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뢰즈의 생성존재론과 혼돈으로부터의 질서

현대철학의 개념-뿌리들: 생성(2)

2017-08-31     이정우 | 철학자

니체와 베르그송을 잇는 현대의 대표적인 생성존재론은 들뢰즈의 철학이며, 그것의 자연과학적 판본은 복잡계과학이다. 

복잡계과학을 비롯한 현대의 학문은 근대과학의 특징인 결정론(determinism)의 한계를 지적한다. 결정론이란 모든 것은 정해져 있다는 것을 주장한다. 물론 현대과학이라고 해서 자연의 필연성을 단적으로 부정하지는 않는다. 과학적 행위 그 자체가 세계에서 질서, 법칙성, 반복성 등을 찾는 행위이므로, 결정성 자체를 단적으로 부정하면 과학이라는 행위 자체의 기반이 허물어지기 때문이다. 그러나 현대의 과학은 세계의 질서라는 것이, 고전적인 학문이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역동적이고 복잡한 어떤 것으로 생각하며, 또한 세계의 생성에 비-결정성의 측면이 핵심적인 역할을 한다고 본다는 점에서 분명 고전적인 학문과 다르다. 

결과적으로 현대의 과학과 철학은 사건, ‘창발(創發)’, 급변(急變), 창조, 복잡성, 카오스 등을 강조하며, 기존의 논리로는 파악하기 힘든 이런 현상에 주목한다. 안정된 평형상태보다는 불연속을 가져오는 사건에, 결정돼 있는 질서가 아닌 새롭게 창발하는 질서에, 계속 지속하는 운동이 아니라 급작스러운 변동에, 단조로운 과거반복보다 새로운 창조에, 간명한 법칙성보다 혼란스러운 가운데 드러나는 독특한 법칙성에, 단순한 코스모스보다 복잡한 카오스에 더 주목하는 것이 오늘날의 학문인 것이다. 

현대의 여러 사상이 이런 특성을 반영하고 있다. 여기에서는 대표적인 철학자라 할 수 있는 들뢰즈의 존재론과 복잡계과학을 참조해서 생성 파악의 전형적인 모델을 살펴보자. 

 
 
1. 들뢰즈의 생성존재론

근대 결정론은 시계태엽의 이미지를 가지고 있다. 감아놓았던 태엽이 풀려 나오듯이 이미 결정돼 있는 사건이 하나씩 현실화되는 것이 근대 결정론의 세계다. 여기서 시간은 별다른 역할을 하지 못한다. 10년 후에 벌어질 사건이 이미 결정돼 있다면, 앞으로의 10년이라는 시간은 별다른 의미가 없다. 그러나 시간이란 그 흐름 속에서 새로운 것이 많이 나타나며 예단할 수 없는 비결정성이 깃드는 존재다. 진화의 역사란 바로 이렇게 예단할 수 없는 새로운 사건의 연속이었다. 그래서 우리는 서구 근대의 과학과 철학이 시간의 의미를 과소평가했다고 볼 수 있다. 

