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ellum Corai(임진왜란)’에 대한 또 다른 시선!

문명교류의 비밀 텍스트(1)

2017-07-31     안재원 | 서울대 인문학연구원 HK연구교수
     
동양문명과 서양문명이 서로 교류하고 충돌하며 융합하는 새로운 만남의 시대, 우리는 전통적 관점에서 해명하기 힘든, 새로운 사태를 많이 경험한다. 물어보자. 도대체 우리는 누구일까? 이때 ‘우리’는 한국인을 말한다. 이 질문에 자신 있게 답할 이가 있을까?

답하기 쉽지 않은 이유는, 우리가 공간적으로는 극동이지만 문화적으로는 동양과 서양이 교차하고, 시간적으로는 동양의 과거와 서양의 과거, 동양의 현재와 서양의 현재, 동양의 미래와 서양의 미래가 교차하는 경계지점에 서 있기 때문이다. 시공의 복합함이 우리의 정체성을 구성하는 실체일 것이다. 이 복잡한 정체성을 규명하기 위해서는, 동양의 정신문명과 서양정신의 문명이 때로는 사이좋게 교류했고 때로는 정면으로 충돌했던 현장으로 돌아가보는 것도 도움이 될 것이다. 이번 연재에서는 널리 알려지지 않은 문헌의 소개를 통해서 동서문명의 교류와 충돌의 현장을 전하겠다.

<일본, 인도와 필리핀에 대한 최신 편지들(De Rebus Iaponicis, Indicis et Pervanis epistolae recentiores)>의 소개로 이야기를 풀어가겠다. 책은 1605년 벨기에 안트베르프에서 출판됐다. 50여 편의 편지들을 모아서 책으로 엮어 출판한 이는 하이우스(Iohnannes Hayus, 1540~1614)다. 예수회 신부였던 그는 동양의 정치, 학문, 문화, 특히 종교를 소개하는 데 힘썼다. 책을 관통하는 역사적 사건은 다름 아닌 임진왜란인데, 전쟁의 명칭부터 흥미롭다. ‘코라이 전쟁(Bellum Corai)’이라고 부른다. 전쟁의 원인과 경과 및 결과에 대한 보고도 마찬가지다. ‘코라이 왕국(Regnum Corai)’에 대한 보고부터 먼저 읽어보자.

코라이는 얼마나 큰 나라인가?

코라이 왕국의 길이는 대략 100레우카(1레우카는 약 6km)이고, 폭은 약 70레우카다. 이곳에 사는 사람들은 언어와 힘에 있어서 키나인들과 구별됐다. 키나인들은 이들을 무서운 사람들로 여긴다. 그럼에도, 코라이는 키나 왕에게 조공을 바쳤고, 키나 왕을 섬기는 신하들과 교역했다. 코라이인들은 키나의 법률, 의복, 제도, 통치방식을 따르는 것으로 보인다. 국경의 일부가 만주인의 지역에 접해 있고, 다른 종족들과도 경계를 이루고 있다. 가끔은 평화를, 가끔은 전쟁을 벌였다. 그러나 키나인들과는 언제나 평화를 유지했다. 코라이인들은 활을 탁월하게 다뤘다.
그러나 다른 무기들에 있어서는 그렇지 못했다. 코라이인들이 보유하고 있는 여타의 다른 무기들은 위협적이었지만 그 수가 많지 않았다. 이런 이유에서, 코라이인은 이아포니아인에게 적수가 되지 못했다. 전쟁을 상시적으로 치러야 했던 이아포니아인은 항상 훈련 중이었다. 천성적으로도 드세고 용감했으며, 또한 철제 총포와 긴창과 검으로 무장하고 있었다. 다만 수군에 있어서는 이아포니아인이 코라이인과 키나인에게는 적수가 되지 못했다. 코라이인이 바다에서 사용하는 함선은 일단 규모가 크고 목재가 더 단단했다. 만약 바다에서 싸운다면, 이아포니아인이 코라이인의 적수가 되지 못한다는 사실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174쪽)

