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 사르셀에서 일어난 기이한 일들

정치환멸과 기권이 낳은 ‘괴물시장’

2017-08-31     피에르 수숑 | 기자

"외곽지역에 사는 젊은이들은 대부분 거짓말을 밥 먹듯 한다."

지난 6월 프랑스 총선 당시, 서민 거주지역인 사르셀에서는 기권율이 무려 68%에 달했다. 오래전부터 시민들의 자치적인 행동에 반감을 품은 시 당국은 협력 프로젝트에 대한 정책을 후견주의(정치에서 투표자와 정치가 간에 거래하는 교환시스템-역주)로 대체했다. 그러나 유권자들의 시민정신은 더 이상 반민주적인 정치행태를 용납하지 않고 있다. 

“이런 폭도들이 지겹지도 않나요? 이들을 다 내쫓아 버리겠습니다!”라는 대사가 나오자 상영관에 웃음이 터졌다. 2015년 5월 29일, 생드니에서 영화 <Ils l’ont fait>의 상영관 풍경이다.(1) 하지만 파리 북부 외곽에 위치한 생드니 관객들이 웃은 이유는 10여 년 전, 발 두아즈 지역의 아르장퇴유에서 이 대사와 같은 말을 한 니콜라 사르코지 당시 내무장관과의 큰 추억 때문은 아니었다. 새로운 활력을 주는 이 코미디 영화에서는, 구원의 반전이 담긴 전형적인 큰 틀 안에서, 지나친 짓을 한 이들에게 인과응보식으로 돌려준다. 고층건물의 그늘 속에서 자란 시의원 후보, 칼리파 카마라는 저가 임대주택(HLM) 아래에 서있다. 이미 여러 번 출마한 경험이 있는 후보이자 선거운동 중인 이 지역의 세력가, 자크 아디를 가리키며 칼리파 카마라는 발코니에 앉아있는 한 시민을 향해 이 대사를 말한다. 

전략가인 자크 아디는 머뭇거리는 법이 없다. 그는 긴 아프리카 의상을 우스꽝스럽게 걸치고, 아프리카 이민자 거주지역을 방문해 아무 시민에게나 ‘체육관 경비’ 자리를 제안한다. 위협적인 거구의 인물을 고용하고, 돈 봉투를 주는 대신 아파트를 약속한다. 이런 권모술수에 맞서 칼리파 카마라는 다른 전략을 펼친다. 시청 컴퓨터를 해킹하고, 기권자들을 투표소로 끌어내는 차량 ‘투표부대’를 만든다. 가장 중요한 것은 자크 아디에게 추모사가 될 선거운동 슬로건이다. “우리에게 투표하는 것이 당신을 위해 투표하는 것입니다!” 환호성이 터져 나오면서 상영관의 불이 켜졌다.

조용히 있으면 아무것도 얻을 수 없다

“제가 사는 믈룅의 모습과 완전히 똑같아요”라고 하며 한 젊은 여성이 말을 시작했다. “다들 어린이집 자리나 시청의 일자리, 보조금 때문에 투표해요. 사람들에게 투표하라고 말하면 ‘투표해서 내가 얻는 건 뭐야?’라는 질문이 돌아와요.” 그의 말에 영화 시나리오 작가, 마지드 에데칸은 웃었다. “제가 사는 도시, 망트라졸리의 현실에서 실제로 영감을 얻었습니다. 영화는 우리가 겪는 일들을 아주 충실하게 표현하고 있죠.” 영화관에서 관객들은 비슷비슷한 경험담을 나눴고 다들 영화 <Ils l’ont fait>의 리얼리즘을 인정했다. 영화에서 보여주는 일부 우스꽝스러운 장면들은 실제 모습과 거리가 있었지만, 자크 아디와 마찬가지로 칼리파 카마라도 공약이 없다는 점은 분명했다. 우리는 이 부분에 대해 질문을 던졌다. “이곳저곳에서 촬영하면서 “우리 동네는 더 심해요”라는 말을 항상 들었습니다. 외곽지역에서는 이런 일들이 허다해요”라고 마지드 에데칸은 몇 번씩이나 강조했다. 

