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틀러와 인터뷰하는 방법

2017-07-31     도미니크 팽솔 | 역사학자

언론의 역사는 저마다 나름의 신화를 가지고 있다. 그러나 그 가운데서도, 특히 어떤 시련에든 권력자와 당당히 맞서는 위대한 기자에 관한 신화가 단연 최고일 것이다. 그러나 현실은 소설처럼 멋지지 않다. 특히 1930년대의 현실을 들여다보면 더욱 그렇다. 세계대전이 발발하기 전 아돌프 히틀러가 프랑스 특파원과 가진 10여 차례의 인터뷰는 일부 프랑스 언론인들의 비굴함을 고스란히 보여준다.


“히틀러 당수는 새로운 명령이 없는 한 프랑스 기자와의 인터뷰는 허락하지 말라고 당부하셨소. 이유는 프랑스 언론이 독일을 대하는 태도 때문이요.”

1932년 3월 나치당 당수의 비서가 벌써 몇 번째인지 모를 인터뷰 거절 의사를 요청자에게 전달했다. 그가 밝힌 거절 사유는 반박할 여지가 없는 진실이었다. 1933년 1월 30일 아돌프 히틀러가 총리로 집권한 이후, 히틀러에 대한 프랑스 언론의 냉대는 차츰 누그러들었다. 그럼에도 프랑스 언론을 향한 히틀러의 적대감은 금세 사라지지 않았고, 심지어 평생토록 지속됐다. 그럼에도 프랑스 언론은 집요하고도 악착같이 매달렸다. 가령 <랭트랑지장(L’Intransigeant)>의 기자 폴 에르포르도 1933년과 1935년 두 차례에 걸쳐 히틀러와 인터뷰를 시도했다. 그러나 두 번 다 허탕을 치자, 1937년 독일대사에게 다음과 같은 편지를 썼다.
“히틀러 총리와 인터뷰를 허락해주신다면, 반드시 사전에 서면으로 승인된 내용만 신문에 실을 것을 약속합니다. 그리고 승인 즉시 지체하지 않고 곧바로 기사를 게재하겠습니다. 또한 반드시 총리가 원하는 질문만 하겠습니다. 그러니까 오로지 총리의 정책에 대해서만 묻겠습니다. (…) 단언컨대 저는 젊은 이탈리아만큼이나 신생 독일에 대해서도 매우 호의적인 시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아마 저에 대해 제대로 알게 되신다면, 제가 무척이나 이해심이 많은 외국인이라는 사실을 대번에 깨달으실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절절한 자기소개서마저도 약발이 통하지 않았다. 에르포르는 마지막으로 독일대사의 공보담당자에게 애원하다시피 매달렸다. “저는 행운의 부적 같은 사람이에요. 에티오피아 전장에서 싸우는 이탈리아 병사들도 저를 남부군의 마스코트라고 불렀던 걸요.” 그러나 히틀러는 끝내 묵묵부답이었다.

“히틀러의 진정성을 믿는다”던 브리농의 최후

히틀러와 인터뷰를 성사시키려면, 한낱 아첨 정도로는 턱도 없었다. 히틀러는 세밀하게 거르고 거른 극소수의 프랑스 기자에게만 인터뷰를 허락했다. 최초의 행운아가 바로 페르낭 드 브리농이었다. 그는 나치당 당원인 요아힘 폰 리벤트로프와의 친분 덕택에 1933년 히틀러와의 인터뷰에 성공했다. 기사는 독일 공보실의 검열을 거쳐 11월 22일 <르마탱>지에 실렸다. 그것은 일대 사건으로 기록되며 세간에 큰 파란을 일으켰다. 사실상 프랑스 대사조차 2달째 히틀러와 접견을 기다리고 있는 상황이었다!

지난 10월 독일은 국제연맹과 군축회의를 탈퇴한 상황이었지만, 히틀러는 아무렇지도 않게 인터뷰에서 프랑스와 독일의 화해를 주장하는 등 온갖 감언이설을 쏟아냈다. 그럼에도 브리농은 히틀러에 대한 호감을 감추지 않았다. 10년 전 출간된 히틀러의 저서 <나의 투쟁>에 대해서도 그는 그저 총통의 생각은 “변하는 중”이라며 걱정 따위는 전혀 할 것이 없다는 태도였다. 그는 “아돌프 히틀러의 진정성을 믿는다”고 큰소리쳤다. 1935년 양국의 화해를 목적으로 설치된 프랑스-독일 위원회의 공동창립자이자 독일점령기 동안 열성적인 대독협력자로 활동한 브리농은 1947년 결국 나치부역 혐의로 처형당했다.