코라이의 소개에서부터 전쟁의 기운이 감지된다. 양국의 전투 능력에 대한 설명에 눈길이 간다. 육전에서는 이아포니아가 코라이를 앞서지만, 해전에서는 코라이가 앞섰다고 한다. 이순신 장군에 대한 소문이 일본에 있었던 선교사들에게도 흘러간 것으로 보인다. 선박의 목재가 더 단단하다는 언급도 흥미롭다. 거북선을 지칭하는 것으로 보인다. 코라이의 배들이 사용하는 목재가 실제적으로 더 단단했음에 대한 언급일 수도 있다. 코라이인들이 목재를 다루는 전통은 대장경 목판을 다루는 기술에서 그 유래를 뒀다 한다. 목판을 오래 보존하기 위해서 나무를 바닷물에 오래 담궈뒀던 기술이 선박의 제작에도 이용됐다고 한다. 이아포니아인이 “총포”를 사용하고 있다는 언급도 나온다. 당연하겠지만 이아포니아인이 총포를 사용했다는 점은 동서교류사에서 매우 중요하다. 서양에서 들여 온 총포 덕분에 이아포니아 전체가 통일됐고 코라이 전쟁을 벌일 수 있었기 때문이다. 총포의 위력에 힘입어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 1537~1598)가 이아포니아를 통일하고 그 여세를 몰아 코라이를 거쳐서 키나를 정벌하려는 야심을 품었다고 책은 전한다.

타이코사마는 왜 코라이인들과
전쟁을 벌이려 했는가?

자신의 통치를 공고히 하고 이아포니아에 통일 왕국을 세우고 그것을 자신의 후손들에게 물려주는 것이 타이코사마(太合)의 유일한 관심이자 숙원이었다. 그러나 왕국을 이어받아 자신의 명예를 영원하게 키워주고 보살펴 줄 자식들이 없었다. 그래서 그는 전적으로 생각을 바꿨다. 이는 그가 쉽게 성취할 수 있는 것이다. 아주 오랫동안 숙고를 거쳤다. 그에게는 자신의 형의 아들들인 조카가 세 명 있었는데, 이들에게 최고의 지위를 주려는 계획을 세웠다. (…) 이 계획을 실행하는 중에 코라이 왕국을 복속시키기 위해 전쟁을 선포해야겠다는 계획을 품게 됐다. (…) 콰바콘도누스는 앞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이아포니아의 상황을 정비하고 나자, 드디어 그 동안 마음 속으로 오랫동안 궁리하고 있었던 생각을 펼칠 시기가 됐다고 판단했다. 즉 코라이와 전쟁을 벌이기로 말이다. (263쪽)

전쟁이 도요토미의 개인적인 야망에서 비롯됐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치자. 흥미로운 점은 도요토미가 코라이 전쟁에 주로 그리스도 신자로 구성된 부대를 파견했다는 보고일 것이다.

콰바콘도누스(관백)은 키나와 전쟁을
벌이려고 준비했다

 