서민지역의 생활구조를 이루는 요소인, 공동체주의가 혼합된 후견주의가 시민들이 정치에 환멸을 느끼게 된 주된 원인일까?(2) 관람객 중 한 명이 딱한 듯이 말했다. “우리 동네 사르셀에 와 보세요. 영화랑 똑같아요!” 우리는 만나기로 약속했다. 며칠 후, 우리는 사르셀의 한 카페 테라스에서 나빌 코스코시가 분명 부풀려 말한 것이라는 의심이 들었다. “영화랑 똑같아요!”라고? 프랑스에서는 보기 드문, 1만 2천 가구가 들어선 대단지 주택 부근에서, 한 테이블에 앉은 니콜라(3)가 피곤한 기색으로 이야기를 시작했다. “일이 없을 때는 친구들과 여기저기 다녀요. 그러면 경찰들이 우리를 건드리죠. 경찰들은 우리 이름을 다 아는데 빈정대기도 하고, 우리도 그렇게 해요. 서로를 지치게 하는 유치한 짓이죠. 문제는 결국 항상 경찰들이 이긴다는 거예요. 우리를 가만히 내버려 두라고, 꺼지라고 소리를 지르면 명예훼손, 공무집행방해로 3개월간 철창신세가 되죠. 저도 얼마 전에 출소했는데 경찰들이 또 집적대요.”

서민 지역과 경찰력 간의 이런 피곤한 관계, 수감에 대한 위험, 그리고 실업과 연관된 경험이 추가된다. 프랑스 국립통계경제연구소(INSEE)의 지역 수치도 이를 뒷받침한다. 프랑스 평균 실업률이 10%였던 2013년, 사르셀 지역의 실업률은 23%에 달했다. 청년층(15~24세)에서는 무려 37%에 달했다.(4) 2014년, 이곳 인구의 1/3이 빈곤층에 속했다. “영화랑 똑같아요!”라고 니콜라가 설명했다. 

“자격증을 취득할 때쯤 루마니아 출신 배관공들이 저임금 불법노동을 하고 있었어요. 그 후에는 터키, 그리고 지금은 파키스탄 출신 배관공들이 더 낮은 임금으로 일하고 있어요.” 니콜라가 사르셀 시장 겸 사회당(PS) 하원의원인 프랑수아 퓌포니와 대면한 일을 이야기할 무렵, 나빌 코스코시가 단언한 영화 속 장면들은 희미해져 가고 있었다. 니콜라에 의하면, 2014년 7월 20일 소요사태 이후 며칠이 지나자, 팔레스타인 지지운동이 금지됐다. 운동이 일어나긴 했지만 심각하게 변질됐다고 한다. 그때 시장이 플라나드 쇼핑센터 앞에서 한 연설에서, 사르셀의 젊은이들을 미개하고, 유대인을 배척하는 이들로 취급했다는 것이다.
니콜라는 시장에게 항의했다. “시장님, 지금 무슨 소리를 하시는 겁니까? 사르셀의 문제는 그게 아닙니다. 우리는 유대인들과 함께 자랐습니다. 문제는 일자리가 없다는 겁니다.” 그러자, 시장이 니콜라에게 물었다. “당신 누구요? 이름이 뭐요?” 니콜라가 “여기 있는 다른 사람들처럼 사르셀 시민일 뿐”이라고 대답했으나, 시장은 “당신 어디 소속이요? 누가 뒤를 봐주고 있어?”라고 캐물었다. 니콜라는 “저는 돌봐야 할 아이가 셋이고, 누구의 도움도 받고 있지 않다”라고 대답했는데, 시장은 그에게 “조만간 가만두지 않겠다”고 했다는 것이다. 니콜라는 이야기 끝에 덧붙였다. “누가 내 뒤를 봐주는지 물어보는 게 말이 됩니까? 그런 사람이 시장이라니요. 어쨌든 일을 벌여야 뭔가를 얻게 돼요. 사르셀에서 문제가 많은 동네에는 시설이 잘 갖춰져 있어요. 우리 동네처럼 조용하면 아무 것도 얻을 수 없죠.”

