이 동네를 떠나야 할 겁니다.” 지젤 대학교의 인류학 교수, 59세의 하실바가 말한다. 그는 공산주의자인 남편과 함께 살고 있고, 알제에서 동료를 만날 때면 와인 병을 딴다.

“와인을 마시기 전에 우리는 집을 완전 봉쇄해요! 문과 창문들을 닫아걸고, 커튼을 내리고…. 정당이 금지돼 비밀회합을 하던 시절보다 더 심해요.” 하실바의 남편이 농담처럼 말한다. 많은 지방도시에서처럼 지젤에서는 술을 팔던 식당들이 하나둘씩 문을 닫는데, 더러는 왈리 도지사의 직접 지시로 폐업하기도 하고 더러는 주인이 허가증을 갱신하려 할 때 난관이 너무 많아서 영업을 중단하기도 한다. 하시바는 말한다.

“우리가 알제에 있는 식당에 가면, 술을 마시는 사람은 제 남편 뿐이거든요. 그 때 저희를 바라보는 눈길들이 지긋지긋해요.” 

용서를 강요하는 정부, 진통제가 된 종교

 처음에는 이와 같은 과도한 종교심에 무척 놀랄 수도 있다. 이슬람교로 인해 그렇게 고통 받았던 한 사회가 어떻게 이 정도로 그 교리들에 동화될 수 있을까? 정신분석자 칼레드 아이트 시드훔은 알제리에 있는 그의 병원에서 1990년대 비극의 여파로 고통 받는 수많은 환자들을 대한다. 그는 조심스럽게 “이슬람교의 종교생활로 되돌아가는 것은 알제리에만 국한된 일이 아니다”라는 사실을 강조한다. 그것은 “전 세계적 현상”이라는 것.

 그래도 알제리인만의 특징이 있지 않을까? “있습니다. 식민지화와 독립전쟁으로 인한 폭력에 뒤이어 발생한 20년 전의 폭력은 오늘날 모든 이들이 고통 받는 정신적 외상의 원인으로 작용합니다. 이슬람교는 마치 진통제 같은 역할을 하지요. 문제는 어떤 진통제는 강한 의존성을 수반한다는 데 있는데, 종교의 경우가 그렇습니다. 이 ‘약’의 판매를 정부가 부추기기 때문에 더욱 큰 문제이지요.” 

 일반적으로 진통제는 근본적인 치료를 기다리는 동안 고통을 완화하기 위한 목적으로 쓰인다. 그런데, 트라우마를 치료하기 위한 근본적인 치료는 전혀 이뤄지지 않았다. 피해자인 동시에 가해자이기도 한 알제리인들에게 그토록 큰 고통의 원인이 된 이 무시무시한 폭력에 대해 말할 기회를 줄 생각을, 정부는 단 한 번도 하지 않았다. 튀니지의 부르기바와 벤 알리의 독재가 막을 내린 후 설치된 진실존엄위원회(2)나, 모로코의 하산2세의 독재가 끝난 후 설치된 공정화해위원회 같은 단체도 전혀 찾아볼 수 없다. 2005년, 압델아지즈 부테플리카 대통령은 폭력의 장을 넘기고 다시금 평화의 시대가 도래하게 하려면, 반군암살자들과 고문경찰관들을 ‘용서’하고 사면해야 한다고 국민을 설득했다. 칼레드 아이트 시드훔은 말한다.
 “과거는 결코 죽지 않습니다. 2005년의 국민화해헌장은 트라우마를 치유하는 대신 은폐하며 희생자들에게 용서를 강요하기 때문에 가증스럽습니다. 피해자가 가해자를 용서하겠다고 생각할 수는 있을지 몰라도, 자신을 학대한 사람과 친구가 되는 일은 인간의 마음속에 실재하지 않아요.”

