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수단 비극의 불씨는 종족 간 헤게모니 갈등

2017-07-31     제라르 프뤼니에 | 국제문제 전문 컨설턴트

지난 5월 30일, 바티칸은 10월로 예정됐던 프란치스코 교황의 남수단 방문을 무기한 연기한다고 발표했다. 이는 방문요청을 거절하기 위한 단순한 핑계가 아니다. 2011년 분리 독립한 중앙아프리카의 신생국가를 유린하고 있는 폭력의 광풍 속에서 교황의 남수단 여행은 실제로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2013년 12월 13일 촉발된 분쟁으로 피해가 계속 증가하고 있다.

 
외국으로 피신한 난민은 173만 2천 명, 남수단 내에서 떠도는 난민은 약 3백만 명이다. 5백만 명 이상이 극심한 기아에 허덕이고 있다. 국제연합 고등판무관 사무소(UNHCR)에 따르면, 남수단 난민을 받아들인 인접 국가들은 보건상황 개선을 위해 엄청난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5월 31일 현재 각국에 퍼져있는 난민 수를 보면, 우간다(90만 명), 에티오피아(25만 명), 콩고민주공화국(8만 명), 수단(40만 명), 케냐(10만 명)이다. 심지어 내전이 한창인 중앙아프리카공화국(2,200명)에까지 난민이 유입되고 있다. UNHCR의 보고에 의하면 매달 6만 명이 내전을 피해 남수단을 빠져나가는 것으로 나타나는데, 이런 상황에서 위의 수치들은 현실과 동떨어져 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정확한 피해자 수는 여전히 알려지지 않았다. UN의 비공식 소식통은 사망자 수가 30만에 이른다고 밝혔다. 대부분 질병과 부상에 대한 치료 부족, 기아로 인한 것이다. 고통스러운 상황에서 장시간 걷다보니 이들은 평시보다 치명적이다. 전투로 인한 직접적인 사망자 수는 약 5만으로 추정된다. 이렇게 계산하다 보면, 남수단 전체 인구수로 추정되는 약 1천2백만에 근접한다(정확한 인구조사가 시행된 적은 없다). 남수단 내전은 이미 수단과의 길고 긴 전쟁(1984~2002)(1)보다 더 큰 피해와 폭력을 야기했다. 교회, 몇몇 비정부기구(NGO), UN은 남수단인들에게 도움을 주려고 애쓰고 있다. 그러나 2015년 UN이 구호금 16억 달러 모금운동을 벌일 때 불확실한 대답만 돌아왔다. 모금안내를 받은 사람들 중 응답자는 46%에 그쳤고, 성금을 내겠다고 확답한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다. 이에 따라 UN은 가장 많은 난민이 밀려든 우간다에 지원하던 긴급구호식량 배급량을 줄여야만 했다. 데이비드 비즐리 유엔세계식량계획(WFP) 사무총장은 “작금의 현실이 받아들일 수 없는 상황에 처해있다”고 지적한다. 
 
반대파 간의 조직적 전투로 시작된 남수단 내전이 이제 국가를 분열시키고 있다. 이제 정부와도, ‘반군’과도 더 이상 효과적인 협상이 불가능하다. 아무도 프란치스코 교황 같은 유력 인사의 안전조차 보장할 수 없는 상황이기 때문이다.
 
남수단 내전의 뿌리는 영국의 식민정책
 
재난이라고밖에 할 수 없는 이런 상황을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까? 언론이 우선적으로 내놓은 ‘설명’에는 아프리카를 멸시하는 국제사회의 시선이 그대로 담겨 있다. 분쟁의 두 주역인 딩카족 출신의 살바 키르와 누에르족의 리에크 마차르는 서로 다른 종족 출신으로 독립과 동시에 키르가 대통령, 마차르가 부통령을 맡았다. 이후 마차르는 누에르족의 지지를 받아 쿠데타를 일으켜 키르를 제거하고자 했으나, 거사에 실패하면서 누에르족에 대한 거센 탄압이 시작됐다는 것이 언론의 ‘설명’이다. 그러나 이는 진실이 아니다. 오바마 행정부의 린다 토마스 그린필드 국무부 아프리카 담당 차관보는 마차르의 군사 쿠데타 기도가 실제로 있었는지 여부에 대해 반박할, 유일한 서방 관료였다. 그는 그런 점에서 중요한 인물이다.
 