우리가 시간을 신중하게 고려할 경우 세계의 근본성격은 ‘생성’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기존의 학문은 항상 변하지 않는 무엇인가를 찾아서 그것으로 세계를 설명하려는 ‘환원주의’의 형태를 띠곤 했다. 이데아, 신, 리(理)와 같은 개체 이상의 존재든 세포, 분자, 원자 등 같은 개체 이하의 존재든 어떤 “실체”를 찾아서 그것으로 대상을, 심지어 세계 전체를 설명하려 한 것이다. 학문의 세계에서 환원주의는 오늘날에도 뜨거운 감자다. 예컨대 <이기적 유전자>로 유명한 리처드 도킨스 같은 인물은 인간을 ‘유전자’로 환원해서 설명하며, 프로이트 같은 정신분석학자는 ‘무의식’으로 환원해 설명하며, 마르크시즘은 ‘계급’으로 환원해서 설명한다. 어떤 면에서 보면 학문 그 자체가 암암리에 환원주의적인 성격을 띠고 있다. 자신에게 익숙한 패러다임을 투사해서 사물을 해석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환원주의적 설명의 패러다임이 매우 다양하다는 것이 문제다. 각각의 환원주의는 어떤 하나로의 환원을 주장하지만, 그런 환원주의가 매우 다양하다는 그 자체가 바로 일의적 환원이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하지만 생성의 존재론에 입각할 경우, 우리는 논의의 단위를 무엇으로 하든 그것을 생성 중인 것으로 간주해야 한다. 개체도 d(철수), d(뽀삐) 등이며, 집합체/보편자도 d(한국사회), d(EU) 등이며, 미시적인 존재도 d(세포), d(원자) 등이다. 여기에서 ‘d’는 ‘Differentiation’의 약자로서 ‘차이생성(差異生成)’으로 번역할 수 있다. ‘Imagination’이 ‘이미지들’이 생겨나는 것이고, ‘Classification’이 클래스들이 생겨나는 것과 똑같이, ‘Differentiation’은 차이들이 생겨나는 것이다. 예컨대 생물학에서 이 말은 ‘분화(分化)’로 번역되며, 수정란에서 신체의 부분(손발, 머리, 눈 등)이 하나씩 생겨나는 과정을 뜻한다. 즉 무형의 수정란이 계속 차이들을 머금으면서 분화되는 과정을 뜻한다. 

‘Differentiation’은 수학적으로는 ‘미분’을 뜻한다고도 할 수 있다. 모든 존재는 연속적으로 계속 변해간다는 의미이다. 그래서 모든 변수는 dx의 형태로 표시할 수 있다. 철수는 고정된 존재가 아니라 일정한 차이를 낳으면서 생성되고 있는 존재다. 어떤 것이든 그것을 이런 생성의 관점에서 보는 것이다. 물론 이런 생각이 어떤 불연속적인 변화를 배제하는 것은 아니다. 모든 사물은 근본적으로 계속해서 변해가지만, 때로는 그 변화가 단절적이고 갑작스러울 수 있다. 그러나 모든 불연속은 연속성 위에서 만들어진다고 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생성만을 강조한다면 이 세계는 어떤 형태도 구조도 규칙성도 없는 흐름이 돼버릴 것이다. 세계를 고착시키는 것 못지않게 그것을 오로지 흐름으로만 보는 것도 한계가 있다. 그럴 경우 세계에 대한 어떤 합리적 이해도 포기해야 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생성으로부터 어떻게 사물이 생겨나는가를 논해야 한다. 이 점은 다음과 같이 생각할 수 있다. 어떤 두 요소가 자체로서는 생성/흐름인 존재들이지만, 그것들이 서로 관계를 맺을 경우 어떤 일정한 결과가 산출된다는 것이다. dx도 흐름이고 dy도 흐름이지만 dy/dx는 일정한 결과를 낳는 것이다. 남자도 흐름이고 여자도 흐름이지만 둘이 관계를 맺음으로써 가족이라는 일정한 존재가 생겨난다. 간단하게 예를 들기 위해 두 요소만 이야기했지만, 사실 우리 삶은 무한한 요소들로 이루어진다. 단백질도 계속 변하고 탄수화물, 지방 등도 계속 변하지만 이들의 상호 관계망은 일정한 몸 상태를 낳는다. 우리가 “배가 고프다”고 느낄 때 이 느낌은 갑작스럽게 오지만 그 아래에서는 사실상 각종 영양소의 상호관계망이 계속 형성되고 있었던 것이다. 또 d(노랑)과 d(빨강)이 섞일 경우 주황이라는 일정한 색이 만들어진다. 

