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자 이익을 흔적없이 지우는 ‘사회적 대화’

2017-08-31     질 발바스트르 | 기자 겸 영화감독

“위대한 피에르 앙드레 앵베르. 현 노동법의 설계자이자, 위대한 레이몽 수비의 제자이기도 한 그는 조만간 대통령의 사회 담당 보좌관으로 활동할 예정이다.”

2017년 5월 22일 게재된 이 메시지는 빈정거리는 투로 보면 마치 ‘치명적 아첨꾼(기사에 과도한 칭송을 담은 댓글로 형편없는 기사임을 역설적으로 꼬집는 전문가들)’의 글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 글은 경영 컨설팅업체 알릭시오 사에서 게재한 것이다. 알릭시오는 니콜라 사르코지 전 대통령의 사회담당 보좌관이던 레이몽 수비가 2010년 설립한 기업이다. 사실 알릭시오에 있어 앵베르의 발탁소식은 축배를 들어 마땅한 일이었다. 미리암 엘콤리 노동장관의 전 비서실장이자, 2016년 8월 8일 제정된 ‘노동법’의 막후설계자이기도 한 피에르 앙드레 앵베르는 사실상 알렉시오 출신의 인사였다. 그는 자신의 멘토와 좌웅을 겨루는 ‘위대한’ 인물이 돼 대통령 보좌관에 오르기까지 참으로 길고 긴 지난한 여정을 거쳐 왔다.

국립행정학교(ENA)를 졸업한 수비가 주로 보수진영에서 잔뼈가 굵은 인물이라면, 앵베르는 좌파진영을 경력의 출발점으로 삼은 인물이다. 장피에르 슈벤느망의 열렬한 추종자였던 젊은 앵베르는 1995년 파리 1대학에서 노동경제학을 전공했다. “당시 이 노동경제의 실험소를 진두지휘한 이가 프랑수아 미숑이었는데, 그는 주로 마르크스주의적 색채가 짙은 노동시장이론들을 미국에서 수입한 학자였다.” 현재 장 뤽 멜랑숑의 측근이자 당시 파리 1대학 부교수이던 경제학자 리엠 호앙 응옥이 과거를 회상했다. “예비박사(DEA) 과정을 마친 앵베르는 동급생 중 가장 뛰어난 두 명의 수재 중 한 명이었다. 미숑과 나는 그에게 논문을 쓰는 데 필요한 연구수당을 지원해주겠노라고 제안했다.”

앵베르는 1995년 12월 사회운동에 투신했다. 그는 당시 노동자들의 편에 서서 알랭 쥐페 총리의 노동개혁안을 반대하는 시위에 동참했다. 또한 호앙 응옥과 함께 ‘유일사상을 벗어나기 위한 경제학자들의 호소’를 진두지휘하는 한편, 국제금융관세연대(ATTAC)의 첫 저서인 <시장의 독재에 반기를 들고>의 출간에도 앞장섰다. 1996년 10월 그는 공저자로 <르몽드 디플로마티크>에 기사 한 편을 기고했다. 기사에서 그는 실업이 노동경직성에서 비롯되고, 해고가 자유로울 때 비로소 경영자가 더 쉽게 직원을 고용할 수 있다는 견해에 반기를 들었다. 그러면서 그는 그와 완전히 상충되는 다양한 실업해소 방안을 제시했다. 가령 급여인상으로 소비를 진작해 상품의 주문량이 늘어나도록 하거나, 급여조정 없이 노동시간을 32시간제로 전환하거나, 공공서비스를 확대하자고 주장했다.(1) 당시 에마뉘엘 마크롱은 19세 풋내기에 불과했다. 즉, 미래 대통령의 보좌관이 일찌감치 먼 훗날 대통령의 견해를 조목조목 반박하는 셈이었던 것이다.