 
 
정치환멸과 높은 기권율, 지자체의 특권

우리 테이블 주위로 사르셀의 젊은이들이 점점 모여들었고, 이야기가 이어지다 ‘시장’이나 ‘시청’을 주로 언급하며 흥분하기도 했다. 지지자에게는 집을, 표를 끌어오는 사람에게는 시청의 일자리를 줬고, 친한 종교단체에는 보조금을 몰아주거나 건축허가를 내줬다.(5) 대체로 서민 지역의 거주자들은 정치에 대한 무관심을 지적받는 편이지만, 이 지역의 기권율은 특히 높았다.(6) 니콜라와 그의 친구들은 지역정책에 대해 완벽하게 알고 있었다. 후견주의를 날카롭게 분석했고, 우리 테이블 주위로 후견주의의 혜택을 받지 못한 젊은이들이 모여들었다. 어떤 이들은 니콜라처럼 솔직하게 반대의견을 피력했다.

하지만 SNS상의 활동을 포함해, 프랑수아 퓌포니에게 폭언을 들은 일처럼 권력기관에 반대 뜻을 취하는 대가는 너무나 크다. 시청은 비판을 막기 위해 감시를 한다. 결국, “정책이라면 진저리가 나요. 다를 게 없어요”라는 말이 나온다. 외국인 투표권, 검문증명서에 대해 프랑수아 올랑드 전 대통령이 지키지 않은 대선공약은 환멸을 불러일으켰다. 프랑수아 올랑드 전 대통령은 니콜라가 투표했던 유일한 후보였다. 프랑수아 퓌포니와 정치권은 선거 때마다 목소리 높여 기권을 한탄한다. 

경제부장관조차도 노랫가락처럼 되풀이해왔던, 경제권력이 정치권력보다 우월하다는 사실을 감안하면, 국민의 절대적인 권력인 세금을 받고 일하는 시의회의원의 이런 행태는 웃음거리가 될지 모른다.(7) 그러나 지방자치단체에는 공영주택 배정권이 있으며 지역직원 채용권도 있다. 또한, 서민 지역에서 지자체는 시 정책기금을 받는데, 올해는 기금이 4억 1,100만 유로에 달한다. 기금의 분배방식은 대개 시청에서 정한다. 국가기금이지만 어떻게 보면 시의 관리하에 있는 이 기금에 대해 최근 프랑스 회계감사원은 “10년간의 개혁에도 불구하고 불평등이 지속되고 있으며, 기준에 부합하지 않는 협회들이 이런 자금의 혜택을 받고 있어 그 결과를 산정하기가 충분하지 않다”고 사용처를 비난할 정도였다.(8)

다양한 분야에 대한 지원은 외곽지역 의원들에게 주요한 지렛대 역할을 한다. 대체로 기권율이 높은 만큼 유권자의 지지가 더욱 소중한데, 이런 지원을 통해서 유권자를 끌어올 수 있다. 한 표가 행사하는 영향력이 크기 때문에, 득표에 도움이 될 만한 인물의 신임을 얻으면서 표의 유동성을 줄이는 것이다. 이런 인물은 지방의 유명한 운동선수나 종교 단체의 대표, 선거 운동을 위한 조직망 형성이 충분히 가능한 범죄자처럼 무차별적인 권력의 모습일 수 있다. 즉, ‘보스’에게 의지하는 것이다.(9) 보스정치는 확실한 표를 확보하기 위해 정책을 사적인 관계로 변형시키지만, 여기에는 ‘공익’과 ‘공생’에 대한 변화를 지지하는 이상적인 공화주의자들에게 의지하는 특수성이 있다.(10)