 알제리에는 심리분석가가 겨우 5명 있고 심리학자들의 조직망도 매우 부실하다.(3) 중증환자들은 약물치료와 결박, 전기충격 등의 방법이 고작인 정신병원에 보내진다.(4) “테러와 관련된 심리적 문제로 고통 받는 환자가 찾아오면 저도 그 사람을 어디로 보내야 할지 모릅니다”라고 악군 박사는 불만을 터뜨린다. “그보다 나쁜 것은, 더 이상의 의료서비스를 받을 수 없는 그 사람이 결국 구마사(마귀를 몰아 내쫓는 사람-역주)를 찾아갈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구마(驅魔)는 고대 이슬람에서 행하던 관습으로, 구마사들은 심리적 장애가, 악한 공기의 정령이 환자의 정신을 장악해서 생기는 것으로 본다. 그래서 구마사는 코란의 특정 장을 낭독하거나 짐승을 희생물로 바치거나, 다양한 물질을 주입시켜 공기의 정령을 환자의 몸에서 끌어내려 한다. 이 중 어떤 방법들은 환자를 죽음에 이르게 할 수도 있다. 

 2005년의 국민화해헌장은 트라우마 뿐만 아니라 책임소재까지도 은폐한다. 헌장의 조항에는 ‘테러리즘’이라는 단어는 사라지고 대신 ‘국가적 비극’이라는 표현이 쓰였다. 비극에 대한 책임은 오직 신들이나 운명만이 질 수 있다. “저는 피해자라고 생각합니다”라고 GIA 소속 무장그룹인 죽음의 군대의 옛 대원이었던 오마르 쉬키가 털어놓았다. 죽음의 군대는 당시 자멜 지투니가 이끌었는데, 극도로 잔인했던 그는 특히 티비리네의 수도사들을 납치해 살해한(1996년 봄) 혐의를 받았고 1996년 7월에 사망했다.

 “군이 제 형제 한 명을 살해했고, 저도 6년 간 사랑하는 가족들과 떨어져서 반군에서 살 수 밖에 없었어요.” 옛 알제리 ‘테러리스트들’은 대개 인터뷰를 꺼린다. 그래서 우리는 한밤중에 외딴 거리에 주차를 하고, 차 안에 숨어서 그들을 만났다. 비록 기소 받지 않게 보호하는 사면판결을 받았지만, 그들은 경찰의 감시에서 결코 자유로울 수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쉬키 씨와 마찬가지로 모두 자신들은 피해자라고 생각한다. 

 “저는 운이 좋아요. 아무도 죽이지 않았거든요. 양심에 거리낄 게 없어요! 사이드 C.가 믿기 어려울 만큼 확고하게 말했다. 그는 옛 GIA 지부 수장이었고 핫산 하탑과 함께 살라피스트 선교전투그룹(GSPC)을 공동설립했다. GSPC는 1998년 이슬람해방전선(FIS)의 무장분파인 이슬람해방군(AIS)과 GIA의 뒤를 이은 조직이다. 신앙심이 깊은 사이드 C.는 알제의 외곽에 위치한 자신이 사는 비르 투타 지역 모스크의 ‘셰이크(부족장의 어른, 지혜로운 사람이라는 뜻으로, 이슬람의 종교 지도자를 뜻함-역주)’다.(5)

“나는 아버지가 이룬 업적을 다 알고 있어요. 나는 아버지가 자랑스럽습니다!” 압델하크 라야다의 아들 렌이 힘주어 말한다. 압델하크 라야다는 알제리 ‘테러’의 또 다른 거물로, 현재 바라키에 정착해 건설자재 무역업자로 전향했다. “아버지는 테러리스트가 아니었습니다. 그는 무기로 정치를 하는 정부에 반대하는 정치인이었습니다. 그뿐입니다. 게다가 부테플리카도 자신이 1992년에 청년이었다면, 반군에 가담했을 것이라고 말했어요. 무슨 말씀인지 이해하시겠지요? 부테플리카가 그런 말을 했다면 저희 아버지는 범죄자일 수가 없지요. 아닙니까?!” 우리가 압델하크 라야다와 만날 거라는 정보를 입수한 알제리 정보기관이 우리의 만남을 방해했다. 그의 아들과 몇 분 간 대화하자, 사복경찰이 우리를 제지하러 왔다. 우리는 그 취재로 인해 알제의 한 경찰서 건물에서 두 시간 동안 심문을 받고 풀려났다. 