그렇다면 실제로 어떤 일이 일어났을까? 남수단 내전의 뿌리 깊은 원인은 한때 수단을 점령했던 영국의 식민정책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영국은 북부 수단에 거주하는 아랍계 주민들에게는 우호적인 태도를 보이며 북부지역의 경제 및 인프라와 교육에 투자를 집중했다.(2) 반면, 남부 수단에는 저개발 상황이 지속됐으며 특히 교육에 대한 투자가 제대로 이뤄지지 않았다(1899년 영국-이집트의 공동통치가 시작되면서 수단을 행정적으로 북부와 남부로 분리하여 통치했다-편집자 주). 1956년 수단공화국으로 독립한 이후, 이슬람권인 북부 수단이 다종교(기독교와 정령 숭배)의 남부 수단을 억압하면서 두 차례에 걸쳐 분쟁이 발발했다(1차: 1956~1972년, 2차: 1984~2002년).
 
1차 분쟁에서는 수단의 남쪽 끝, 에콰토리아 주(州)에서 거의 모든 교전이 이뤄졌다. 그 결과 행정을 재정비했는데, 바로 남부 수단이 ‘자치’를 인정받으면서 남부 수단 자치정부가 수립된 것이다. 그러나 1982년 자파르 니메이리 당시 대통령이 1972년에 체결된 평화협상을 파기했다. 남부 수단에서 유전이 발견되면서 이 지역에 대한 수단 정부의 지배 야욕이 거세졌다. 이에 따라 1984년 어퍼 나일 주와 바흐르 엘 가잘 주, 종글레이 주에서 딩카족과 누에리족 지도자들이 이끄는 2차 분쟁이 발발했다(지도 참조). 1차 분쟁으로 지친 에콰토리아 지역 주민들은 전쟁에 휩쓸리는 것을 원치 않았다. 반군 지도자, 존 가랑 대령은 딩카족 출신이다. 뛰어난 군사 지도자이며 예지력 있는 정치사상가였던 가랑은 불행히 그 자신도 부족주의자이자 독재자였다. 그가 이끌었던 수단인민해방군(SPLA)내에서 수많은 배신과 전복 기도가 있었지만, 그는 철권통치로 그 모든 것을 이겨냈다. 2005년 1월에 평화협정을 체결하고 얼마 지나지 않은 같은 해 7월 헬리콥터 추락사고로 사망한 가랑은 SPLA에 딩카족이 중심이 되는 부족주의와 지배관계를 남겼다.
 
가랑의 뒤를 이어 SPLA의 수장이 된 살바 키르는 남부 수단 자치정부의 수반을 맡으며 동시에 수단 제1 부통령직에 오른다. 당시 대통령은 오마르 알 바시르였다. 2010년 4월 남부 수단 자치정부 대통령에 선출된 키르는 남부 수단을 독립시키겠다고 마음먹었다. 
 
2011년, 남부 수단에서 독립에 대한 열망이 점점 커져 나갔고, 빌 클린턴의 민주당뿐만 아니라 조지 부시의 공화당에 이르기까지 미국의 전폭적 지원을 받게 된다. 국제사회는 만장일치로 신생 독립국(남수단)을 환영했다. 하지만, 남수단의 상황은 열악했다. 가난한 남수단은 교육수준이 매우 낮았고(남성의 문자해독률은 20%, 여성은 2%). 정치적 경험이나 행정망이 부족했으며 과도하게 무장한 상태였다. 그리고 원유 판매가 국가 재원의 98%를 차지하는데, SPLA의 고위직만 원유 혜택을 누릴 수 있다.
 
