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자가 없는 독일 사민당

2017-08-31     윌리엄 이리고옌 | 언론인

오는 9월 24일로 예정된 독일의 차기 총선에서 사민당의 미래가 그리 밝아 보이지 않는다. 얼마 전 지방 선거에서 패하고 보수와의 연정체제 구축으로 위험한 줄타기를 하는 사민당은 그 사상적 요체마저 흔들리는 상황이다. 이런 당의 행보 앞에서 갈피를 잡지 못하는 각 지역 당원들은, 하나의 명확한 노선을 추구하며 공허한 노력을 지속하고 있다.


비 오는 어느 봄날 아침, 사민당 제2의 발원지인 바트고데스베르크의 공회당 ‘슈타트할레’를 따라 학생들이 시가행진한다. 독일 사민당(SPD; Sozialdemokratische Partei Deutschlands)의 유서 깊은 발자취를 보여주는 이 건물에 눈길을 주는 학생은 아무도 없었다. 1875년 독일 중부 고타에서 발족한 이 마르크스주의 정당은 1959년 11월, 이곳 바트고데스베르크에서 “경쟁이 허용되는 한, 어디에서든 자유시장 경제를 허용한다”는 강령을 내세우며 서독 진영으로 들어가 노동자 부문뿐만 아니라 다른 사회부문까지 정책과제로 포괄하겠다는 의지를 내비쳤다. 그 당시 사민당은 “새로운 경제·사회 질서의 수립”을 내세우며 “공유권은 현대의 어떤 국가도 포기할 수 없는 공적통제의 적법화된 형태”라며 한발 물러섰다.(1)

사민당의 ‘변절’과 연이은 패배로 인한 실망

그로부터 60여 년이 흐른 지금, 사민당 지도부의 ‘변절’은 더 이상 참을 수 없을 만큼 극단으로 치닫는다. 1998년에서 2005년까지 녹색당과 함께 집권한 사민당은 (연금, 실업, 노동법 등과 관련해) 복지 수준을 대폭 낮추는 개혁안 ‘어젠다 2010’을 내놓는다. 사민당이 앙겔라 메르켈 총리와 함께 대연정을 구축했던 2005~2009년과, 2013~2017년 두 시기에 지속된 이 개혁안은 여러 가지 한계를 안고 있었다. 볼프강 쇼이블레 재무부 장관이 그리스의 숨통을 죄는 압박을 가할 때도 어젠다 2010은 이를 저지하지 못했고, 메르켈 정권에서 도입된 최저임금제와도 기본 방향이 어긋났다. 또한 2015년 메르켈 총리가 난민영입을 호소했을 때도 어젠다 2010은 이에 부합하지 못하며 그 한계를 드러냈다. 

마르틴 슐츠 전 유럽의회 의장이 사민당 총재로 선출되자, 여론조사 기관과 언론에서는 이를 중대한 전환점이 될 것으로 인식하며 환영했다. 앞으로 슐츠 총재는 당을 정상화하는 것은 물론, 다가오는 9월 24일 총선에서 사민당의 승리를 견인함으로써 12년간 지속된 보수집권 체제를 종식해야 한다는 과제를 안게 됐다. 그러나 자르 주와 슐레스비히홀슈타인 주, 라인하르트베스트팔렌 주에서 치러진 지방선거에서 사민당이 연이어 패배해, 정권교체에 대한 기대와 희망은 사그라진 상태다. 

독일에서 연정체제(2)가 수립되는 경우는 빈번하지만, 지역 차원에서의 연정을 보면 사민당의 취약한 입지가 그대로 드러난다. 이미 4개 지역(3)에서 기독민주당의 보수세력과 연정을 구축하고 있고, 그 외 다른 3개 지역에서도 좌파당과 손을 잡고 있기 때문이다. 심지어 굳건한 제도적 기틀과 유력 정치인을 보유하고 있음에도 사민당이 과연 사회계획안을 제시할 역량이 있는 정당으로서 앞으로 계속 존속할 수 있을지 의구심이 들 정도다. 사민당은 여전히 독자적인 사상적 방향성을 가진 정치세력인가, 아니면 우파와 손을 잡고 정권연장에만 관심을 가지는 정당에 불과한가?