사실 히틀러가 만난 기자들이 전부 다 진정으로 열성적인 독일애호가였는지는 확인할 길이 없다. 그러나 (단 한 건을 제외하고) 프랑스 언론에 소개된 거의 모든 인터뷰 기사는 하나 같이 노골적으로 히틀러의 주장에 신뢰를 실어줬다. 독일도 그런 효과를 노리고 프랑스 언론을 십분 활용했다. 그들은 언론과의 인터뷰가 독일의 외교정책을 홍보하는 역할을 톡톡히 할 것이라는 사실을 잘 알았던 것이다. 1933~1934년, 히틀러는 국제연맹, 군비 축소, 그리고 아직 프랑스 자치지역과 독일 점령지역 중 지위가 결정되지 않은 자르 지역 분쟁 등과 관련해 모두 5차례에 걸쳐 인터뷰를 허락했다.

그 가운데 1934년 9월 21일 <랭트랑지장(L’Intransigeant)> 1면에 실린 인터뷰기사는 거의 독일 외무부가 만들어낸 날조기사에 가까웠다. 이 기사에서 나치즘을 표방하는 독일의 국가수반은 평화 추구에 대한 의지를 재천명했다. 그런데 문제는 이 기사가 뤼시앵 르마(Lemas)라고 불리는 한 무명기자의 손에 작성됐다는 점이었다. 그는 뉘른베르크 요새에서 총통과 인터뷰를 가졌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신문사조차 인터뷰의 진의를 믿을 수 없었던 것인지(독일제국의 공보담당자가 일개 무명기자의 인터뷰 요청을 순순히 받아들여 히틀러를 소개해줬다니!), 인터뷰가 ‘진실’임을 입증하는 리벤트로프의 친필 메모를 같이 실었음에도 불구하고 ‘본지 특파원’이라는 표현 대신 ‘한 특파원’이라는 표현을 에둘러 사용했다.

이 한 글자 차이는 금세 사람들의 이목을 집중시켰다. 사람들은 기사에 실린 사진의 출처를 보고, 그것이 히틀러가 뤼시앵 뢰마(Leumas)에게 헌정한 사진이라는 사실에 주목했다. 그 길로 사회당 계열의 일간지 <르 포퓰레르>가 그 기자의 이름이 실은 뤼시앵 사뮈엘(Samuel)이란 사실을 순식간에 밝혀냈다. 유대인 이름 끝에 붙는 특유의 자음을 은폐하기 위해 알파벳을 뒤섞어 뢰마라는 가명을 만들어 냈는데 최종기사가 나가면서 ‘u’자마저 빠졌다는 것이다. 결국 <랭트랑지장>의 단독기사는 언론계와 외교가에서 비웃음거리만 되고 말았다.

독일 독재자의 선전용 인터뷰가 항상 이처럼 어설프기만 했던 것은 아니다. 대체로 히틀러는 고위 인사의 소개를 통해 자신에게 호의적인 기자만을 선별해 만났다. 1934년 센느 지역 하원의원이자 전국참전용사연맹(주요 퇴역군인단체 중 한 곳) 회원인 장 고이와, 파리 시의회 의원이자 ‘참전용사 주간’ 행사의 진행자인 로베르 모니에가 오토 아베츠의 초청을 받아 베를린을 방문했다. 오토 아베츠는 브리농과 함께 프랑스-독일 위원회의 공동창립 인물로, 훗날 독일 점령기에는 파리주재 독일대사로도 활약했다. 고이는 1934년 11월 18일자 <르마탱>지에 실린 기사에서 흥분을 가라앉히지 못했다.

“빌헬름가(빌헬름 슈트라세)의 널찍한 집무실에서 히틀러 총리가 우리를 맞아줬다!” 그러면서 그는 이렇게 썼다. “우리가 도착하자마자 곧바로 히틀러가 우리를 만나러 나와 줬다. 그는 우리에게 프랑스 퇴역용사들의 방문을 받게 돼 무척 기쁘다고 말했다.” 