투표를 하느니 자원봉사를 하는 편이 낫다

“영화랑 똑같아요!” 우리를 속인 나빌 코스코시는 외곽지역의 시장과 시민의 연결 관계를 요약했다. “저는 폭도도 아니고, 정치인의 인척도 아닙니다.” 이런 상황에서 사르셀 시청에 있었던 나빌 코스코시의 말을 믿기는 어려웠다. 그는 권력에 맞서 정치적으로 이런 ‘독립성’을 만들었다. 나빌 코스코시가 어렸을 때 그의 아버지는 오랜 기간 수감됐고, 이후 본국인 튀니지로 추방됐다. “이중처벌이 가능한 때였어요. 아버지가 다시 프랑스에 올 수 있도록 애썼지만 결국 성공하지 못했죠. 그러다 이민 및 외곽지역 단체(MIB)의 운동가들을 알게 됐어요. 그들은 제게 도움을 줬고, 무엇보다도 제가 배울 수 있었어요.” 1995년에 결성된 MIB는 무엇보다 ‘이중처벌과 자율성’이라는 명목으로 자행되는 경찰폭력에 맞서왔다. 특히 SOS 인종차별(SOS Racism) 단체의 설립과 1983년 인종차별 철폐 및 평등을 위한 행진의 열망을 ‘배신’한 전통적인 정당을 강력히 거부했다.(11)

최근엔 이들과 또 다른 사람들이 나빌을 지지했다. 2014년에 금지된 팔레스타인 지지 운동의 주최자인 나빌 코스코시는 사르셀 시청으로부터 협박, 사유재산 파손 혐의로 고소를 당했고 결국 불기소처분을 받았다. 현재 그는 명예훼손으로 프랑수아 퓌포니를 고소했다. “정치적으로 제 명예를 실추 당했습니다.” 그는 2015년 지방선거 당시, “단 2주간의 선거운동으로” 사르셀에서 약 10%의 표를 얻었다. 이 선거의 투표율이 30% 미만이었던 점을 고려하면, 사실 그는 무시할 수 없는 상대다. 780표가 결과를 좌우하기 때문이다. 같은 선거에서 좌파전선과 유럽 녹색당의 총 득표율은 나빌 코스코시보다 낮았다.

나빌 코스코시가 이 선거를 통해 정치적 경쟁에 직접 모습을 드러냈다면, 우리가 만난 호신 라자이는 이와는 다른 경우였다. 기업에서 코치로 근무하는 그는 독서에 열정적인 모습을 보이며, 사르셀에 “시민이 6만 명인데 시립도서관이 단 하나라니, 뭔가 해야 합니다”라며 안타까움을 금치 못했다. 그는 “독립적이고 보조금을 받지 않는, 우리 힘만으로 할 수 있는” 문화 행사 기획을 염두에 두고 있었다. “자율적인 방식으로, 시민 스스로 무언가 해야 합니다.” 

그는 시청의 반발을 예상했다. 아직 구상단계에 있는, 문화와 관련된 그의 아이디어는 특별한 문제가 없어 보였다. 우리는 의심이 들었다. 호신 라자이는 “시청의 반발은 불가피합니다. 그들은 통제할 수 없으면 신경 쓰일 것입니다”라고 예상했다. 2016년 11월, 그는 친구인 튀르칸 이난과 함께 비블리오 테스(Biblio’Tess)의 대중과의 첫 만남을 기획했다. 관타나모 수감 경험에 대해 책을 쓴 무라드 벤첼랄리를 만났다.(12) 아무 지원 없이, 한 친구가 운영하는 카페 지하에 100명 남짓한 사람들이 모였다. 이후 작가들과 함께 하는 문학모임이 5차례 더 있었다. 튀르칸 이난은 정치와는 거리가 먼, 자신의 ‘휴머니즘’과 새로운 참여의 ‘진정성’을 강조했다. 역사와 지리를 가르치는 튀르칸 이난과 가까운 대부분의 사람들은 사르셀에서 시장에 맞섰다는 이유로 보복을 당했다. “겉으로만 민주주의인 척 하고, 정치가 부패했다는 사실을 알게 됐죠. 그래서 일요일에 투표하러 가는 것보다는, 야외활동을 하거나 남을 돕는 게 더 나아요.” 서민 지역 중, 일부 시가 시민들의 주도적인 행동에 적대감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은 이미 잘 알려져 있기 때문에, 비블리오 테스의 경험을 나눌 수 있도록 튀르칸 이난과 호신 라자이는 외곽지역 여기저기에서 관심을 받았다.

