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보’로 둔갑된 기업가 정신

2017-08-31     피에르 뮈소 | 렌느2대학 명예교수

지난 4월 선거유세에서 에마뉘엘 마크롱 대선후보는 “진정한 정권교체란 바로 능률성 제고”라고 주장했다. 요즘 프랑스 정치계에서는 유독 ‘능률’이 뜨거운 화두다. 너나 할 것 없이 모두 필사적으로 능률에 목을 맨다. 오늘날 정치계는 이중의 문제에 직면해 있다. 


첫째, 정치권이 점차 기술관료화 돼가고 있고, 둘째, ‘민중주권의 수호자’라는 상징적 토대를 잃었다는 것이다. 이제 정치권은 자신을 떠받쳐줄 버팀목을 찾아 기업세계를 기웃거린다. 그들이 벤처기업에 끊임없이 경애를 표하고, 기업을 향해 낯간지러운 사랑고백을 하며, 실리콘밸리 앞에 무릎 꿇기를 마다하지 않는 것도 모두 그 때문이리라. 하지만 능률이 대체 무슨 쓸모란 말인가? 능률이 과연 한 사회를 이루는 토대가 될 수 있을까?

그에 대한 해답으로, 서구가 스스로를 그런 인류학적 시선으로 바라보게 된 것이 1800년 이후 일어난 산업화와 관련이 깊다는 사실을 먼저 지적할 필요가 있겠다. 그러나 그런 놀라운 산업혁명을 이룩하기 위해서는 그 전에 먼저 창의적이고도 생산적인 인류를 칭송하기 위한 어떤 공통된 세계관을 구축할 필요가 있었다. 말하자면 ‘Industriation(필자인 뮈소가 만들어낸 표현. 본격적인 산업혁명 이전에 수도원에서 태동한 어떤 원시적 형태의 산업화를 의미-역주)’이라고 부르는 과정이 ‘산업화(Industrialisation)’ 이전에 선행했던 것이다. 이른바 ‘Industriation’ 과정은 기독교 모태 속에 자리를 잡고 훗날 세속적인 종교가 탄생하는 데 자양분을 제공했다.

‘산업종교’의 역사는 모두 세 번의 중대한 분기점을 거쳤다. 첫 번째는 바로 그레고리우스 7세의 개혁운동이었다. 이 개혁으로 12~13세기 포도압착 공정과 관련한 ‘최초의 산업혁명’이 실현됐다. 훗날 공장의 모습을 예고하기라도 하듯 강가를 따라 죽 늘어선 물레방아가, 포도주 생산을 위한 과거 수도사들의 수작업을 대체했다. 두 번째 분기점은 근대과학의 탄생과 그리고 진보라는 미명 아래 “인간을 자연의 주인이자 소유자로” 만들려고 한 르네 데카르트의 기획이었다. 마지막으로 가장 중요한 세 번째 분기점은 1800년 산업중시정책과 그와 함께 등장한 세속적이면서도 과학적인 ‘새로운 기독교’의 출현이었다. 이른바 ‘Industriation’ 과정은 각각의 분기점을 거치며 변화를 거듭했다. 그리고 이를 구현하는 생산기관도 수도원, 제조소, 공장, 기업 등으로 새롭게 재편됐다. 이들 생산기관은 의미부여의 역할을 하는 신앙과 노동공동체의 체계적 운영을 조직하기 위한 규율을 갖췄다.  