이렇게 우리는 그 자체로서는 차이생성을 하는 존재가 서로 관계 맺음으로써 일정한 결과를 낳는다고 봄으로써, 근본적으로는 생성존재론의 입장을 취하면서도 그 위에서 동일성들을 이해하고자 한 것이다. 앞에서 언급했듯이, ‘동일성’이란 개체이든 보편자이든 물질 입자이든 일정하게 서술 가능한(예컨대 철수의 경우 키, 눈 색깔, 성격, 직업 등) 개별적 존재를 철학적으로 추상해 부르는 이름이다. 일정한 “하나”로 간주될 수 있는 모든 것이 정체성이다. 한 사람, 한 학교, 한 국가가 가지는 ‘아이덴티티’가 동일성이다. 앞서 나온 ‘차이생성’과 대비시켜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여기에 한 가지가 덧붙여져야 한다. 이처럼 생성의 바탕 위에서 정체성이 형성되는 과정은 단일한 과정이 아니라 누층적(累層的) 과정이다. 한 남자와 한 여자의 만남은 한 가족을 낳지만, 이 가족 또한 흐름이다. 여러 가족의 흐름이 교차하면서 마을, 지방이 형성되지만, 이것 또한 흐름이다. 이 흐름이 교차하면서 하나의 국가가 형성된다. 그러나 국가 또한 하나의 흐름이다. 한국도 흐름이고 일본도 흐름이고, 중국도 흐름이지만 이들의 교차를 통해서 ‘동북아’라는 또 하나의 정체성이 형성된다. 이렇게 보면 우주 전체가 이런 누층적 과정을 겪고 있다고 볼 수 있다. 들뢰즈는 이런 맥락에서 ‘포텐셜’이라는 개념을 사용한다. 포텐셜화(Potentialisation)가 누층적 구조에 있어 상향을 뜻한다면, 탈-포텐셜화(Dépotentialisation)는 하향을 의미한다. 예컨대 ‘허파꽈리→기관→신체→사회’의 방향으로 가는 것은 포텐셜화이고, 반대 방향으로 가는 것은 탈포텐셜화다. 수학적으로 말해, 미분방정식으로 표현되는 계(系)에서 탈-포텐셜화는 미분을 통해서 차수가 하나씩 낮아지는 과정이고(예컨대 y = x3 + x2에서 y = 3x2 + 2x로), 포텐셜화는 적분을 통해 차수가 높아지는 과정이다. 

지금 개체에서 출발해 점점 큰 단위로 나아가는 방향을 이야기했지만, 그와 거꾸로 아래의 단위로 내려가는 방향을 취해도 마찬가지다. 우주는 이렇게 개체 이상으로 또 이하로 끝없이 이어지는 존재론적 층위(層位, Layers)의 누층적/계층적 복합체다. 

요컨대 세계의 근본 성격을 생성으로 보되 그 생성으로부터 어떻게 다양한 존재자들(Beings) 또는 동일성들이 나오는가를 존재론적 또는 포괄적으로 해명하는 것이 중요하다. 우주의 모든 것은 d(x)로서 존재한다. 즉 차이생성을 겪는 것으로서 항상 존재한다. 그러나 이 존재는 상호작용을 통해서 어떤 일정한 존재/정체성을 낳는다. 그리고 이런 과정은 극미세계에서 극대세계에 이르기까지 누층적으로 성립한다. 이런 존재론은 현대 학문의 여러 분야와 함께 공명한다. 

지금까지 세계를 근본적으로 차이생성을 겪고 있는 요소로 보는 생성존재론의 바탕 위에서 개체, 보편자, 물질적 실체를 비롯한 다양한 정체성이 형성되는 과정을 논했으며, 그런 과정이 우주의 누층적/계층적 질서에 따라 이루어짐을 논했다. 현대의 생성존재론에는 여러 형태가 있지만, 우리가 논한 구도는 현대 학문 일반에 대한 존재론적 정초로서 기능한다고 할 수 있다. 

이런 존재론적 바탕 위에서 자연과학 계통에서도 시간을 다루는 새로운 논리가 등장하게 된다. 근대과학은 존재론적으로는 결정론에 입각해 있었고, 인식론/방법론적으로는 해석학이라는 새로운 수학에 입각해 있었다. ‘해석학(解析學)’은 미적분이 정교화된 수학 분야이다. 극한, 연속성, 무한, 도함수 등을 다루는 분야다. 존재론적으로는 어떤 불변의 실체를 상정하는 경우가 많았다. (예컨대 물리학에서의 ‘원자’) 즉 근대과학은 실체주의적이었으며, 또 결정론적이었고, 나아가 연속주의적이었다. 