1934년 7월 오스트리아 총리 암살 뒤 첫 오스트리아 합병(Anschluss) 시도가 실패로 돌아갔을 때, 히틀러는 프랑스 국민 앞에 다시금 자신의 평화주의를 소리 높여 외칠 수 있게 된 것을 얼마나 ‘흡족’해 했을까. 더욱이 고이도 가슴을 쓸어내리며 “국민의 사기를 꺾는 그 어떤 공포도 퍼뜨리지 말아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그러나 논쟁은 뜨겁게 가열됐다. 하원에 출석한 이 센느 지역의 의원은 무소속 의원 플랑클랭부이용으로부터 <나의 투쟁>을 한 번 읽어보라며 거친 항의를 받았다. 피에르에티엔느 플랑댕 의장도 프랑스 언론에 두 번 다시 그와 같은 발언이 실리는 일은 용납하지 않겠다며 독일대사를 소환했다. 그러나 고이는 자신의 생각을 굽히지 않았고, 결국 브리농, 아베츠의 뒤를 따라 프랑스-독일 위원회에 합류했다.

기자들을 매료시킨 히틀러의 파란 눈동자

<파리 수아르>의 유명기자 엘리자베스 소비, 일명 티타냐도 그와 똑같은 프랑스-독일 네트워크를 통해 1936년 히틀러를 만났다. 그러나 이 시기 쟁점이 된 문제는 그전과는 상이하게 달랐다. 당시는 일 년 전쯤 국민투표를 거쳐 자르 지역이 독일 지역으로 완전히 합병된 뒤였다. 또한 총통의 명령으로 군 관련 부서가 복원되는 한편, 독일제국의 재무장이 공식화된 상황이었다. 프랑스는 1935년 5월 소련과 상호원조조약을 체결했다. 그러나 티타냐가 베를린을 방문했을 당시 아직 조약은 비준되지 않은 상태였다. 

티타냐는 아베츠의 친구인 장 리샤르 기자와 친분이 두터웠다. 리샤르는 아베츠를 도와 프랑스와 독일의 화해를 위해 발 벗고 나선 기자였다. 사실 티타냐가 독일제국의 총리를 그토록 간절히 만나보고 싶어 한 데는 그가 독재정권에 관심이 많다는 사실도 분명 한몫 했다. 그의 인터뷰 기사는 1936년 1월 26일 <파리 수아르 디망슈> 1면에 대서특필됐다. 기사내용은 필자가 히틀러에 대해 얼마나 우호적인 사람인지 여실히 드러냈다.

“총통이 집무실 겸 자택으로 사용하는 빌헬름가의 궁전은 건축물의 선이나 가구 배치가 신생 독일의 민주적 선명성과 잘 어우러졌다. (…) 마침내 히틀러가 내게 다가와 손을 내밀었다. 나는 흑백 사진 속에서 늘 갈색으로 보였던 그의 눈이 실은 파란색이라는 데 깊은 인상을 받았다. 그는 평소 내가 그리던 것과는 전혀 다른 모습이었다. 나는 실물의 히틀러가 마음에 들었다. 그가 말을 할 때면 총기와 에너지로 가득 차오른 얼굴이 환하게 빛났다. 나는 문득 이 지도자가 왜 그토록 매력적인지, 왜 그토록 군중을 매료하는지 대번에 이해할 수 있었다.”

그 다음 달에는 사상가 베르트랑 드 주브넬이 아베츠의 소개를 받아 히틀러를 만났다. 그것은 히틀러가 프랑스소련상호원조조약 비준이 임박한 상황에서 프랑스와의 화해에 대해 견해를 피력할 수 있는 좋은 기회였다. 그러나 정작 <파리 수아르>는 프랑스 하원이 조약을 완전히 비준한 다음 날인 1936년 2월 28일이 돼서야 비교적 발행부수가 적은 정오판 신문에다 인터뷰를 실었다. 독일은 프랑스 정부가 하원 비준 전에 총통의 발언이 신문에 실리지 못하도록 공작을 펼쳤다고 비난했다. 그러나 정작 기사내용은 오히려 총통에게 상당히 우호적이었다. 심지어 훗날 이 기사를 쓴 주브넬 본인조차 ‘잘못된 발걸음’이었다며 후회할 정도였다.