화해 없는 화해헌장, 일상을 잠식하는 두려움

 ‘국민화해’ 헌장이 공포된 지 어느덧 10년 이상이 흘렀지만 알제리 사회에 화해가 이뤄지기는커녕, 모두 다른 사람에게 폭력의 책임을 떠넘기고 있다. 1989년에 결성돼 1992년 3월에 해체된 FIS를 대대적으로 지지했던 유권자들은 아무런 후회도 하지 않는다. “그래요! 이 곳 사람들 중 90%가 그랬듯이 저도 FIS에 투표했어요”라고 밥 엘 우에드시의 에스 수나 모스크 근처에서 종교전문서점의 점원으로 일하는 사이드가 분명히 밝힌다. 그 당시 FIS의 카리스마 넘치는 지도자 알리 벨하지가 열정적인 목소리로 이 모스크의 확성기를 통해 “이슬람 국가(IS)를 위해 우리는 싸운다. 그리고 IS를 위해 우리는 죽을 것이다!”라고 외칠 때 이 지역의 거리는 기도하는 남성들로 넘쳐났었다.

이웃의 많은 사람들처럼 사이드는 수염을 기르며 항상 카미를 입는다. “당시 FIS는 정말 평화적으로 권력을 장악할 수도 있었을 겁니다. 그런데 정부가 지레 겁을 먹었던 거죠. 그래서 정부가 먼저 폭력을 행사한 거예요.” 현재 사이드는 자신의 조국이 이슬람 국가가 되기를 끊임없이 염원하고 있다. “하지만 저는 폭력적인 방법은 원치 않아요. 저는 살라피스트입니다. 선함과 정당함이 진정한 살라피즘의 길이거든요.”

 1992년 이슬람교 교리의 통치를 받는 나라에 사는 위험을 안는 것보다 오히려 무력 쿠데타를 더 바랐던 이들도 전혀 후회하지 않는다. 정확한 집계는 없지만 희생자 수는 대략 20만 명으로 추산된다. 우리가 “만약 쿠데타가 없었더라면 그토록 엄청난 희생자를 내지는 않았을 수도 있다”고 말하자, 셰리파 케다르는 즉각 화를 내며 말한다. “제가 이토록 고통을 받았다는 것을 아시나요? 머리에 아무 것도 쓰지 않은 채 거리를 활보할 권리를 얻기 위해서입니다.” 1996년 어느 날 밤, 케다르의 자매와 형제가 바로 그의 눈앞에서 살해됐다. 그녀는 현재 ‘테러’ 희생자들의 권리를 위해 투쟁하는 자자이루나(우리 알제리: 알제리 국가(國歌)명이기도 함-역주)협회의 회장이다. “군은 테러에 대항하는 유일한 방패였어요. 그런데 요즘은 우리가 의심을 받고 있어요. 시위를 하면 경찰이 우릴 체포합니다!” 대개 프랑스어를 사용하는 세속주의자들은 1992년에 이뤄진 군부(반이슬람주의)의 권력장악에는 찬성하면서도, 동일한 세력이 장악한 현재의 권력은 지나치게 '비민주적'이라며 이를 반대한다.