하지만 현대과학은 실체주의보다는 생성존재론의 입장을 취하고 있으며, 우연의 개입을 인정하고 있고, 또 불연속적인 변화를 파악하고자 한다는 점에서 근대과학과 구분된다. 물론 현대과학에는 매우 많은 분야와 방법이 존재하기 때문에 획일적으로 단정하기는 곤란하다. 다만 근대과학에 비해 독특한 새로움을 보여주는 분야는 근대과학과 뚜렷이 대비되는 패러다임을 보여주고 있다. 지금부터 서술/소개할 복잡계 이론이 대표적이다. 

복잡계 이론과 관련되는 프랙탈, 카오스, 카타스트로피 등의 세계는 일정한 규칙에 따라 또는 천체의 운동이라든가, 지구에서의 물체의 역학적 운동, 근대사회과학에서 추구했던 결정론적 인과관계 등과 현저히 다른 생성/운동을 보여준다. 우리는 이 “새로운 과학”을 통해서 세계가 생성/운동해 가는 새로운 논리를 읽어낼 수 있다. 

여기서 논의는 ‘자기조직화’ 개념을 핵심으로 하며, 이 개념은 복잡계 이론을 통해서 다듬어졌다. 복잡계 이론은 그 이전에 등장했던 사이버네틱스, 급변론, 비선형 열역학, 카오스 이론 등을 흡수하면서 보다 종합적이고 “복잡한” 이론을 구성했다. 어떤 기계 전체를 이야기하기 전에 우선 그 주요부품을 논하는 것이 편리하다. 각 부품의 성능을 이해한 후 그것들이 조립된 전체기계를 파악하는 것이 순서다. 이제 복잡계 이론을 설명하기 위해 우선 그것에 흡수된 몇 가지 개념/이론을 미리 정리해 보자. 

첫째, 시스템 이론이 있다. 시스템이란 과학자들이 탐구의 편의를 위해 세계 전체로부터 마름질(‘분절’)해 내는 부분이다. 태양계를 비롯한 천문학적 시스템, 화학 공장을 비롯한 열역학적 시스템, 뉴욕 증권시장을 비롯한 경제학적 시스템 등을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시스템은 그 자체가 여러 부분으로 구성된다. 한 사람의 신체를 하나의 의학적 시스템으로 본다면, 신체를 이루는 기관이 신체라는 시스템을 구성한다고 할 수 있다. ‘System’이라는 말이 잘 보여주듯(‘System’은 희랍어 어원에서 “함께 세운다”는 의미), 시스템은 여러 부분이 서로 밀접하게 연계되면서 하나의 장(場)을 이룰 때 성립한다. 

자연에서의 시스템은 그 시스템을 지배하는 자연법칙에 따라 움직인다. 태양계의 행성 사이에서는 역학적 관계가 성립하며, 때문에 태양계는 무너지지 않고 그 법칙에 따라 일정하게 지속한다. 반면 인간세계에서의 시스템은 훨씬 불안정하다. 부부가 이혼하기도 하며, 회사가 도산해서 해체되기도 한다. 때문에 사회과학적 맥락에서의 시스템 이론은 더욱 복잡한 양상을 띤다. 