남수단의 분리독립 이후 정치적 갈등
 
2011년 1월 독립을 위한 국민투표를 거쳐 남수단은 수단에서 분리돼 나온다. 키르는 선거 없이 신생독립국의 대통령이 된다. 마차르 부통령은 SPLA 누에르족 출신 간부들에게 키르보다 더 많이 알려져 있고 더 인정받는다. 2012년 국제사회의 압력으로 2015년에 대통령 선거를 치르기로 하면서 딩카족 지도자들은 공포에 휩싸인다. 마차르 외에도 영향력 있는 후보들이 더 있었다. 가랑의 미망인, 레베카 냔뎅은 딩카족으로 독립적 여성이다. 파간 아뭄은 SPLA 사무총장으로 실루크족 출신이다.
 
키르 대통령의 측근들은 지엥(Jieng:딩카족 언어로 ‘딩카’) 원로위원회를 조직함으로써 민주적인 딩카부족민을 포함해 모두의 비난을 샀다. 각 조직의 실질적이고 구체적인 역할을 규정하기 어려웠던 혼란스러운 상황에서 원로위원회는 진정한 기구로 비쳤지만, 실상은 비합법적 ‘정부’였다.
 
2005년 평화협정을 맺은 이후 자치적으로 행정기능을 수행해온 남부 수단은 SPLA 군사정권의 손아귀에 놓여있었고 경제는 침체돼 있었다. 대통령이 공개서한을 통해 정부 측에 “독립 이후 정부가 유용한 40억”이라고 언급할 정도로 부정부패가 만연했다. 유용 자금 40억 달러 중 22억 달러가 회수됐다. 교육, 보건, 인프라 구축은 전혀 이뤄지지 않았다. 대개 가축 절도로 인한 타민족 간의 소규모 교전이 늘었는데, 정부는 이를 전혀 통제하지 못했다. 최악의 상황은 ‘국가’의 군대가 마음 내키는 대로 어떤 때는 사실상 딩카 민병대(친정부군)처럼, 또 어떤 때는 누에리 민병대(반군)처럼 행동한 것이다.
 
2013년 대선이 다가오면서 마차르 부통령이 공공연한 대선후보가 되자, 키르 대통령은 가능한 모든 수단을 동원해 정권을 독차지하고자 폴 말롱 참모총장에게 점점 더 중요한 역할을 부여하기에 이르렀다. 2013년 12월 13일 말롱 장군의 명령에 따라 딩카족 군대가 누에리 군사들을 무장해제하려 했다. 누에리 군사들은 반항했지만 즉각 진압됐다. 여러 민족으로 이뤄졌으나 딩카족이 다수인 ‘충성스러운’ 남수단 군대는 수도인 주바에서 눈에 띄는 모든 누에리족 사람들을 조직적으로 학살하기 시작했다. 여전히 정확한 숫자는 알려지지 않았지만, 3일 간 발생한 피해자 수는 6천에서 1만까지로 추정된다.
 
지방에 주둔하던 누에리 군사들이 반격에 나섰다. 학살을 피해 도망친 마차르가 그 수장에 섰다. 분쟁 첫해(2014년)에 외교관을 위시한 외국 옵저버들은 개인적 경쟁관계(마차르 대 키르)에 부족 간 갈등(누에리 대 딩카)이 더해졌다고 내전의 원인을 설명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특히 에콰토리아 인근 3개 지역과 바르 엘 가잘 지방에서 거의 모든 민족이 키르 정부와 딩카족의 권력 독점에 반기를 들었다. 이제 전쟁이 전면화된 것이다. SPLA의 어떤 조직도 이를 막지 못했다. 정부군이 와해되는 가운데, 반군은 조직화되지 못했다.
 
국제사회의 무력함 내지는 무관심
 
그렇다면 그간 ‘국제사회’는 무엇을 했을까? 별로 한 일이 없다. UN과 미국은 SPLA을 모태로 하는 정권의 ‘정당성’을 계속 옹호했다. 2014년 5월 UN안전보장이사회는 2011년 독립 이후 주둔해온 UN남수단임무단(UNMISS)의 병력을 강화했다. 이미 1만 3천 명이 주둔해 있었는데, 5천 명을 추가파병하기로 했다. UNMISS의 임무는 10만 명이 수용돼 있는 난민캠프를 감독하고 보호하는 방향으로 전환됐다. 포화상태에 이른 난민수용소는 현재 새로운 난민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실정이다. 
 