산업과 종교의 ‘성스러운’ 만남  

처음 시발점이 된 것은 수도원이었다. 수도원은 묵상과 독송의 공간이자 동시에 노동의 공간이었다. 공동체는 기도(Ora)를 통해 한 마음으로 결속하는 한편, 성 베네딕트의 규율이 정한 엄격한 의식 일정에 따라 체계적으로 육체노동(Labora)을 조직했다. 13세기 이후 교회 꼭대기에 설치된 추시계는 수도사들이 좀 더 ‘능률적’으로 일을 하며, 더 많은 자유시간을 기도에 할애할 수 있게 해줬다. 수도원은 강생(육화)의 신비(1)를 시간의 계산과 측정을 토대로 한 합리화 작업과 연결해주는 가교역할을 했다. 이처럼 서구 산업역사의 현장에는 늘 시계가 있었다. 사실상 시계는 도시와 작업장에 노동 시간과 규율을 부여했다. 그런 시계의 역할을, 현대에는 고성능 슈퍼계산기이자 슈퍼시계인 컴퓨터가 대신하고 있다.

수도원은 기도와 묵상을 보완하는 수단으로 ‘노동가치’를 인정했다. 노동은 금욕의 도구이자 나태를 막는 수단이며, 일종의 생산활동이자, 자선의 의무에 대한 해법이었다. 오늘날에도 여전히 성 베네딕트의 규율에 따른 체계적이고 엄격한 단체생활은 일종의 경영모델처럼 인식되곤 한다. 어떤 경영자들은 베네딕트회 수도원을 능률적인 거버넌스의 선구자로 여길 정도다. 가령 2001년 ‘의미 성장 연구소’의 공동창립자이자, 베네딕트회 수도사인 돔 위그 맹게도 이렇게 주장했다.

“베네딕트회 수도원은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다국적기업이라 할 수 있어요. 우리의 수도사 경영기법(원문은 Moine-agement. 발음이 유사한 경영을 의미하는 Management이라는 표현을 비틀어 만든 언어유희-역주)은 실상 성 베네딕트의 규율이 매우 우수하다는 사실을 여실히 증명해주지요.”(2)

11세기 말, 통화량과 교역량이 급격히 증가하면서, 수도원의 운영체계도 함께 변모했다. 가령 두 경쟁 모델이 새롭게 등장했다. 그것이 바로 클뤼니 수도회와 시토 수도회였다. 클뤼니 수도회는 번영을 구가하며 많은 상업활동을 벌였고, 덕택에 수도사들은 매우 호사스러운 생활을 누렸다. 그러나 좋은 시절은 오래가지 못했다. 수도사들의 호화롭고 안이한 생활과 부의 축재에 기부자들이 반감을 품고 등을 돌렸기 때문이다. 반면 시토 수도회의 경우, 사치를 금하고 재정을 아껴 쓰려고 노력했다. 그러나 금욕을 중시하는 수도사들의 생활과는 대조적으로, 수도원 자체는 토지자본의 수익이 증대되면서 풍족한 재정을 누렸다. 시토 수도회는 늘어난 재정을 바탕으로 각종 생산 인프라(배수관로, 물레방아, 도로, 작업장, 대장간, 포도압착실, 창고, 평수사를 위한 기숙시설 등)를 구축했다. 이로써 수도원은 흡사 일종의 제조소 같은 모습으로 변모하게 된다. 본디 경제와는 거리가 먼 기도의 공간이어야 할 수도원이 점차 미래의 제조소나 공장의 전신이라 할 만한 ‘생산센터’의 모습처럼 말이다. 

한편 시토 수도회와 프란치스코 수도회는 경제사조와 기술활동이 탄생하는 데도 기여했다. 시토 수도사들은 12세기 이후 생산정신을, 성 프란치스코의 제자들은 13세기 상업정신을 널리 발달시켰다. 시토회 수도사들은 새로운 문화와 기술, 상업유통망을 유럽전역에 전파했으며, 프란치스코회 수도사들은 돈을 무조건 죄악시하지 않았다. 프란치스코회 수도사들은 상업가들이 교역과 투자를 위해 유통시키는 돈에 대해서는 고리대금업자들이 벌어들이는 돈과 차별화해 비교적 관대한 시각을 가지고 대했다. 역사적으로 프란치스코회는 시장을 규범화하고, 경제주체를 부를 재창출하는 유익한 존재로 인정했다. 역설적이게도 상업정신은 요컨대 자신과는 전혀 상반되는 성격의 정신에서 탄생했던 것이다. 즉 기도를 중시하는 베네딕트의 규율과 청빈한 삶을 중시하는 시토회와 프란치스코회 수도사들의 정신이 그 뿌리가 됐던 것이다.