하나의 사회적 시스템이 마치 물리적 시스템에서처럼 어떤 일정한 법칙에 따라 움직인다면, 그 시스템은 특정한 법칙으로 간단히 설명될 것이다. 그러나 사회적 시스템은 단순한 물리적 시스템이 아니라 고유의 신체와 욕망, 감정, 무의식, 인격, 가치, 기억 등을 가진 개인의 집합이다. 하나의 시스템을 구성하는 성원은 일정한 규칙에 따라 움직이지만 규칙에 단순히 복속되는 물체가 아니다. 때문에 하나의 사회적 시스템은 극히 역동적으로 변해 가는 운동성을 잠정적으로 담아 놓는 그릇에 불과하다. 들뢰즈 식으로 말해 개인 한 사람 한 사람은 d(x)이고, 또 하나의 사회적 시스템 역시 d(철수), d(영희) 등의 상호관계를 통해서 형성되는 살아 있는 장이며 계속 변해 가는 시스템이라고 할 수 있다. 계속 생성해가면서도 혼돈으로 와해하는 것이 아니라 일정한(실선으로보다는 점선으로 그려지는) 질서를 형성해 간다는 점에서, 이런 시스템은 “복잡하다”고 할 수 있다. 

2. 혼돈으로부터의 질서

그러나 현대과학에 이르러 자연 현상에서조차 단순히 일정한 법칙에 따라 반복되는 것이 아니라 매우 역동적인 변화를 겪는 현상이 존재한다는 사실이 밝혀지기에 이른다. 자기조절 이론(사이버네틱스 이론), 급변론, 복잡계 이론 등은 바로 이런 역동적이고 복잡한 질서를 탐구하는데 큰 공헌을 한 이론이다. 
다음으로는 자기조절 이론(사이버네틱스)이 있다. 자기조절 이론은 하나의 시스템이 단순한 정체성을 유지하기보다 계속 변해가는 한편, 완전히 와해되지 않는 현상을 설명해 준다. 달리 말해, 하나의 시스템이 계속 차이생성을 겪으면서도 자체의 정체성을 바꿔가면서 변해 가는 양상을 설명해 준다.

‘Cybernetics’라는 이름도 이런 양상으로부터 유래했다고 할 수 있다. ‘Cybernetics’는 ‘Gouvernein’이라는 헬라어에서 나온 말로 ‘이끌다’, ‘제어하다’를 뜻한다. 하나의 계를 이끌어가고, 제어하고 있는 원리를 나타내기에 적절한 말이다. 사이버네틱스는 노버트 위너가 <사이버네틱스: 동물과 기계에서의 제어와 통신>(1948), <인간의 인간적 이용: 사이버네틱스와 사회>(1950)에서 전개했다.  

이런 자기조절적인 양상은 생명체에게서 가장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생명체는 계속 변해 간다는 의미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유지하지 못한다. 그러나 생명체는 그런 차이생성을 통해 와해돼버리는 것이 아니라 계속 새로운 존재로서 스스로를 정립해 간다. 즉 자신의 정체성을 잃어버리지 않으면서도 그 정체성으로 하여금 차이생성을 보듬을 수 있도록 변해감으로써 생존한다. 달리 말해 자신을 정체성을 변화시켜 나가되 그 정체성의 알맹이 자체는 잃어버리지 않는 것이 생명체의 핵심이다. 계속 변해 가면서도 어떤 ‘평형’을 잃어버리지 않는 이런 성격을 ‘항상성(호메오스타시스)’이라 부르기도 한다. 밥을 먹는 것, 잠자는 것, 성행위를 하는 것 등이 모두 이런 항상성을 위해서다. 복잡계 이론의 용어를 쓴다면, 생명체란 전형적인 ‘복잡 적응계(CAS=Complex Adaptive System)’다. 

이런 맥락에서 핵심적인 개념이 ‘되먹임(피드백)’이다. 되먹임이란 한 시스템을 이루는 구성요소의 상호작용으로 인해 시스템이 변화해 가는 과정을 말한다. 달리 말해, 상호작용이 순환함에 따라서 힘을 가했던 요소가 그 힘을 거꾸로 되돌려 받게 됨으로써 인과관계(힘의 전달)가 복잡해짐을 뜻한다. 이런 ‘되먹임 고리’를 통해서 한 시스템의 변화가 증폭되기도 하고(‘양의 되먹임’) 거꾸로 힘들이 상쇄돼 진정되기도 한다(‘음의 되먹임’). 되먹임의 논리는 예전의 단순한 결정론 도식이나 일방향적 인과와는 다르며, 생명체라든가 사회조직을 비롯해 매우 역동적으로 변해가는 존재/현상을 이해하는데 진일보를 이뤘다. 