 20년 전의 암살자들은 분명 괴물이라는 점에 모두 동의한다. “우리가 어떻게 이 지경에까지 이렀는지 파악하기 위해 다함께 자문해 보는 일이 불가능하다”며 파리와 알제에서 활동 중인 알제리 심리학자 카리마 라잘리는 유감을 표한다. “도대체 우리 사회의 무엇이 이런 폭력을 낳았을까요? 괴물의 형상이 창조돼 그것이 자기성찰을 전적으로 방해합니다. 그런데 그 살인자들은 알제리 사회에서 나온 인간들이에요. 만약 이들이 우리에게 교훈을 줄 수 있다는 전제에서 출발하지 않으면 우리는 결코 트라우마를 극복해내지 못할 겁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렇게 하지 못하고 대신 그들을 괴물로 치부해 벽장에 가둬버렸어요. 하지만 괴물들은 벽장을 정말 좋아합니다! 가둘수록 점점 거대해지죠. 그리고 마침내 벽장을 부수게 됩니다.”

 벽장이 부서지는 소리를 기다리는 동안 두려움은 알제리인들의 일상생활 속에 자리 잡기 시작한다. 카리마 라잘리처럼 우리와 면담한 많은 이들은 폭력이 돌아 올까봐 두려워하고 있다. 건강이 극도로 악화된 압델아지즈 부테플리카 대통령의 연임을 둘러싼 ‘정치적 불확실성’이라는 막연한 두려움은 내부를 잠식하며 점점 확산되기만 한다. 장시간 혼자 밖에 있는 것에 대해 모든 여성이 가지는 두려움, 외출하는 것에 대한 두려움, 밤에 집밖에 있는 것에 대한 두려움, 경찰과 밀고자들에 대한 두려움, 모르는 사람은 곧바로 적으로 여기는 모든 타자에 대한 두려움, 군의 총탄에 사살당해 거의 매일 신문들에 오르내리는 현역 이슬람주의 무장세력에 대한 두려움 등이 그것이다.(6)

또한, 시민들이 함부로 고소하지 못하도록 법으로 보호하고 있는 ‘전향한’ 옛 이슬람주의 활동가들에 대한 공포도 있다. 압델하크 라야다의 집 주소를 들고 그의 집으로 가는 길을 물었을 때, 구경거리를 좋아하는 바라키 지역사람들의 겁에 질린 눈동자와 마주쳐야 했다. “여기 사람들은 다 그가 어디 사는지 알아요. 하지만 아무도 당신들에게 알려주지 않을 거요! 그건 너무 위험하니까요!”

부테플리카 대통령이 뇌졸중을 앓게 된 2013년 이래, 알제리인들은 말도 못하고 걷지도 못할 만큼 신체가 마비된 노인의 지배를 받고 있다. 지난 5월 총선 때, 내무부 장관이 투표율을 38%라고 공인했지만 확인이 불가능한 이 수치는 부풀려졌을 공산이 크다. 알제의 아가역 플랫폼에서 만난 젊은 영어교사 타렉은 말한다. “오늘날 사람들은 정부가 석유 판 돈을 사취하는 것을 개의치 않아요. 그들은 두려운 겁니다. 그들은 다만 폭력이 다시 시작되지 않기만을 바랄 뿐입니다” 
 

글·피에르 돔 Pierre Daum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특파원

번역·이상순 leesangsoun@hotmail.com
한국외국어대 통번역대학원 졸업.

(1) 3천만 명이던 인구는 이 기간 4천만 명으로 증가했다. 
(2) Thierry Brésillon, “Grand déballage historique en Tunisie(튀니지, 과거의 망령과 마주하다)”,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한국어판, 2017년 5월.
(3) <Islam sur le divan. Alger, du trauma au déni(환자용 침상위의 이슬람. 알제, 트라우마에서 현실거부로)>, France Culture에서 2017년 3월 8일 방송. 
(4) 2004년 콘스탄틴 정신병원에서 촬영한 말렉 벤스마일(Malek Bensmaïl)의 다큐멘터리 영화 ‘정신이상’ 참조.
(5) 종교학에 박식한 셰이크는 모스크의 코란 강의 요청을 받는다.
(6) ‘잔존하는 테러’를 구실로, 정부는 여전히 대규모 병력을 배치해 통행을 제한하는데, 이는 국민을 안심시킴과 동시에 국가가 위기상황에 있음을 끊임없이 느끼게 하는 두 가지 역할을 한다.