사민당이 겉으로 내세우는 말만 들어보면 별문제는 없어 보인다. 사민당은 사회적인 시장경제의 기반을 바로잡고 싶다고 천명했을 뿐 아니라 국가를 하나의 성장동력이자 고용창출 동력으로 삼고자 했으며, 고소득자에게 더 많은 세금을 부과하고 금융시장도 규제하고 싶다고 이야기한다. 임시직 고용을 남용하는 행태 역시 근절시키겠다고 단언하는 한편, 노동자의 기업위원회 참여 권한을 확대하겠다고도 했다. 일단 이런 부분들은 기독민주당의 기본목표와 합치되는 구석이 별로 없다. 기독당은 한층 더 규제가 풀린 자유무역을 옹호하는 한편, 조세경감을 내세우며 부유세 도입을 반대하고 공공부채를 강력히 비판하는 입장이기 때문이다. 이에 국가적인 차원이든 지역적인 차원이든 다양하게 나타나는 사민당과 기독당의 연정체제에서는 여기저기 구멍이 많다. 특히 정치적인 측면에서 기독당보다 사회당 쪽이 더 양보하는 분위기여서, 사민당 지지자와 당원들은 상대적 박탈감까지 느끼고 있다.

“사민당은 노동자들을 저버렸다.”

오늘날 근사한 건물들로 새롭게 옷을 갈아입은 루르 지방은 과거 공업지대로 유명했던 곳으로, 이 지역의 뒬멘 출신 안드레 스틴카는 노르트라인베스트팔렌 주의 지방 선거 당시 사민당 측 후보로 출마했다. 대외적 발언들과 현실 간의 격차를 인정하는 안드레 스틴카는 말한다. “당내에서 미혼모의 처우에 대한 논의가 끊이지 않지만, 우리 중 이런 여성들의 상황에 대해 제대로 알고 있는 사람은 없다. 일부 의원들은 논의 대상으로 삼아야 할 사람들에 대해서조차 언급하지 않는 모습을 보이기도 한다.”

지금은 현직에서 물러난 전 오펠 사 기업위원회 의장 라이너 아이넨켈도 “사민당이 노동자들을 저버렸다. 노동자들 그 자체가 사라질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라고 개탄하며 좀 더 강경한 태도를 보인다. 그는 현장에서의 오랜 경험에 근거해 이와 같은 사실을 깨달았는데, 공장폐쇄를 비롯한 여러 노사안건에 관해 소속 지역 사민당 의원과 협상을 벌였었기 때문이다. 그는 말한다. “사민당의 문제는 이 사람 저 사람과 함께 통치하겠다는 성향에서 비롯된다. 사민당은 당의 근본적 뿌리에 문제가 있는데, 이 점은 기독당도 마찬가지겠지만 기독당은 그 사상적 근거를 훨씬 더 중시하는 편이다.”

사민당의 자유주의적 탈선과 좌파당 창당

사민당의 이런 이데올로기적 문제는 1998년에서 2005년까지 게르하르트 슈뢰더 전 총리의 재임 시기에 그 정점을 찍었다. 영국의 토니 블레어 전 총리가 내세운 신자유주의 노선 ‘제3의 길’에 장단을 맞추던 슈뢰더 총리는 ‘새로운 중도’ 노선에 발을 들인다. 경쟁질서의 구축을 앞세우던 그는 정부지원을 축소하고 노동시장을 유연화했으며, 각자의 자구적인 노력을 요구했다. 그 결과 영세한 노동자들은 불과 몇 년 사이에 실업급여 수급자로 전락하고 만다. 이는 곧 사민당이 내세우던 정치철학에 위배되는 것이었으므로 사민당의 지지기반은 반 토막이 났고, 선거에서도 패한다. 전임자의 과감한 행보에 대해서는 2005년 말 취임해 첫 종합정책 기조를 발표한 신임 메르켈 총리 또한 경의를 표할 정도였다.  