앵베르, 레이몽 수비의 두 얼굴을 닮아가다

1997년 사회당이 재집권한 뒤 앵베르는 홀연히 학계를 떠나 하원금융위원회 위원장인 앙리 에마뉘엘리의 동료로 변신했다. 하원금융위원회는 전략적으로 중요한 자리였다. 그곳에서 그는 중요한 인맥을 두루 쌓았는데, 가령 그처럼 랑드 지역 출신인 국립행정학교를 졸업한 사회당원 자비에 라코스트와도 친분을 맺었다. 라코스트는 당시 로랑 파비위스 하원의장의 비서실에서 일했는데, 레이몽 수비와도 친분이 두터웠다.

사회당에 일대 변화의 바람이 불어 닥쳤다. 리오넬 조스팽 총리가 파업 중인 노조원들을 향해 “국가가 모든 것을 다 해줄 수는 없다”고 선언했다. 나침반 바늘이 방향을 잃은 듯 사정없이 공회전했다. “피에르 앙드레는 야심가였다. 그러나 권력과의 관계만큼은 애매모호했다. 그는 파리 교외지역 출신의 서민태생이었다. 그는 빛의 세계에 속하기를 갈망하는 한편, 동시에 그러기를 단호히 거부했다.” 호앙 응옥이 과거의 기억을 더듬으며 말했다. 앵베르는 또 다시 인생의 전환점을 맞이했다. 어느 날 돌연 정계를 떠나 권력이 훨씬 더 은밀한 형태를 띠는, 경제적 이권을 훨씬 더 많이 누릴 수 있는 새로운 세계에 발을 디딘 것이다. 라코스트는 1992년 수비가 세운 인사컨설팅 그룹 알테디아로 전직했다. 학계에서 정계로, 정계에서 또 다시 재계로. 그의 눈앞에는 잘 짜여진 성공코스 같은 인생항로가 펼쳐졌다. 

앵베르의 고용주, 수비는 두 얼굴의 사나이였다. 먼저 전문가 ‘지킬’은 상냥하고 예의 바르며 열린 사고관을 가진 인물로, 기자들을 감탄하게 하고 정치인들을 흡족하게 하며, 노조 지도자들을 매혹시켰다. 반면 ‘하이드’는 고용 유연화, 해고 간편화 등 경영자 로드맵을 실현하는 데 두 팔을 걷어붙였다. 특히 파리 대표증시 CAC40 상장기업 대부분을 고객으로 둔 알테디아가 이를 제2의 임무로 삼아 쏠쏠하게 주머니를 채웠다. 2000년대 수비는 프랑스 제235위에 해당하는 막대한 재산(2)을 일궜는데, 특히 2005년 알테디아를 아데코에 매각한 것이 주효한 역할을 했다.

2003~2007년, 앵베르는 알테디아의 기획팀장직을 꿰찬 데 이어, 2010년 ‘사회공학, 구조개혁, 재산업화’ 부서의 책임자가 됐고, 다시 수비가 창립한 ‘경영 컨설팅’ 그룹 알릭시오의 부사장직에 올랐다. 앵베르도 수비와 마찬가지로 점점 양면적인 얼굴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그는 한편으로는 ‘자기 분야에 정통한 전문가’이자 ‘성실한 노동자’로 명망이 높았다. 그런 한편, 위압적인 아우라를 뿜어내며 원형경기장에 등장하는 무시무시한 검투사의 모습을 보였다. 2004년 4월 국영군수업체 지아트 앵뒤스트리가 생산시설 2곳(생샤몽, 퀴세)의 문을 닫은 데 이어 다른 2곳(타르브, 로안)도 ‘압살’시켰다. 게다가, 종업원 6,250명 중 절반이 넘는 3,850명에 대해 해고조치를 단행했다. 지아트 앵뒤스트리의 후신 넥스테르에 파견된 노동총동맹(CGT) 대표, 장피에르 브라트는 당시 상황을 이렇게 회고했다.