양의 되먹임의 예로는 플라워스 스캔들을 들 수 있다. 클린턴과의 불륜을 폭로했던 플라워스의 인터뷰를 대부분의 TV 경영자는 그 저질성 때문에 방영하지 않기로 했지만, 결국 이 인터뷰는 다음 날 아침 일제히 브라운관을 탔다. 복잡다기한 방송 네트워크 어디에선가 방송이 나갔고, 급작스러운 양의 되먹임 고리가 만들어지면서 네트워크 전체로 확산하자 사태는 걷잡을 수 없게 됐기 때문이다. 반면 음의 되먹임은 일어난 변화를 상쇄시키면서 시스템의 항상성을 보존해 준다. 온도조절 장치는 변화가 발생했을 때 음의 되먹임을 통해서 본래의 항상성을 유지해 준다. 우리 신체는 양의 되먹임을 통해서 성장하지만, 음의 되먹임이 작동하지 않는다면 치명적인 손상을 입게 된다. 이렇게 자기조절 이론은 되먹임 개념을 통해서 한 시스템의 증폭과 진정 과정을 잘 설명해 준다. 

세 번째로는 급변론, 카타스트로피(Catastrophe) 이론이 있다. 자기조절 이론은 기본적으로 시스템의 역동적 변화를 말하면서도 또한 논의의 핵심을 ‘제어(컨트롤)’에 둔다. 즉 시스템의 역동적 변화와 그 보존을 동시에 사유하려 한다. 이런 점에서 보면 자기조절 이론을 창시한 위너는 철학적으로는 ‘유기체론’에 속한다고 할 수 있다. 반면 급변론은 ‘Catastrophe’라는 말에서 짐작할 수 있듯 불연속적 변화, 급변(急變)을 사유한다. 급변론은 프랑스의 수학자이자 철학자인 르네 톰의 <구조적 안정성과 형태변이>(1972)에 의해 개발됐고, 영국의 수학자인 지만에 의해 여러 가지 모델이 개발됐다(<급변론>, 1977). 또 장 프티토는 급변론을 언어(철)학에 적용해 <의미의 형태변이>(1985)를 펴내기도 했다. 

네 번째가 비선형 이론이다. 자기조절 이론은 되먹임 고리를 통해서 한 시스템이 매우 역동적으로 변해 가는 과정을 보여준다. 이로써 ‘시스템’이라는 개념 자체가 현저한 변화를 겪게 됐다. 한편으로 급변론은 불연속적 운동을 개념화함으로써 연속적 운동에 기반을 뒀던 근대과학의 테두리를 무너뜨렸다. 이와 더불어 생성을 복잡하게 만드는 것으로서 또 하나 빼놓을 수 없는 개념이 비선형성(Non-linearity)이다. 19세기에 어떤 공장장은 증기기관의 효율을 높이기 위해서 여러 곳에서 기계를 좀 더 크게 만들곤 했다. 그러나 이것은 매우 단순한 생각이었다. 기계를 두 배로 늘렸다고 해서 생산성이 두 배로 늘어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기계가 모두 망가져서 큰 낭패를 보았을 뿐이다. 어떤 자동차를 정확히 두 배로 늘렸다고 해서 그 자동차의 속도가 두 배로 늘어날까? 우리 몸이 성장하는 과정을 보면 각각의 부분이 균등하게 자라지 않는다. 키가 수직으로 크는 정도와 몸이 옆으로 늘어나는 정도는 다르다. 눈이 커지는 정도와 귀가 커지는 정도도 일치하지 않는다. 우리 몸은 균등하지 않은 방식으로 복잡하게 자란다. 이런 변화의 성격을 ‘비선형성’이라 부른다. 