프랑스아 퓌포니, 사르셀 시장과의 대화

사실 이런 자율성은 프랑수아 퓌포니에게 문제가 됐다. 그는 시장 집무실에서 경고하듯 말했다. “외곽지역에 사는 대부분의 젊은이들은 거짓말을 밥 먹듯이 하고 터무니없는 소리를 하는데 여러분은 그 말을 무조건 믿고 있어요. 나한테 이름만 대면, 누구인지 말해줄 수 있어요. 누구라고 이름을 말하면, 그들이 어떤 핏줄인지 알려줄 수 있어요.” 이렇게 말한 후, 그는 계속 “이름을 말해 봐요! 이름을!”이라고 했다. 그는 우선 나빌 코스코시에 대해서는 ‘공동체주의’를 비난했다. 이 단어의 정확한 뜻은 “민족 또는 종교 공동체가 국가, 공화국의 이상보다 우선시 되는 것”을 의미한다. 하지만 프랑수아 퓌포니의 보좌관 중 한 명인 앙투안 에스피아스는 “도미니크 스트로스 칸이 ‘유대인’이기 때문에 사르셀에서 환영받을 수 있었다”고 말했다.

도미니크 스트로스 칸이 차례차례 남긴 시청과 의원직을 넘겨받은 프랑수아 퓌포니는 “당시, 사회당은 ‘잘 됐어, 도미니크. 게다가 넌 유대인이잖아. 여기 사르셀에는 유대인들이 많아’라고 했어요. 하지만 유대인 공동체에서는 우려의 시선이 적지 않았죠. 그들은 비유대인이 당선되는 편이 낫다고 생각했어요. 그래야 공동체주의라고 비난할 수 없을 것이고, 비유대인이 자신들에게 더 많은 것을 해줄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죠.” 사르셀의 운영은 특히 공동체 문제에 집중되는지 질문을 던졌다. “마그레브 공동체에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는 자리를 원해. 우리가 당신을 대신하고 싶어’라고 말이죠.” 프랑수아 퓌포니는 “칼데아인(이라크 가톨릭 신자), 유대인 등 다른 이들은 체제를 받아들입니다. 그런데 마그레브 젊은이들은 원칙에 따라 행동하지 않아요. 감사할 줄 모르면서 혜택만 바라죠. 2017년 6월 총선에서 내 상대는 이슬람 네트워크의 한 녀석입니다.”

면담을 시작하고 45분간 줄곧 “민족 또는 종교” 문제에 대한 이야기만 했던 터라 사르셀에서 시급한 사회문제에 대해 프랑수아 퓌포니에게 질문했다. “저는 지난 20년 간 이런 문제들을 다 시청에서 소화해냈다는 걸 자랑스럽게 생각합니다. 마약밀매를 한 사람에게는 주택이나 일자리를 주지 않아요!” 하지만 그런 중재에도 불구하고 통계수치는 우려스러운 수준 아닌가? “외곽지역에는 사회문제가 없습니다”라며 프랑스 도시 재개발 기구 대표이기도 한 프랑수아 퓌포니는 딱 잘라 말했다.

우리가 아무 대답도 하지 않자, 퓌포니는 당황했는지 자세한 설명을 덧붙였다. “외곽지역 일부에는 사회문제가 있습니다. 유대인, 칼데아인, 터키인, 파키스탄인이 사업을 하죠. 몇몇 공동체가 있는 지역에서 사회문제가 발생해요.” 그렇다면 결국 외곽지역에서의 문제는 마그레브인이라는 것인가? “그들은 이렇게 말하죠. ‘우리의 시대가 왔다’고. 자, 페이스북에서 호신 라자이인가 뭔가 하는 사람의 프로필을 한 번 찾아보세요. 이 자식은 경계인이에요”라고 프랑수아 퓌포니는 말했다. “그게 무슨 뜻이죠?” “경계인이라고요.” 비블리오 테스 행사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기도 전에 호신 라자이의 예상이 맞았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다.