“알테디아는 회사의 의뢰로 노동자 재배치 업무를 담당했다. 컨설턴트들은 사무실에 들른 직원들에게 직장생활 30년 만에 느닷없이 이력서를 새로 쓰게 하고, 자신을 세일즈하도록 요구했다. 사실상 그들의 임무는 직장동료들을 서로 고립시킴으로써 집단투쟁을 막아보려는 것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경영자나 정부 당국은 불공정한 해고 사태로 인해 노동자의 분노가 폭발할 것을 두려워했다.”

당시 수비는 마이크와 카메라 뒤에 숨은 채 이런 주장을 늘어놓았다.(3) “적정한 성장률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각 기업이 연간 15% 인원을 감축해야 한다.” 그러나 여러 기업위원회(노사협의회)에서 공인회계사로 잔뼈가 굵은 파트릭 카스파르는 “경쟁력 운운은 그저 핑계거리에 불과하다”고 일갈했다. 노동 분야에 정통한 사회학자 멜라니 귀용바르슈도 “현재 우리는 해고가 일상화된 시대에 살고 있다. 이제는 해고가 일반적이고도 표준적인 직업경력의 한 과정처럼 돼버렸다”고 지적했다.(4) 그렇다면 수비와 앵베르 지휘 하의 알테디아는 대체 어떤 역할을 했을까? 브라트의 분석에 의하면, 그것은 바로 “사회적 원성을 진압”하는 것이었다.

‘사회적 대화’라는 표현이 무려 60배로 늘어

2012년 앵베르는 다시 정계로 복귀했다. 그는 역대 노동 장관을 차례로 보좌하며 노동 장관 비서실에서 차근차근 승진의 사다리를 밟아나갔다. 미셸 사팽 장관 시절에는 ‘경제 변혁’ 문제를 자문하는 보좌관으로 활약했고, 프랑수아 레브사멘 시절에는 부비서실장을 역임한 데 이어, 마리암 엘콤리 시절에는 마침내 비서실장직에 올랐다. 알테디아와 알릭시오에서 보낸 10년의 세월은 그를 금세 멘토에 버금가는 ‘위대한’ 인사로 만들어줬다. 

각종 경영자 관련단체를 부지런히 드나든 덕택에, 유력인사로서 입지를 더욱 단단히 굳힌 앵베르는 서둘러 각종 경영자의 요구를 법문화하는 데 앞장섰다. “엘 콤리의 ‘노동법’은 사실상 앵베르의 작품이나 다름 없었다”고 전 노동장관의 보좌관이 귀띔했다. “거의 완성본 상태의 개혁안이 노동부로 내려왔다. 장관이 개입할 수 있는 여지가 전혀 없었다. 모든 것을 진두지휘한 인물은 피에르 앙드레 앵베르였다.”(5)

2004년, 2008년, 2015년, 마침내 장피에르 라파랭(2002~2005), 프랑수아 피용(2007~2012), 마뉘엘 발스(2014~2016) 정부가 차례로 ‘사회적 대화’에 역점을 둔 법안을 줄줄이 내놓았다. 분명 매번 막후에서 법안의 도입을 위해 팔을 걷어붙인 것은 수비와 앵베르였으리라. 2014년 10월 앵베르는 말했다. “나는 사회적 대화가 혁신의 지렛대라고 생각한다. 최근 몇 년의 개혁안만 봐도 그렇다. 매번 사회적 대화를 통해 혁신을 위한 수단이 마련됐고, 이어 경제주체들의 노력에 힘입어 개혁안이 생명력을 이어갔다.”(6)

2000~2010년, 일간 <르몽드>에도 1970~1980년과 비교할 때, ‘사회적 대화’라는 표현이 무려 60배 사용된 것으로 조사됐다. 이것이 단순한 우연일까? 노동총동맹(CGT) 소속 마리즈 뒤마의 설명은 다음과 같다. “나는 ‘협상’이라는 표현을 더 좋아한다. 협상이란 다양한 관점과 이익이 함께 상존함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결코 똑같은 이익을 공유하는 이들끼리는 ‘협상’이란 것을 하지 않는다. 반면 대화는 아무하고나 할 수 있다. 그런 측면에서, 최근까지도 노동법에서는 경영자와 노조에 대해 ‘단체 협상’이라는 표현을 사용해왔다. 그러나 ‘사회적 대화’가 현대성의 표본처럼 간주되기 시작하면서, 정작 노동자의 권익은 흔적 없이 사라지고 말았다.”