히틀러와 함께 한 마지막 인터뷰 3건은 전부 국제문제와는 관련이 적었다. 비교적 잡다한 주제를 다룬 데다 곧바로 외교적 파장을 불러일으킬 만한 중대발언도 없었기에, 세간의 관심을 끌지 못했다. 그럼에도 인터뷰 내용은 여전히 히틀러에게 상당히 우호적이었다. 훗날 비시정권에서 교육부 장관을 지낸 작가 아벨 보나르도 1937년 5월 22일 <르 주르날> 기사에서 “국가사회주의 정권이 사회질서를 위해 쏟는 강력한 노력”에 열광적인 찬사를 보냈다. 그는 이 인터뷰에서 히틀러에게 세계대전 이전의 세계로부터 시작해, 근대교통의 보급, 노동자들에게 ‘삶의 즐거움’을 되돌려줄 방도 등에 이르기까지, 실로 다양한 주제를 놓고 대화할 기회를 제공했다. 

보나르는 많은 이들에게 큰 즐거움을 선사했다. 가령 그를 만났던 이들 중 한 명은 파리주재 독일대사에게 이런 편지를 썼다. “나는 그가 독일의 상황을 아주 진지하게 바라보며, 아주 정확히 이해하고 있다는 인상을 받았습니다. 그는 매우 똑똑하고 재능이 뛰어난 사람이어서 자신이 성찰한 결과를 프랑스 대중에게 적절한 방식으로 전달하고 이해시키기에 충분해 보입니다. 하긴, 그가 괜히 아카데미 회원이겠습니까. (…) 고백컨대, 저는 그와 함께 한 시간이 정말이지 너무나도 즐거웠습니다.”

국가사회주의를 신봉하는 필자, 알퐁스 드 샤토브리앙도 <르 주르날> 기사에서 히틀러에 대해 비슷한 찬양을 늘어놓았다. 그의 경우에는 1938년 8월 바바리아 알프스 소재 저택에서 히틀러와 만났다고 했다. <릴뤼스트라시옹>지가 건축과 도시개발에 대한 총통의 의견을 듣기 위해 파견한 로베르 쉔느비에 특파원도 1938년 12월 10일자 기사에서 히틀러의 “전반적인 교양수준”에 대해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그러나 히틀러의 높은 교양수준 보다 더 기자에게 큰 감명을 준 것이 있었으니, 그것이 바로 히틀러의 파란 눈동자였다. 그는 히틀러의 눈에 대해 “옅은 푸른빛, 억세게 비가 퍼붓고 난 뒤의 청명한 하늘과도 같은 푸른빛, 절대 권력자의 눈만이 소유할 수 있는 그런 종류의 무구한 푸른빛”이었다고 썼다.

1940년 프랑스 패전 뒤 이들 기자들은 대부분 대독 협력의 길로 빠져들었다. 그러나 1944년 전국레지스탕스평의회(CNR)가 언론의 자유와 명예, 그리고 국가·금권세력·외세 등에 대한 언론의 독립성”을 보장하며, 마침내 이런 치졸한 ‘언론 부역사’에 종지부를 찍었다. 비록 언론의 나치부역 행태가 지난 시대에 벌어진 일이라고는 하나, 그것을 이제는 완전히 지나간 부끄러운 언론역사의 한 장으로만 인식하는 것은 너무나도 위험천만한 일일 것이다.  


글·도미니크 팽솔 Dominique Pinsolle
역사학자. 올리비에 다르 등이 엮은 <Confrontations au national-socialisme dans l'Europe francophone et germanophone(프랑스어권과 독일어권 유럽 내에서 펼쳐진 국가사회주의와의 대결)(1919~1949년)>(피터 랭 출판사 출간 예정작)의 집필에 함께 참여했다. 이 기사에서 다룬 주제는 이 책의 제1권에 실릴 예정이다.

번역·허보미 jinougy@naver.com
서울대 불문학 석사 수료. 한국외국어대 통번역대학원 졸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