그로부터 2년 후 사민당의 이런 자유주의적 탈선에 반기를 들며 독일 좌파당이 창당한다. 좌파당과의 동맹을 중시하면 사민당도 좌파적 뿌리를 한층 공고히 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 문제는 전국적인 차원에서 열띤 논란을 불러왔다. 전 사민당 유럽의원 헬무트 쿠네의 주장대로 “사민당은 좌파당과 손을 잡을 수가 없다. 좌파당은 NATO 탈퇴를 주장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베를린, 브란덴부르크, 튀링겐(주도인 에르푸르트에 지역 의회 본부 소재) 등지에서 두 정당은 연정 체제를 구축했다. 이 지역의 사민당 대표인 마티아스 헤이는 역내 집행부를 관할하는 좌파당 출신 보도 라멜로프에 대해 ‘현실감 있는 정치인’이라고 설명한다. 사민당은 현재 “억만장자를 거느린 이 지역의 불평등 해소에 관한 문제에 대해” 그와 함께 공동전선을 구축하고 있다. 그러나 좌파당과의 정책 조율에 있어 근본적인 입장차가 있다는 점에 대해서는 그 역시 인정한다. 작년만 하더라도 기독당-사민당 연대는 비호권을 박탈당한 알제리, 모로코, 튀니지 난민들의 추방을 원했지만, 좌파당과 녹색당은 이에 대해 반대하는 입장이었기 때문이다. 

인터뷰를 통해 만나본 여러 사민당 의원들은 의회에서의 “태생적 동맹”이라면 단연 좌파당이라고 확언했지만, “실용적 성향의 의원들로만 구성될 경우”라는 전제조건이 붙었다. 이는, 사민당 소속의 안드레아스 바우제바인 에르푸르트 시장의 뼈 있는 말처럼, “사민당의 노선에 실망한 구 공산주의자 및 무정부주의자”가 혼재된 서부와 달리 사민당과의 동맹결성에 익숙한 동부의원들을 가리키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 전에 에르푸르트 시장은 “오늘날 당이 겪고 있는 난관의 원인에 대해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고 덧붙였다. 즉 “당의 사회적 지지기반이 달라졌다”는 것인데, “사민당을 지지하던 전통적인 유권자인 노동자층 지지 세력이 이탈했다”는 것이다. 

당의 정책적 무능함도 사민당이 외면당하는 현 상황의 원인으로 제시된다. 사실 사민당은 초창기 단체협약에서나 노조인정 투쟁, 일일 8시간 노동제, 기업위원회의 창설, 실업보험 제정, 1970년대 동독과의 관계 완화 등 대부분의 주요 투쟁에서 승리를 거뒀으나, 그 이후 어떤 사회적 반모델도 제시하지 못했고, 포괄적인 정책견인도 실현하지 못하고 있다. 게다가 기독당과 대연정을 구축한 상황에서, 사민당은 독일 우파의 ‘사회 인식’을 고려할 수밖에 없다. 기독당과 함께 연정으로 집권한 슈베린 메클렌부르크포어포메른 주 지역의회에서 사민당은 이런 지적에 대해 일단 부인하는 입장이다. 사민당 측 대표인 코마스 퀴거는 “양측에 서로 근본적인 입장차가 존재한다”고 주장한다.

슐츠는 제2의 빌리 브란트가 될 수 있을까

“우리는 서부와 동부 간 임금평등에 관한 단체협상을 더욱 많이 원하고 있지만 기독당은 그렇지 않다. 노동시간과 관련해서도 양측의 입장은 서로 다르며, 무상교육 문제에 있어서도, 우리는 찬성하지만 기독당은 반대하고 있다. 게다가 이들은 모든 것을 다 민영화하려 든다. 그에 반해 우리는 국가의 중요성을 역설한다.” 

다만, 퀴거 대표는 (기존의 마르크스주의 성향을 약화시키고 새로이 자유민주주의를 추구한) 바트 고데스베르크 강령에 따라 “계획경제도 필요하지만 경쟁도 최대한 보장돼야 한다”는 견해를 내비쳤다. 사민당 측 정치재단인 프리드리히-에베르트 스티프퉁 직원 벤자민 히믈러는 지적한다. “사민당은 보수화된 것이 분명하다. 단지, 현상유지를 위해 노력할 뿐이다. 그러니 사민당이 기독당과 태생적 동맹관계에 있는 것도 놀랄 일은 아니다.”

