팩트지상주의에 진실이 은닉된다

2017-07-31     서명준 | 민주언론시민연합 정책위원

“식사하셨습니까?” 누구나 다 아는 우리의 독특한 안부인사다. 가끔 힘이 들거나 고독할 때 누군가 이렇게 물어주면 나름 큰 힘이 되기도 한다. ‘팩트 체크’를 연상시키는 이 인사법에는 한국적 정서가 묻어 있다. 식사 여부를 체크하는 이 인사에는 따뜻한 기운마저 감돈다. 함께 밥을 먹는 사람들을 뜻하는 ‘식구’라는 말에도 우리네 정서가 담겨 있다. 두 언어에 공통적으로 담겨 있는 것이 공동체 사상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물론 한가롭게 식사 문화를 논하려는 것은 아니다. 팩트와 사상, 다시 말해 사실과 의견은 결코 유리될 수 없다는 ‘팩트’를 공유하는 것이 논점이다. 존재를 나누는 이분법으로는 만물이 단단히 연결돼 있다는 변증법을 넘어설 수 없는 사실 말이다. 여기 문제는 요즘 기승을 부리는 ‘가짜뉴스(Fake news)’를 잡으려다 오히려 팩트‘만’ 숭배하게 되는 일종의 신실증주의 저널리즘이 득세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점이다. 우리의 저널리즘이 가짜뉴스라는 괴물을 잡으려다 ‘팩트지상주의’라는 괴물이 돼가는 것은 아닌가?

논쟁의 밥을 먹고 사는 민주주의

민주주의라는 정치시스템으로부터 이야기를 시작해 보자. 민주주의는 어떤 밥을 먹고 사는가. 당신과 타자 모두 동일한 권리를 가진다는 평등의 원칙을 먹고 산다. 그런 점에서 민주주의가 먹는 밥은 ‘논쟁’이라는 이름의 쌀로 지어진 밥이다. 이 밥을 맛있게 지으려면 자유언론이라는 불리는 막강한 불이 필요하다. 그 불의 본질은 무엇일까. 객관성이라고 응답한다면 당신은 모든 것을 말하되 아무것도 말하지 않는, 즉 진공상태에서 존재하는 상상의 불을 만들어내는 신과 동급이 되시겠다. 어쩌면 시공을 초월해 누구에게나 동일한 가치를 지니는, 예컨대 ‘선과 악’이라는 형식의 늪으로 빠져들지 모른다. 그러나 현실에서 형식은 입장에 따라 달라지는 것이다. 당대에 명백한 악으로 간주됐던 범죄가 시대와 사회의 입장에 따라 달라지고 한때 너무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였던 사형제마저 사라지고 있지 않은가.

오늘의 디지털사회에서 언론 개념은 이런 형식을 벗어나, 데이터 정글 속에서 시민 스스로 자신의 정치사회적 입장을 발견할 수 있도록 도움을 주는 방향으로 진화해 나가야 한다. 그런데 권력의 4부라는 칭호까지 부여받은 언론이 최근 ‘기레기’라는 참담한 비판에 직면해 있다. 이것의 함의는 신뢰도 추락인데, 그 원인을 찾기 위한 각종 논의들은 “있는 그대로 보도해 달라”는 부끄러운 주문으로 귀결된다. 

이런 비판에 대해 기자들이 마땅히 해야 할 대응은 자기비판이다. 거기에 자신의 과오를 인정하는 양심선언까지 더해지면 윤리적 정당성을 획득할 수 있다. 이런 방식의 대응은 공통적으로 “사건과 자신을 동일시하지 않고 보다 객관적으로, 있는 그대로 보도하겠다”는 결론에 이른다. 있는 그대로 보도하는 객관주의 저널리즘은 이처럼 늘 반복되는 자기비판의 밥을 먹고 산다. 그러나 잊지 말아야 할 것이 있다. 객관주의 저널리즘으로 향하는 길은 모든 이들에게 똑같은 가치를 가져다주는, 영원한 팩트의 세계로 들어가는 길이며, 그 가치의 영속성에 있어서 시공을 초월한다는 점이다.

‘있는 그대로 보도’가 언론의 본질?