이아포니아의 정치적 상황 전반에 대해서는, 즉 콰바콘도누스가 이아포니아 전체에 통치와 지배를 선포하려 한다는 점에 대해서는 이미 다른 자리에서 기술했다. 진실로 통치영역을 그토록 넓은 지역에 선포해 본 적이 없었다. 왕권을 완벽하게 세우기 위해, 또한 불멸의 명성을 후세에 남기기 위해 그는 새로운 성공을 통해서 권위를 강화해나갔다. 최고의 지위에 오르는 것만으로는 결코 충분하지 않았다. 양식을 구하기 위해 매일 장작을 패고, 어깨로 져 날라 시장에 내다 팔았던 이로, 가장 비천한 신분에서부터 시작한 사람이었음에도 말이다. 이는 콰바콘도누스 스스로가 자주 한 말이었다. 그는 대규모의 전쟁을 통해서 왕국의 권위와 모든 사람들에게 자신에 대한 기억을 영원히 심어주려고 시도했다.
그래서, 그 해(아마도 1591년)에 그는 키나인에게 전쟁을 선포하려는 마음을 먹었고, 이아포니아의 모든 장수를 이끌고 자신이 친히 전쟁터로 나가려고 마음 먹었다. 비록 불가능한 일이었음에도, 그는 이를 능수능란하게 실천에 옮겼다. 코라이 왕국을 정복하는 일을 말이다. 모든 크리스티아누스(그리스도교 신자) 신자들이 하나의 군대를 이뤄 키나로 원정을 떠날 수 있도록 말이다. 그러나 불길한 소식이 흘러 들어왔다. 그가 시모(규슈, 九州지역)의 질서를 뒤바꾸고, 코라이를 크리스티아누스 신자인 장군들에게 맡기려는 계획을 품고 있다는 소문이 들려왔기 때문이다. 하지만, 콰바콘도누스가 자신의 계획을 이 시기에 완수할 수 없고, 이런 계획을 실천에 옮기는 것도 시기적으로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며칠 지나지 않아서 우리는 알게 됐다. (121쪽)

인용은 통일왕국을 공고하게 만들기 위해, 또한 이아포니아의 여러 정치세력의 질서를 재정비하기 위해 전쟁을 준비했다고 전한다. 시모지역의 부대를 코라이에 파견하려 했다고 한다. 시모는 그리스도교 신자들이 많이 거주했던 지역이다. 이쯤 되면 코라이 전쟁은 세계사적인 관점에서 해명이 가능할 것이다. 서양에서 총포가 들어왔고 그 총포를 사용하는 이들이 통일왕국의 수립에 결정적으로 기여했다. 하지만 그들은 어떤 식으로든 제거돼야 할 세력이었다. 효율적인 수단이 전쟁이었다. 하지만 전쟁의 명분은 “정명가도(征明假道)”였다. 예수회의 보고다.

전쟁의 명분은 코라이 왕국에게 키나로 가는 길을 내어 달라는 것이었다. 코라이 왕국은 섬과 비슷한 지역이었다. 이 지역의 머리에 해당하는 곳이 키나에 맞닿아 있었고, 거의 단절된 왕국이었다. 비록 키나 왕에게 종속됐고, 조공을 바치는 왕국이었지만 말이다. 이 왕국의 한 면은 바다에 의해서 이아포니아로부터 떨어져 있었다. 콰바콘도누스는 코라이 왕국을 복속시키려고 결심했다. 코라이 왕국은 물자를 보급함에 있어서 풍요로운 곳이고, 키나로 넘어감에 있어서 용이한 곳이었기 때문이었다. (170쪽)


도요토미가 정명가도를 내세울 수 있었던 것도 어쩌면 서구에서 들여온 총포의 위력 덕분이었을 것이다. 총포라는 신식 무기의 힘을 빌어서 이아포니아는 코라이를 침략했다. 명나라도 5만의 군대를 파견한다. 전쟁은 조-명 연합군 대 이아포니아 군대의 대결로 확전된다. 예수회 신부의 표현대로, 코라이 전쟁은 동아시아 전쟁이었다. 전쟁의 초기상황에 대한 보고다.