반면 경영자는 국제금융관세연대(ATTAC) 출신의 경제학자가 그들의 권익을 보호해줄 만한 세상에 살고 있다.  


글·질 발바스트르Gilles Balbastre
기자 겸 영화감독

번역·허보미 jinougy@naver.com
서울대 불문학 석사 수료. 한국외국어대 통번역대학원 졸업. 

(1) Liếm Hoang-Ngoc, Pierre-André Imbert, ‘Cinq leviers pour l'emploi(고용을 위한 다섯 가지 수단)’,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프랑스어판, 1996년 10월.
(2) “Dans la coulisse de la réforme(‘개혁’의 막후)”,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프랑스어판, 2003년 6월.
(3) 기업의 변화를 위한 협회가 2011년 3월 28일 파리에서 개최한 ‘기업의 구원과 변화’ 제7차 연례회의 
(4) Mélanie Guyonvarch, ‘La banalisation du licenciement dans les parcours professionnels(직업경력에 있어 해고의 일상화)’,  <Terrains et travaux(테렝 에 트라보)>, 제14호, ENS Cachan, 2008년.
(5) <Le Canard enchaiếné(르 카나르 앙셰네)>, 파리, 2016년 2월 24일.
(6) ‘Dialogues, un creuset d'innovations(대화, 혁신의 도가니)’, 2014년 10월 8일, dialogue.asso.fr.


박스기사

인수촉진을 위한 법률

우선매수권 행사 이전에 노동자의 기업인수를 활성화할 해법이 있을까? 있다면, 초기에 경영악화 징후가 나타나자마자 파산 신고에 앞서 사전조치에 나서는 것이리라. 사실상 그것이 바로 사회연대경제에 관한 2014년 7월 31일자 법률, 이른바 ‘아몽법’의 도입 취지이기도 하다. 아몽법은 노동자가 기업 인수 의향서를 제출할 수 있도록 기업양도의 경우 기업이 자사 직원에게 미리 양도 계획을 사전 공지할 의무를 부과하고 있다. 그러나 2016년 1월 1일 도입된 마크롱 법은 사실상 기업의 책무를 상당히 축소시켜버렸다. 마크롱 법 도입 이후, 기업은 노동자에게 사전고지 없이도 무효화 조치 없이 벌금만 내고도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길이 활짝 열렸다.

프랑스 생산협동조합(SCOP)지역연맹은 기업의 책무를 강화하기 위해 ‘에코플라법’을 도입하자고 주장한다. 이 법안은 노동자가 자사의 경영활동이 어려움에 빠졌다고 판단될 경우, 해당 사실을 고용주에게 미리 경고하고 조처를 요구할 수 있는 경보권의 강화를 제안하고 있다. 론-알프스 지역연맹 대표 로랑스 뤼팽은 이렇게 설명했다. “현재 상업재판소는 문제에 개입할 의무가 전혀 없다. 따라서 이 사안과 관련해 반드시 법률을 강화할 필요가 있다. 에코플라처럼 명백하게 자사 자산을 마구잡이로 내다버리는 행위를 하는 기업에 대해 아무런 맞대응을 할 수 없다는 것은 어불성설이 아닐 수 없다.” 기업이 청산절차를 밟는 경우, 현행법은 고용구제보다는 채권자에 대한 채무상환만을 중요한 기준으로 삼고 있다. 그러나 에코플라 법은 장기간 고용유지를 조항에 삽입하고자 한다. 그러면 상업재판소가 기업양도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기업청산의 경우에도 고용유지를 판결의 중요한 기준으로 삼을 수 있을 것이다.  

글·M.H, C.M.   /   번역·허보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