팩트 보도가 저널리즘의 토대를 이룬다는 명제에는 누구도 이견을 달 수 없다. 하지만 객관주의가 정보에 대한 비판적 분석보다는 중립적인 팩트 기사에 지나치게 큰 가치를 부여한다는 점은 우려할 만한 대목이다. 예컨대 “문재인 대통령은 탈 원전 공약을 발표했다”와 같은 단순보도 기사는 손쉽게, 또 자주 되풀이되는 기사문의 전형이다. 이처럼 유형화된 형식에 따라 생산된 기사의 가장 큰 장점은 오보를 낼 위험성이 적다는 것이다. 이런 기사는 심지어 ‘불량률’이 낮기 때문에 객관적 보도라는 미명 하에 선호되기까지 한다. 물론 단순 사실보도조차 팩트와 다를 경우, 해당 언론사는 저널리즘의 기초를 저버렸다는 무수한 질타에 직면하겠지만 말이다.

이처럼 중립적인 기사에 지나치게 가치를 부여하는 팩트주의는, 예컨대 맛좋은 소시지가 그렇듯 언론이 일반상품과 동일하게 다뤄지기를 바라는 시장주의자들의 간절한 소망이 담긴, 자본주의 ‘사상’의 한 형태로 전락하고 만다. 소시지 선호에 이념의 구분이 무의미하듯, 좌파와 우파 모두 음미할 수 있는 객관적인 보도를 지향하게 된다는 얘기다. 언론이 만일 공장에서 생산되는 소시지와 동급이라면, 이 논의조차 한가한 이론적 유희에 불과할 뿐, 그저 자본주의 생산양식에 나타나는 상품 물신주의를 비난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할 것이다.

다시 묻자. 진보언론이든, 보수언론이든, 있는 그대로 보도하는 것이 언론의 본질인가? 그렇지 않다! 저 하늘의 저널리즘에서는 ‘있는 그대로’가 현실이고 진리겠다. 그것은 모든 것이 정치로 연결될 수 있는 이 땅의 저널리즘과는 다르다. 언론사와 기자 자신의 정치철학과 양심에 따라 보도하는 것이 이 땅의 저널리즘이다. 언론사마다 논조가 다른 까닭이 여기에 있다. 각 언론사마다 선호하는 팩트를 보유하고 있으며, 나름의 프레임을 동원해 그 팩트에 대한 해석의 권리를 획득하려 한다. 이는 일종의 문화투쟁이다. 항상 논쟁을 유발하고, 기자들은 원하든 원하지 않든 거기에 결박된다. 기자들은 현실 위에 군림하는 진리의 신이 아니어서 그 결박의 사슬을 스스로 풀어내기란 사실상 불가능하다. 더구나 기자들도 이 낮은 곳의 다른 모든 인간들처럼 자신의 신념에 따라 기사를 작성하는 호모 폴리티쿠스가 아닌가.

‘언론의 자세’에는 독자의 자세도 포함된다

이런 팩트를 무시하거나 간과한 독자들에 의해 최근 발생한 것이 바로 한경오(한겨레·경향신문·오마이뉴스) 사태다. 진보언론으로 분류되는 한경오는 지난 대선 당시 문재인 후보에게 불리한 보도를 했다는 이유로 일부 문재인 지지자들로부터 편파 판정을 받은 바 있다. 기자가 신이 아닌 것처럼, 문 후보 역시 신정(神政)을 공약으로 내세운 것이 아닌데도 말이다. 지지자들은 한경오가 문 후보의 당선을 방해한다며 노골적인 적대감을 드러냈다. 사태는 결국 한겨레신문 임인택 기자의 한탄스런 고백을 낳고 만다. “한겨레를 떠난다는 당신은 떠나도 된다. 한겨레의 주인은 진리이고 진실이고 다수의 상식이며, 더 나은 세계에 대한 열망이다.” 정작 당사자인 문 후보는 담담한 자세를 보였다. 그는 한겨레신문과의 인터뷰에서 “한겨레 정신은 편 가르지 않고 비판의 정신을 견지하는 것”이라고 밝힌다. 심지어 그는 “한겨레가 나를 비롯해 우리 당에 많은 애정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렇다고 해서 무조건 편을 드는 것이 아니라, 필요한 비판을 하는 언론이라고 생각한다”며 언론학자 못지않은 유려한 의견을 피력한다.