 
 
퓌포니와 총선에서 겨룬 사미 데바를 만나다

2017년 5월 25일. 프랑스 이슬람혐오 반대 단체(CCIF)의 전 대표이자, 총선 ‘무소속’ 후보인 사미 데바는 사르셀에서 모임을 가졌다. 그의 연설에서 프랑수아 퓌포니가 언급했던 “이슬람 네트워크”를 파악하기는 어려웠다. “저는 당파체제를 따르지 않겠습니다. 어떤 법이 적합하다면, 지지할 것이지만 그렇지 않다면 반대하겠습니다”라고 역사 및 지리 교육자인 사미 데바가 말했다. 그런데 그의 정치적 좌표는 어디에 위치해 있을까? 그는 명백하게 중도파다. 그가 당선된다면 “임금 노동자 보호 및 기업을 지원하고, 진료의 질을 보장하며, 가까운 곳에 경찰서를 신설하고, 어떤 학생도 교육을 받지 못한 채 학교를 떠나지 않도록 노력”하는 것이 중요하기 때문이다. 합의로 이루어진 그의 공약에 현장에 모인 사람들은 열광했다.

이슬람교도이자, 사르셀에 거주하는 청년 엘리에스(13)와 출구에서 대화를 나눴다. 그는 이런 공약이 “효과적이고 모든 이들에게 해당한다”고 말했지만 이곳에 모인 사람들이 거의 마그레브인 뿐이라는 점을 아쉬워했다. 엘리에스는 사미 데바가 CCIF에서 “이슬람교도들을 위해 한 일” 때문에 그를 지지하지만, 지지층을 확대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그는 스스로 자신의 모스크를 지키기 위해 ‘정통’ 교리를 표방하며 시청과 참호전을 벌였다. 엘리에스는 사르셀에 있는 다른 이슬람교 사원들이 시로부터 독립적이지 않다고 생각했다. 싸움은 그에게 불리하게 돌아갔다. 시에서 모스크 지역의 선매권을 가져가면서 싸움은 끝났다.(14)

2015년 11월 13일 테러 발생 후 얼마 지나지 않아, 국가비상사태가 선포되고 가택수색이 허용되자 한밤중에 기동대가 문을 부수고 들이닥쳤다. 떠날 때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이는 엘리에스의 의지를 꺾지 못했다. 오히려 시련은 정치적인 측면뿐만 아니라 그의 종교적 신념을 더욱 굳건하게 만들었다. 일부 역할에서 배제되고, 다름을 강조한 결과, 그들의 낙인은 정체성이자 긍지가 됐다.(15)

총선 1차 투표에서 어느 후보도 당선에 필요한 득표에 실패하면서, 선거 등록인 5만 4천 명 중 2천 6백 표인 13.94%를 득표한 사미 데바가 프랑수아 퓌포니와 2차 투표에서 맞붙게 됐다. 해당 선거구는 약 68%의 기권율을 기록했다. 시민후보들이 프랑스 여기저기에서 제한적인 성공을 거두긴 했지만, 사미 데바 후보가 이룬 결과는 그의 전국적인 명성과 선거구에서의 탄탄한 기반 덕분이었다. 한편, 해당 선거구에서 자리를 잡지 못하고, 인지도가 낮아 고전을 면치 못하던 라프랑스 앵수미즈(굴복하지 않는 프랑스)당의 후보, 파믈라 오시니는 이 지역에서 대선 당시 29.9%를 득표한 장뤼크 멜랑숑 후보의 덕을 보지 못했다. 사미 데바는 이런 돌풍을 예상했을 것이다. 그는 1차 투표 몇 주 전, 장뤼크 멜랑숑 후보를 공개적으로 지지하며, 총선에서 유권자들의 표심을 얻었다. 결국, 65.8%를 득표하며 재당선된 프랑수아 퓌포니는 1차 투표에서 앙마르슈(전진하는 공화국)의 후보와는 맞붙지 않았다. 에마뉘엘 마크롱 대통령은 이런 결과가 그의 연설과 정치 행보에서 자신이 그토록 바란 ‘개혁’의 징후라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시민들에 맞서는 현 시장, 시민들과 함께 자본주의에 맞섰던 옛 시장