모든 것이 완료되자, 음력 3월이 시작하는 즈음에 그는 나고야를 향해 여행을 나섰다. 아우구스티누스(고니시 유키나와, 小西行長, 1555~1600)에게 명해 코라이 왕국으로 선발로 출정시키고, 다른 장군들은 쓰시마 섬에서 대기하라고 명했다. 마침내 음력 3월 26일에 나고야에 도착했다. 그곳으로 다른 장군들이 소집됐고, 다른 네 명의 장군들이 이끄는 군사를 제외한 20만 군사가 집결했다. 그 동안 아우구스티누스는 자신의 군사와 함께 80척의 배를 이끌고 코라이로 진격했다. 이 부대에서 프로타시우스(아리마 하리노부, 有馬晴信, 1562~1612)가 특히 뛰어났다. 비록 단지 2천 명의 군사를 이끌었지만, 무기와 함선의 화려함으로 모든 이들을 감탄케 만들었다.
코라이 왕국에 침범하면서 두 번의 전투를 벌였다. 이 전투들에 대해서 코라이인들은 용감하게 맞섰다. 높은 성벽의 보호를 받고 있었고, 군대의 힘과 성벽에 설치된 두 뼘 반 정도로 긴 화살의 위력을 믿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포환 대신에 나무로 된 화살을 날렸고, 양날로 된 화살을 쏘아댔는데, 큰 소리를 냈다.
하지만, 이렇게 날리는 화살의 공격은 모두 무위로 끝났다. 총으로 무장한 이아포니아인들이 있는 곳에는 도달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 총에 대해서 코라이인들은 전혀 모르고 있었다. 그러자 이아포니아인들은 곧장 코라이인들을 성벽으로부터 몰아냈고, 단단한 모래 바닥에 단단하게 사다리를 고정했으며, 성벽에 걸쳐놓았고, 곧장 성벽으로 타고 올라가서 깃발을 꽂았다. 코라이인들이 잠시 저항했다. 하지만 곧장 줄행랑을 놓았고, 약 그들 가운데 5천 명의 사람들이 죽었다. 그러나 아우구스티누스의 군사는 약 1백 명의 군사를 잃었고, 4백 명이 부상을 입었다. (170쪽)

이처럼 코라이 왕국을 침범한 군대가 서양의 총포로 무장한 그리스도교 신자로 구성됐다는 보고에 눈길이 간다. 그들을 이끌었던 고니시 유키나와와 아리마 하리노부는 독실한 그리스도 신자였다. 전자의 세례명은 아우구스티누스였고, 후자는 프로타시우스였다. 각설하고, 전쟁을 통해서 서구의 문물과 서구의 종교는 이렇게 코라이 왕국에 들어온다. 또한 코라이 왕국은 세계사의 직접적인 영향을 받는 나라로 편입된다. 보고는 부산진 전투에서 코라이 군대가 서양에서 들어온 총포의 위력에 놀라 도망쳤다고 전한다. 서양의 문물인 총포의 위력이 얼마나 대단했는지를 보여주는 단적인 사례라 하겠다. 서양의 총포로 무장한 이아포니아 군대는 큰 저항을 받지 않고 단숨에 한양으로 진격했고 도성을 장악했다고 전한다.

자신이 적에게 포위됐다는 것을 파악한 코라이 왕은 왕국의 여러 지역으로 장군들을 급파했다. 전세가 불리해지자, 코라이 왕은 도성을 버리고 자신의 군대를 이끌고 키나의 내륙 지역으로 도망칠 생각을 했다. 코라이에는 말이 많았기에 이는 쉬운 일이었다. 두 번째 혹은 세 번째 날 아우구스티누스는 아무 저항 없이 도성에 입성했다. 도성에 남아있던 사람들이 군수물자와 선물을 가지고 달려왔다. 그러자 아우구스티누스는 다른 부장들과 함께 도성의 통치자가 됐고, 모든 전공을 자신의 것으로 취했다. 나머지 장군들이 나고야로부터 이 시기 도착했는데, 그들은 모든 상황이 완료됐음을 알게 됐다. (175쪽)

인용은 코라이 왕국이 서양의 무기로 무장한 이아포니아 군대에게 얼마나 무력했는지를 보여준다. 왕이 중국의 내륙 지방으로 피난하려 했다는 지적도 한다. 아무튼 아우구스티누스가 도성을 장악하고 거의 전쟁에서 승리한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여기까지가 전쟁의 초기상황에 대한 보고다. 반전은 지금부터다. 전쟁의 결과에 대한 보고다.