박스기사 1 

변화에 대한 환멸감

1988년 10월. 
격격렬한 폭동들로 인해 민족해방전선(FLN)의 주도권은 종말을 고한다. 알제리에 다수당 시대가 열리고 많은 신문들이 창간된다.
1990년 6월.
이슬람해방전선(FIS)은 알제리 역사상 최초로 다수당이 참여한 지방선거에서 승리를 거둔다. FIS는 지방의회의 절반 이상을 장악한다.
1991년 12월 26일.
총선 1차 투표가 실시된다. FIS가 430개의 경쟁의석 중 188석을 차지한다. 1992년 1월 16일로 예정된 총선 2차 투표에서 이슬람주의자들이 차지할 의석은 총 330석(의회의 77%)으로 추산된다. 1차 투표가 끝난 수일 후 몇몇 당은 투표의 무효를 주장한다.
1992년 1월 11일. 
인민해방군(ANP) 장성들이 쿠데타를 일으킨다. 2차 투표는 취소되고 의회는 해산되며 차들리 벤제디드 대통령은 사임 압력을 받는다. FIS와 그 추종자들에 대한 극심한 탄압이 가해진다. 그들 중 수백 명은 재판도 받지 않은 채 사하라 강제수용소로 보내진다. 조직적인 고문이 자행되고 수천 명의 수용자들이 실종(정부 추산 8천 명)된다. 탈출하거나 석방된 사람들은 산악지역의 망명군 조직들에 가담한다. 그 중 주요조직들은 이슬람무장그룹(GIA)과 이슬람국가운동(MEI, FIS와 유사)(1)으로, 그들의 1차표적은 군인과 경찰이다. 1993년부터는 지식인들과 정부 지지자들로 의심되는 이들이 표적이 된다. 수천 명의 간부와 지식인들이 알제리를 떠난다.
1994~2005년.
대규모 인원이 분쟁에 관계돼, 군과 반군 간의 대치는 짧은 순간에 내전으로 번진다. 자위 집단의 자원자들(‘애국자들’이라 불리는 이들의 수는 총 25만 명에 달한다)과 프랑스어권의 지식인들 다수를 포함한 수십만 명의 청년들이 정부군 입대를 종용받았다. 한편 무장이슬람주의자들(전 시기를 통틀어 조직원은 3만 5천 명 가량 됨)은 일부 국민의 지지를 받는다.(2)
1995년.
총사령관인 리아민 제루알 장군이, 수감된 이슬람주의자들과 반군을 탈퇴할 사람들에 대한 ‘관용대책’(사면 또는 감형)을 내놓는다.
1997년.
알제리 시골에서 대량학살이 벌어진다. 
1999년.
압델아지즈 부테플리카는 대통령 당선 직후 장군들과 이슬람해방군(AIS)의 지도자들이 비밀리에 체결한 협정을 국민화합 법안의 형태로 승인한다. 6개월 후 ‘사면’ 법령이 공포된다. 이들 법으로 인해, 범죄를 저지르지 않고 항복한 이슬람주의자들(실질적인 조사 없는 판단)에 대한 기소를 중지하고, 살인죄로 투옥된 이들의 감형을 실시한다. AIS 대원 6천 명이 반군을 떠난다. 그러나 타협하지 않는 AIS 대원들과 과거 GIA 대원들은 새로운 살라피스트 선교전투그룹(GSPC, 오사마 빈 라덴과 연계)을 중심으로 재집결하고, 이들과의 충돌이 계속된다. 동시에 고문행위와 실종에 책임이 있는 안보군(군과 경, ‘애국자들’을 포함)을 상대로 알제리 법원과 국제재판소에 기소가 시작된다. 
2005년.
부테플리카 대통령은 평화와 국민화해를 위한 헌장을 투표에 부쳐 97%의 찬성으로 가결되게 한다. 이 헌장으로 인해 그 때까지 여전히 반군에 남아있던 자들에게 항복을 조건으로 추가 ‘사면’ 조치를 내린다. ‘테러리스트’ 8천 명이 그 혜택을 누린다. 그러나 이 헌장은 특히 ‘정부가 사망과 실종에 대한 책임소재를 단호하게 물어야 한다는 모든 주장’을 무효화한다.
2006년 2월.
행정명령과 그 시행법령들로 인해, 인권침해로 기소된 보안국 요원들에 대한 전면적 사면이 실시된다. 판사들은 관계자들에 대한 고소사건을 맡을 수 없게 된다. 이 법률은 ‘집필행위나 그 외 모든 행위에 의한 진술을 통해, 국가적 비극의 상처를 이용하고 도구화해 알제리민주인민공화국 체제에 위해를 가하거나, 정부를 불안정하게 하거나, 국가 공무원의 명예를 훼손하거나, 국제사회에 알제리의 이미지를 실추시키는 모든 이들, 특히 기자들을 투옥한다고 협박한다. 