프랑수와 퓌포니의 전임자들 중 한 명의 정치적 성향을 파악하는 것은 그렇게 어렵지 않았다. 사르셀에서 1965년부터 1983년까지 공산주의 성향의 시장이자 세 차례 하원의원을 지낸, 만 89세의 앙리 카나코스는 “우리의 등대는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연방(USSR)이었죠”라며 당시를 회상했다. “우리는 사회주의를 신봉했습니다. 한때, 소련인들이 빵을 거저 주려 했던 기억이 나요. 우습게 들릴지 모르겠지만, 그것은 우리의 무지를 깨닫게 하고, 꿈을 꾸게 해줬죠.” 제련업자인 그는 빵도 제대로 먹지 못한 채 자랐다. 생테티엔에서 광부로 일했던 그의 아버지는 규폐증으로 젊은 나이에 숨을 거뒀다. 광산회사에서 지냈던 앙리 카나코스의 가족은 “밖으로 나가라는 말에 우리는 그곳을 떠나 빈민촌에서 되는대로 살았다”고 했다. 

앙리 카나코스는 생투앙에 있는 연장공장에 조립공으로 취직했다. “이때 프랑스 노동총연맹(CGT) 노조 활동과 정치를 알게 됐어요.” 주택단지 건설 직전에, 그는 주택 부족으로 사르셀에 정착하게 됐다. “내가 우리 아파트에서 최초로 조직을 만들었죠.” 또한 그는 아파트 난방과 비포장도로 때문에 진흙탕 속에서 출근해야 하는 문제에 주목했다. 그는 문제해결을 위해 1955년부터 대거 이주해온 새로운 사르셀 시민들과 단결했다. 앙리 카나코스는 특히 마르크스의 유물론에 관심을 가졌다. 덕분에 십여 년 후 그는 “이 도시 여기저기에서 함께한 사람들과” 시청 및 우파의 하원의원직을 차지했다. 사르셀이 신속하게 시골의 모습을 벗어나 도시화되고 산업화됨에 따라, 인구가 급증했으며 사회적인 변화가 일어났고, 이런 변화는 이 정치세력의 확대에 큰 역할을 했다.(16)

앙리 카나코스는 임기 동안, 부동산중앙협회(SCIC)를 통해 주택단지를 관리하는 정부에 결사적으로 맞섰다. 그는 자신의 노조에 적용한 방식을 정책에 도입했다. 국민의 적, 국가의 자본주의에 맞서 시민들과 지역적으로 결집하고, 알력관계에 영향을 미치며 협상을 진행한 것이다. 그에게 문제의 핵심은 사회였다. 공동체에 대해 질문을 던졌다. “많은 공동체가 결성됐어요. 당연한 일이었어요. 공동체는 결속이었죠. 하지만 제한을 뒀어요. 어떤 사람들은 특정 종교의 스포츠클럽을 만들고 싶어 했어요. 저는 허락하지 않았어요. 이미 이곳에 필요한 모든 것이 다 있었기 때문이죠.”

이런 시대는 먼 과거의 이야기 같았다. 앙리 카나코스는 인종차별 철폐 및 평등을 위한 행진이 있기 몇 달 전, 1983년 선거에서 패했다. 한편 나빌 코스코시는 어린 시절의 기억 하나를 생생하게 간직하고 있었다. “여름에 한 달 동안 크뢰즈에서 보낸 여름학교의 기억이에요. 그곳은 부유하진 않았지만, 공산주의자들이 있었죠. 그들 덕분에 소젖도 짜보고, 운동도 하고 문화도 알게 됐어요. 제가 공무원 중에서도 청소년 담당 부장이 된 것은 우연이 아니랍니다.”

우리는 나빌 코스코시도 소비에트의 환상을 가지고 자랐는지 궁금했다. 그는 웃었다. “그게 어떤 건지 아마 모르실 겁니다. 제 어머니도 분명 기억하실 거예요.” 그는 전화기를 들고 스피커 모드로 뒀다. “엄마? 마리클로드 보도 씨 기억나요?” “그 사회복지사?” “아니요, 시청에서 일했던 여자 분이요!” “나빌, 네가 착각하는구나. 그 사람은 사회복지사였어. 뭐든지 우리를 도와줬지. 문제가 생기면, 그 여자한테 갔어. 항상 거기에 있었지.”