‘아프리카 문제에는 아프리카 해법’을 장려하는 신외교철학에 따라 동아프리카 정부 간 개발기구(IGAD)가 남수단 내전 문제 해결을 맡게 됐다. 그러나 IGAD의 문제해결능력은 매우 한정적이며, 심지어 없으나 마찬가지라고 할 수 있다. IGAD 회원국들은 군사적으로 대응하기에 군사력이 아주 약하거나(남수단, 소말리아, 지부티), 지역정책이 상호 충돌하는 이해관계자다(수단, 에티오피아, 에리트레아, 케냐, 우간다). 긴긴 협상 끝에 2015년 8월 17일 마침내 케냐 나이로비에서 평화협정이 체결됐다. 
 
마차르는 자신의 안위를 걱정하며 보장책을 요구했다. 주바로 돌아온 그는 2016년 7월 8일 간신히 암살을 피해 콩고민주공화국으로 피신했다. 그러나 몇 주 후 에티오피아의 수도인 아디스아바바에서 체포된다. 마차르는 아프리카연합(African Union)의 중재를 기다리며 이 기구의 본부가 있는 아디스아바바에 온 것이다. 현재 그는 재판 없이 남아프리카공화국에서 가택연금 상태에 있다. 그의 추종자 중 한 명인 타반 뎅 가이는 반대파에 매수돼 2015년 평화협정을 승인했다는 이유로 반군의 지탄을 받는다. 남수단 정부는 평화협정의 이행을 바란다고 말하지만, 전혀 실행된 것은 없다. 
 
‘국제사회’는 마차르의 쿠데타가 실패했다는 이유로 “마차르가 남수단 내전의 원흉”이라고 주장한다. 영어권 아프리카 지역에서 영향력이 지대한 미국의 존 케리 당시 국무장관은 마차르 책임론을 공론화하는 데 가장 큰 역할을 했다. 따라서 마차르를 체포해 구금하면 이 문제가 해결될 거라 생각한 것이다. 그러나 현실은 그 반대였다. 지도자를 빼앗긴 반군은 여러 독자적 군사조직으로 재편됐다. 한편, 남수단 정부는 지엥 원로위원회에 종속된 위원들과 함께 표면적으로만 ‘거국적인 대화’를 하겠다고 나섰으나, 기독교계와 시민사회, 언론은 이구동성으로 이를 거부했다. 이제 전쟁의 폭력에 기아가 겹치면서, 2월 21일 남수단 정부는 기아의 심각성을 공식발표했다. 남수단의 북부지역에서 최소 10만 명이 기아에 허덕이고 있다.
 
현재 많은 딩카족 출신 남수단인들조차 키르 대통령이 하야하기를 원한다. 그러나 대통령 하야가 평화로 이어지기 어려울 만큼 혼란스러운 상황이다. 내전으로 인한 민간인 피해가 재앙 수준에 이르자, 이제 세계에서 가장 헐벗은 나라인 남수단을 UN이 신탁통치하자는 안이 나오고 있다. 일시적인 효과는 있을 수 있겠으나, 그 대가는 상당할 것이다. 신탁통치안에 반대하는 이들이, 엄청난 대가를 치루며 해묵은 식민체제로의 귀환에 대해 비난을 쏟을 것이다.  
 
글·제라르 프뤼니에 Gérard Prunier
프리랜서 컨설턴트로 활동 중이며, 국제 전문 싱크탱크인 'Atlantic Council'의 멤버이기도 하다.
 
번역·조승아
한국외국어대 통번역대학원 졸업
 
(1) ‘Au Soudan du Sud, l’écroulement des espoirs démocratiques(남수단, 좌절된 민주화 희망)’ 기사 참조,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프랑스어판·한국어판, 2014년 2월호.
(2) Cf. M. W. Daly, <Empire on the Nile: The Anglo-Egyptian Sudan, 1898-1934>&<Imperial Sudan: The Anglo-Egyptian Condominium, 1934-1956>, Cambridge University Press, 각각 1986년, 1991년 출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