지금까지 논한 여러 개념(되먹임, 급변, 프랙털, 비선형성)이 중요한 것은 이 개념들이 결국 ‘창발(Emergence)’ 또는 ‘자기조직화(Self-organization)’ 현상을 이해할 수 있게 해 준다는 사실 때문이다. 
복잡계에 대한 요시나가 요시마사(吉永良正)의 정의를 보자. “복잡계란 무수한 구성요소로 이루어진 한 덩어리의 집단으로서, 각 요소가 다른 요소와 끊임없이 상호작용함으로써 전체적으로는 각 부분의 움직임의 총화 이상으로 무엇인가 독자적인 행동을 보이는 것이다.” 

이 정의를 지금까지 논한 여러 개념들을 사용해 다시 한 번 음미해 볼 수 있다. 1)우선 복잡계에서의 ‘구성 요소’란 들뢰즈를 따라 어떤 실체적인 요소들이 아니라 계속 생성해 가는 요소들로 보아야 한다(dA, dB, dC … 등). 2)다음으로 이렇게 생성하는 요소들로 구성되는 한에서의 ‘집단’은 어디까지나 ‘열린 계’로 보아야 한다. 3)각 요소가 “끊임없이 상호작용”하는 것은 바로 되먹임 고리, 비선형성의 개념을 통해 이해될 수 있다. 4)“각 부분의 움직임의 총화 이상”이란 곧 창발, 자기조직화의 개념을 통해 파악될 수 있다. 5)“독자적인(특이한) 행동”은 급변이나 프랙털 현상 등으로 파악할 수 있다. 

프리고진은 자기조직화 이론의 신지평을 연다. 그의 과학사상은 ‘혼돈으로부터의 질서’라는 말로 요약된다. 그는 비평형 상태, 즉 무질서 상태에서 일어나는 작은 요동(搖動)이 자기조직화의 과정을 통해 새로운 질서를 만들어가는 원리를 연구했다.

프리고진의 연구는 닫힌 계가 아니라 열린 계가 대상이며, 이는 외부로부터 에너지가 유입될 수 있다는 의미다. 또 평형 상태가 아니라 비평형 상태를 대상으로 한다. 예컨대 물의 온도가 일정하거나 큰 변화가 없으면 평형상태지만 온도가 점점 올라가면서 물 분자들은 요동을 치는데, 이를 ‘비평형 상태’라 한다. 

프리고진은 생명의 본질에 대해 깊은 관심이 있었다. 그는 생물이 비평형이라는 조건 아래서도 생명과정을 유지할 수 있다는 사실에 매료됐다. 평형상태와 거리가 먼 시스템에 매혹된 그는 정확히 어떤 조건에서 비평형상태가 안정적일 수 있는지를 찾아내기 위해서 철저한 조사를 시작했다. 우선 자신이 직접 생체계를 연구하지 않고, ‘베나르 불안정성’이라고 알려진 보다 단순한 열대류 현상에 관심을 돌렸다. 구체적인 예를 보자. 바닥이 넓은 냄비에 물을 조금 넣고 끓이면 재미난 현상을 볼 수 있다. 냄비바닥이 뜨거워지기 시작하면 바닥 가까이 있던 물 분자 하나하나가 뜨거워져 마구 돌아다니다가 옆에 있는 다른 분자와 부딪혀 열을 전달하는 전도(傳導=conduction)현상이 관찰된다.

제법 물이 뜨거워지면서 바닥과 꼭대기 간의 온도 차가 일정한 문턱 값에 도달하면 많은 물 분자들이 한꺼번에 떼 지어 규칙적으로 돌아다니는 혼돈적 대류(對流=conviction)라는 새로운 질서가 만들어진다. 냄비 모양에 따라 다르지만 대개 두루마리 모양의 무늬를 만들며 순환하는데, 마치 단체로 떼 지어 응원하는 붉은 악마와 같은 모습이다. 더욱 뜨거워지면 여러 대류들이 서로 엉겨서 난류(亂流=turbulence)의 모습을 보인다. 게임에서 승리한 후 여러 붉은 악마대류들이 서로 뒤섞여 난리를 치는 모습을 보인다. 