오늘 일방소통이 아닌 쌍방소통의 언론 지형에서, ‘언론의 자세’라는 용어에는 기자의 자세뿐 아니라 독자의 자세도 당연히 포함된다. 뉴스의 원천인 팩트란 다양한 세력의 이해관계로부터 발생하는 사회적 과정 그 자체이지, 이와 유리된 요소가 아니라서 그렇다. 팩트란 수많은 관계 속에서 변형되고 또 권력 규모에 따라 가치가 달라지는 것이라서 더 그렇다. 사정이 이렇다면, 독자들은 과연 이런 팩트의 이면에 얽혀 있는 요인들을 정확히 꿰고 있는가. 솔직히 의문이다. 예컨대 보수우파 성향의 독자들은 자신의 정치적 입장에 걸맞은 팩트를 찾아내고 그것을 그럴듯하게 해석해 주는 언론을 소비할 개연성이 매우 높다. 진보좌파 성향의 독자들도 마찬가지다. 더구나 하위 계층이 중상위 계층의 주류 신문인 조중동을 소비하는 한국 언론의 독특한 지형, 즉 비계급적 언론 소비 지형은 또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지금 이 순간에도 부자가 되고픈 욕망은 가난한 독자들로 하여금 조중동이라는, 부자들을 위한 언론을 소비하게끔 만들고 있다.

뉴스의 한계를 인정할 용기가 있는가

가짜뉴스를 대하는 독자들이나 이용자들의 자세도 고려하지 않을 수 없다. 페이스북, 트위터 등 SNS는 가짜뉴스에 대한 어떠한 검증장치도 갖고 있지 않다. 이용자들은 검증 없는 뉴스를 마구 생산하고 퍼 나른다. 쌍방소통의 테크놀로지가 주어졌지만, 이들은 역설적이게도 정치적 견해가 일치하는 사람들과만 소통하는 배타성과 편협성을 보인다. 미국의 인터넷 운동가인 엘리 프레이저의 지적대로, 그런 이용자들은 이른바 필터 버블(Filter Bubble)에, 즉 ‘관심의 감옥’에 갇힌 존재들이다. SNS는 그들에게 수시로 더욱 견고한 배타성과 편협성의 감옥을 제시한다. 이용자가 ‘좋아요’를 누를 때마다 페이스북은 비슷한 성향의 글을 추천하고, 이용자의 취향과 관심, 검색기록 등을 수집, 분석해 맞춤형 정보를 제공하는 식이다. 알고리즘의 필터링에 의해서 당신만의 세계가, 정보의 ‘버블’이 탄생한다. 당신이 보수 성향이라면 보수의 필터를 거친 다음 보수주의의 버블에 갇히고, 진보도 역시 그렇다. 이를 강화하는 장치도 있다. 공유된 관심사가 ‘내용적인 것’을 넘어 그 자체로 즐거움이 되게 해주는 것, 바로 해시태그(#)다. ‘상호 이해’라는 딱딱한 본질은 밀려나고, ‘상호 재미’라는 느낌과 그 느낌에 이은 쾌감이 현상을 지배한다. 공유는 즐거움으로 이어지고, 그럴수록 버블은 커진다. 

오늘 민주화 이후의 민주화 시대, 디지털 미디어 시대에 언론이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은 이러한 상황의 심각성이다. 기레기라는 비난에 대한 언론의 냉혹한 자기비판은 “팩트에 충실하겠다”는 공허한 선언에 그치지 말아야 한다. 문제의 심각성으로 파고들어 생산적인 해법을 끌어내야 한다. 책임 있는 저널리즘이란 하늘의 절대 진리를 이 땅으로 불러내려는 팩트주의 저널리즘이 아니라, 오히려 하나의 해석을 제시해주는 저널리즘이어야 한다.

모든 현실은 우발적이다. 오늘의 저널리즘은 이를 인정할 수 있는가. 객관주의의 함정에 빠지지 않고, 뉴스가 다양한 사회적 입장에서 해석되며, 제시하는 해석은 그중 하나일 뿐이라는 점을 과감하게 공개할 준비가 돼 있는가. 뉴스란 정치경제적 메커니즘의 필연적인 산물이면서도 우발적인 성격을 가진다는 사실을 독자들에게 정확히 알릴 용기가 있는가. 팩트주의에서 자유로워질 수 있는가. 팩트는 회색이요, 오직 영원한 언론의 길은 저 푸르른 자유언론의 사상이다. 

그런데 참, 식사는 하셨나요?   

글·서명준
베를린자유대 언론학 박사로 동국대와 건국대에서 커뮤니케이션 관련 강의를 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