코라이인이 이아포니아인과의
전쟁에서 승리했다


셋째 재앙이 찾아왔다. 왜냐하면 불리한 새로운 소식이 코라이 왕국으로부터 많이 날라왔기 때문이다. 코라이인들이 정신을 다시 가다듬고 이아포니아 군대를 무찔렀다. 거대한 함선으로 이아포니아 배 300척을 가로막아 버렸고, 선원들을 도륙했다. 콰바코도노스의 조카가 차지하고 있었던 8개의 성도 다시 회복했다. 이때 많은 이아포니아 군사가 살육당했다. 이로 말미암아 물자 보급이 끊긴 이야포니아 군대는 아주 큰 고생을 했다. 또한 질병이 크게 돌았다. 그로 인해 많은 군인이 목숨을 잃었다. 많은 군인들이 진지를 이탈해 이아포니아로 도망쳤다. 이 전쟁을 이길 수 없다는 생각으로 모든 군인들이 절망에 빠졌다. 이 사실이 콰바콘도누스에게 큰 수치와 큰 고통을 가져다 줬다. (196쪽)

‘재앙’은 이순신(李舜臣, 1545~1598)장군이 마지막으로 지휘했던 노량해전을 가리킨다. 책은 이아포니아가 전쟁에서 패배했고, 패전이 도요토미에게 큰 치욕과 고통을 가져다줬다고 한다. 전쟁은 이렇게 끝난다. 하지만 이게 끝은 아니었다. 그 끝이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동아시아의 새로운 질서를 여는 서곡이었으므로. 동아시아 삼국의 힘겨루기가 바로 이 전쟁으로부터 다시 시작하기 때문이다. 내 생각에, 현재 한반도를 둘러싸고 있는 동아시아의 지정학적 구도도 코라이 전쟁 때에 이미 결정됐다. 콜럼버스가 아메리카를 발견한 1492년이다. 그 이후 딱 100년 뒤에 코라이 전쟁이 발발했다. 그런데, 이 전쟁이 발발하게 된 근본적인 배경에는 코라이를 통해서 중국으로 들어가려는 이아포니아와 그들이 받아들인 서양에서 들여 온 무기의 위력과 종교적 염원도 함께 작용했다. 이런 역사적 배경을 고려한다면 기본적으로 동양 세계와 서양 세계가, 그 형식이 어떤 모양을 취하든, 한바탕 힘겨루기를 벌였던 최초의 사건이 코라이 전쟁이라 하겠다. 이 힘겨루기는, 이후 역사적으로 중요한 여러 후속 변화를 야기한다. 키나의 왕조가 명에서 청으로 교체된다. 이아포니아는 도요토미 정권에서 도쿠가와 이에야스(徳川家康, 1543-1616) 막부 정권으로 권력이 이양된다. 코라이는 또 다른 전쟁의 위험(병자호란)에 놓이게 된다.


그런데 코라이 전쟁이 야기한 변화는 미시사적인 측면에서도 포착된다. 전쟁 중에 포로로 끌려간 코라이인들이 그리스도교 신자로의 개종이 바로 그것이다. 전쟁을 통해서 코라이인이 서양 종교를 받아들였다는 점은 중요하다. 이아포니아가 지정학적인 이유에서 서양 정신문명의 제도적 실체인 그리스도교를 먼저 받아들인다. 하지만 이아포니아에서는 도쿠가와 막부의 박해를 받고 그리스도교는 더 이상 확산되지 않는다. 이아포니아가 받아들인 서양 문명의 실제를 고려해 본다면, 그들은 물질 문명의 수용에 더 적극적이었다. 이른바 ’동도서기(東道西器)’론이 그 증거다. 서양 종교에 대해 코라이인이 보여준 태도는 이아포니아인의 그것과는 차이를 보인다. 전쟁 포로인 코라이인들에 대한 관찰이다.