16세기의 종교개혁과 과학혁명

산업종교의 두 번째 분기점이 된 시기는 종교개혁과 과학혁명이 일어난 16세기였다. 자연은 강생(육화)의 신비를 받아들인 제2의 ‘위대한 존재’로 거듭났다. 그동안 신과 연계해서만 생각하던 자연에 대해 사람들은 새로운 시각을 갖게 됐다. 더 이상 인간은 자연 속이 아닌 자연 앞에 존재했고, 사람들은 수학을 통해 자연을 이해하려고 노력했다. 1620~1630년, 새로운 기계공학적 세계가 구축됐다. 앎은 관조가 아닌, 실험과 제조가 됐다. 생각은 곧 실행을 의미했다. 산업종교의 선지자인 철학자 프랜시스 베이컨은 “산업을 통해 자연을 극복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런 이상을 몸소 실천한 단체가 바로 1660년 런던에 설립된 영국왕립학회였다. 

이른바 ‘industriation’이 ‘industrialisation’으로 변모하기까지 매우 중대한 영향을 미친 것이 1750년 정치경제학의 탄생, 그리고 산업주의·중농주의(모든 부는 토지에서 나온다고 주장하는 부류)·중상주의(무역을 중시한 부류)를 주창하는 각종 자유주의자들의 팽팽한 대결이었다.

사실상 그 대결의 배후에는 두 철학계의 거목이 있었다. 그들이 바로 장자크 루소와 데이비드 흄이었다. 먼저 루소는 ‘industria’란 자기 탐구를 통해 자신을 완성해나가는 과정이라고 봤다. 반면 흄과 그의 친구 애덤 스미스는 노동 분업이 지배하는 제조소에서 노동으로 물질적인 것을 만들어낸다는 의미에서의 산업을 옹호했다. 흄은 저서 <정치론>(1752년)에서 “자고로 모든 권력과 부의 실체는 산업정신을 자극하고 노동 기반의 자본을 증대”하는 것이라고 기술했다.

19~20세기의 산업혁명과 경영혁명

19~20세기를 거치면서 이른바 ‘Industriali-sation’은 세 번째 분기점을 맞이하게 된다. 그것이 바로 1830년경 산업혁명과 1880~1940년 경영혁명이었다. 산업혁명이 기술과학을 신앙으로 삼았다면, 경영혁명은 노동조직에 관한 규율을 정립했다. 공장-기업은 바로 그 두 가지를 단단히 결합시켰다. 인류를 제2의 ‘위대한 존재’로 삼은 이 새로운 신앙은 또 다시 강생(육화)의 신비를 열렬히 설파했다. 가령 이 신흥종교의 대사제격에 해당하는 철학자 오귀스트 콩트(1798~1857)가 이 새로운 신앙을 율법화했다. 한편 1848년 젊은 에르네스트 르낭도 “인류를 과학적으로 조직”하기를 꿈꿨다.(3)

차츰 여기저기 공장이 늘어나는 사이, 초기 사회주의자들도 이 신흥종교를 널리 전파했다. 가령 앙리 생시몽은 “과학 및 산업 시스템은 신의 원리를 실행시키는 것”(1821년)과 다르지 않다고 주장했다. 이제 전지전능한 창조주는 더 이상 초월적 존재인 신이 아니라, 자기완성을 실현한 인간 그 자신이었다. 세속적이고도 합리적인 이 신흥종교가 가진 파우스트적인 비전은 곁에 두 길잡이를 뒀다. 그것은 진보와, 미래의 행복에 대한 장밋빛 약속이었다. “과학이 발명하거나 발견하면, 산업이 그것을 활용하고, 인간이 그에 맞춰 적응한다.”(1933년 시카고) 이처럼 만국박람회장은 이런 신앙과 신념이 실물로 체현된 공간이었다.