재미난 것은 물이 수증기로 상전이를 하기 직전에 바닥에 벌집 같은 육각형 모양의 구조가 여러 개 만들어지는 것인데, 이를 베나르 세포(Bénard cell)라 부른다. 이것이 프랑스의 물리학자인 앙리 베나르가 1900년에 발견한 ‘베나르 불안정성’이라는 현상이다. 엄청난 숫자의 분자들이 함께 움직이는 규칙적인 대류운동이 일어나 새로운 질서가 스스로 만들어지는 것이다. 이것은 통념과 달리 비평형 상태가 단순히 무질서만을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질서의 근원이 된다는 의미다. 즉 어떤 계가 안정적인 상태, 즉 평형상태에 있으면 계를 구성하는 요소 간에 상호작용은 매우 적으며 계의 일부에 아무리 변화를 가해도 영향이 크게 확산되지 않는다. 그러나 비평형상태에 들어가면 구성요소 간의 상호작용이 긴밀해지고 영향이 미치는 범위가 급격히 증가하면서, 마침내 임계점을 넘어서면 멀리 떨어진 다른 구성요소들과도 상호작용을 하면서 계 전체를 뒤흔드는 거시적 현상으로 증폭되고, 그 결과 완전히 새로운 질서가 만들어지는 것이다.

프리고진은 이렇게 형성되는 새로운 질서를 무산구조라 불렀다. 즉 열린 계에서 외부로부터 에너지를 유입해 비평형상태에 이르면서 새로운 질서가 생기고, 주위의 엔트로피(무질서)를 무산(감소)시킨다는 의미다. 이처럼 새로운 질서가 자발적으로 이루어지는 과정을 ‘자기조직화’라고 부르고 이 새로운 질서가 출현하는 모습을 ‘창발’이라 한다. 이렇게 보면 가장 전형적인 무산구조가 우리의 몸이다. 소산구조와 자기조직화가 바로 혼돈으로부터 질서를 가져다주는 메커니즘이자 생명현상을 풀어가는 실마리가 될 수 있는 현상인 것이다. 

 지금까지 봤듯, ‘존재에서 생성으로’는 인류가 세계를 이해해 온 과정에서 일어난 가장 거대한 변화 중 하나다. 플라톤의 ‘이데아’로 대변되는 ‘Being’의 사유가 니체의 ‘영원회귀’와 베르그송의 ‘지속’으로 대변되는 ‘Becoming’으로 변화된 과정은 사유/지식의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변화이며, 우리는 진화론이라든가 인상파 미술이라든가 현대의 정치 현상 등도 이런 철학적 기초 위에서 이뤄지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들뢰즈의 생성존재론과 복잡계과학은 이런 흐름을 잇고 있는 최근의 예라고 할 수 있다. 우리가 사는 세계를 거시적으로 이해하고 그 이해를 바탕으로 구체적인 삶을 살아나가기 위해, 오늘날 갖춰야 할 핵심적인 철학적 교양에는 바로 이 ‘존재에서 생성으로’라는 주제가 속해 있다고 할 수 있다.  


글·이정우
1959년에 영동에서 태어나 서울대에서 공학, 미학, 철학을 공부했다. 아리스토텔레스 연구로 석사학위를, 미셸 푸코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서강대 철학과 교수를 역임했으며, 최초의 대안철학학교인 철학아카데미를 창설해 시민들을 위한 철학, 인문학 강좌를 열었다. 소운서원을 열어 연구와 후학 양성을 해오고 있으며, 최근에는 경희사이버대학교 교양학부장으로도 활동하고 있다. 최초의 대학 내 대안공간인 파이데이아 홍릉을 창설해 대학의 시민교육운동에도 앞장서고 있다. 저서로는 <소운 이정우 저작집(전5권)>, <천 하나의 고원>, <진보의 새로운 조건들>, <세계철학사 1> 등이 있다.