코라이인들은 그리스도교 신앙을
받아들이는 데 적합한 이들이다


성(聖) 금요일 저녁이었다. 성당의 문을 닫고 다음 날인 사바투스 날(토요일)에 있을 세례식을 준비하고 있는 즈음에, 성당의 문 옆에서 소란스런 소리가 들려왔다. 창문을 열고 무슨 일로 그러는지를 묻자, 코라이인들이 무릎을 끓고 이렇게 아주 겸손하게 이렇게 답했다. “신부님, 이곳에는 우리 코라이들만 있나이다. 어제, 전쟁 포로인 우리에게는 ‘십자가 행진’에 참여하는 것이 허용되지 않았나이다. 해서 이곳으로 찾아와야겠다고 마음을 먹게 됐습니다. 하느님께서 우리를 불쌍히 여기시고 우리의 죄를 용서해주시기를 간구하기 위해서입니다.” 코라이인들은 이렇게 말을 하면서, 피를 토하듯이 절실하게 간청했는데, 이 말을 듣는 이는 그 어느 누구도 흐르는 눈물을 막지 못했다. 이 코리아인들은 참으로 강했고, 진실로 순결한 마음을 가지고 있었는데, 이들은 “자신들은 결코 이아포니아인들에게 뒤지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코라이 전쟁으로 말미암아 찾아온 새로운 수확의 첫 결실이 하느님께도 기쁨이 됐고, 또한 그들 자신의 영혼의 구원을 위해서도 마찬가지였다. 이아포니아를 통해서 코라이에 복음을 전파할 수 있는 길이 마련된다면, 코라이 왕국에 복음이 널리 전파될 것이라는 믿음이 모든 사람들이 가지게 됐던 공통의 확신이었다. (439~440쪽)

관찰은 예수회 신부가 코라이인들을 매우 동정 어린 시선으로 맞이했고 그들을 그리스도의 세계로 인도했다고 전한다. 코라이인들이 서양의 종교를 받아들인 데에는 여러 해명이 가능할 것이다. 전쟁 포로라는 점에서 구원이 절실했을 것이다. 하지만, 이것만으로는 부족하다. 나중에 소개하겠지만 18세기와 19세기에 전쟁이 아닌 종교적인 이유에서 자발적으로 순교를 선택하는 사람들이 무수히 나오기 때문이다. 또 다른 이유가 있을 것이다. 아무튼 책은 코라이 전쟁 시기에 이아포니아로 끌려가서 순교한 코라이 신자들에 대해서도 소개한다.


하지만 세례명으로 언급되기에 추적하기 어려운 대목이 없지 않다. 하지만 코라이 전쟁은 코라이를 서양에 알리는 계기가 됐고 코라이인에게는 새로운 정신세계를 소개해 준 사건이었다는 점은 분명하다. 여기에 한반도의 지정학적 역학 구조가 결정된 것은 구한말이 아니라 코라이 전쟁의 시기로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는 점도 덧붙여야 한다. 분단의 질곡과 고통도 실은 동양 문명과 서양 문명이 때로는 교류하고 때로는 충돌하는 양상 가운데에 하나이기에. 하지만 꼭 부정적으로 볼 필요는 없을 것이다. 우리가 구촌시대(球村時代, Global age) 에 가장 요청되는 개방과 융합의 태도를 갖게 된 것도 어쩌면 이 지정학적인 구조 덕분일지도 모르기에.


글·안재원
서울대 서양고전학 협동과에서 석사(헤시오도스의 <신통기>에 나타난 호메로스의 수용과 변용 연구)학위를 받은 뒤 독일 괴팅엔 대학 서양고전문헌학과에서 로마 하드리아누스 황제 시대의 수사학자인 ‘알렉산더 누메니우의 <단어-의미 문채론>’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현재 서울대 인문학연구원 HK연구교수로 재직중이다. 키케로의 <수사학>(2006), <Hagiographica Coreana 2> (2012), <인문의 재발견>(2014), <고전의 힘, 그 역사를 읽다>(공저, 2016) 등의 저술과 <교황 요한 22세가 보낸 편지에 나오는 Regi Corum은 고려의 충숙왕인가?>(2016), <서양고전문헌학과 동양고전문헌학의 만남> (2017)등 다수의 논문을 저술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