1900년대, 프레드릭 테일러나 앙리 파욜 같은 엔지니어들이 창안한 경영기법에 힘입어 산업종교는 좀 더 체계적인 규범을 갖추게 된다. 1909년 4월 <더 엔지니어링 매거진>에 실린 ‘능률의 복음’(Gospel of Efficiency)은 기계공학이라는 신학을 위한 일종의 성서가 돼 줬다. 1941년 전직 경영자 출신의 트로츠키주의자 제임스 버넘이 <경영혁명>(4)이란 책을 출간했다. 이 책은 레옹 블룸의 서문과 레이몽 아롱의 홍보에 힘입어 프랑스에도 널리 전파됐다. 저자는 책에서 경영자와 기업의 힘은 사회주의나 자본주의를 능가한다고 지적했다. 경영혁명은 국가나 정치를 능가하는 기업의 우월성을 주장했다. 요컨대 두 차례의 세계대전을 거치면서 국가나 정치는 몰락했다는 주장이었다. 따라서 정치권력도 기업의 경영자들이 대신해야 한다고 했다.

이런 식의 시각은 특히 아나키스트들 사이에서 널리 유행했다. 가령 윌리엄 고드윈이나 피에르 조제프 프루동, 혹은 생시몽이 “정치란 사실상 생산학”이라고 일갈했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컴퓨터를 활용한 작업의 능률을 일종의 교리로 삼은 사이버네틱이 경영 분야에 적용됐다. 사이버네틱은 인간과 기계, 뇌와 컴퓨터 사이의 상관관계를 연구하며, 자동조종, 숫자, 알고리즘 등을 통해 인간을 관리하는 것을 최우선 목표로 삼았다. 가령 오늘날 가장 대표적인 예가 금융시장이었다. 정치가 몰락하자, 결국 경영 교리와 사이버네틱 모델이 결합한 이른바 사이버경영이 의사결정과정에 절대적인 합리성을 부여해주겠다며 자처하고 나섰다. 르낭이 꿈꾸던 이상향을 완성한 사이버경영은 오로지 단 하나의 척도만으로 인간을 경영하고 사물을 관리했다.

바야흐로 기업이 새로운 지배기구로 군림했다. 기업은 물질생산과 지적생산을 관장하는 최고의 기구로 거듭났다. 기업은 순식간에 사회·경제적 조직으로 전락했다. 그로 인해 기업이 지닌 정치·문화적 차원은 자주 무시됐다. 그러나 그람시는 “헤게모니는 공장에서 탄생한다”고 주장했고, 1817년 생시몽도 “거대한 산업현장으로서의 국가를 보라”(5)고 외쳤다. 오늘날 다시 이런 시각을 부활시킨 자가 있으니, 바로 마크롱 대통령이다. 마크롱 대통령은 이른바 ‘벤처 국가’(6)건설을 희망하는 인물이다. 단순히, 기만적인 성격의 경영신어(뉴스피크)를 도입하고 대통령의 이미지에 난데없이 ‘기업 프랑스’의 총수 이미지를 덧입히는 수준에만 그치지 않고, 나아가 아예 산업종교가 전성기를 구가하며 판을 치고 있다.

이처럼 서구 기독사회 내에서는 말하자면 한 종교가 다른 종교를 등 뒤에 조용히 감추고 있었던 것이다. 마침내 정치와 국가의 신성화가 무대 전면을 차지했다. 그러나 정치와 국가가 각기 ‘환속’과 ‘세계의 탈주술화’를 위해 싸우는 동안, 정작 밀실에서는 ‘종교적인 것’의 새로운 변신을 통한 ‘탈속화’ 작업이 부지런히 진행 중이었던 것이다. 마침내 수도원 안에서 오랜 시간에 걸쳐 조용히 탄생한 산업종교가 각종 산업혁명을 계기로 화려하게 모습을 드러냈다. 산업종교는 지난 2세기 동안 각종 산업혁명을 거친 뒤 오늘날 디지털 혁명에 이르면서 마침내 최고의 전성기를 맞이했다.