나빌 코스코시는 전화를 끊고 말했다. “마리클로드 보도가 ‘사회복지사’라고요? 당시 공산주의자들이 어땠는지 아시겠죠. 그들은 사람들의 가장 가까운 곳에 있었어요. 앙리 카나코스가 축출에 몸소 맞서는 것을 봤어요. 오늘날의 운동가들에게는 교훈입니다. 그들은 선거 전날 시장에 와서 전단에 적힌 자본주의의 폐해에 대해 우리에게 말했어요.”

마리클로드 보도는 사르셀 시청의 수석 보좌관이자 상원의원이었다. 그의 행보에서 후견주의는 흔적을 찾을 수 없다. 그리고 모로코인인 나빌 코스코시의 어머니는 단 한 번도 투표를 한 적이 없었다.   


글·피에르 수숑 Pierre Souchon 
기자

번역·이하임 haimleee@gmail.com
한국외국어대 통번역대학원 졸업

(1) 영화 <Ils l’ont fait(그들은 그것을 했다)> 감독 Rachid Akiyahou, Saïd Bahij, 제작 S Bien Rézonable 2015.
(2) 다비드 가르시아, “후견주의가 살찌운 부패정치인들”,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한국어판, 2017년 4월.
(3) 가명처리 했음.
(4) Sarcelles en chiffres. Données générales sur la commune(숫자로 본 사르셀. 시 관련 일반자료), 사르셀 시. 2016년.
(5) “Sarcelles chouchoute ses communautés(사르셀 내의 지역 편애)”, <르 파리지앵>, 2009년 5월 29일.
(6) 셀린 브라코니에, 장 이브 도르마젱, ‘서민계층의 기권율이 높을 때, 반사이익은 누가?’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프랑스어판 14년 5월호·한국어판 14년 6월호.
(7) Bruno Le Maire, <Jours de pouvoir(권력의 시대)>, Gallimard, 파리, 2013년
(8) La Politique de la ville. Une décennie de réformes(시 정책. 개혁의 10년), Cour des comptes, rapport public thématique,  2012년 7월.
(9) Emeline Cazi, Simon Piel, Le “système Dassault” raconté de l’intérieur(내부에서 본 “다소 시스템”), <르몽드>, 2014년 2월 11일. 또는 이런 현상에 대한 마르세유의 사례, Philippe Pujol, La Fabrique du monstre. Dix ans d’immersion dans les quartiers nord de Marseille, la zone la plus pauvre de France(괴물 생산. 프랑스에서 가장 빈곤한 지역, 마르세유 북부 10년의 침수), Les Arènes, 파리, 2016년.
(10) Alain Garrigou, Le boss, la machine et le scandale. La chute de la maison Médecin(보스, 기계 그리고 스캔들. 하우스 닥터의 몰락), Politix, vol. 5, n ° 17, 파리, 1992년.
(11) Abdellali Hajjat, La Marche pour l’égalité et contre le racisme(인종차별 철폐 및 평등을 위한 행진), éditions Amsterdam, 파리, 2013년.
(12) Mourad Benchellali (avec Antoine Audouard), Le Piège de l’aventure. Des Minguettes à Guantánamo, et après…(모험의 함정. 맹개트에서 관타나모로, 그 이후...), Robert Laffont, 파리, 2016년.
(13) 가명처리 했음.
(14) “Sarcelles : les locaux de la mosquée salafiste préemptés par la mairie(사르셀: 살라피스트 모스크 지역, 시청에서 선매)”, <르 파리지앵>, 2016년 5월 25일.
(15) Olivier Masclet, “La Gauche et les cités. Enquête sur un rendez-vous manqué(좌파와 주택단지. 이뤄지지 않은 약속에 대한 조사)”, La Dispute, 파리, 2003년.
(16) Henry Canacos, Sarcelles ou le béton apprivoisé(사르셀 또는 굳어진 콘크리트), Éditions sociales, coll. <Notre temps/Société>, 파리, 1979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