그는 차기 총선 이후 다시금 ‘대연정’이 이뤄진다면 명부에서 자기 이름을 빼겠다고 단언했다. 현재는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지그마어 가브리엘 전임총재의 후보 사퇴 이후 당내 1인자가 된 슐츠 총재의 역량에 대해 의구심을 품고 있는 상태다. 사실 전 EU 의장이었던 슐츠 총재는 여러모로 모순된 행보를 보여준다. 그는 슈뢰더 전 총리의 개혁이 ‘가난한 노동자’ 세대를 만들어냈다고 시인하며, 실업급여 확대에 대한 의지를 표명하고 연금제도에 대한 지지의사도 내비쳤으며, 비정규직 채용 남용도 막아내겠다고 했다. 이 정도면 독일 노조위원장 라이너 호프만도 흡족해할 수준이다. 확실히 노조와 사민당은 슈뢰더 총리 재임 당시보다 더 원만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그러나 슐츠 총재가 한층 보수적인 제스처를 취하는 것도 사실이다. 가령 ‘필요한 개혁’이 이뤄지지 않을 경우 그리스의 유로존 탈퇴 가능성을 시사한 경우가 이에 해당한다. 슈베린 대학 정치학자인 마르틴 코슈카르는 “사민당 대표의 사회 정의 관념이 유권자의 눈에 명확히 드러나지 않는다”고 지적한다. 좌파당 대표 사라 바켄크네히트도 마찬가지 생각이다. 다수의 사민당원들로부터 지나치게 극단적이라는 지적을 받고 있는 좌파당 대표 사라 바켄크네히트는 사민당이 원래의 취지로 돌아올 것을 촉구한다. 특히 그는 1989년 이후 사민당의 기본 노선이 됐던 베를린 강령의 한 대목을 꼬집어 인용한다.(4) “현대의 시민혁명은 지금껏 실현되지 못한 자유와 평등, 박애를 약속해줬다. 노동자운동이 모두에게 자유로운 연대사회를 요구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이제 우리는 역사적으로 중대한 한 걸음을 내디뎌야 한다. 자본주의의 폐단을 바로잡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기 때문이다. 앞으로는 새로운 경제사회 질서가 필요하다.”

사민당에 관한 저서에서 정치학자 프란츠 발터는 노동자계급 기반의 사민당이 ‘새로운 중도’로 전향하면서 사상적으로나 사회학적으로 서서히 일탈 과정이 진행되고 있다고 기술한다.(5) 그의 저서에 의하면, 오늘날의 사민당에게는 더 이상 ‘사회주의적 목표’가 없다. 슐츠가 자주 지적받는 비판 중 하나는 그가 장 클로드 융커 집행위원장과 굉장히 닮아있다는 점이다. 9월 총선에서 그가 왼쪽으로 전향해 보수와의 차이점을 부각할 가능성은 별로 없지만, 그렇다고 좌파와의 단절을 선언할 것 같지도 않다. 그의 가장 큰 ‘자산’은 남다른 이력 및 친 대중적인 성향이다. 그는 분명 극성스런 언론의 마음에 드는 ‘상품’이다. 

슐츠 총재는 제2의 빌리 브란트가 되기를 꿈꾸지만, 그 실현 여부는 불투명하다. 1969년에서 1974년까지 총리로 재직한 빌리 브란트가 이끌던 사민당은 1백만 명 이상의 당원을 거느리고 있었다. 하지만, 오늘날엔 당원 수가 44만 5천 명에 불과하다. 여기에서도 하나의 분명한 정치적 메시지가 드러난다. 그것은, 당시에는 좌파에 대적할 만한 그 어떤 경쟁세력도 존재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글·윌리엄 이리고옌 William Irigoyen
언론인

번역·배영란 runaway44@ilemonde.com
한국외국어대 통역대학원 졸업. <22세기 세계> 등의 역서가 있다.


(1) SPD, ‘독일 사민당 기본 계획’, <Friedrich-Ebert-Stiftung>, 1959, www.library.fes.de
(2) 더 많은 의석을 보유한 정당이 이끄는 대연정의 상대.
(3) 메클렌부르크포어포메른 주, 자르 주, 작센 주, 작센안할트 주.
(4) 사민당, ‘Grundsatzprogramm der Sozialdemokratischen Partei Deutlschlands’, Berlin, 1989년 12월 20일, www.library.fes.de
(5) 프란츠 발터Franz Walter, <Die SPD. Vom Proletariat zur neuen Mitte>, Alexander Fest, Berlin, 2002 및 <Die SPD. Biographie einer Partei>, Rowohlt Taschenbuch(3판), Berlin, 20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