최근 하버드 대학 연설에서 페이스북의 창립자 마크 저커버그는 글로벌 사회를 위한 야심찬 프로젝트를 발표했다. 그는 이 자리에서 의미 있는 기업 공동체의 필요성을 주창했다. “의미야말로 우리를 진정한 행복으로 인도해줄 수 있습니다. 저는 여러분께 여기서 행복에 이르는 세 가지 방법을 소개하고자 합니다. 첫째, 보다 큰 계획을 실행하자. 둘째, 우리 모두가 자유롭게 자신의 목적을 추구할 수 있도록 새롭게 기회의 균등을 실현하자. 셋째, 전 세계를 잇는 하나의 커뮤니티를 건설하자.” 그러면서 그는 다음 말을 덧붙였다. “우리는 모두 기업가적인 면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것은 아주 멋진 일입니다. 실상 기업가 문화야말로 이 모든 진보를 이끄는 원동력이기 때문입니다.”(7)

그것은 기막힌 바통터치가 아닐 수 없었다. 저커버그가 글로벌 사회의 방향을 새롭게 재정립하겠다며 자신의 산업주의적 시각을 전파하자, 얼씨구나 마크롱 대통령이 정치를 되살리기 위해서라며 기업가의 논리를 도입했다. 구글의 후원을 받는 싱귤레리티 대학의 공동창립자이자 실리콘 밸리의 영적 지도자로 통하는 피터 디아멘디스가 남긴 말은 이런 현상을 한 마디로 아주 명료하게 정리해준다. “나는 정치인, 요컨대 정치 그 자체의 힘보다 경영자의 힘을 더 신뢰한다.”(8) 사실상 이런 ‘실리콘밸리지상주의(실리코니즘)’는 말하자면 산업에 의한 정치흡수 현상이 가장 극단적인 형태로 발현된 일종의 자유지상주의적 변종이 아닐지.  


글·피에르 뮈소Pierre Musso
렌느2대학 명예교수. 대표적 저서로 <La Religion industrielle. Monastère, manufacture, usine. Une généalogie de l'entreprise(산업종교. 수도원, 제조소, 공장. 기업의 계보)>(Fayard·Paris·2017)가 있다.

번역·허보미 jinougy@naver.com
서울대 불문학 석사 수료. 한국외국어대 통번역대학원 졸업. 

(1) 신의 말씀이 그리스도의 몸으로 육화해 인간과 신이 하나로 합치되는 것을 의미하는 기독교 사상.
(2) Michel Feltin, ‘Les hommes d'affaires à l'école du moine-agement(수도사 경영 학교의 사업가들)’, <La Croix(라크루아)>, Paris, 1998년 12월 8일.
(3) Ernest Renan, <L'Avenir de la science(과학의 미래)>, Garnier-Flammarion, Paris, 1995년(초판: 1890년)
(4) James Burnham, <The Managerial Revolution. What's happening in the World>, 번역본 제목 <L'Ere des organisateurs(조직자들의 시대)>, Calman-Lévy, Paris, 1947년.
(5) Henri Saint-Simon, <L'Industrie(산업)>, 프랑스대학출판부, Paris, 2013년.
(6) 2017년 4월 13일 파리에서 개최된 제2차 ‘벤처서밋’
(7) <르몽드>, 2017년 5월 28~29일.
(8) Fabien Benoit, ‘A Palo Alto, au royaume des radieux(행복한 자들의 왕국, 팰로 앨토에서)’, <Libération(리베라시옹)>, Paris, 2017년 1월 9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