글·피에르 돔 Pierre Daum
번역·이상순

(1) 1994년 여름, MEI가 GIA에 합류하자 FIS는 이슬람구국군(AIS)이라는 공식적인 자체 조직을 창설하는데 이후 AIS는 GIA에 필적할 만한 힘을 가진 것으로 인정받는다. 
(2) Abderrahmane Moussaoui, De la violence en Algérie(알제리의 폭력). Les lois du chaos(혼돈의 지배), Actes Sud, Arles, 2006. 


박스기사 2

재정적 보상은 얼마?

1994년부터 ‘테러리스트들’로 인한 희생자들의 가족에 대한 재정지원 대책이 마련된다. 2005년 공포된 ‘평화와 국민화해를 위한 헌장’을 바탕으로, 테러리스트들에 의해 사망한 사람들의 가족뿐만 아니라 반군에 소속돼 사살된 무장 이슬람주의자들의 가족 및 항복한 사람들에 대한 재정적 보상을 실시하게 된다.(1) 알제리 당국은 각 경우에 대한 보상금을 단 한 번도 명확히 밝힌 적이 없었다. 그로 인해 “테러리스트들이 엄청난 액수의 정부보상을 받았다”는 등의 소문들이 떠돌았고, “내 딸은 테러리스트들에게 살해됐는데, 나는 군에 살해당한 테러리스트의 엄마보다 보상을 적게 받았다”는 등의 불만도 나온다. 한편, ‘애국자들’은 충분한 보상을 받지 못했다며 자신들의 주장을 관철하기 위해 주기적으로 시위를 한다. 

우리는 조사를 진행하면서 보상의 규모를 일부 확인할 수 있었다. 무장이슬람주의자들에게 희생된 사람의 가족은 9,600유로를, 군이 살해한 무장그룹 조직원의 가족은 1만5천 유로를, 군에 납치돼 실종된 사람의 가족은 7천 유로를 보상금으로 받았다. ‘애국자들’은 매달 150유로의 ‘특별연금’을 받는다. 무장그룹에 있다가 ‘전향한’ 조직원들은 반군에 있었던 기간에 따라 연당 300유로를 받고, 반군에 있었을 때 자녀가 생겼을 경우 추가보상을 받는다. 그들의 지도자들은 살해와 강탈로 얻은 ‘전리품들’을 고스란히 지킬 수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글·피에르 돔 Pierre Daum
번역·이상순

(1) 정부는 1992~2006년 살해된 ‘테러리스트’ 1만 7천 명의 명단을 확보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그 후, 군은 해마다 ‘테러리스트’ 300~400명을 사살한다고 발표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